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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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9년  02월호 내일 문 닫을 것을 고민하는 당신에게 ‘양육’이란? 교회를 살리는 양육 비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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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 교회 양육은 험지에 씨앗을 심는 과정 자체다.


오늘 내일 문 닫을 것을 고민하는 당신에게 우선! “신의 가호가 있기를…” 너무 비관적인 시작인가?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소위 개척 교회(어떤 곳에선 비전 교회라고 부르기도 한다)를 한다는 또는 이미 판을 벌린 자들은 어느새 엄혹한 현실에 입이 바싹 말라 가면서도, 내가 시작한 이 일에 하나님의 기적 같은 개입과 도우심이 있을 거라는 믿음인지 자기최면인지 모르는 확신으로 텅 빈 공간을 채우며 한 주를 또 버틴다.

개척하는 또는 개척한 목사끼리 공유하는 경험 하나가 있다. ‘삼 년의 저주’라는 말이다. 개척 삼 년 차에 심각한 리더십의 타격을 받는 사건이 꼭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거 잘 넘기면 또 몇 년 공동체가 이리저리 흘러가는 거고, 그게 극복이 안 되면 교회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개척자의 에너지와 열정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목회의 모든 영역에서 한계치를 드러내는 시절이 찾아오는 것이다.

일이십 명 어찌해서 모여 무언가 목회적 성과를 보려는 순간 이내 이 작은 공동체에는 한국 교회의 축소판이 된 냥 온갖 저질스럽고, 언론에서 떠들던 시답잖은 문제들이 고스란히 재방송된다. 개척자는 스스로 확신한다. ‘난 달라. 우리 교회는 다르게 해결할 수 있어! 기다려 봐! 대안적인 방식을 보여 줄게’ 이 정도의 자신감이 있기에 개척을 했을 거라 인정해 주고 싶지만, 그것도 한두 달 안에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공동체를 주저앉게 만드는 자못 심한 상처를 주는 상황이 되고 만다.

포기할 수 없는 양육!

먼저 고백하자. 개척 교회에게 양육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의 연약함을 증명할 절호의 찬스다. 양육이 성경적이며 목회의 본질이며, 성도들을 구비시키는 신앙의 핵심이라는 점은 머리로는 명쾌하게 이해하나 손과 발로는 안드로메다보다 먼 이야기다. 주일예배 한 번을 앉아 있는 것도 사역인 개척 교회 성도들이다. 그들에게 양육의 시간까지 주중에 확보하는 것은 대출금을 갚아야 할 맞벌이 성도들과 비정규직 일터의 근로자 집사님과 은퇴 후에도 손주들을 대신 돌봐 주어야 할 우리 권사님의 삶에는 가당치 않은 영적 사치다. 

그렇다고 양육이 없는 성도의 삶, 내면의 성숙과 거룩함을 위한 훈련이 없는 일상을 어찌 성도의 삶이라 하겠는가? 개척이라는 말로 목회의 결여된 구조를 마냥 옳다고 우길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가 이곳에서 존재함을 드러내는 가시적 공동체로 교회가 서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바로 건물과 프로그램과 돈의 힘으로 과시할 게 아니라면, 아니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면, 교회는 더욱 한 영혼의 성숙과 성장이라는 양육의 훈련과 과정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 자명하다.

Ctrl+C, Ctrl+V

개척 교회의 치명적 실수는 사실 개척의 첫 부르심을 잊고 소위 잘 나가는 교회의 프로그램을 따라가려는 유혹에 넘어질 때다. ‘처음 왜 우리가 교회를 시작했는가?’, ‘왜 우리는 이런 교회를 하려고 하는가?’, ‘왜 우리는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교회의 본질로 붙잡고 시작하는가?’ 하는 그 첫 부르심이 있다. 그러나 한두 번, 예상치 못한 어떤 상황으로 인해 기우뚱 하면서 그것을 빨리 회복하려는 마음에, 또는 별 생각 없이 남이 해서 잘 된다니 우리도 하자는 식으로 이런저런 훈련과 프로그램과 양육의 과정을 ctrl+c, ctrl+v 한다. 조금 규모 있는 교회에서 사역했던 목회자라면 자신의 이전 현장에서 경험한 성공적인 양육의 경험이 누구나 있다. 그것이 세상에 없는 최고의 과정이며 최선의 솔루션이라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은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또 실패라는 구렁텅이로 결연하게 투신한다.

위의 방식으로 잘 되는 경우가 왜 없겠는가?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며 그것이 진짜 비책이라면 윤리 상식의 기초적인 수준에서 실패하는 이 많은 한국 교회의 문제들은 이러한 솔루션과 상관없는 결과인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그토록 많은데 왜 공동체적인 기독교의 집약된 헌신과 사랑의 수고가 세상에서 보이지 않을까? 수많은 제자 훈련을 통한 변화된 간증들이 넘치는데 왜 교회는 내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서초동 법원과 기독교 로펌으로 몰려가야만 하는 것인가?

양육은 성장과 성숙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성장과 성숙은 몸과 머리가 함께 유기적으로 체득하면서 생성되는 결과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말씀과 성례라는 머리와 몸을 함께 키우는 주요한 기제를 갖는다. 그것이 구체적이며 실제적으로 작동할 때 교회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은 성장과 성숙이라는 양육의 열매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말씀과 성례의 구체화가 양육의 결과로 나타나기 위한 환경은 그럼 무엇일까?

위험하고, 모험적이며 용기가 필요한 공동체

예수와 바울이 보여 준 공동체는 위험하고 모험적이며 용기가 필요한 모임이었다. 시대정신에 저항하고, 남들이 안 된다는 것에 도전하고, 그러기에 늘 위협을 받는 공동체였다. 개척 교회는 안전하고, 편안하며, 가만 있어도 되는 그런 교회가 아니다. 그런 교회는 세상에 참 많다. 위로해 주고, 따스하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그런 교회를 찾는 자들에게 개척 교회는 양육은커녕 참여하기도 쉽지 않은 현장이다.

묻고 싶다. 그런 달짝지근한 교회가 과연 개척의 목적이었나? 그런 교회를 꿈꾸는 자들에게 개척 교회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 아니 교회 자체가 그런 곳이었나 묻고 싶다. 교회는 어느 시기나 어려웠다. 교회는 언제나 위협적이었고 교회는 늘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서 안 된다는 걸 된다고 말해 주는 곳이었다. 그렇게 교회가 움직일 때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양육은 성도들에게 온실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 성도들을 온실 바깥으로 나가게 하는 게 양육이다. 포대기에 싸인 아이는 건강하게 양육되면 바깥으로 나간다. 일어섰다는 것이 온 가족의 환호성을 지르게 하는 일이었는데 어느 날 집에 빨리 들어오질 않아 부모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게 양육의 건강한 결과다. 양육은 자녀를 강하게 한다. 죄짓는 곳에서 죄를 거부하고, 타락의 현장에서 그게 틀렸다고 말하게 되고, 편법이 횡행하는 일터에서 묵묵히 정도를 걷는 삶을 사는 것, 그게 양육의 결과다. 그러려면 ‘우쭈쭈’를 넘어서는 현장의 쫄깃함을 경험케 하는 양육이 필요하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는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이라는 책에서 ‘커뮤니티’와 구별되는 ‘커뮤니타스’를 이렇게 규정한다. “위험하고 모험적이며 용기가 필요한 공동체.” 성경을 가만히 보면 믿음의 용장들은 전부 모험을 감행했고 인생의 도전에 직면하는 삶을 받아들였다.

개척 교회는 내적 돌봄과 위로와 격려가 키워드 되는 커뮤니티가 아니라 거칠고 임무를 완수하고 세상 속에서 대안을 보여 주는 커뮤니타스를 지향해야 한다. 무용담이 간증이고, 모험 중 입은 상처가 긍지이며, 몸에 지닌 흉터는 자랑스런 훈장이 되는 곳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통해 믿음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개척교회는 스스로 가진 이 위기의 상황을 양육을 위한 최적의 환경으로 만들 이유가 있다.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은 따스한 아랫목에 눕기 위함이 아니다. 당신은 총탄이 날아다니는 구원의 전투에 초대받았다. 

 부르심(calling)과 보내심(missional)

교회 공동체는 끊임없이 이 질문 앞에 선다. 나는, 우리는 왜 모여 있는가? 우리 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것에 흥분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설레게 하고 기쁘게 만드는가?

양육은 부르심을 확인하게 하는 과정이다. 주기적으로 성도들에게 내가 이 교회에 있는 이유를 물어보라. 내가 여기서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가를 스스로 묻게 하라. 교회가 주는 프로그램의 유익이나 설교의 은혜 말고(!)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룸으로 세상이 어떤 유익을 얻는지를 말해 보라고 질문하라.

우리는 은혜 안에서 부름 받은 존재다. 그 부름은 부려 먹으려는 못된 주인의 호통이 아니라 세상을 원래의 목적대로 아름답게 바꾸려는 창조주가 부르시는 동역자로서의 초대다. 망가뜨리는 일에 종사한 자들을 창조의 주역으로 세우시는 그분의 계획에 참여케 되는 영광이다. 그래서 개척 교회는 새로운 일에 대한 초대다. 현존하는 교회들이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분야에 뛰어드는 대조사회이며 대안적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기에 개척 교회의 양육은 프로그램이 아니다. 양육은 수료증을 받는 과정이 아니라 현장의 경험치를 쌓는 과정이다. ‘양육 후 사역’이라는 기존의 패턴을 거부하라.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보이시고 가르치시면서 동시에 경험하게 하셨다. 눈으로 보게 하시고 손과 발로 체험하게 하셨다. 도대체 수료증을 몇 개나 받아야 당신은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교회가 제공하는 모든 양육과 프로그램을 놀라운 성적으로 끝내 보라. 아마 그 다음은 신대원에 가는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당신은 알을 낳지 못하는 묵은 닭이 되어 있음을 알 것이다. 알을 낳고 부화하지 못하는 묵은 닭. 그런 식으로 신대원을 졸업하는 예비 목회자들을 우리는 많이 본다.

양육은 훈련과 경험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최대치의 효과를 본다. 현장이 없는 훈련은 교재로 테니스를 배우겠다는 내 옛 친구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떠 올리게 한다. 그는 그 후 몇 년 동안 나와 단 한 번의 테니스 시합도 하지 못했다. 양육은 선교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오늘 내게 주신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며 현장을 섬기고, 그 자리에서 배운 것들을 나누고, 그리고 그것이 머리에서 끝나는 것(brain wash)이 아니라 몸으로 새기는(body memory) 것이 될 때 우리는 또 한 번 자라난다.

개척 교회는 선교의 현장이고 그 현장을 중심으로 양육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인격과 삶에 대한 태도는 교재를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니며 학원에서 선행학습으로 되는 게 아니다. 머리로 성적을 매기는 입시제도는 교회에서 요구되지 않는다. 일터에서 그리스도인의 원칙을 적용하고, 쉼과 일의 균형을 신앙으로 지켜내며, 믿음의 가치 체계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현장에서 체험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이 주변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원리와 방식을 스스로 보게 하는 것이 양육이다. 예배당 입구 유리문에 다닥다닥 써 붙인 예배 안내 선팅으로 교회를 보여 주지 말고, 지역 사회의 모임에 참여해 건강하고 즐거운 제안을 하라. 그리고 참여하라. 참여한 그대가 지역 사회의 선교사다.

혼자하지 말고 공동체로

보냄 받은 예수의 제자들은 언제나 공동체로 움직였다. 그들은 혼자 일하지 않았고, 홀로 깨닫는 구루(Guru)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짝지어 파송받았고, 여럿이 함께 공동체로 모였다. 삼위일체는 머리로 아는 게 아니다. 우리들의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고 세 분 하나님의 동역과 협력을 배우고 서로에게 경청하는 법을 익히면서 온몸으로 경험되는 삼위일체는 이단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신학적인 진술과 개념들을 머리로 알려 하다가 이단이 되고 혼자서 깨닫겠다고 뛰어들다가 삼단이 된다. 공동체의 신비를 믿고 공동체의 결정에 순종하고, 모를 때 공동체가 가르쳐 주는 대로 따라가 보라.

대형 교회가 사고를 치면 큰 사고를 친다. 체격이 커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신비를 경험하기에 너무 큰 조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동체의 교회를 만드셨지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세운 적이 없으시다. 왜 조직과 시스템이 공동체의 뼈대를 이루는가? 조직과 시스템은 양육을 하지 않는다. 사육을 할 뿐이다. 조직과 시스템은 개성을 원하지 않는다. 획일화와 규격이 목표다. 사육은 동일 결과와 동질의 상품을 목표로 하기에 유기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작은 공동체인 개척 교회가 사육 시스템을 적용하면 망가진다. 살찌는 게 목적이면 사육이지만 자라는 것이 목적이면 양육이다. 자란다는 것은 잘 하는 것이다(doing good!).

위험한 일을 용기와 모험으로 감행하는 것은 혼자서 못한다. 위험한 스포츠, 익스트림 스포츠일수록 훌륭한 교관과 조교들이 포진해 있다. 그들은 말로 가르치지 않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 준다. 커뮤니타스적인 공동체는 혼자 할 수 없기에 주변에 동행할 선배와 동지와 어깨동무를 함께할 자들로 들썩인다. 개척 교회는 이런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어쭙잖은 대형 교회 흉내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한국에는 대형 교회와 대형 교회를 추구하는 작은 교회만이 있다는 말에 당당히 아니라고 말하라. 그들의 리그를 부러워하지 말고 이 작은 공동체로 팀을 이루어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라. 150만 가나안 성도들이 그런 작은 교회들을 찾고 있다.

 “이런 교회 다니고 싶다”

몇 년 전 발제로 초대받아 갔던 세미나의 주제였다. 건강한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들이 함께 모여 연례적으로 여는 세미나였다. 주제가 얼마나 대안적인가? 여기 이런 교회도 있다고 말하고 싶은 작고 건강한 교회들의 외침으로 들린다. 실제 그 세미나를 주관하는 교회들은 건강하고 민주적 정관을 갖고 있으며 목회자들의 리더십 또한 밝고 건강했다.

그런데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여전히 우리는 그런 교회를 찾고 있을 뿐 만들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교회 다니고 싶은데 누가 좀 만들어 줘요’라고. 양육의 목적은 건강한 교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건강한 기준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결단과 실행력, 그런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창조적 희생의 마음을 갖는 데 있다.

양육의 최종적 결과는 무엇일까? 수많은 제자 훈련 과정이 말하듯 ‘재생산’이다. 건강한 교회를 찾는 안목을 기르는 ‘눈팅의 고급화’가 목적이 아니다. 수준 높은 소비자와 의식이 아니라 창조성이 발현되는 실천가의 마음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우리는 실천가의 비전과 마음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재생산의 열매를 꿈꾼다. 당신의 개척 교회가 양육의 과정을 만들기 원한다면 당신 같은 또 다른 개척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다. 자!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 같은 개척자를 또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지긋지긋한 이걸 또 나 말고 누가? 왜?

말 많고 탈 많은 한국 교회 안에 세습의 대물림이 개척의 현장에서는 쏙 빠진 걸 보니 양육은 참 어려운 일이긴 한가 보다. 그래도 내 뒤에 누군가 그 길을 걷겠다는 자가 나올 때까지 위험하고 용기를 내야 하는 모험의 과정인 이 현장을 지켜내면 그 현장에서 양육된 디모데 같은 후배 하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우리는 마치 내가 바울이 된 양 뿌듯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척의 현장이 대기업이 세운 마트와 싸우는 동네마트가 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양육은 서비스와 가격 경쟁력의 싸움이 아니라 누구도 팔 수 없고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거룩한 작품으로 빚어져 가는 그분의 걸작인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김종일 동네작은교회 담임, 개척학교 숲 대표코치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