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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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말씀 2023년  06월호 영화에 나타난 미움과 용서 주제별 성경 연구 | 미움과 용서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다. 예수님은 용서를 몸소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향해 저주하던 자들을 용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리고 제자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미워한다. 그 미움의 대상이 타인일 때도 있고, 자기 자신인 경우도 있다. 진정한 용서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몇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1.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
감독: 송해성
주연: 이나영(문유정 역), 강동원(정윤수 역)

‘미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곧 ‘타인’을 연상하게 된다. 미움은 미워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꼭 타인만을 미워할까? 자신을 미워하진 않을까? 여기 자신을 혐오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정은 자신이 너무 싫어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사는 것이 싫었고, 자신이 너무 미웠다. 윤수 또한 자신이 너무 싫다. 세상이 미워서 사람을 죽이고 사형수로 살아가는 자신이 너무나 밉다.

두 사람은 운명처럼 매주 목요일에 만남을 갖는다. 유정은 고모의 손에 이끌려 교도소를 방문했고, 윤수는 프로그램 때문에 끌려 나왔다. 어색한 만남,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닮은 꼴이 있었다. 자신을 증오하고 미워한다는 것이다. 

유정이 먼저 말을 꺼냈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내면의 말을 윤수에게 털어놓았다. 윤수는 사형수니까, 내 비밀을 가지고 갈 사람이니까. 유정의 말을 들은 윤수의 얼어붙은 마음에 균열이 생긴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 부자고 예쁘고 아무런 고민도 없을 것 같은 여자에게도 남모를 괴로움이 있다니, 생소했다. 게다가 스스로를 미워하는 면이 닮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마음에 공통분모가 생겨난다.

자신에 대한 미움은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함으로 증폭된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미움은 용서로 서서히 바뀌어 간다. 이 용서는 우선 자신에 대한 용서다. 자신에 대한 용서는 사랑으로 발전한다. 나를 용서해야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자살을 시도한 여자, 사형을 기다리는 남자는 그렇게 서로에게 용서의 길이 된다.

자신에 대한 미움은 외부로부터의 은총으로 극복된다. 나도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 나도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미움은 용서로 승화된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비췰 때 자기혐오는 치유된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예외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악인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 없는 의인도 없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나눠주지 못할 사람도 없고, 사랑을 받지 못할 사람도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일 때, 미움은 용서가 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바로 그 시간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다.

2.    〈자산어보〉(2021)
감독: 이준익
주연: 설경구(정약전 역), 변요한(창대 역)

1801년 순조 1년, 조선에는 피비린내 나는 소용돌이가 인다. 신유년 그 해, 조정은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대대적으로 실행한다. 황사영의 백서가 화근이 됐다. 제천의 배론 골짜기에 숨어 있던 황사영은 박해 받는 조선의 교인들을 구해 달라는 탄원문을 비단에 깨알같이 적어 중국 북경에 있는 주교좌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 편지는 중국에 도달하지 못했고, 황사영은 참수된다.

황사영으로 인해 정씨 일가도 풍비박산이 났다. 황사영의 장인 정약현은 물론이고, 형제인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이 검거됐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됐으며, 정약종은 처형됐다.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의 마음에는 분노와 미움이 들끓었다. 세상을 향한 원망, 정파 싸움에 희생자가 된 것에 대한 정치적 원망이 그의 마음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더욱이 흑산도의 말단 벼슬아치인 오칠구의 조롱은 견디기 힘들었다. 정약전은 자신을, 세상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발단이 된 기독교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정약전의 삶에 극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창대란 녀석 때문이다. 그는 고기잡이 청년 창대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실사구시, 즉 삶에 유용한 학문이 흑산도에서 실행된다. 조정에서의 논쟁보다 흑산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신의 쓰임새가 더 나아 보였다. 약전은 창대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창대는 약전에게 물고기에 대해알려 준다. 그렇게 해서 조선 최고의 실용서적이자 어류 백과사전인 《자산어보》가 탄생한다.

‘흑산’이 ‘자산’으로 바꾸는 삶의 변화가 일어났다. 세상을 향한 미움이 세상을 향한 용서와 사랑으로 바뀐다. 흑산도는 정약전에게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형이상학에서 삶의 공부로 바뀌었고, 그의 학문은 주자학에서 실학으로 옮겨간다. 자신의 쓸모를 제대로 찾자 미움은 용서로, 지옥은 천국으로 바뀐다.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유배지였으나 계시를 받았기에, 할 일이 있었기에 그에게 섬은 천국이었고, 그는 사랑을 전했을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세상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3.    〈그린북〉(2019)
감독: 피터 패럴리
주연: 비고 모텐슨(토니 발레롱가 역), 마허샬라 알리(돈 셜리 역)

1962년을 배경을 하는 영화 〈그린북〉은 혐오와 차별에 대한 용서의 드라마다. 19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은 심각했다. 1861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 흑인에게 정치적인 자유가 주어졌지만 100여 년이 지나도록 차별은 사회적 문제로 남아 있었다. 흑인은 백인 전용 식당에 들어갈 수 없었고, 백인이 다니는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다. 심지어 버스를 탈 때도 앞 칸은 백인 전용이었다.

〈그린북〉은 당시 흑인에게 주어진 일종의 통행증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뉴욕의 뒷골목에서 깡패로 자란 이탈리아계 미국인 토니와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존경받던 흑인 음악가 돈 셜리 박사다. 남부 지역 공연을 기획 중이던 돈 셜리 박사는 북부보다 차별이 심한 남부 여행을 위해 운전자이자 경호원으로 토니를 고용했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남부 여행기를 다룬다.

남부의 한 지역을 지나던 중 백인 경찰이 다짜고짜 차량을 세우고 검문을 한다. 그러고는 뒷좌석에 타고 있던 돈 셜리 박사를 이유도 묻지 않고 유치장에 감금한다. 흑인이 백인이 운전하는 차량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를 갱 조직의 두목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토니는 백인 경찰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그때 돈 셜리 박사는 토니의 행동을 저지하면서 말한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면 똑같은 사람밖에 되지 않습니다. 폭력에 품위로 대응해야 이길 수 있어요.”

1960년, 최초로 백인 학교에 등교한 루비 브리지스의 일화도 동일하다. 여덟 살짜리 루비는 자신을 향해 욕을 하고 돌을 던지는 백인들을 뚫고 매일 아침 학교에 갔다. 백인 아이들이 밉지 않냐는 질문에 루비는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교회학교에서 예수님의 용서를 배웠어요. 예수님이 기도하셨잖아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똑같이 기도하면서 학교에 가요.”

그렇다. 용서는 강한 사람이 할 수 있다. 또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4.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2014)
감독: 아르토 데 팔리에르
주연: 매즈 미켈슨(미하엘 콜하스 역), 드니 라방(루터 역)

16세기 독일의 한 지역에서 말을 사고 파는 일을 하는 미하엘 콜하스. 어느 날 말을 팔기 위해 가던 중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한다. 새 남작이 갑자기 통행세를 내라며 길을 막은 것이다. 통행세를 준비하지 못했던 콜하스는 자신의 말 중 두 마리를 맡겨두고 길을 떠난다. 말을 팔고 돌아온 콜하스는 통행세를 내고 맡겨두었던 말을 찾으러 갔지만, 건강했던 말이 끔찍한 상태로 변해 있음을 발견한다. 콜하스는 항의하지만 거부당한다. 정식 절차를 걸쳐 법원에 항의하지만 남작과 한통속인 법정은 재판조차 열어주지 않는다. 급기야 콜하스의 아내가 공주에게 항의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 챈 남작으로 인해 오히려 콜하스의 아내는 싸늘한 주검이 돼 돌아온다.

분노한 콜하스는 자신의 사람들을 모아 남작에게 복수를 강행하려 한다. 콜하스와 비슷한 일을 겪었던 억울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콜하스 일행은 일전을 앞두고 있다. 그때 누군가 콜하스를 찾아온다. 바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르틴 루터다.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당한 대로 되갚아 준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무기는 칼이 아니라 십자가와 인내, 사랑일세.” 그러나 콜하스는 루터의 제안을 거절한다. “제가 남작을 용서할 때까지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칼을 들고 싸운다.

콜하스의 선택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진다. 용서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것일까? 원수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나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자를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십자가에서 무한한 용서를 실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 또한 사울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긴 다윗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삶에서 이 같은 수준의 용서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정의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미하엘 콜하스의 어려운 선택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김양현 더불어행복한교회 협동 목사.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