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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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3년  02월호 조력 존엄사에 대한 6가지 쟁점 가치 충돌의 시대, 기독교 관점에서 읽는 쟁점 법안

2022년 6월 15일 안규백 의원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이하 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그러면 개정 법률안은 현행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이하 연명의료결정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개정법률안에 대하여 ‘존엄사법’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기는 한가?

연명의료결정법은 무의미한 연명 치료 중단을 허용하면서도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 행위, 그리고 영양분, 물, 산소의 단순 공급과 같은 일반적 의미의 연명 치료를 중단시키지 못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소극적 안락사를 금지했다. 이 점은 연명의료결정법, 제2조, 4에서 연명의료를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하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및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의학적 시술로서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과정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을 말한다”라는 정의를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의학적 시술”이라는 단서 조항이 붙기는 하지만 이 정의는 중단할 수 있는 연명 치료를 명확히 치료 효과가 없는 ‘특수한 연명 치료’에 한정하고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비록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라도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산소, 물, 영양을 공급하는 ‘일반적 연명 치료’는 중단하지 못하게 차단하고 있다. 이는 소극적 안락사를 차단한다는 뜻이며, 소극적 안락사를 차단한다는 것은 적극적 안락사를 포함해 안락사 자체를 차단한다는 뜻이다(여기서 소극적이라는 형용어를 첨가한 이유는 공급을 중단한 물, 산소, 영양이 환자를 죽이는 직접적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환자에게 일산화탄소와 같은 물질을 주입하면 일산화탄소가 지닌 독성이 직접 원인이 돼 환자가 사망한다. 이 경우를 적극적 안락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상 두 경우를 소극적이나 적극적이라는 형용어를 첨가해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 의료진의 조치가 곧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생명 보호 기능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이 안락사법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먼저 영양분, 물, 단순 산소 공급과 같은 일반적인 연명 치료 중단을 슬그머니 허용하고, 눈치를 보면서 안락사를 전면 허용하는 단계를 밟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개정법률안은 안면몰수하고 이 모든 단계를 단번에 건너뛰어 안락사를 전면 허용하는 대담하고 거친 특성을 보였다.

개정법률안은 ‘조력/존엄사’ 항목을 신설하고 조력/존엄사를 “본인의 의사로 담당 의사의 조력을 통해 스스로 삶을 종결하는 것”으로 정의한 다음(제2조, 11호), 말기 환자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이 발생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조력/존엄사를 희망할 때(제20조, 3호), 조력 존엄사 대상자로 결정된 후 1개월이 지나면 조력/존엄사를 허용한다(제2조, 4호1)고 규정했다.

개정법률안이 조력/존엄사로 명명한 행위는 정확히 안락사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안락사에 대한 생명윤리계의 표준 정의는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여 자기 목숨을 종결시켜 달라는 환자의 요청을 듣고 환자의 생명을 종결시켜 주는 행위”인데, 이 정의는 개정법률안이 말하는 조력/존엄사 정의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개정법률안은 안락사를 2개의 단어로 표현한다. 하나는 조력이라는 단어고, 다른 하나는 존엄사라는 단어다. 여기서 문제는 존엄사라는 용어가 과연 정당한가 하는 것이다. 존엄사는 문자 그대로 ‘존엄한 죽음’이라는 뜻인데, 존엄한 죽음이라는 말은 적어도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고결한 죽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죽음을 돕는 것 곧 ‘조력’하는 일도 덩달아 정당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여기서 관건은 개정법률안이 허용하는 의료 조치가 과연 존엄사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수 있는 조치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바른 답변은 다음과 같은 6단계의 논리적 추론 단계를 분명히 석명(釋明)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제시할 수 있다.

말기 환자도 살아 있는 인간이다

첫째, 말기 환자는 살아 있는 인간인가? 개정법률안은 안락사의 대상을 말기 환자로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이 발생하고, 자기 의사를 표명하는 자로 규정하므로 이 대상은 명백히 살아 있는 인간이다.

둘째, 말기 질환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가 살아 있는 환자라면 이 환자의 생명을 자의적으로 끊는 행위는 살인 행위임이 명백하다. 따라서 개정법률안은 살인을 허용하는 법안이다. 개정법률안 발의자는 다 된 밥에 숟가락 하나 얹어 놓듯 연명의료결정법이 법적으로 허용하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 중단에 안락사를 조력/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살짝 얹어 마치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과 안락사가 동일한 수준의 의료 조치인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두 의료 조치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연명의료결정법이 법적으로 허용하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 중단의 경우에는 환자가 죽는 원인이 연명 치료 중단에 있는 것이 아니다. 효과가 있는 치료를 중단한다면 그 때문에 환자가 죽을 수 있으므로 살인 행위가 성립되지만, 효과가 없는 치료를 멈추는 경우에는 중단 때문에 환자가 죽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때 환자의 사망 이유는 환자가 지닌 질병 때문에 죽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안락사(필자는 의도적으로 조력/존엄사라는 개정법률안의 용어를 피하는데, 그 이유는 개정법률안이 이 용어를 오용하기 때문이다)의 경우는 의사가 의료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환자가 의사가 취한 의료 조치로 인해 사망에 이를 경우 살인 행위가 성립된다.

셋째, 그렇다면 살아 있는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죽이는 행위는 정당한가? 이 질문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가치가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행위까지도 정당화할 만한 무거운 가치인가라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 윤리 차원과 의료 윤리 차원에서 답변할 수 있다.

먼저 성경 윤리 차원에서 보자. 성경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서 천하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가치의 총체를 뜻한다. 목숨(psyche)은 이 문맥에서 신체적 생명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신체적 생명 가치가 현세 안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가치의 총합보다도 더 무거운 가치임을 분명히 하셨다. ‘하늘의 가치’,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혹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라는 수직적인 가치가 아닌 한 인간의 목숨은 어떤 현세 안의 수평적 가치보다 무겁다. 이와 같은 성경 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가치는 인간의 목숨이라는 가치를 능가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 윤리 관점에서 볼 때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인간의 신체적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다음으로 의료 윤리 차원에서 보자. 의료 윤리는 성경 윤리의 관점을 의료라는 특수한 현장에 적용해 구체화시켰다. 의료 윤리의 제1원칙은 질병으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환자를 지켜 내는 것이다. 제2원칙은 죽음으로부터 환자를 지켜 내지 못할 때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제1원칙은 제2원칙에 항상 선행한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제2원칙을 달성하기 위해 죽음으로부터 환자를 보호한다는 제1원칙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후에도 환자가 살아 있어야 한다.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후에 환자가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해방 자체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중대한 의도적인 의료 사고다.

인간이 자기 생명의 결정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넷째, 개정법률안은 국민 여론의 80%가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을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의 근거로 제시한다. 이 여론 조사를 누가 어떤 방법으로 시행했는지, 그리고 설문 조사 항목을 어떻게 구성했는지 의문이다. 설사 이 조사가 바르게 이뤄졌다 해도 인간 생명의 존폐에 관련된 법안을 여론 조사에만 근거해 만든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시민들의 한시적인 정치적인 이익이나 경제적인 이익이 문제가 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법안을 만들 때 여론의 추이를 반영해도 무방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법안을 단지 국민 여론의 추이에만 근거해 마련한다는 것은 위험하고 무책임한 발상이다. 국민 여론은 특정한 시대를 풍미하는 특정 시대 사조의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간의 목숨이 현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가치의 총합보다 더 무거운 가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현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의 극히 적은 일부밖에는 차지하지 않는 여론이 목숨의 가치를 능가할 수 없다.

다섯째, 개정법률안은 인간의 생명의 종결권이-환자에게든, 아니면 의료진에게든­인간에게 있다는 관점 곧, ‘인간 생명의 자기결정권’을 구현한다. 자기결정권은 자율주의(autonomy) 철학을 생명의 영역에서 구현한 것으로서 인간의 생명을 인간 스스로가 종결시킬 권리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생명의 종결권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말은 생명의 소유권이 인간에게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나 생명의 자기결정권은 철학적으로나 성경적인 인간관 관점에서나 정당화하기 어렵다. 먼저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생명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면 ‘나’라는 자의식이 신체적 생명보다 선행해야 한다. ‘나’라는 자의식이 신체보다 먼저 존재하는 상태에서 신체를 선택하거나 받아들인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신체적 생명은 절대적으로 ‘나’라는 자의식에 선행한다. 신체가 ‘나’보다 앞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나’는 자신의 신체의 생명을 획득한 일이 없다. 이미 주어진 신체의 생명을 자각할 뿐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신체적 생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

이와 같은 철학적 성찰은 필연적으로 다음 질문으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나’가 자의식을 갖기 전에 이미 선행적으로 실재하는 나의 신체적 생명을 누가 나에게 부여했는가? 이에 대해 어떤 인간도 답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자의식을 갖기 시작할 때 선행하는 신체의 생명을 지각했을 뿐, 단 한 사람도 그것을 획득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시편 24:1에서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선언하심으로써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명확히 한 후에 욥기 1:21에서 자기 생명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고 고백함으로써 인간 생명의 절대적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명확히 한다.

‘나’의 생명이 그 생명을 누리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하나님과의 신학적 관계를 구태여 고려하지 않고 수평적인 사회 관계만 잠시 성찰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신체적 생명을 포함한 ‘나’는 현세 안에 사는 동안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부모가 성관계를 갖기로 결정하지 않았으면, 부모가 잉태했어도 낙태시키지 않기로 결정하지 않았으면, 유아 시절 부모가 양육을 거부했다면, 유치원·초중고등학교·대학교 등에서 많은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생명에 관한 한 나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관점에서 보나,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나, 수평적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보나, 나의 생명에 대해 자기결정권을 주장할 수 없다.

여섯째, 지금까지의 논의를 단계적으로 정리해 볼 때 처음에 제기한 질문, 곧 안락사를 존엄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불가능하다”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요구하시지 않는 한, 천하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가치의 총합보다 더 무거운 인간의 생명을 고통의 완화 또는 여론의 향배라는 극히 지엽적인 이유로 자의적으로 끊는 살인 행위에 대해서 ‘존엄한’ 죽음이라는 명칭을 붙여서는 안 된다. 아무리 큰 고통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내 곁에 두신 수많은 이웃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는 확고한 생명관을 가지고 결코 자의적으로 손대지 않고, 하나님이 그분의 소유이신 생명을 거두어 가실 때까지 인내로서 참고 기다리는 태도에 대해서만 ‘존엄한 죽음’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부여할 수 있다. 
 

이상원 전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대표. 저서로 《기독교 윤리학》, 《현대 사회와 윤리적인 문제들》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