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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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24년  05월호 몸, 성(性)에서 성(聖)으로 신자의 삶(5)

몸에 대한 무관심

기독교는 몸의 종교다. 아쉽게도 몸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것 같다. 그 결과 신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몸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적 기준이 없으니 상당수 신자들은 그저 세속적 세계관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한편으로는 어떤 신자들은 지나치게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진다. 젊은이들은 얼굴을 가꾸거나 몸매를 다듬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지출하기도 하고, 나이 든 이들은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데 온갖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몸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몸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신자들도 적지 않다. 기독교가 시작된 지 얼마 후 2-3세기에 번성했던 영지주의라는 이단은 몸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교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이들은 영혼은 거룩하지만 몸은 악하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을 따르는 어떤 이들은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추구했고 반대로 어떤 이들은 아예 쾌락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몸이 구원에 있어서 배제된다는 점에서는 둘 다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영지주의적인 사고는 여러가지 변형된 형태로 신자들에게 교묘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바른 교리를 잘 배워서 균형잡힌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몸을 본질적으로 악하게 보는 영지주의에 따르면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는 구원자가 악인으로 태어났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고, 몸의 부활은 악한 몸에 갇혀서 영원히 죽지 않는 저주에 지나지 않았다. 영지주의 가르침에 대항해 정통교회는 사도적 가르침으로 응전했다. 

정경이 아직 확정되지 않고 성경책이 극도로 비쌌던 시절, 신앙의 준칙으로 불렸던 교회의 신경들은 성경보다 이단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다. 예를 들어서 대부분의 신경은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성육신의 교리와 부활의 교리를 고백했다. 
이것은 악한 육체를 가진 존재가 구원자가 될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하는 영지주의 교리에 대한 완벽한 변증이었다.

몸의 창조

몸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창조됐는지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몸과 영혼을 창조하셔서 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고(흙으로 몸으로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 다른 하나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한 몸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 두 사실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전혀 상반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요소가 하나가 됐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몸은 단순한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영)이 거하는 처소가 됐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한 남자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한 여자가 연합해서 한 몸이 됐다. 이 둘의 하나 됨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는 참 형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으로만 창조된 천사들은 이 형상을 전혀 반영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몸을 가진 인간이 천사보다 더 하나님의 형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를 통해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창조된 인간의 몸이 얼마나 순결했는지도 알려 주고 있다.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몸 역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나타냈다. 우리 몸에 있는 눈과 귀를 보면서 신자는 단지 하나님이 그것들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아시고 들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굳게 신뢰한다(시 94:9).

타락과 몸

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파괴했다. 타락으로 인해 영광스러운 창조는 수치스러운 비참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몸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영혼뿐만 아니라 거룩하고 순결하고 영광스러웠던 인간의 몸도 수치스럽게 바뀌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직후 인간의 첫 부모에게 처음으로 일어난 일은 서로의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생육과 번성의 복이 주어지는 통로인 생식기가 부끄러움의 주 대상이 됐다. 이 전에 출산은 복이었지만 이제 출산은 저주가 됐다. 출산은 단지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의 증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죄가 몸에게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죽음이다. 몸은 창조 때의 아름다운 몸을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뿐 아니라 나이가 들게 되면 약해지고 추하게 된다. 아무리 건강한 몸이라고 하더라도 병으로 고통을 받게 되면 결국 그 마지막은 죽음이다. 죽음의 기본적인 정의는 몸과 영혼의 분리다. 영혼이 몸을 떠나게 되면 그 몸은 추하고 냄새나고 더러운 시체일 뿐이다. 죽음은 죄가 인간에게 준 가장 비참한 형벌이다. 

죄는 관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 남자는 반드시 한 여자와 결합해서 한 몸을 이뤄야 한다는 하나님의 규범도 더 이상 지켜지지 않게 됐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를 가인의 후예인 라멕에게서 보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가진 힘을 노래로 자랑했다. 라멕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도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이와 같은 일은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 잡았고 더 이상 죄로 간주되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의 음행1

죄가 보편적인 사회 현상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고 나서도 옛 습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 교회다. 여러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남녀가 서로 좋아서 즐기는데 무엇이 잘못됐는가?”, “왜 한 명의 남자가 한 명의 여자하고만 살아야 하는가?”, “사랑하지도 않은데 억지로 붙어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처음 들을 때에는 황당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극단적 개인주의가 만연한 오늘날에 이런 질문에 대해서 근거를 가지고 설득력 있게 답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도 바울은 음행의 죄를 짓는 형제들을 교회에서 쫓아내고 그런 사람과 사귀지 말라고 엄히 명했다. 그러자 어떤 신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렇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합니까?”라고 반문했다. 이 반문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지만 중요한 점을 하나 놓치고 있었다. 신자는 당연히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사는 비신자와도 교제하면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 문란한 삶을 사는 사람이 신자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바울 사도의 의도는 자신이 신자라고 입으로 말하면서 행함에 있어서 비신자와는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똑같은 죄를 짓는다고 해도 그 죄를 범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효력은 달라진다. 비신자가 짓는 죄는 신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본인만 조심하면 된다. 하지만 신자가 짓는 죄는 동료 신자에게 영향을 준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 신자가 짓는 죄는 그 한 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자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만약 그 죄를 그대로 둔다면 교회 전체가 큰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몸: 성육신, 성찬, 교회2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물리적인 혹은 자연적인(physical/natural) 몸을 취하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하는데 성육신은 구원의 첫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성육신의 복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몸을 취한 것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중보자 그리스도는 취하신 그 몸으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저주와 수치를 당하시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셨다. 이로써 죄인인 인간이 치러야 할 모든 형벌을 대신했다. 이 속량의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몸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하실 수 없는 일이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오늘 우리에게 적용돼야 한다. 이 적용이 없다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이 적용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잡히시던 밤에 성찬을 제정하셨다. 성찬을 제정하신 최후의 만찬에서 우리 주님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종교개혁 당시 이 짧은 구절에 대한 해석이 달랐기 때문에 교회가 여러 개로 분리되기도 했다. 

성찬에서 사용되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린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구분해 성례전적(sacramental)인 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은 단순히 우리의 죗값을 치렀을 뿐 아니라 이제 신자를 위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우리는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참된 양식과 음료이기 때문에 그것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는가는 상대적으로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례전적인 몸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적인(mystical) 몸인 교회다. 예수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신약 교회가 형성됐는데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린다(엡 1:23; 골 1:18). 흥미롭게도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으로 잉태됐듯이 몸인 교회 역시 성령으로 설립됐다. 성령으로 설립된 교회는 성령의 전이기도 하다. 교회에 임하신 성령은 이제 그리스도의 각 지체인 신자에게도 내주하셔서 그들을 성전으로 변화시키신다. 

우리의 구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에 보다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몸에 무관심하면 우리는 구원을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혹은 지성적으로만 이해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구원은 단지 영혼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혼 구원이라는 구호의 늪에 빠지면 신자들은 이 세상의 삶과 우리의 행위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전 6:13)라는 말씀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몸: 그리스도의 지체 & 성령의 전

구원의 결과 우리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 몸도 변화됐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고전 6:15, 19).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바울은 신자의 몸이 얼마나 중요한지 계속 지적한다. 영혼 중심적인 구원론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미흡하다. 이와 같은 구원론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이 구원론에 따르면 구원이란 단지 생각의 변화일 뿐이다.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몸에 대해서 주목하게 한다. 여러분은 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별로 고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예수를 믿기 전과 예수를 믿은 후의 영혼은 많이 달라져 있을 수 있으나 우리 몸은 아무런 변화를 거치지 않는다. 더 예뻐진 것도 아니고 더 튼튼해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도적 가르침에 따라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하고 미천한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교리가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정말 믿게 되면 그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없다(고전 6:15). 그렇다면 창녀의 지체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창녀와 합하는 것, 성관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sex)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성에 대한 세상의 가르침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타락으로 인해 우리는 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상실했다. 성은 경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성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보다 성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성이 주는 쾌락은 많이 즐겼을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얻는 성에 대한 지식은 왜곡된 지식일 뿐이다.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울 사도에 따르면 성이란 두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드는 수단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창세기 2:24을 인용한다.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이 구절에서 성은 명시적으로 언급돼 있지 않다. 하지만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는 것이 성이라는 것을 분명히 추정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바울 사도는 이 성경에 근거해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이라고 규정한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의 몸으로 성관계를 통하여 창녀와 합하는 것은 우리의 몸을 창녀의 지체로 만드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음행이란 단지 도덕적 부정이나 배우자에 대한 배신 이상을 의미한다. 음행은 그리스도의 지체를 창녀의 지체로 만드는 심히 가증스러운 행위일 뿐이다. 

군에 입대하고 나서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비신자들은 거의 대부분 군입대 하기 전에 여자 친구나 여자 친구가 없으면 친구들과 홍등가에 가서 총각 딱지를 뗀다는 것이었다. 어려서 교회 안에서만 자랐던 필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믿지 않는 청년과의 결혼을 생각하는 자매들은 이 점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요즘에는 대학가에서 동거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고, 심지어 믿음의 청년들도 성에 대해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성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을 윤리적인 측면에서만 가르친다면 세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교회는 성경의 분명한 교리를 청년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야 한다. 

첫째, 구원이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신비적인 몸(교회)을 이루는 것이다. 
둘째, 이 연합에는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몸도 포함된다. 
셋째, 믿음으로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존귀한 지체가 된다. 
넷째,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성은 두 사람을 한 몸이 되게 한다. 
다섯째, 따라서 음행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지체를 더럽히는 것이다. 

구원의 결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우리 몸은 또한 성령의 전이 된다. 이것은 성전에 대한 유대교적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원래 모세가 세웠던 성막은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으로 바뀌었다. 성막이 천으로 만들어졌다면 성전은 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구약의 성전은 그 기능을 다했기 때문에 신약의 성전인 교회로 바뀌었다. 구약의 성전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성전도 돌로 구성된다. 하지만 구약의 성전과 달리 신약의 교회는 죽은 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 즉 성도들로 구성된다. 이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성도들에게 명한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지니라”(벧전 2:5).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신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제사, 즉 예배를 드려야 한다. 돌로 만든 성전에서 구약의 제사장들은 동물의 피로 희생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이 제사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다 드리셨기 때문에 신약의 제사장에게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근거해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가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감사의 제사이며 이때 드릴 우리의 제물은 우리의 몸이다. 

그 유명한 구절에서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여기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너희의 몸’이다. 중생한 이후의 신자의 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 된다. 이를 위해서 신자는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제사장과 거룩한 제물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전혀 없다. 

타락했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를 통해 성전을 더럽혔다. 이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에스겔서 8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에스겔이 본 환상에 따르면 하나님의 성전의 모든 방은 우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십계명의 제1계명을 보다 정확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원래의 의미를 살리면 제1계명은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이다. “나 외에”와 달리 “내 앞에”라는 표현은 공간적 장소를 강조한다. “내 앞에”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 신을 섬겼다. 간단히 말하면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은 것이다. 어찌 하나님의 불타는 진노와 심판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의 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을 뿐 아니라 값으로 샀다는 점, 따라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고전 6:19). 우리의 몸은 성전과 같이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를 멸하실 것이다(고전 3:17). 그렇다면 우리의 몸을 더럽히는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음행이다. 다른 죄와 달리 음행은 우리 몸에 죄를 짓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행은 단지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성모독 죄다. 자신의 몸이 얼마나 귀하고 거룩한지 모르면 자기 몸을 아무렇게나 함부로 놀리게 된다.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사도 바울은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단지 착하게 살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몸은 제사장이고, 제물이고, 성전이다. 제사장인 신자는 거룩한 제물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소극적으로 음행을 피하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유일한 아내와 깊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은 거룩해야 하며 우리는 이 거룩한 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 이성호,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그 책의 사람들, 2020), “음행의 사악함,” pp. 172-192.
2) 이성호, 《성찬: 배부름과 기쁨의 식사》(좋은 씨앗, 2023), pp. 65-73.

이성호 고려신대학원 교회사 교수. 미국 칼빈신학교 (Ph.D.). 저서로 《직분을 알면 교회가 보인다》, 《성찬: 천국 잔치 맛보기》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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