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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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2024년  06월호 교리를 알고 설교하는 것과 모르고 설교하는 것 교리설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으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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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목사 이야기

진난감 목사는 울면서 기도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매우 일상적인 하루였다. 그는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늘 하던 대로 본문을 한 번 읽고 기도한 다음 대략적인 주제를 결정했다. 그리고 몇 가지 예화를 찾아보고는 어떻게 하면 이 주제로 성도들에게 효과적인 설교를 작성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차였다. 바로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에 대학에 입학한 유고민 청년이었다. 

유고민 목사님 안녕하세요, 유고민 청년입니다. 궁금한 게 생겨서 연락드렸어요.
진난감 그래, 고민아 잘 지냈니? 뭐가 궁금해서 연락했어? 
유고민 일전에 목사님께서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라고 하셨잖아요.
진난감 그렇지. 
유고민 그렇게 생각하니까 혼란에 빠졌어요. 예수님이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랑하시는데 결국에는 구원하지 않고 지옥에 던지시면 그걸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요? 부모님의 사랑만 생각해도 자식이 잘못해도 결국 자식을 위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도 사람이 죄를 지었더라도 결국 모두 구원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 최종적으로 지옥에 던지시면 어떻게 그걸 두고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라고 할 수 있나요? 
진난감 (당황하며) 음, 그거야 …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뜻이 있는 거겠지. 
유고민 그리고 목사님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은 온 세상 사람 모두에게 흘러넘친다”라고 설교하셨잖아요.
진난감 그렇지, 예수님의 보혈은 세상 사람 누구에게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단다. 놀라운 사실이야!
유고민 그러면 마지막까지 결국 믿지 않게 된 사람은 예수님의 보혈이 그 사람에게 미쳤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효력이 없는 거네요? 

진 목사는 무언가 대화가 잘못돼 가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도 나름 논리적인 사람인데, 대화를 이어가는 도중 이미 마음속으로 두 사실이 논리적으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논리 1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논리 2    하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논리학의 기초로 말하더라도, 이 논지의 결론은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가 뿌려지더라도 구원 못 받을 사람은 못 받는다”다. 어차피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피의 효력이 있어도 구원을 못 받는다면, 예수님의 피는 사실상 ‘결정적인’ 효력이 아닌 것이 되지 않는가?

진 목사는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됐다. 그리고 일차적으로 ‘청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목사’라는 불명예를 떠안는 것도 싫었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나는 진리가 아닌 것을 설교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공포로 다가왔다.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을 설교했다니 상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진 목사는 대충 얼버무리며 청년과의 대화를 끝냈다. 온갖 생각이 들고 일어났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도대체 무얼 가르친 게냐?”

진 목사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 설교가 생명을 살려야 하는데, 도리어 진리가 아닌 설교를 한 것은 아닙니까! 저는 두렵습니다!” 하지만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고 있는 중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전혀 다른 생각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이게 과연 기도한다고 해결될 문제일까?’ 

그렇다. 이런 문제가 정말, 기도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일까? 

진리가 설교되고 있는가? : 교리는 목회를 위한 것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아주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이것이다. 신학교에 다니고 있거나 막 졸업한 사역자 중에는 ‘성경 자체’나 ‘교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소수, 곧 애초에 관심이 있었던 몇몇에 국한된다. 반면 어느 정도 목회를 하고 회중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갖고 있는 목회자 중에는 ‘성경 자체’나 ‘교리’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이런 현상은 실제로 가르침의 자리에 오래 있어 보면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똑같은 내용을 그저 말 몇 마디만 바꾸어 계속 뇌까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시니어 목회자가 될수록 ‘배움’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 

다행히도 어떤 목회자는 이 갈등을 ‘올바른 배움’으로 연결시키지만, 그렇지 못한 목회자도 많다. 후자의 경우 이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온갖 세미나 투어’를 시작한다. 여기저기를 다니며 각종 ‘스킬’, 소위 ‘목회 방법론’을 배운다. 비어 있는 속을 채우는 대신 시스템으로 그 자리를 메꿔, 거짓된 번영을 구가하는 일로 스스로에게 변명한다. 불행히도 이것이 많은 교회, 많은 목사의 현실이다. 

교회는 ‘말씀 공동체’다. 온전한 가르침 없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만 지탱될 수 있는 것이 교회라면, 교회가 YMCA나 로터리 클럽과 어떤 면에서 다르겠는가?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헬라어 ‘퓔레’는 ‘문’이라는 뜻이다. ‘음부의 문’은 야곱이 발견했고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던 ‘하늘의 문’의 반대편이다)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교회가 단지 ‘모종의 프로그램적 기술’로 지탱되는 공동체라면1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공동체가 비슷한 방식의 경영 기술이 적용되는 기업들에도 나타나야 하는 것인가?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제아무리 방법론을 추구하는 목회자라도 기업 경영과 교회가 똑같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교회는 참으로 ‘말씀 공동체’, ‘진리 공동체’다. 그렇다면 교회는 진리가 없다면 지탱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 위에 굳건하게 서 있을 때에만 교회는 참으로 교회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시니어 목회자가 되면 될수록 ‘온전한 배움’을 향해야만 하고, 그 온전한 배움을 통해서만 목회자는 회중에게 하나님을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다. 웨인 그루뎀은 자신의 《조직신학(상)》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교리적인 불확실함과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의문을 가지고 신학 과목을 이수한 학생은 “바른 교훈을 권면하며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기가”(딛 1:9) 매우 어려울 것이다.“2

그루뎀의 이 말은 단순히 ‘설교자가 회중 연설에서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법’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설교자가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일을 통해 교회가 세워진다는 데 확신을 갖고 있다면, 그가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인데, 자신이 지금 선포하고 있는 메시지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해 있다는 확신이라는 것이다. 

이를 거꾸로 말하자면 설교자가 자신이 선포하고 있는 메시지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스스로 확신하지 못한다면, 담대하게 가르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즉 스스로 “불확실함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갖고 있는 목회자라면, 그에게는 디도서의 이 말씀, 곧 “바른 교훈을 권면하며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기”가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교회가 진리의 공동체라면 말씀을 가르치는 이에게는 반드시 ‘진리에 기반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이 확신은 ‘분명한 앎’에서 온다. 회중에게 ‘대답’을 주지 못하면 ‘선동가’가 될 뿐이다(실은 ‘좋은 선동가’조차 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가르친다는 것을 피상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진리의 ‘내용’이 가르쳐지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성은 오직 하나님, 곧 진리 그 자체이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는다. 그러므로 오류와 거짓은 직접적으로 정신의 고유한 본성과 갈등을 빚는다. … 오직 진리만이 정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고 해답을 제공해 주며, 진리 안에서만 정신이 안식을 찾는다. 확실성은 안식, 평화, 행복이지만 의심, 추측, 의견 등은 항상 어떤 정도의 불안과 걱정을 담고 있다. … 그러므로 진리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훨씬 아름답고 귀중한 선물이다.”3

따라서 ‘교리’는 신학 박사나,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람 혹은 신앙생활에 별로 불필요한 내용이지만 호기심에 무언가를 자꾸 캐기를 원하는 소수의 독특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이단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아니다.

교리야말로 모든 신앙의 기본적인 동력이다. 우리는 교리를 배우는 일을 ‘특별 활동’으로 해서는 안 된다. ‘시류에 떠밀려’ 해서도 안 된다. 교리는 그야말로 신앙의 생명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리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교리가 필요 없다면 무엇을 믿는가? 예를 들어 ‘자꾸 머리만 커지는 것은 필요 없어요. 어떻게든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되도록 제자화해야지요’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역시 교리를 믿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지를 향한 열망’조차 교리다. 어떤 종류의 교회, 어느 시대의 교회도 ‘제 나름의 교리’를 갖고 있지 않은 교회는 없었다. 

따라서 교리가 필요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단지 “어떤 교리입니까?”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리를 가르치는 문제는 ‘학술적’ 영역이 아니라 ‘목회적’ 영역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정론과 같은 교리적인 강조조차도 종교개혁의 상황에서는 신학적인 추론이 아니라 목회적인 돌봄의 표현이었다. 즉 예정 교리는 구원받은 증거라는 무거운 짐을 인간의 어깨로부터 들어 올려 그것이 속해 있는 하나님께 곧바로 돌리려는 목회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5

예정 교리 같은 것은 ‘골머리 아픈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정 교리를 다룬 어느 시대의 목회자도 이 주제를 다룰 때 “나는 세련된 학문적 기술을 다루고 있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교리를 다루는 일은 ‘목회적 문제’였다. 

바운더리: 교리를 알고 설교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교리를 알고 설교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핵심은 ‘바운더리’다. 곧 울타리가 그에게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나는 주로 이 문제를 ‘성도의 교제의 문제’라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별안간 무슨 성도의 교제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실은 우리가 공부하는 모든 이유가 근본적으로 ‘내가 말씀의 모든 이치를 홀로 깨달을 수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 있다. 때문에 이것은 사실상 ‘성도의 교제의 문제’다. 즉 공부의 이유가 성도의 교제의 문제라는 말의 의미는 나는 반드시 누군가를 읽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특정인 한두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사람에게 여기저기 주셨다. 나 혼자 모든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조금, 저기 저 사람에게도 조금, 이런 방식으로 주셨다. 하나님이 진리를 주시는 방식을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먼저 ‘겸손’해지고, 나아가 ‘다른 이들을 참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바로 ‘역사’를 이해하는 태도를 낳는다. 이단들이 이단인 이유는 수천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다른 모든 이에게는 성령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가, 자기네 이단 교주 단 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진리를 주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이단의 사고방식을 앞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소위 ‘사관(史觀)이 잘못된 것’이다. 

올바른 역사 이해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우리 앞에는 ‘나보다 더 뛰어났던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이 ‘범 교회’의 한 일원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에 맞닥뜨리던 간에 우리는 “내 앞에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한 사람이 있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다. 내가 당면한 문제를 그 누군가는 ‘먼저’ 고민했을 것이기 때문이고, 이 말은 다르게 말하자면 “이미 대답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운더리’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앞에 수많은 믿음의 선진, 그것도 각별히 뛰어나며 심지어 놀랍도록 경건하기까지 한 많은 인물을 통해서, 말씀을 탐구하고 또 탐구하여, 그 말씀이 올바로 사용되는 길을 닦아 놓으셨다. 

그리고 역사 안에는 동일하게 천재였지만 또 각별히 튀는 방식으로 사고한 많은 이가 있어 이들이 교회 안에서 온갖 종류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셨다. 데살로니가후서 2:11-12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거짓 가르침과의 분투 속에 교회 안에 올바른 가르침으로 정립된 것이 교리다. 따라서 교리를 알고 설교하는 것은 위태로 떨어질 낭패의 위험 없이 안전하게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지름길이기도 하다. 성경의 모든 문제에 내가 해답을 낼 필요가 없다면, 그리고 누군가를 참고하는 일이 우주적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헤엄치는 것이라면 사실 그 일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닌가! 고집스레 내 마음대로 말씀을 가르치려 들어 잘못되고 이상한 길로 빠져드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이미 수많은 선생을 주셨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교리를 알고 설교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현격히 차이가 난다. 단순히 유명 설교가의 몇몇 설교집을 대강 읽고 베껴서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전하는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고, 그 진리의 터 위에 서서 설교하는 좋은 목회자가 돼야 한다. 

이 일에 가장 추천할 만한 것으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있다. 따스하고, 다정하다. 그러면서도 성경에 대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만큼의 깊은 이해가 있고, 그 주제에 있어서도 놀랍도록 성경적이다. 톨레 레게!6 집어 들어 읽도록 하자! 

에필로그: 다시 진 목사 이야기

눈이 퉁퉁 붓도록 기도하던 진 목사는 서서히 꿇었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샌가 밖은 캄캄해져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기고는 집으로 가기 위해 목양실을 나서다가 문득 신학교를 다닐 때 유난히 동료 사역자들에게 교리 공부를 하자고 귀찮게 굴던 모 목사의 낯이 떠올랐다. 그리고 작년쯤이었던가? “형님 공부 좀 하셔야죠” 하면서 넉살 좋게 책 한 권을 보내 주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뭘 이런 걸 보냈냐? 스타벅스 쿠폰이라도 보냈으면 커피라도 한잔 마실 텐데’라고 생각하며 책장 한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책이다. “이게 기도한다고 해결될 문제일까?”라고 생각했던 차이므로, 진 목사는 집에 가기 전에 잠깐 그 책 내용이라도 한번 살펴보자고 생각했다. 책 제목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다. 하이델베르크가 독일의 도시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펼친 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제7주일
20문   그러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멸망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답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은덕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21문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이며, 동시에 성령께서 복음으로써 내 마음속에 일으키신 굳은 신뢰입니다. 곧 순전히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나에게도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진 목사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성령께서 알려 주셨다는 생각에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1) 놀랍게도, 교회의 유지와 발전 등의 문제 역시 기업 등의 사회적 시스템처럼 경영학적 기술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라 믿는 이가 많다. 주로 ‘교회 성장학’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은 온갖 종류의 앙케트 조사와 여론을 반영하는 것으로 교회가 유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과 교회를 유지하시는 성령님은 필요 없다. 그럴 듯한 시스템적 기술만 있으면 된다. 
2) 웨인 그루뎀, 《조직신학(상)》, 노진준 옮김(은성, 2009), p. 10.
3) 헤르만 바빙크, 《믿음의 확실성》, 허동원 옮김(우리시대, 2019), p. 53.
4) 교리를 배우는 것의 가치 혹은 중요성을 ‘이단 대처’ 같은 것에 두면 교리를 배우는 자체라 ‘피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공격에 대한 응전의 성격만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리를 배우는 중요성을 ‘이단 대처’ 같은 것에 두면 안 된다. 교리를 배우는 일은 ‘스스로도 자립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즉 무언가에 대한 대응이나 대처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는 자립의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5) 카터 린드버그, 《종교개혁과 신학자들》, 조영천 옮김(CLC, 2012), p. 31.
6) “집어 들어 읽으라!”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할 때 아이들의 노랫 속에서 들었다는 말이다. 육적 갈등에 고민하던 그가 성경을 펼쳤을 때 이 말씀이 나왔다고 한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음률이 좋아서 개역한글판 번역을 사용).

윤석준 유은교회 담임목사. 고려신학대학원(Th.M.). 저서로 《견고한 확신 : 도르트 신조 강해의 정석》, 《지하철에서 읽는 사도신경》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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