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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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4년  05월호 교회 신앙 전승의 위기, 세대통합 목회의 필요에 대해 한 몸 된 교회, 세대통합 목회

옛말에 ‘잘되는 집안’에는 두 가지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첫째는 노인들의 기침 소리고, 둘째는 아가의 울음 소리다. 평생을 살아 온 노인의 삶에 권위가 있어 그들이 내는 낮은 헛기침 소리에 집안의 시끄러운 문제가 해결되고, 새로운 생명이 계속 태어나기에 가문의 전통과 가치를 이어갈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존경받을 만한 노인과 소망 가득한 새생명이 이어지는 집안은 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 두 가지 소리가 끊어지고 있다. 어른의 기침 소리에는 힘이 없고, 새생명의 울음소리가 줄어든다. 어르신들은 요즘 청년들이 믿음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고 염려하고, 젊은이들은 존경할 만한 믿음의 선배가 없다고 교회를 떠나간다. 종교 자체에 대한 관심과 필요가 현저히 줄어 가나안 성도가 급격히 늘고 있다. 밖에서 들어오는 이가 없는데, 안에 있던 사람도 빠져나가는 상황이니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할까. 

그래서인지 이제 모두가 교회의 미래를 걱정한다. 신앙의 대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다음 세대’에게 돌리게 했다. 이제라도 주일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하나같이 높였다. 그래야 교회의 미래가 희망이 있지 않겠냐며 말이다. 그러나 주일학교 교육 시스템을 개선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1시간 내외 모이는 현실적 제한은 큰 걸림돌이 됐다. 주일학교가 기대만큼 작동하지 않자 교회는 가정으로 시선을 돌려 ‘가정과의 연계’를 말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의 신앙 양육 책임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깨달음은 교회와 가정 모두에게 도전을 줬다. 이에 부모들은 거룩한 책임감을 느끼며 교회의 파트너로 서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본 적도 해 본 적도 없는 자녀 신앙 양육의 길은 사실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결국 시간적-물리적 한계와 준비되지 않은 부모라는 장애물을 넘기 위해 ‘세대통합 예배’ 혹은 ‘온세대 예배’를 시도하는 교회가 늘기 시작했다. 주일학교로 되지 않고, 가정에게 전적으로 맡기기에도 불안한 다음 세대를, 기성 세대와 함께 예배하는 자리로 불러 모아 신앙 전수의 끈을 이어보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러나 소위 세대통합 예배는 불과 70여 년 전까지 거의 모든 교회가 행해 왔던 보편적 예배의 형태가 아니었던가? 그저 옛날로 회귀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때와 지금은 어떻게 다른가? 무엇을 붙잡고 바꿔야 할 것인가?

SBNR, BBNB의 시대

목회는 이 시대, 이 지역, 이 사람을 위해 부르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는 통시적이면서 동시대적이다. 영원한 복음의 가치를 붙잡지만 지금의 시대를 위로하고 구조하고 안내해야 한다. 그러기에 목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알고자 하는 열정만큼 지금의 세상을 이해하려는 세밀한 태도를 요구한다. 시대적 요구를 기계적으로 따르는 게 아니라 그들의 표면적 필요를 내면적 필요로 연결해 영원한 가치에 닿도록 안내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시대고 이 시대를 위한 동시대적 목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현대사회의 종교가 세 가지 흐름으로 빠르게 전환될 거라 내다봤는데, 세속화, 다원화, 사사화가 그것이다. 첫째, 세속화는 종교의 타락이라기보다는, 한 사회가 더 이상 어떠한 지배적인 종교의 영향력을 받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경향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이성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종교적 담론보다는 합리적 추론을 더 신뢰하게 돼 일종의 탈종교 현상이 지금 모든 연령대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둘째, 다원화는 다른 세계관에 대한 관용과 대화를 더욱 요구하게 되는 사회 현상을 말하는데, 유일신 사상을 기반한 기독교적 가치가 무례하고 독선적인 것으로 오해받는 현실을 보면 그 흐름을 알 수 있다. 셋째, 사사화는 공적 주도의 영역과 영향력이 줄고 사적 영역과 영향력이 강화돼 공동체적 가치보다는 개인적 가치를 더욱 추구하고 모색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개인주의, 이기주의, 타자에 대한 무관심이나 1인 가구와 고독사 증가 등이 그 경향성을 방증한다. 

한편 종교 사회학자 로버트 우스노우는 현대인의 영성이 ‘거주의 영성’에서 ‘추구의 영성’으로 1960년대 이후 급격히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거주의 영성’은 말 그대로 어떤 공동체, 환경, 건물 안에 머물 때 개인의 영적 가치와 만족, 성장을 경험하기에 종교 집단이나 종교적 환경 속에 놓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영성의 추구 방식을 말한다. 따라서 거주의 영성 시대에는 교회 건물이나 종교적 장소, 신앙 공동체가 매우 치명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피터 버거의 말처럼 세속화, 다원화, 사사화 과정을 거치며 사람들은 영적인 갈급에 대한 만족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과 방법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영적 주제를, 원하는 방법으로 추구하고 누리고 소비하는 새로운 시대가 된 것이니 그것이 바로 ‘추구의 영성’이다. 피터 버거와 우스노우가 지적한 흐름은 소위 코로나19 시대를 지나며 더욱 가속화돼 지금에 이르렀고, 그 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세대의 출현과 믿지만 속하지 않은(Believing But Not Belonging) 성도의 출현이다. SBNR은 무종교인의 증가가 그 증거다. 한국은 여러 조사에서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이미 50%를 넘었으며 연령대가 낮을수록 그 비율은 높아진다. 다만, 무종교인이라고 하여 영적 필요가 없거나 영적 추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은 종교의 영향력을 기대하거나 신뢰하지 않을 뿐이다. 한편, 믿지만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의 증가는 BBNB 현상의 방증이다. 신앙 공동체가 없어도 개인적인 영성 추구나 종교 생활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 볼 수도 있고, 혹은 신앙 공동체가 꼭 필요하지만 기존 공동체에 대한 신뢰나 기대를 저버려 방황하며 떠다닌다고 볼 수도 있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비신자들의 종교 거부감이 크고, 신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의지나 기대가 낮은 상황으로, 종교나 신앙 공동체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성향의 사람이 급속히 증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제도화의 딜레마

그렇다면 이런 시대의 목회는 어떠해야 할까? 필자는 지난 60년을 돌아보면 여기서 ‘반응적’ 그룹과 ‘본질적’ 그룹으로 목회 형태가 나뉜다고 본다. 

먼저, 반응적 목회는 시대에 발맞춰 그들의 요구에 순응하며 목회의 형태와 내용을 수정 보완해 온 그룹이다. 이 그룹은 과학주의, 합리주의, 개인주의 시대에 걸맞게 교회 조직을 개편하고 시스템을 강화하여 현대인의 필요와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다. 1960년대 등장한 연령별 부서 편제, 다양한 주제의 선택식 강의, ‘OO학교’로 대변되는 필요별-상황별 맞춤 교육, 시간대와 형식을 달리하여 선택 가능한 다부제 예배(예를 들면 1부는 전통 예배, 2부는 열린 예배, 3부는 젊은이 예배 등), 초신자에서 핵심 그룹까지 성장하도록 돕는 단계별 제자 훈련 과정, 연령별-지역별-상황별 소그룹 편성, 같은 교회지만 다른 이름으로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멀티 캠퍼스 전략 등이다. 

이 모든 것은 현대인의 특성과 필요에 반응하여 그들이 선택하기 좋도록 혹은 그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덜거나 허무는 방향으로 제도화됐다. 이러한 ‘백화점식’ 혹은 ‘월마트식’ 교회 운영은 초기에 신자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 추구의 영성 초창기인 60년대부터 한 세대(30년) 동안 전 세계 곳곳의 교회로 퍼져 갔고 한동안 성공적인 목회를 위한 기본적인 접근법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이러한 움직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연령별, 상황별, 맞춤별로 체계화되고 고도로 조직화된 교회 교육 시스템에서 자라온 다음 세대가 성인이 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2030세대가 되자 정작 교회를 떠나가게 되고, 4050세대마저 믿지만 속하지 않은 가나안 성도로 변하며, 60대 이상의 노령 인구만 교회 구성원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는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왜 그럴까? 

그 힌트를, 또 하나의 종교사회학적 용어인 ‘제도화의 딜레마’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전제할 것은,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믿음이 공동체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고 우리는 자녀로 불리게 되는 관계적 변화다. 교회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이 돼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의 1차 집단, 즉 운명 공동체, 가족 공동체다. 그러한 1차 집단으로서의 교회가 지니는 공동체성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남자와 여자가, 종과 자유자가 태생과 한계를 넘어 하나의 가족으로 되는 혁명적인 변화를 이 세상에 가져왔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점점 제도화, 조직화됐다. 조직으로서의 효율성을 높여 더 많은 사람의 선택을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의 선택을 받아 공동체 규모가 커지게 되면, 더욱 조직화하고 세분화해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춰야 운영되는, 소위 2차 집단적 성향이 극도로 강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소위 시스템 때문에 굴러가고 이젠 그것을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고 교회는 그렇게 2차 집단이 됐다. 

2차 집단은 1차 집단과 달리, 형식적이고 사무적인 집단으로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형성됐기에, 지속적이기보다 임시적이고, 무조건적이기보다 조건적이어서, 조건에 맞지 않거나 나의 목적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른 집단으로 옮겨 갈 수 있는 그런 집단을 말한다. 예를 들면 직장이나 학원, 협동조합이나 동호회 등이 그러하다. 쉽게 말해 가족이었던 교회가 이제 회사나 학원이 된 것이다. 물론 1세기 교회들도 조직화된 교회였다. 긍휼 사역을 위해 일곱 집사를 세웠고,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위해 장로와 감독을 세우기도 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사람이 모이는 곳의 조직화는 자연스런 결과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제도화는 선을 넘었다. 주객이 전도됐다. 공동체를 위해 제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존재하기에 공동체가 모이는 꼴이다. 원래 목표를 잃어버린 제도는 상한 열매를 내기 마련이다. 유월절 제사를 지키기 위해 먼 곳에서 오는 순례자들의 편의를 좋은 뜻으로 봐주다가 성전 안에서 제물을 팔고 환전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이 목표가 되고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을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해 보지 않았는가? 교회를 위한 제도화가 아니라, 제도화로 유지되는 교회는 변질 된다. 성령의 역사보다 제도적 건강성에 의지하고, 교회의 본질인 선교적 목적보다 회원 교인을 늘리는 것이 목표가 되기 쉽다. 

그러한 변질을 교회 외부의 세상 사람이 가장 먼저 눈치챈다. 요즘 세상 사람은 교회를 핍박하지 않는다. 무시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에 보이는 행태가, 메시지는 1차 집단 것인데 운영은 2차 집단처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외치는 소리는 사랑과 용서와 하나됨이라는 매우 1차 집단적인 선언인데, 교회는 세상 어느 기관보다 더욱 치밀하게 조직된 2차 집단으로 효율과 효과를 중시하며 운영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제도화의 딜레마가 있다. 교회가 더 많은 사람의 선택을 받기 위해 더 조직화하고 체계화하고 세분화할수록, 세상은 점점 더 교회를 1차 집단의 메시지로 위장한 2차 집단, 소위 예수 주식회사라고 보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불신자들을 위해 ‘전도’한다고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포교’ 혹은 ‘홍보’로 인식하게 됐다. 교회는 주와 세상을 위해 ‘봉사’한다고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조직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사회 공헌 사업’ 정도로 간주한다. 

반응적 목회의 위험성

그렇다면 어떻게 이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을까? ‘생존자 편향의 오류’라는 말이 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투기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는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방식은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전투기 조종사들 보고와 전투기의 피격 상황을 체크해 분석했는데, 대공포 탄흔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부위를 분석하고 보완하면 전투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이 나왔다. 보고서에 따라 어느 정도의 장갑을 어느 곳에 덧붙여야 좋을지 통계학자인 아브라함 발트에게 과제가 주어졌는데, 그는 보고서를 읽은 후 큰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살아 돌아온 비행기가 아니라 살아 돌아오지 못한 비행기 자료가 있어야 어느 부위를 보완해야 할지 알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그렇다. 생존자 이야기만 들어서는 사망의 이유를 알 수 없다. 기존 신자들 선택을 받기 위한 조직화, 세분화, 제도화를 넘어, 잃어버린 자, 세상에 빼앗긴 자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예수께서는 항상 잃어버린 자를 향한 마음을 크게 가지셨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내버려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셨다. 기생과 창기, 세리 같은 세상 사람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셨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들과 친구가 돼 주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모가 있지 않냐고 말씀하셨다. 고아와 과부 같은 연약한 자들, 나그네 같은 이들에게 마음이 향하셨고 그들에게 눈길이 머무셨다. 교회도, 목회도 그러해야 한다. 

잃어버린 자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절실하다. SBNR,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세상이라는 말은 종교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영적 갈망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영적으로 메말랐다는 말이다. 종교적 메시지를 뛰어넘은 진정한 영적 회복의 음성을 듣고 싶다는 말이다. BBNB, 믿지만 속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말은 가나안 성도가 공동체를 무시한다는 말이 아니다. 진정한 교회 공동체가 무엇인가 고민하며 갈망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다. 

이러한 소리를 듣거나 고려하지 않고 교회 내부의 생각과 체계에만 갇혀서 목회를 구상하면 더욱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 우리 딴에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목회 혁신을 하겠다고 조직을 개편하고 새롭게 구조를 설계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세상의 반감만 산다. 생존자 편향의 제도화의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잃은 양 찾기’와 ‘달란트 잔치’를 했던가? 왜 유명 연예인을 불러 간증을 시키고 전도 축제를 벌였는가? 그토록 많은 물티슈와 사탕 전도지를 왜 만들었던가? 진짜 잃어버린 자, 살아 돌아오지 못한 자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세워진 교회의 목회인가? 정말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위해 계곡 아래까지 내려갔던 목자의 마음인가, 아니면 더 많은 회원 교인을 효율적으로 모으기 위한 지략이었던가? 

본질이 이긴다

그런 면에서 ‘세대통합 목회’는 한국 교회의 기회며 위기다. 목회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면에서 기회고, 이마저 2차 집단적 책략으로 사용될 수 있기에 위기다. 교회는 원래 세대통합적이다. 연령, 성별, 피부색, 심지어 언어의 차이를 극복해 모든 믿는 자가 한 형제와 자매로 지어져 갔던 것이 초대교회다. 그래서 요엘은 신약 시대의 교회를 비전으로 보며 이렇게 예언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 이 이상은 마가 다락방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이 강림하시며 각자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들을 때 성취됐다(행 2:1-21). 바울 역시 그토록 다양한 배경과 서로 다른 가치관 위에 세워진 에베소교회가 하나 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체론을 통해 강조했다(엡 4:1-16). 이렇게 하나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회복하는 세대통합 목회는, 잃어버린 교회의 사명과 본질을 되살려 진정한 교회의 부흥을 한 마음으로 성령께 구하는데 시대적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것을 또 하나의 성장 전략으로 보는 시선이 있다. 아니, 너무나 많다. 1차 집단으로서의 교회를 회복하자는 메시지는 있지만 그 운영은 2차 집단 것으로 행하는 아이러니다. 외치기는 세대통합이지만 내용은 오히려 세대통합의 본질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한 예를 너무나 많이 본다. 주일학교가 작동하지 않으니까 가정을 동원하고, 주일학교보다 가정이 효과적이니 가정이 앞장서라 말한다. 아니다. 가정이 효과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시니 하는 것이다. 비신자가 믿게 되는 데 어디 효과적인 방법이 따로 있는가. 그것은 온전히 성령의 일이다. 그 가슴 떨리는 일에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 은혜다. 

신앙을 전수하는 명문 가정을 만들자고 외치며 3대가 함께 모이는 특별 새벽 예배를 기획한다. 몇 달 전부터 홍보하고 가장 많이, 빠지지 않고 참석한 가정에게 가족 식사권과 스튜디오 가족사진 촬영권을 준다고 한다. 얼마나 좋은 의도인가.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는가. 그러나 교회 안에 고아와 과부 같은 사람,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이들이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하는가? 아이를 갖고 싶어도 못 갖는 난임 부부와 불임 부부, 믿음의 부모를 갖지 못해 부모 없이 홀로 나오는 청소년과 청년, 남편 없이 혼자 믿는 아내나 아내 없이 혼자 믿는 남편, 자녀가 믿음을 떠나 얼굴을 들지 못하는 중직자들, 수많은 1인 가구, 이혼 가정, 재혼 가정, 한부모 가정, 미혼모 가정이 있다. 교회 안팎의 이토록 많은 이 시대의 고아와 나그네, 이방인이 하나의 교회로 지어져 가는 데 걸림돌이 되서는 안 된다. 

세대통합 예배는 오히려 이러한 자들이 교회라는 영원한 가족 공동체를 만나는 축제의 장이 돼야 한다.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성도를 섬긴 바울처럼,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했던 바울처럼 해야 한다(살전 2:7-12). 고아들의 아버지시며 과부들의 읍소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한다. 혈연 관계를 넘어 영원한 하늘 가족으로 서로를 인식하고 바라보도록 안내해야 한다. 그것이 목표인 세대통합 예배는 하나님의 기회가 될 것이다. 신앙 전수가 일어나는 수문 앞 광장의 부흥회가 될 것이다. 천국이 이와 같은 자들 것이라며 어린아이를 중앙에 세우고 어른을 깨우치셨던 예수 가르침의 현장이 될 것이다. 

본질적 예배로서의 세대통합 예배는 연결과 동행이 일어나는 예배가 될 것이다. 서로 다른 세대가 함께 연결되고, 먼저 믿은 선배와 후배가 믿음으로 연결되고, 주일과 평일이 연결되고, 구원받은 죄인과 은혜의 하나님이 연결되는 예배, 모든 세대가 하나님, 한 성령, 한 세례 안에 함께 지어져 가는 동행,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천국에서 영원히 한 형제와 자매로 동행하는 기쁨을 이 땅에서 당겨 누리는 기쁨이 있는 예배가 될 것이다. 본질적 예배로서의 세대통합 예배는 환대와 포용의 예배가 될 것이다. 세대 차이를 넘어 나와 너무나 다른 세대를 포용하고 이해하려는 예배, 서로를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힘쓰는 예배, 우리를 입양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내 자식 남의 자식 가르지 않고 함께 양육하는 어른과 자녀가 어울리는 예배, 나그네를 환대하고 고아를 안아 주며 과부들이 힘을 얻고 깊은 격려를 얻는 예배는 천국을 보여 주는 이 땅의 아버지 집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 예배가 가장 시대적 예배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늘 시대를 거스르고 이끌고 도전했다. 개인주의 사회라지만 모두 다 외로워 견딜 수 없는 사회, 혼자이기를 원하지만 사랑받기 원하고 진정으로 속하기를 갈망하는 사회,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는 영혼의 갈급함을 가진 현대사회야말로 세대를 뛰어넘어 하나로 연결되고 동행하며 환대하고 포용하는 교회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시대의 필요에 이끌려 전략적 선택을 했던 교회들이, 이 시대를 이끄는 본질적 예배의 회복을 통해 이 시대를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에 동참하게 되는 아름다운 교회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김대진 싱크와이즈 교육목회연구소 대표. 댈러스신학대학원(M.A.). 저서로 《교회가 그립습니다》, 《싱크와이즈 세대통합 커리큘럼》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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