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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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2022년  10월호시편 42:1-11,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바르고 힘센 설교를 꿈꾸는 채경락 목사의 설교 클리닉(10)

시를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언젠가 한 시인이 대답하기를, 시가 아니면 안 되는 말이 가슴에 들어왔기 때문이란다. 시인이라 그런지 대답도 시적이다. 시가 아니면 안 되는 말이 가슴에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시로 토해 낸다는 말인데, 예레미야 선지자의 토로가 떠오른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이래서 한 구약학자는 선지자를 일컬어 시인이라 명명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말씀이 그러하지만, 시편을 읽는 마음은 조금 더 뜨거워도 좋겠다.

오늘은 그중 갈급함을 노래하는 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인 듯 시구인 듯 회자되는 문구가 떠오른다. 사슴은 갈증을 가장 심하게 느끼는 동물이라고 한다. 물 없이 살아남을 짐승이 없지만 그중 사슴은 목이 마를 때면 기본적인 판단이 흐려질 만큼 숨을 헐떡인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노리는 사자가 잠복해 있어도, 갈증을 이기지 못해 물을 찾다가 그만 목숨을 잃기도 한단다. 

오늘 시인은 스스로를 그런 사슴에 비유한다. 목숨을 걸고 시냇물을 향해 돌진하는 사슴처럼 시인의 영혼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 이 시편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 일단은 뜨거워야겠다. 뜨거운 설교를 기대한다.

설교A.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설교 구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탄식하는 시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지를 살피게 된다. 설교의 목적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힘겨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게 하는 데 있다. 왜 하나님께 소망을 둬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갈급함을 채우시며, 불안과 낙심을 잠재우시고, 우리를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서론: 왜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저마다 소망을 갖고 이 땅을 살아갑니다. 성공이나 명예, 물질과 같은 소망을 향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에게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1. 갈급함을 채우신다
먼저, 우리의 갈급함을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1절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찾는 데 갈급하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뵐 때 그 갈급함을 채우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 소망은 당장의 갈급함을 채우면 다시금 채울 무언가를 고대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다시금 채울 무언가에 갈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항상 뵈옵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갈급함을 충만함으로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2. 불안과 낙심을 잠재우신다
두 번째로 우리의 불안과 낙심을 잠재우시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불안과 낙심은 우리의 연약함을 파고듭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 가운데 불안과 낙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힘겨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도우셔서 불안과 낙심을 잠재워 주십니다.

    3. 나를 기억하신다
세 번째로 우리를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6절과 9절 말씀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시인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를 잊지 않으고 찾으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냐고 말할 때,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기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기를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삶은 낙심과 불안은 던져 버리고,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게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길 기도합니다.

〈설교 이해〉
오직 하나님을 소망하는 삶으로 초대하는 설교다. 누구나 삶의 소망이 있다. 삶의 푯대로 혹은 삶의 반석으로 의지하고 달려가는 대상이 있는데, 설교자는 많은 이가 세상에 소망을 둔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권면한다. 설교의 본론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열거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갈급함을 채우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불안과 낙심을 잠재우시며,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권면 설교지만 실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하는 설교다.

1.     우산 질문과 대지의 조화
설교 클리닉에서 자주 언급하는 내용인데, 우산 질문과 대지는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조율되는 것이 좋다. 이유를 물었다면 ‘~ 때문에’로 답하는 것이 좋고, 누구인지를 물었다면 ‘이런 분, 저런 분’으로 답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 대지 내용에는 “~ 때문입니다”를 사용하는데, 대지 제목에는 “갈급함을 채우신다”, “불안과 낙심을 잠재우신다”와 같이 하나님을 묘사하는 말로 기재돼 있다. 대지 제목 자체를 ‘~ 때문에’ 형식으로 바꾸면 설교에 임하는 자세도 더 선명해질 것이다.

이에 더해 각 대지에 주어인 ‘하나님’을 포함시키는 것이 보다 선명하겠다. 지엽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대지 설교에서 대지 문장은 메시지 전달의 승부처다. 다듬을 수 있는 최대한 선명하게 다듬어야 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는가?
대지1.    하나님이 우리의 갈급함을 채우시기 때문에
대지2.    하나님이 우리의 불안과 낙심을 잠재우시기 때문에
대지3.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기 때문에

2.     하나님의 능력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설교자가 하나님을 소개하는 흐름이 능력에서 사랑으로 이어짐에 주목하고 싶다. 대지1과 대지2가 하나님의 능력을 소개한다면, 대지3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한다. 우산 질문에서 설교자는 우리가 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둬야 하는지를 물었는데, 하나님이 그만큼 좋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좋은 분이신가? 대지1과 대지2는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시는 그분의 능력 때문이라고 선포하고, 대지3은 미천한 우리를 그분이 기억하시기 때문이라고 선포한다.

누군가의 소망이 되려면 능력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도 약한데 하나님이 우리와 비슷하게 약하신 분이거나 심지어 우리보다 더 약한 존재라면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거나 그분께 소망을 둘 수 없다. 서로에게 짐만 될 뿐이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보다 강하신 분이다. 우리의 갈급함을 채우시고, 우리의 불안과 낙심을 잠재울 능력의 소유자시다. 그래서 설교자는 하나님을 소망하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신 분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실 수 없다. 심지어 능력은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적대감을 품고 계신다면 그분은 소망이 아니라 더 큰 절망의 이유가 된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따뜻한 호의를 품고 계신다. 설교자는 ‘기억’이라는 단어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한다. 이렇게 설교자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설교의 흐름을 이어가는데, 이는 메시지 전개에서 매우 효과적인 구도로 보인다.

한 가지 아쉬움을 소개하면,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는 본문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설교자가 소개한 6절과 9절은 시인이 하나님을 기억하신다는 내용이지,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음을 원망하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설교자는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십니다”라고 선포한다. 이는 주석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는 분이고, 그것이 다른 본문에서 선포된다. 그렇다면 그 본문을 인용해서라도 성경적인 근거를 갖추는 것이 좋다.

3.     하나님은 갈급함을 채우시는 분인가 아니면 갈급함의 대상이신가?
설교 메시지는 철저히 본문에 기초해야 한다. 하나님을 좋은 분으로 소개한다고 무조건 좋은 설교는 아니다. 본문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설교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본문이 하나님을 안타까워하면 설교도 하나님을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이 설교의 길이다. 이를 위해 먼저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정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하나님은 갈급함을 채우시는 분인가 아니면 갈급함의 대상이신가? 본문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갈급함을 채우시는 분인가 아니면 시인의 갈급함의 대상이신 분인가?

물론 둘이 양자택일의 관계는 아니다. 갈급함의 대상이신 분을 만날 때, 나의 갈급함이 채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메시지의 초점이 미세하지만 다르다. 전자가 우리 삶의 이런저런 부족함을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메시지라면, 후자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갈급함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메시지다. 미세하지만 메시지의 초점이 다르다. 본문의 방향은 무엇일까?

필자의 판단으로는 후자다. 성령께서 시인의 갈급함을 통해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신다. 하여 본문을 제대로 담아 내려면 설교의 전체 기조를 하나님에 관한 탐구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권면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어지는 항목에서 소개하겠다.

4.     설교는 하나님을 선포할 수도 있지만 사람을 선포할 수도 있다
내용적 측면에서 설교의 갈래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을 선포하는 설교와 사람의 본분을 선포하는 설교다. 복음 설교와 윤리 설교, 혹은 고백 설교와 결단 설교라고 명명해도 좋다. 복음과 윤리를 대척점에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 둘은 이율배반의 관계가 아니고 한 동전의 양면이요,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열매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서신서 전반부에 주로 복음을 선포하고, 자연스레 후반부에 삶의 결단을 담아 냈다.

그런데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서는 그날의 초점을 한쪽으로 모으는 것이 좋다. 오늘 설교가 복음에 초점을 맞춘다면, 다음 설교는 삶의 결단에 무게중심을 두는 식이다. 전자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교의 중심에 세운다면, 후자는 은혜 입은 주의 자녀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분을 어떻게 예배하는 것이 합당한지를 설교의 골격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의 방향은 어느 쪽으로 잡을 것인가? 하나님을 선포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본분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원리적으로 본문의 지시에 순종해야 한다. 본문이 하나님을 선포하기 원하면 설교도 하나님을 선포하고, 본문이 사람의 본분을 선포한다면 설교도 그렇게 해야 한다. 같은 본문에서 양방향 설교가 모두 가능한 경우도 많다. 특히 내러티브 본문의 경우는 설교자가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선포할 수도 있고, 사람의 본분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다. 어디에 초점을 둘지 설교자가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기조 자체가 후자에 맞춰진 느낌이 강하다. 즉 사람의 본분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에 방점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필자로서는 오늘 설교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수정하기를 제언한다. 하나님을 선포하는 설교보다 주의 백성의 본분을 설교하는 기조로 수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했던 설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채경락, 《쉬운 설교》, p. 104)
대지1.    목마른 사람
대지2.    눈물의 사람
대지3.    몸부림의 사람

원래 설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탐구했지만, 필자의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선포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해 목마르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에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조할 때면 불안 증세를 보이듯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운 갈망을 가진 사람이 시편 42편의 시인이다. 묵상 중에 필자는 그 사람을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명명했고, 성도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자고 권면했다. 하나님을 선포할지 아니면 성도의 본분을 설교할지 분명하게 선택하는 것이 선명한 설교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설교B. 주님을 소망하라!

〈설교 구상〉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이야기한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은 무엇인지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이란 하나님을 갈망하는 삶이고, 어떤 상황에도 낙심하지 않는 삶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그분께서 우리를 도우심을 선포하려 한다.

서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은 무엇인가?
소망이란 의지와 바람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대상에 소망을 둡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어떤 사람은 권력에,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건강에 소망을 둡니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소망을 둡니다. 돈과 세상 권력은 변하지만,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과 평안은 영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소망하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1. 갈망하는 일이다
첫 번째, 주님을 소망하는 것은 그분을 갈망하는 일입니다. 1절을 보면 주님을 갈망함이 무엇인지 다윗은 설명합니다. 갈망은 히브리어로 ‘차메’인데 목마르다는 뜻입니다. 더운 여름날에 뙤약볕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무엇이 가장 생각날까요? 시원한 물 한 잔입니다. 생각나는 정도를 넘어 물 한 잔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갈망하는 일은, 주님을 얻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드리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갈망할 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로 채우실 것입니다.

    2. 낙심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11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은 그분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의 불안을 주님 안에 내려놓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 걱정거리들을 해결해 주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신자는 이 믿음으로 주님을 소망해야 합니다.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의 걱정거리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3.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소망한다는 것은 그분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는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11절 말미에 시인은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그분을 향한 감사함이 넘치고 자연스럽게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주님을 소망하라!
우리는 주님을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자신을 간절히 소망하는 자들에게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도움 되시는 주님을 소망하며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은혜를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이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을 정리하는 설교다. 설교의 골격은 주님을 소망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답함에 있다. 설교는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을 믿고 낙심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그분께 소망을 두는 것이라고 선포한다. 문법적으로는 무언가를 정의하는 평서문이지만, 의미상으로는 강한 촉구의 메시지다. 주의 백성으로서 주님을 갈망하고,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뜨겁게 권면하는 설교다.

1.     원리적으로 우산 질문은 각 대지 앞에서 반복돼야 한다
대지 설교, 특히 3대지 설교는 원리적으로 하나의 질문에 대한 세 개의 대답으로 구성된다. 설교자는 서론 말미 우산 질문의 자리에서 “주님을 소망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고 물었는데, 이것이 곧 이어지는 세 대지의 공통 질문이 된다. 첫째 대지에서 설교자는 “주님을 소망하는 것은”이라는 질문을 그대로 살려서 “그분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고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우산 질문이 사용된 첫 번째 걸음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둘째 대지에서 이 원칙이 흐트러진다.

둘째 대지의 첫 문장을 보면 “두 번째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우산 질문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이라는 새로운 질문이 들어온다. 우산 질문은 설교의 구심점으로서 설교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선명한 설교를 위해서는 우산 질문을 향한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첫째 대지가 우산 질문으로 시작됐듯이, 둘째 대지에서도 우산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답하는 방식이 좋다. 셋째 대지에서는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주님을 소망한다는 것은”을 묻고 “그분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고 답한다. 둘째 대지에서도 집중력을 유지하면 전체적으로 더 선명한 설교가 될 것이다.

2.     낙심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하라
둘째 대지가 “낙심하지 않는 것”을 선포하는데, 낙심의 대상이 무엇인지 혼동을 주는 느낌이 있다. 삶에서 찾아온 낙심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갈망하는데도 만나지 못함에서 오는 낙심인지 분명치 않다.

설교 중간에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 걱정거리들을 해결해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하고 선포하는 것을 보면 삶에서 찾아온 낙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삶의 현장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만나고, 거기서 우리가 때로 낙심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그 어려움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니 낙심하지 말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런데 본문의 흐름을 보면, 삶에서 찾아오는 낙심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함에 대한 낙심에 방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고 갈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3절에는 다른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고 놀리는 것에 마음이 상한다. 4절에는 과거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던 추억을 떠올리며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하는 낙심과 관련한 표현이 나오는데, 일반적인 삶의 낙심보다는 하나님의 부재에서 오는 낙심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맞아 보인다.

설교자의 판단이 다를 수도 있다. 혹은 필자가 잠시 언급했듯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닐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본문 근거와 함께 선명한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이다. 본문이 무엇을 선포하는지, 본문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해 성도들에게 혼동의 여지없이 선명하게 전해야 한다.

3.     효과적인 점층의 흐름
좋은 설교를 위해서는 좋은 재료와 함께 좋은 배열이 주효하다. 대지 설교의 경우, 본문 연구와 적용을 통해 좋은 우산 질문과 좋은 대지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같은 대지를 갖고도 배열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설교의 효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오늘 설교는 배열에 있어서 매우 효율적인 설교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에서 낙심하지 않는 것으로,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마음이 점차 강화되는 흐름을 보인다. 갈망이 열심을 가리킨다면, 낙심하지 않는 것은 부정적인 장애물을 이겨 냄을 의미한다. 마지막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느낌이다. 뒤로 갈수록 메시지의 힘이 강화된다.

낙심을 이기는 것이 소극적인 갈망이라면, 찬양은 적극적인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표시다. 하나님을 향한 초점을 잃지 않으면서 그분을 향한 갈망의 강도를 점차 상승시킴으로써 전체적으로 선명하고도 효과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다.

어떤 순서로 대지를 배열할 것인가? 본문의 순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설교자들이 많겠지만, 대부분의 설교학 교과서는 본문의 흐름보다 생각의 순서를 따르라고 조언한다. 물론 많은 경우 본문의 흐름 자체가 생각의 흐름에 따라 배열했기에, 본문의 흐름을 존중하다 보면 자연스레 생각의 흐름에 따라 메시지가 배열된다.

그렇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땐 생각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설교의 일반 원칙이다. 생각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보다 선명한 설교, 그래서 더 파워 있는 메시지를 구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본문을 향한 신실함은 기계적인 답습이 아니라, 본문의 메시지를 신실하고도 파워 있게 전하는 데 있다.

4.    서론의 내용을 첫째 대지에 배치하는 것도 가능하다
설교 준비의 첫 단계는 본문 연구를 통해 메시지의 주제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주제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대체로 확보된 주제를 서론에 풀어 놓는 경우가 많은데, 첫째 대지에 위치시킬 수도 있다. 오히려 그것이 효과적인 설교를 구성하기도 한다. 비교를 위해 먼저 현재 설교의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제 ­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대지1.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다
대지2.    낙심하지 않는 것이다
대지3.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혹은 더 상세히 풀면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설교자는 이 주제를 서론에 풀어 놓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고 대지를 통해 답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전개해 나간다. 그런데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혹은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다”를 첫째 대지에 배치하는 방식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럴 경우 질문은 보다 포괄적인 모습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사람인가?
대지1.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
대지2.    낙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
대지3.    어려움 중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

원래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서론에서 완료했지만, 필자의 설교에서 서론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다짐만을 다룬다. 이어서 우산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사람인지를 묻고, 대지를 통해 답하는 흐름이다.

세밀하게 살피면, 대지1이 하나님 백성이 소망을 두는 ‘대상’에 관한 메시지라면, 대지2와 대지3은 그 대상을 향한 ‘소망의 강도’를 터치한다. 다시 말해, 대지1은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데 눈길을 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메시지고, 대지2는 그 눈길의 뜨거움을 터치한다. 원래 설교가 ‘소망의 강도’에 세 개의 대지 전부를 할애했는데, 자칫 피로도를 일으킬 수 있다.

필자가 수정한 설교는 소망의 대상에 대지 하나를 할애하고, 이어지는 두 개의 대지에서 소망의 강도를 다룬다. 단일 질문을 유지하면서도 더 풍성한 이슈를 다루기 때문에 메시지가 진전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듣기에 더욱 용이하다고 자평한다. 

채경락 샘물교회 담임목사. 미국 남침례신학교 (Ph.D.). 저서로 《쉬운 설교》, 《설교자들이 알아야 할 절기와 상황 설교》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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