사랑은 기독교 정신의 핵심이며 요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한다는 면에서 신적 속성에 속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요구된다는 면에서 인간적 속성이기도 하다. 사랑은 속성일 뿐 아니라 구체적 행동이며 또한 윤리적 이상(理想)이다. 성경과 기독교 신학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어휘는 다양하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로 표현된 사랑의 유의어, 동의어 개념들을 엄밀하게 정의하고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설사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그 단어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순간, 원어에 담긴 개념을 적확하게 표현하거나 이해하는 일은 우리 능력 밖이다. 그럼에도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의 사랑이 본래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밝히는 시도가 필요하다. 사랑이 중요한 만큼 이에 대한 속설과 오해도 많기 때문이다.
네 가지 사랑
“그리스어로 사랑은 네 종류가 있다”라는 속설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에로스’(ἔρως), ‘필리아’(φιλία), ‘스토르게’(στοργή), 그리고 ‘아가페’(ἀγάπη). 이 네 단어가 각기 독특한 사랑을 표현한다. 구분의 일차적 기준은 사랑의 주체와 대상이다. ‘에로스’는 남녀 간의 사랑, ‘필리아’는 친구 간의 사랑, ‘스토르게’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그리고 ‘아가페’는 하나님 사랑을 지칭한다.
이 주장을 속설이라 보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어뿐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언어에서 사랑처럼 추상적 개념을 표현하는 어휘들이 그렇게 한두 가지 단순한 기준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어원을 살피고 용례를 분석해 보면 그 네 단어의 의미 차이는 모호하거나 미미하며, 종종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둘째, 언어는 본질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 네 언어의 의미 역시 시대와 장소에 따라 고정되지 않고 달라졌다. 어떤 단어의 의미는 엄밀히 말해서, 특정 시대나 지역, 저자의 저술에 한해서 그렇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 문화 자체에 접근할 수 없다. 오로지 우리에게 남겨진 문헌들과 고고학적 증거들에 의존해서 부분적인 그림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진 제한된 자료에 근거해서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셋째, 사랑을 네 개의 단어로 나누어 이해하려는 시도는 순수한 학문적 탐구의 결과라기보다 교리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급조되거나 왜곡됐다. 이런 시도는 ‘아가페’를 하나님 사랑과 동일시하고 다른 세 가지보다 높은 범주에 둠으로써, 하나님 사랑의 성격과 내용을 쉽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런 의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 사랑이 단어 하나로 다 파악될 수 없음은 분명하고, 그렇게 쉽게 기독교적 사랑을 정의하고 이해하려고 함으로써 오히려 무지와 오해, 오류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울러 다른 세 종류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라는 오해, 그런 세 가지 사랑은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편견을 심어 줄 위험도 있다.
이 속설을 누가 처음 주장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 다음 두 신학자와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다.1 20세기 초 미국 장로교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는 네 가지 사랑 용어에 관한 문헌학적 탐구를 시도했다. 먼저 고전 그리스 문헌에서 네 단어의 용례들을 살피면서 각 단어가 가졌던 의미의 폭과 깊이를 가늠했다. 그러고 나서, 그 넷이 칠십인역과 신약, 사도교부 문헌을 거치면서 빈도와 의미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음을 관찰했다. 그 변화들은 현대 그리스어에까지 이어지며, 따라서 워필드는 칠십인역과 신약성경이 기록된 시기야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어휘들의 변화를 단번에 가져온 특별한 시기였다고 봤다.
다른 한편으로 20세기 중반 옥스퍼드대학의 영문학자이자 기독교 변증가였던 C. S. 루이스는 BBC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갈무리해서 1960년에 《네 가지 사랑》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했다. 루이스의 접근은 문헌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다. 그도 워필드처럼 네 그리스어 단어에 서려 있는 그리스적 관념을 언급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개별 그리스 철학자들과 그들의 저술에 대한 접촉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루이스는 20세기 유럽의 문화적 정황에서 네 가지 사랑 개념의 외연을 탐색한다. 따라서 루이스의 의도를 이해하려면 스토르게,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라는 그리스어 어휘에 천착하는 것보다는 애정(affection), 우정(friendship), 에로스(eros), 그리고 자비(charity)라고 명명한 영어 단어들의 의미와 쓰임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낫다. 앞의 세 가지, 즉 애정, 우정, 에로스 간 위계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비는 명백히 가장 높은 등급의 사랑이며 앞의 세 가지를 틀 짓는 지배적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고 루이스가 앞의 세 가지 사랑을 악하거나 불완전하다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각각이 지닌 독특한 가치와 역할을 충분히 부각한다. 루이스의 말을 다 듣고 나면, 다음과 같은 점이 분명해진다: 애정, 우정, 에로스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며, 그 세 가지가 자비에 의해 올바르게 자리 잡음으로 비로소 사랑은 온전해진다.
워필드나 루이스, 혹은 어떤 다른 학자도 그리스어로 표현된 사랑에 관한 논의에 종지부를 찍는 표준적인 대답을 못 했다. 사실 두 사람의 논의나 다른 학문적 자료 어디에도 “사랑에는 네 가지가 있다”라는 식의 단순한 구분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스어로 표현된 대부분의 신앙, 신학 용어가 그렇듯이, 사랑 역시 지나친 단순화, 체계화는 금물이다. 복잡하고 미묘한 실체는 복잡하고 미묘한 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낱말(φιλία, ἔρως, ἀγάπη) 세 가지를 살펴볼 것이다. 명사 스토르게(στοργή)와 동사 스테르고(στέργω)는 비기독교 그리스 문헌에서조차도 드물게 사용될 뿐 아니라, 신구약성경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단어이기에 굳이 우리의 논의에 포함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필리아(φιλία)
고대 그리스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지중해 문화권의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는 ‘필리아’였다. 본래 필로스(φίλος), 즉 ‘사랑스러운, 사랑받는’을 뜻하는 형용사에서 동사 필레오(φιλέω)와 명사 필리아(φιλία)가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고전 그리스 문헌에서 필리아의 대상은 어떤 인격체(사람이나 신), 구체적 물질이나 활동(포도주, 음악, 자연 등) 혹은 추상적 이념(국가, 정의 등)까지 여러 가지였고, 사람의 경우 누구든 필리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역사 서술이나 포고문 같은 공적인 문서에서 필리아가 언급된다면, 이는 두 나라 사이의 동맹 관계를 의미했다. 친밀한 사이의 사람들은 만나거나 헤어질 때 입을 맞춤으로 인사했다. 그래서 필리아는 ‘입맞춤’이라는 의미도 갖게 됐고, 그 의미만을 갖는 또 다른 명사 필레마(φιλήμα)도 생겨났다. 이런 상황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나 요세푸스 같은 헬레니즘 시대 유대인들의 저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필론의 글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를 묘사한 몇몇 문맥에서 이 단어가 쓰였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혜로운 이들은 하나님께 ‘사랑받는’(φίλοι) 자들이고, 모세는 ‘하나님의 친구’(φίλον τοῦ θεοῦ)였다.
필리아와 동계어들이 신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빈도는 들쭉날쭉이다. 먼저 칠십인역의 경우, 형용사 필로스는 180번 정도 쓰였다. 이는 대부분 친구, 이웃 등의 관계를 나타낸다. 반면 동사 필레오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약 30회). 다른 그리스 문헌과 비교할 때, 필레오의 빈도가 이렇게 줄어든 이유는 칠십인역 전반에 걸쳐 히브리어 아하브(사랑하다)를 번역할 때 거의 항상 필레오가 아닌 아가파오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동사 필레오는 총 25번 나타나며, 칠십인역에서 일어났던 경향이 상당 부분 이어진다. 즉, 신약 저자들이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표현하고자 할 때 그들은 필레오보다는 아가파오를 훨씬 더 즐겨 썼다. 25번의 용례마다 필레오의 쓰임은 다채롭다. 마태복음 6:5에 의하면, [위선자들은] 남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에 서서 기도하기를 ‘필레오’한다. 마태복음 10:37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나보다 더 ‘필레오’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필레오’한다는 말씀(요 5:20), 그리고 하나님이 신자들을 ‘필레오’한다는 말씀(요 16:27)도 나오며,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은 당신이 ‘필레오’하는 이들을 책망하며 징계하신다는 말씀도 나온다(계 3:19). 바울은 ‘필레오’를 신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에 적용하기도 했다(고전 16:22).
형용사 필로스나 명사 필리아는 어떨까? 필리아는 신약성경에 딱 한 번 나온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다”(약 4:4). 반면, 누군가에게 친구가 된다는 개념은 형용사 필로스로 여러 차례 표현됐다. 무엇보다 하나님 또는 예수님의 친구 됨을 표현할 때 필로스가 등장한다(눅 12:4; 요 15:14-15; 약 2:23). 필로스는 종종 다른 단어와 결합해서 무언가를 좋아하고 추종하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형제 사랑(φιλαδελφία, 롬 12:10; 살전 4:9; 히 13:1; 벧전 1:22; 벧후 1:7)이나 돈 사랑(φιλαργυρία, 딤전 6:10; 눅 16:14; 딤후 3:2) 같은 것들이다.
종합하면, 일반 그리스 문헌은 말할 것도 없고 신구약성경에서도 필리아와 그 동계어들은 우정, 친구 간의 수평적 사랑 같은 의미로 축소되지 않는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 물건이나 무형의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모두 필레오로 표현될 수 있다. 루이스는 이것을 affection이라는 영어로 번역했는데, 우리말로는 애틋하고 편안하고 친밀한 느낌 같은 것이다.
에로스(ἔρως)
고대 그리스 문필가들에게 에로스, 그리고 동사 에라오(ἐράω)는 그 저변에 무언가를 향한 열정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 따라서 진심으로,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에로스가 개입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수사학》에서 사람들이 말하거나 글을 쓰거나 혹은 연기하는 일을 사랑할 때, 그 활동들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항상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썼다. 즉, 에로스는 사랑할 때 동반되는 감정적인 차원을 포착한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이든, 사랑의 강도가 강할수록 거기에는 에로스가 동반될 가능성이 커진다.
에로스를 어떤 관계에 적용할 것인가에 있어서 그리스 저술가들은 다양한 견해를 펼쳤다. 크세노폰은 형제 간에, 부모자식 간에 서로 ‘에라오’할 수는 없다고 말했지만 에우리피데스는 자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에라오라는 동사로 표현했다. 플루타르코스에 있어서 에라오는 필레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이었다. 자애롭고 온순한 왕은 백성들로부터 필레오받는 것이 아니라 에라오받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에라오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으로 제시된다. 철학자가 궁극적 진리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열정이 에라오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철학적 세계관과 언어를 포용하여 성경 속의 하나님을 묘사한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에게 있어서 “천상의 에로스”(ἔρως οὐράνιος)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며 모든 덕을 완전하게 만드는 사랑이다. 필론을 비롯한 그리스 철학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초기 교부들 역시 에로스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대해 품는 열정적이고 진심 어린 사랑의 표현으로 사용했다. 2세기 사도교부 이그나티오스는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에로스라고 표현하면서, “나의 에로스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라고 기록했고, 또 다른 2세기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ὁ έραστός)라고 불렀다.
로맨틱한 사랑, 성적인 욕망과 연관된 열정을 표현할 때 에로스와 그 동계어들이 자주 사용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다른 단어들과(φιλία, ἀγάπη) 동일하게 에로스 역시 좁은 의미의 방에 가둘 수 없다. 그것이 다른 단어들보다 더 자주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데 사용됐어도 그 단어 자체에 어떤 의미가 내재해 있었다기보다 문맥과 정황에 따라 굉장히 다채롭고 넓은 뜻을 표현할 수 있었다. 열정이 다 나쁘지 않듯, 에로스가 항상 추하고 이기적이고 육체적인 사랑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신구약성경에서 에로스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신약에는 그 동계어 중 어느 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 저자들이 육체적이고 이기적이고 탐닉적인 사랑을 몰랐거나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다소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에로스 대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악덕이나 악행을 지적하면서 다양한 어휘를 사용해서 표현했다. 예를 들어, 성적 욕망이 부정적으로 발현되는 상태를 표현할 때 자주 나오는 단어로 에피튀미아(ἐπιθυμία)나 아셀게이아(ἀσέλγεια)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스어 어휘의 쓰임을 충분히 공부한 사람이라면(교부들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고백하고, 노래하고, 그 사랑에 사로잡혀 선교와 전도에 매진하는 이들을 두고 거룩한 에로스에 빠져 있다고 말하는 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아가페(ἀγάπη)
이 단어의 어원은 불분명하다. 만족함 혹은 소중함이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기본 의미는 사물이나 추상적 개념을 대상으로 한 사랑이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사랑이다. 형용사 ‘사랑스러운’(ἀγαπητός)은 종종 어린이들, 특히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적용되기도 했다. 동사 ‘사랑하다’(ἀγαπάω)를 써서 신들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간혹 남녀 간 성적 관계나 행동을 묘사하는 데 이 동사를 사용하기도 했다. 단, 아가페는 명사 고전 그리스어 문헌에 거의 보이지 않으며 헬레니즘 시대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구약 성경이 명사 아가페를 신학적, 철학적 서술의 중심에 놓은 첫 번째 문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칠십인역에서 동사 아가파오는 약 250회 나오는데, 그중 대부분이 히브리어 동사 ‘아하브’(사랑하다)를 번역한 경우다. 히브리어 명사 ‘아하바’(사랑)는 항상 그리스어 아가페로 옮겨졌고, 형용사도 마찬가지였다. 칠십인역 번역자들이 왜 그리스인들에게 더 친숙한 필레오 대신 아가파오를 ‘사랑하다’의 번역어로 사용했을까? 상대적으로 아가파오가 육체적, 감정적 성격이 덜한 사랑을 표현하기 때문이라거나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서서 필레오 단어가 전반적으로 인기가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제시됐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아가페와 아하바 사이에 발음의 유사성을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어쨌든 구약성경에서 부부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경우 거의 항상 아가페와 그 동계어들을 사용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레 19:18)와 같은 신적 명령만이 아니라 남녀 간의 로맨틱한 관계나 성적인 행동을 표현할 때도 아가파오를 썼다. 한편, 구약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품는 감정이나 행동을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데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오경과 역사서 등 구약성경의 전반부에서 하나님이 피조 세계와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방식은 은혜, 구원, 자비, 언약적 신실성과 같은 단어들로 표현된다. 예언자들은 좀 더 대담하고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했다. 예를 들어, 호세아는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호 11:1-4).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사건을 “신혼 때의 사랑”(렘 2:2)에 비유했고, 이사야도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사 43:4)라고 표현한다.
구약성경이 사랑을 말할 때 아가페와 그 동계어들을 필리아나 다른 단어들보다 선호했다고 해서 거기에 본질적으로 어떤 신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아가페나 아가파오가 쓰인 문장이라고 해서 그것의 주체가 항상 하나님이지도 않고, 그 의미가 이타적이고 희생적이고 순수한 사랑에 한정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손이 들릴라를 향해서(삿 16:4), 사울이 다윗을 향해서(왕상 5:1), 솔로몬이 그의 수많은 이방인 아내를 향해서(왕상 11:2) 품었던 마음이 모두 아가파오로 표현돼 있다. 헛된 것에 마음을 두고(시 4:2), 사악한 자가 불의, 악, 저주를 사랑하며(시 11:5; 52:3-5), 돈과 부를 좇는 마음(전 5:10)도 모두 아가페로 불린다. 이처럼 구약성경에는 신적이고 거룩한 사랑을 나타내는 용례만큼이나 그 반대의 용례, 즉 사악하고 헛되며 불순한 사랑을 아가페와 그 동계어로 표현하는 용례들도 많다.
아가페와 동계어들의 쓰임에 있어서 신약성경은 칠십인역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시고 구원하신(요 3:16) 행동은 ‘아가파오’이다. 동계어 전체로 볼 때 320회 정도 사용됐고 요한일서, 요한복음, 그리고 에베소서에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특히 명사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칭하는 전용 어휘처럼 사용되며,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사랑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기독교적 사랑을 나타낼 때 항상 나타난다. 아가페를 빼놓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설명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아가페이시다(요일 4:10).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셨다(엡 1:3-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셨다(롬 5:8; 8:35-39).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의 수단이 아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셨고(갈 2:20; 엡 5:2),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구약성경 전체를 요약하셨다(막 12:28-31). 바울은 기독교인의 인격과 삶의 요체를 사랑이라고 요약했다(고전 13장). 이 모든 서술에서 아가페와 그 동계어들이 사용됐다. 신약 저자들과 원독자들은 칠십인역 구약성경의 어휘와 문장에 익숙했을 뿐 아니라, 칠십인역의 언어를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과 그분을 통해 일어난 구원 사건을 설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함에 있어서 아가페는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반면,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아가페의 동사형인 ‘아가파오’가 항상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용도로만 쓰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회당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한다”(아가파오, 눅 11:43).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요 3:19),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다”(요 12:43). 바울의 동역자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딤후 4:10). 요한은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강하게 권면한다(요일 2:15). 동사 아가파오가 상반된 성격의 사랑을 모두 표현한 것과 달리, 명사 아가페가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된 용례는 신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동사와 명사는 어차피 어원적으로 같기에, 아가페 자체에 거룩한 사랑이라는 의미가 내재한다고 말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종합하면 사랑이 성경 신학의 중심 개념임은 분명하다. 이는 서사와 시, 찬송과 잠언, 명령과 율법, 그리고 논증과 환상을 통해 묘사되고 설명된다. 창조주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성경 저자들은 고대 그리스 문화권에서 이미 사용돼 오던 ‘아가파오’ 동사를 활용했고, 거의 사용된 적 없는 그것의 명사형 ‘아가페’를 적극 사용했다. 다만, 성경적 사랑,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의 성격과 내용을 아는 것이 중요할 뿐, 그 사랑이 어느 특정 단어에 꼭 담겨 표현돼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그런 주장이 실제 성경의 용례들에 비추어 정당화될 수가 없다.
요한복음 21:15-17
이것은 설교자들이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본문이다. 여기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오간 세 번의 문답이 나온다. 첫 두 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파오’하느냐고 물었고, 베드로는 ‘필레오’한다고 대답한다. 세 번째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가 나를 ‘필레오’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한다고 답했다.
대부분의 학술적 주석은, 적어도 이 단락에서만큼은 아가파오와 필레오 사이에 사실상 차이가 없다고 설명한다. 즉,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던졌고, 베드로는 세 번 다 그 물음에 긍정으로 대답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면 본문의 신학적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렇게 단순하게 해석하지 않고 아가파오를 필레오와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면 불필요하고 정확하지도 않은 고답적 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우리가 살펴본 두 단어에 대한 성경 외적 그리고 내적 용례들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 둘이 상호 교환적으로 쓰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
1) B. W. Warfield, “The Terminology of Love in the New Testament,” 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5.16 (1918): pp. 1-45, 153-203, 511; C. S. Lewis, The Four Loves (Jeoffrey Bles 1960). 루이스의 책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C. S. 루이스, 《네 가지 사랑》, 이종태 옮김(홍성사,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