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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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2년  10월호서울, 기독교 선교 활동의 출발지 한국 기독교 성지 순례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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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서울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한 이래 오늘날까지 한반도의 수도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 땅에는 서구 열강이 밀려들어 왔고, 조선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 사회로의 면모를 갖춰 갔다. 이 무렵 주로 영미계 선교사들이 들어와 서울은 기독교 선교 활동의 출발지가 됐다. 이후 미국 미감리회와 북장로회는 미국 공사관이 있던 정동에 선교 기지를 마련하고 선교를 시작하면서 정동은 한국 개신교의 ‘배꼽자리’가 됐다. 초기 정주 선교사들이 들어와 처음 정착한 곳이 정동(貞洞)이었고, 마지막 잠든 곳은 한강변 양화진이다. 이 땅에 복음을 들고 들어와 선교의 열정을 바쳐 헌신하다 주님 품에 안긴 선교사들이 잠든 곳,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시작해 그들의 삶의 자리를 둘러보는 것으로 서울 지역 기독교 유적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서울시 마포구 양화진길 46

버들꽃나루 양화진은 조선의 수도 한양의 젖줄이 되는 한강의 나루로 일찍부터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였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 조치로 프랑스 함대가 1866년 8월 양화진까지 침범했다가 10월 강화도에서 패배하고 철수한 병인양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대원군은 천주교를 극심하게 박해하고, 서양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한강을 사교도(邪敎徒)의 피로 씻는다면서 양화진 가에서 천주교도들을 참수했다. 잠두봉(蠶頭峰) 버들꽃나루는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자른 장소라는 ‘절두산’(切頭山)이라는 험한 이름으로 바꿔 불렸다. 더욱이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을 1894년 능지처참해 양화진에 효시했다. 이로써 양화진은 일찍부터 침략하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의 상쟁의 현장이자 그로 인해 흘린 피가 강을 적시는 죽음의 공간이 됐다. 

그러나 대원군의 통상거부정책도 시대를 거스를 수 없었다. 이어 고

이순자 (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책임 연구원. 숙명여대(Ph.D.). 저서로 《일제강점기 문화재 정책과 고적 조사》, 공저로 《믿음의 흔적을 찾아: 한국 기독교 유적》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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