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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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22년  12월호生: 인생의 목적과 의미 심층기획 인간 생로병사의 신학

왜 태어났느냐고 물을 때

만일 누군가 당신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좀 머쓱해하다가 정색을 하고서 “그거야 우리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만나 수태가 일어났고 착상된 수정란이 자라 약 9개월 후 세상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지요”[A]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생물학적 과정에 의한 설명은 “왜”라는 질문을 “어떻게”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며 탐탁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면서 “우리 할머니의 간절한 소원 때문에 제가 태어났습니다”[B]라며, “왜”라는 질문에 좀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답변을 내놓을 것이다. 2대 독자로 태어난 그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시집온 지 오래지 않아 과부가 된 할머니는 아들(2대 독자의 아버지)을 하나 낳았는데, 잦은 병치레 때문에 몸이 매우 허약했다고 한다. 어렵사리 결혼을 시켰지만 이제는 아이가 생기지를 않아 결혼 후 근 10년 동안 잉태 비법·각종 약재·무속 의식 등 갖은 노력을 해 임신이 됐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며느리(2대 독자의 어머니)가 임신한 후에도 출산하기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정화수를 떠놓고 지극 정성으로 기원을 드렸다. 그리하여 본인이 태어났으니, 상기 진술은 결코 거짓이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태어났느냐”에 대한 답변으로서 [B]는 확실히 [A]보다 낫다. 그러나 [A]의 말이든 [B]의답변이든 태어난 목적을 밝히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아쉽고 불충분하다. 보통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나는 ~한 목적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C]라는 답이기 때문이다. [A]는 “어떻게”에, [B]는 “무엇에 의해”에 초점을 맞춘 답이라면, [C]야말로 “무슨 목적으로”를 밝히는 답이다.

성경상으로 볼 때 [A] 차원의 설명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태중에서의 형성과 발전을 언급하는 듯한 내용(시 139:15-16)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시적 묘사로부터 인간의 태생에 관한 생물학적 정보를 얻기는 힘들다. [B]식의 설명은 성경에서도 발견되는데, “사람의 뜻”(사람의 의지/욕구)(요 1:13)이라는 어구가 이것을 나타낸다. 즉 부모의 강한 열망이 자녀 생산의 추동 원인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창 11:30; 15:2-3; 16:2; 17:17-18; 18:11-13; 21:5-7)가 여기에 해당하고, 또 한나의 한스런 사연과 처절한 서원 기도(삼상 1:2, 5-6, 10-11, 15-16, 20, 26-27)가 대표적 예증일 것이다. 그 외에 세례 요한의 출생 뒤에도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간구와 소원(눅 1:7, 13-14, 24-25)이 있었다.

그러나 [B] 역시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전망이나 개관 혹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세례 요한의 경우에는 태어날 때부터 그의 생애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장래에 대한 계시적 힌트(눅 1:15-17, 76-77)가 부가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지, 부모의 열망이 자녀 출생의 원인으로 작용한 모든 이에게 본유적으로 획득되는 무슨 지식 내용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가 왜 태어났느냐에 대한 온전한 설명을 확보하려면, 우리는 불가불 [C] 차원의 답변에까지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의 인생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슨 목적 때문에 태어났는가?”다.

1.    인생의 2가지 목적
우리는 성경 전반의 가르침에 비춰 두 종류의 인생 목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신앙적 자태의 현시 목적[줄여서 성품적 목적]이요, 또 하나는 신국(神國)적 임무의 수행 목적[줄여서 활동적 목적]이다.

인생의 성품적 목적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면모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성품(character)과 덕목(virtue)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는 데 있다. 반면, 인생의 활동적 목적은 그리스도인 각자마다 서로 다른 바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과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또 후천적 훈련에 의해) 모종의 은사와 적성을 허락받는데(획득하는데), 이를 활용해 하나님이 뜻하신 사역과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우리가 태어난 목적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그리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수행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상기한 내용에서 인생의 목적이 두 종류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이 두 가지 목적이 한데 어울려 작동한다. 예수님도 자신의 인생 목적과 관련해 두 가지를 함께 언급하셨다.

“인자가 온 것[인생의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성품적 목적]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활동적 목적]이니라”(마 20:28).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목적을 밝히면서 먼저 ‘섬김’을 언급하신다. ‘섬김’이란 종으로서의 태도와 겸비한 자세를 의미한다. 연이어 그리스도는 대속자로서 죽어야 할 책임 또한 자신이 오신 목적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마 9:13; 눅 19:10; 요 12:27; 히 10:5-7).

인생의 목적을 성품적 목적과 활동적 목적 두 가지로 설명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하게 해당하는 성품적 목적에 대해서부터 알아보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항목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는 온유(마 11:29), 겸손(마 11:29; 빌 2:5-8), 섬김(마 20:27-28; 요 13:14-15), 이타심(롬 15:2-3), 연합 의식(롬 15:5-6), 받아 줌(롬 15:7), 사랑(엡 5:2; 요일 3:16-18), 용서(골 3:13), 인내(히 12:23; 벧전 2:21)와 같은 도덕적 특질이 포함된다.1

바울은 인생의 목적과 관련해 또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 받았음을 설명한다. 이것은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활동적 목적이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사실 바울이 자신의 활동적 목적에 대해 들은 것은 다메섹 사태를 겪으면서였다(행 9:15; 26:16).

2.    활동적 목적의 이모저모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활동적 목적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이해한다. 인생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것이 그 정도로 중요하다는 뜻이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 1941~)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고 싶은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처럼 좀 더 큰 목적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러 여기에 있는지, 왜 이 곳에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의 것].2

이제 이러한 인생 목적, 곧 활동적 목적의 성격을 몇 항목으로 분석해 보자. 첫째, 인생의 활동적 목적은 당사자 개인의 은사나 재능 및 훈련 경험과 긴밀히 연관된다. 즉 어떤 이가 생애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그의 은사나 재능이 어떠하냐 또 그의 전공이나 인턴십 혹은 직업 훈련이 무엇이냐와 상관관계가 깊다. 예를 들어,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하게 된 것은, 가말리엘 문하에서의 율법 교육(행 22:3), 희랍 문서에 대한 지식(행 17:28; 고전 15:33; 딛 1:12), 로마 시민권(행 22:3, 25-29), 천막 짓는 기술(행 18:2-3) 등이 확보돼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인생의 목적(활동적 목적)은 광의적으로도 협의적으로도 묘사될 수 있다. K교회에서 청년 사역을 담당하는 어떤 교역자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내 인생의 목적은 K교회에서의 사역이다”[광의적]라고도 할 수 있고, “내 인생의 목적은 K교회 청년 리더들의 영적 성숙이다”[협의적]라고도 할 수 있다.

셋째, 인생의 목적은 복수적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영역과 세상 영역을 망라하므로 우리의 임무 수행은 교회뿐 아니라 가정과 회사에서도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여기 S씨는 교회의 장로이고 가정에서 아버지며 회사에서는 중역이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 목적(활동적 목적)은 장로로서, 아버지로서, 회사 중역으로서 해야 할 바를 ― 이렇게 삼중적 책임을 ―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다.

넷째, 인생의 목적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필자의 경우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에는 대학생 선교 단체에서의 임무 수행이 활동적 목적이었다. 그러나 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에는 활동적 목적이 지역 교회의 목회로 바뀌었다. 40대 후반부터 60대 중반에는 다시금 변화가 찾아와 신학교 교수로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인생의 활동적 목적이 됐다. 이처럼 인생의 활동적 목적은 개인의 내적·외적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를 겪을 수 있다. 어쨌든 인생의 목적(활동적 목적)만큼 그리스도인을 기운차게 만들고 활성화시키는 요인은 없다고 하겠다.

목적 의식을 흐리게 하는 요인들

이처럼 중요한 인생의 목적이지만 어떤 때에는 방해 요소로 인해 목적 의식이 흐려지기도 한다. 열등한 조건과 혹독한 시련이 그것이다.

1.    열등한 조건
우리가 활동적 목적에 따라 보람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하지만, 자신의 인생 조건이 다른 이들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분명 그런 의도는 좌절을 겪을 것이다. 주위의 친구들은 태어날 때부터 경제적·사회적 여건이 탄탄했고 부모의 지원도 대단해서 대학이나 직장까지도 별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했다고 하자. 이에 비해 자신은 흙수저의 전형으로서, 시골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고, 서울로 상경한 이후에도 여러 형태의 아르바이트와 하루살이 생활로 근근이 대학을 마쳤으며, 천신만고 끝에 중소기업의 신입 사원으로 안착했다고 하자. 어느 날 연봉의 수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차가운 현실에 직면한 그가,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인생의 (활동적) 목적과 관련해 만족과 보람을 운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인생에 과연 어떤 확실한 목적이 있는 것인가? ― 아마도 그는 이런 회의에 잠길 것이다.

인생 조건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인간은 존재를 시작할 때부터 서로 큰 차이를 나타낸다. 출신지, 경제적 수준, 인종, 천부적 능력, 질병에의 소인, 체질 … 그 목록은 끝이 없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열등한 조건 때문에 인생의 목적 의식을 포기하든지 약화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이 베푸신 달란트 비유에서도 주인이 맡기고 간 자본금은 사람마다 달랐고, 두 달란트나 한 달란트는 분명 다섯 달란트보다 열등한 조건이었다(마 25:15). 그러나 이러한 열등한 조건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데 ― 즉 인생의 활동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두 달란트 받은 이의 성실한 경제 활동을 보라, 마 25:17)!

사도 바울 역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은사상의 차이가 있음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다. 발과 귀가 손이나 눈보다, 손과 발이 눈이나 머리보다 열등한 대상으로 인식된다는 것(고전 12:15-16, 21)이 논지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열등한 조건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약한 지체들 역시 보람과 의의를 누리게 역사하신다(고전 12:22-23). 결론적으로, 열등한 조건은 분명히 인생의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인생의 (활동적) 목적 의식이 약화되거나 묵살될 필요는 없다.

2.    혹독한 시련
혹독한 시련 또한 활동적 목적을 밝히는 데 커다란 장애 요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련은 인생에서 겪는 각종 불행, 고난, 재난을 총망라한다. 질병의 엄습, 천재지변, 경제적 실패, 불의의 사고 등이 몇 가지 예다. 이런 어려움은 신체적·정신적 기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활동적 목적의 성취에 치명타로 작용한다.

대표적 예로 욥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일곱 아들과 세 딸의 아버지요(욥 1:2), 남편이고(욥 2:9), 대규모의 축산업자 ― 양이 칠천, 낙타가 삼천, 소가 오백 겨리, 암나귀가 오백에 달함(욥 1:3) ― 였으니, 가장과 축산업자로서 활동적 목적을 수행하던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닥친 재난(욥 1:13-19; 2:7) 때문에 욥은 더 이상 인생의 목적을 말할 수가 없게 됐다. 오죽하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겠는가!(욥 3:1)

선지자 예레미야도 버금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시련을 많이 겪었다. 그는 자신이 전달한 예언 때문에 구타와 목 고랑이 가해졌고(렘 20:2), 사람들로부터 조롱(렘 20:7)과 치욕(렘 20:8)과 비방(렘 20:10)을 겪었다. 그러한 수난은 선지자로서의 활동적 목적을 이루는 데 큰 장애물이 됐고, 그 역시 생일을 저주했다(렘 20:14-18).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 인생의 목적(활동적 목적)은 빛이 바래고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인생 목적의 또 다른 종류, 신앙적 자태의 현시 목적(성품적 목적)이 의미심장하게 부각된다. 혹독한 시련을 만나 인생에서 활동적 목적을 운운하기에 힘든 상황에서도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오히려) 성품적 목적은 얼마든지 거론될 수 있다.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고난은 사실 삶의 목적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3

혹독한 시련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적 자태를 견지할 때, 성품적 목적이 이뤄진다는 말이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 밑에서 박해와 고통을 당하던 노예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성품적 목적을 권면한다.

“이[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것]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는 데다가 노예라는 비천한 신분까지 따라다녔으니 그들에게 인생의 활동적 목적을 강조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부적절했다. 그러나 그처럼 열악한 상황에서도 성품적 목적은 얼마든지 현시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본을 좇으라고 권면한 것이다. 이처럼 혹독한 시련 가운데서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바는 인생의 성품적 목적을 이루는 일이다.

가장 어려운 질문들

열등한 조건이나 혹독한 시련 이상의 난관에 처한 이들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가령 태어날 때부터 중증의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성품적 목적이든 활동적 목적이든 실현할 수 없는 경우 말이다. 이런 대상에게는 인생의 목적이 하나의 사치가 아니겠는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물론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지는 않을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정상적인 소통이 되지 않는 장애인 청년 아담 아네트를 라르쉬 공동체에서 만나 그가 죽기까지 10년 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다. 헨리 나우웬은 죽어서 관에 누워 있는 아담의 시신을 보는 순간 다음과 같이 느꼈다고 한다.

그때 섬광처럼 내 가슴에 와닿는 사실은, 아담이라는 이 장애인이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치유 사역이라는 독특한 사명을 띠고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사명을 완수했다는 것이었다[강조는 인용자의 것].4

하지만 나우웬 같은 대가에 의해 각광을 받지 못하고 죽은 수많은 장애인도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도 인생의 목적이 해당되는가? 또 태어나기는 했지만 질병과 악의로 이슬처럼 사라진 ―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 헤롯의 잔인한 칼에 희생된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이하 남아들(마 2:16)을 포함해 ― 수다한 어린아이는 어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우리는 더 이상 인생의 목적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접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인생의 의미는 언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일단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는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또 그가 처한 인생의 조건이 어떠했느냐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생의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이 있는 한 그는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됐다는 점에서 인생의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나는 왜 태어났는가? 우리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하도록 하기 위해[성품적 목적], 또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기 위해[활동적 목적] 이 땅에 태어났다. 우리의 조건이 열등해도 우리가 혹독한 시련에 직면해도 이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혹시 목적 의식을 정상적으로 거론할 수 없는 인생의 경우라면, 그들이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됐다는 점에서 인생의 의미만큼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전체로 본 그리스도인의 인생 철학이다. 



1) 송인규,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하여》(IVP, 1997), pp. 286-287.
2) 오스 기니스, 《당신을 향한 소명》, 홍병룡 옮김(IVP, 2003), p. 19.
3)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최종훈 옮김(두란노서원, 2018), p. 33.
4) 헨리 나우웬,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김명희 옮김(IVP, 2022), pp. 17-118.

 

송인규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 시라큐스대학교(Ph.D.). 저서로 《새로 쓴 기독교 세계관》, 《성경의 적용》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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