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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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진단 2022년  12월호드라마 〈작은 아씨들〉 미디어 속 트렌드

기사 메인 사진 tvN이 올해 9월부터 방영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서사 설정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여류 문인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이 집필한 동명 소설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원작 소설에서 일부 캐릭터의 성격과 관계에 관한 설정만 빌려왔을 뿐, 시대 배경이나 서사 흐름은 판이하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월남전 이후부터 현재 시점까지 한국 현대사를 극 전체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 드라마에 그려진 우리 사회는 부와 권력을 틀어 쥔 자들의 비틀린 욕망과 부도덕함으로 점철돼 있다. 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정황 속에 세 명의 자매들이 내던져진다.

오인주(김고은 분), 오인경(남지현 분), 오인혜(박지후 분), 이 세 명의 자매는 가정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부모 때문에 빈곤한 삶을 살았고, 재력가인 고모할머니 오혜석(김미숙 분)이 친분을 맺고 있는 권력자들의 사조직 정란회와 얽히면서 여러 차례 목숨을 잃거나 구속당할 위기에 처한다. 특히 정란회 원년 멤버인 원기선의 딸이자, 원기선의 잔혹한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아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연쇄살인마 원상아(엄지원 분)의 타깃이 되면서 온갖 위기에 처하며 여러 차례 굴욕을 맛본다. 드라마 결말에서 정란회와 연관된 악인 다수는 패망하거나 죽음을 맞이하며, 세 자매는 모든 위기에서 벗어나 커다란 경제적 보상을 받는다. 이로써 〈작은 아씨들〉은 권선징악형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현대물 장르 문학의 전형적인 소재, 재력가 및 권력자 후예의 잔혹함

〈작은 아씨들〉은 근래 장르 문학계의 중요 소재로 자리 잡은 ‘통제 불가능하고 잔혹한 재벌 및 권력자 집안 자제들’에 관한 서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웹툰과 웹소설을 통해 대중문화계 전반에 널리 퍼진 현대물 장르 문학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타락한 권력자 및 재벌 가문 후예의 악의와 계략을 물리치는 소시민의 이야기는 최근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여러 차례 변조 재생산됐고 나오는 족족 인기를 끌었다.

권력자 및 재벌 가문의 잔혹함과 악행을 중심으로 삼는 소설과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직면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저격하기 때문이다. 언론과 미디어에 끊임없이 소개되는 유력 정치인과 기업인의 부도덕, 비리 그리고 범죄 의혹은 우리 마음에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그 후계자에 대한 깊은 불신을 새겨 놓았다. 인구 증가와 경제 성장세가 멈추고 사회가 점차 침체 국면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계층 이동이 점차 어려워지는 현실 또한 반영한다.

〈작은 아씨들〉과 비슷한 서사를 담은 소설이나 드라마는 이런 젊은 세대의 불안감과 절망을 허구적으로나마 극복하게 함으로써 위로를 제공한다. 최근 연애, 결혼 혹은 불륜에 관한 드라마가 이전처럼 활발하게 제작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젊은 세대가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연애와 결혼을 포기한 상황에서 남녀 관계를 중심에 둔 서사는 예전처럼 시청자의 공감을 얻기가 어렵다. 반면 사회적 지위도 확보하지 못하고 경제력도 부실한 현재의 젊은 세대에게는 권력자와 부자들의 비행과 부도덕을 파헤치고 힘없는 이들이 결국 승리하는 범죄극이 더 큰 공감을 이끌어 낸다.

반자본주의적, 사회주의적 메시지: 자본주의 체제 타파 및 공정한 분배를 향한 열망

최근 방송가를 둘러싼 세태가 이렇다 보니 드라마 다수는 반자본주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2021년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 이후 재력가나 권력자들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거의 반드시 상류층 인사들이 절대 악으로 그려진다.

이런 캐릭터 설정에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사고가 짙게 배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극소수 자본가들에게 부를 몰아 줌으로써 사회적 약자, 서민들이 절대 손댈 수 없는 잔혹한 괴물을 만들어 낸다는 사고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는”(마 6:24) 자들의 영혼에 닥친 위기를 여러 차례 경고했다. 새로 지은 창고에 재물을 잔뜩 채우고서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라고 안위했던 부자의 예화, 그리고 많은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고 주를 따르는 것을 거부한 부자 청년의 일화(마 19:22)는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많은 재물의 해악을 확증하는 사례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들이 도무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재물을 갖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된다. 많은 이가 그 막대한 재물을 바라보고 그 소유자에게 굴종하며 노동력을 바친다. 이렇게 해서 막대한 재화와 자본은 그 자체로 어떤 초월적 권세를 갖는 것처럼 인식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지목한 물신숭배(fetishism) 증후군이다. 이렇게 막대한 재화와 자본이 우상화되면서 이를 소유한 자본가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을 때와 달리 자기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막대한 재화와 자본이 순전히 자기애(self-love)를 위해 활용될 때 벌어지는 인간 영혼 혹은 정신의 황폐화에 대해 성서와 마르크스는 비슷한 진단을 내린다.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 모두 물신숭배로 인해 자기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는다. 이 주도권은 보다 고결하고 윤리적인 삶, 기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위해 행사돼야 하는 것이지만, 물신(物神)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주도권을 자본이 주는 안락함과 쾌락에 건네준다.

이에 대한 대응책 및 해법과 관련해 성서와 사회주의는 전혀 다른 방안을 내놓는다. 사회주의 집대성자인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로 유지되는 자본의 우상화를 철폐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폭력 혁명과 사유 재산의 전면적 국유화, 그리고 이 국유화된 재화나 생산 수단의 평등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최근 반자본주의 메시지를 담은 장르 문학이나 드라마가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해법이다.

〈작은 아씨들〉의 결말은 이런 동향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주인공 세 자매는 우여곡절 끝에 원상아의 흉계를 물리치고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작중 악의 근원인 원기선이 성장시킨 원령그룹의 비자금 700억 원을 확정적으로 손에 넣게 된다. 세 자매 중 막내 오인혜는 이 돈을 골고루 분배해 나눠 준다. 이 결말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자본가의 폭력에는 폭력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약자들은 공정한 분배를 통해 공생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적 대응책: 내세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현실의 부와 권력을 포기하기

이렇게 약자를 위한 공정한 분배라는 결말은 인간의 자력구제 가능성을 확증하는 사회주의적 인간 이해의 소산이다.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 전체를 인간 정신이 신격에 이르는 변증법적 과정으로 보았던 헤겔의 변증법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마르크스는 신과 영혼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였기에 인간 정신의 신격화라는 헤겔 사유의 결론에는 동조하지 않았지만, 인류가 스스로 진보를 달성해 완벽한 정치적,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이상적 유토피아의 도래에 대한 헤겔의 전망을 적극적으로 계승했다.

반면, 성서는 인간 스스로 이룩하는 유토피아의 꿈이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 애초에 존재적 완전성이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 귀속된 속성이기에 만일 어떤 완전한 것이 존재하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어야 한다. 이는 성서와 기독교 신학이 오랜 세월 가르쳐 온 완전성에 대한 대전제다. 인간은 애초 유한한 존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정치적, 경제적 공의가 완전하게 이뤄지는 세상을 달성할 수 없다. 죽음과 빈곤의 위협에 대한 불안 그리고 안락함에 대한 이기적 욕망이 뒤엉킨 인간의 심성으로부터는 마르크스가 전망한 진보된 사회주의적 정신의 출현이 불가능하다. 결국 막대한 양의 재화와 그로부터 나오는 권력과 쾌락의 힘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의 가르침은 인간이 지닌 이 저열하고 불완전한 본성을 분명하게 간파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부와 권력에 예속되는 문제와 관련해서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지극히 한시적으로만 누리다가 죽음과 함께 강제적으로 포기해야만 하는 재화와 권력 대신 영원한 행복이 함께하는 내세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상급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전해 주는 것이다.

단,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붙는다. 이생의 부와 권력, 그리고 내세의 복과 상급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조건이다. 인간은 그 탐욕스러운 본성 때문에 부와 권력의 힘에 붙들리는 순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의 귀중한 인생을 잠시만 누릴 수 있는 부와 권력에 모두 바치게 된다. 성서는 하나님이 “두 주인을 섬기는”(마 6:24) 일을 가당치 않은 것으로 여기심을 명시하고 있다. 이생의 부와 권력을 탐하는 이는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영원한 내세의 복락에도 참여할 수 없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교회는 전통적으로 부와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신자들에게 가르쳐 왔다.

사실 이런 맥락에서 〈작은 아씨들〉의 기독교인 묘사는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작중 원기선의 아내이자 원상아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남편 원기선이 저지른 여러 건의 살인 행각을 보다 못해 그의 죄를 교회에서 폭로하려 하다가 8년 동안 남편에게 감금당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원상아가 원망 섞인 마음에 어머니를 밀쳤고, 이로 인해 상당히 큰 상해를 입은 어머니는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알고, 자신의 딸이 살인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모정으로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 사건으로 원상아는 세상과 자신의 존재를 원망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살인마로 돌변한다.

원기선의 아내에 대한 이런 묘사 방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기독교적 가르침에 어긋나는데, 첫째는 그녀가 원기선의 살인 행각을 폭로하겠다고 원기선에게 자신의 의사를 밝힌 점이다. 이는 아마도 원기선이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죄를 뉘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행동인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부와 권력의 노예가 된 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영적인 각성을 체험하지 않는 이상 결코 죄악으로 물든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둘째, 원기선의 아내는 딸이 살인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했다는 설정이다. 이는 〈작은 아씨들〉의 극본을 맡은 정서경 작가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편견 혹은 오해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런 편견과 오해는 정서경 작가가 박찬욱 감독과 함께 각본을 집필했던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녀는 이 두 작품에서 기독교 신앙이 현실의 죄악과 불의에 저항하는 데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주저 없이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세상의 부와 권력, 그리고 거기에 결부된 죄악을 바라보는 성서적 지혜와 대안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다.

정서경 작가가 생각하는 신앙의 ‘독실함’은 무지에 기인한 무력하고 비현실적인 선의지를 고수하는 것이겠지만, 성서가 가르치는 신앙의 ‘신실함’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그 해악으로부터 영혼을 지켜내는 기민함을 특징으로 삼는다.

이처럼 〈작은 아씨들〉은 부와 권력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 군상을 예리한 시선으로 파헤치지만, 그 대안으로 비현실적 이상에 가까운 반자본주의적, 사회주의적 해법을 제시하는 한계를 내보인다. 그리고 부와 권력에 사로잡힌 인간의 죄악에 대한 기독교적 해법을 잘못 이해하고 폄하하는 우를 범한다.

이런 한계를 덮기 위해 주인공 자매들과 원상아의 감정선 짙은 신파조 연기를 동원하지만 이는 오히려 시청자가 서사에 몰입하고 납득하게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 애초 정치적·경제적 정의에 대해 근거가 빈약한 해법을 제시하고, 오해에 기인한 기독교인 묘사를 감행하는 까닭에 아무리 뛰어난 연출을 동원한다고 해도 서사 자체를 충분하게 납득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결국 〈작은 아씨들〉은 부와 권력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약점을 예리하게 간파해 보여 줌으로써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종국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서사와 결말을 선보이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 아쉬운 작품이라 평할 수 있다. 
 

박욱주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강사. 연세대학교(Ph.D.).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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