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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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22년  08월호 반성직주의를 넘어선 대안 공동체: 헤르트 흐로테와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 역사, 목회자에게 묻다(8)

초대교회가 지향했던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가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핵심이라지만, 중세 천년의 그리스도교 전통을 간단하게 지워 낼 수는 없다. 한 탁월한 개인의 극적인 출현에서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찾고 싶지만, 그 영웅의 사상과 철학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직조된 결과다. 루터의 경우를 보더라도 누구보다 치열하고 진지하게 가톨릭 체계 속에서 완전함을 추구하다가 그 한계를 경험하고 새로운 체제를 열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적 연원을 위클리프나 후스 등과 같은 중세 말 반성직주의의 흐름 속에서 찾곤 하지만, 루터의 교회 개혁 추구는 루터 자신의 공동체 경험을 통해 추적할 수도 있다. 그 터전은 수도회다.

중세 유럽에서 교회 개혁은 곧 수도회 개혁이었다. 제도 교회가 부딪친 한계 앞에서 새로운 수도 공동체가 출현해 제도 교회를 견인했다. 이 연장선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분리된 종교개혁은, 체제 내에서 새로운 종교성을 견인할 수도회 출현 부재의 결과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수도회의 영향이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중세 스콜라학에 대한 저항인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종교적으로 ‘새로운 경건’이나 ‘근대적 경건’으로 옮기는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n moderna) 운동과 연결된다.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은 16세기 종교개혁자까지 연결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다.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흔치 않은 공통 유산으로 간주된다.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는 대중의 경건성을 재발견하고, 일상 노동의 가치를 제고해 이원론을 극복한 것이 이 운동의 직접적 유산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운동을 가톨릭 체제 내의 운동으로 읽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연결시키기도 한다.1

한국 교회 개혁의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이 시점에서 되돌아볼 가치는 전통과의 단절이나 분리가 아닌 연속성, 통합, 지속가능성이다.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나 보헤미아의 얀 후스와 같은 중세 말 개혁가들과 그 추종자들인 롤라드파와 후스파가 형성한 공동체는 15세기 초 콘스탄츠공의회(1414-1418)에서 이단으로 단죄됐다. 반면 같은 시기 개혁 이상을 추구하며 공동체를 이룬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과 그 핵심 주창자 헤르트 호르테(Geert Grote, 1340-1384)는 체제 내에서 교회 개혁의 동력을 제공해 종교개혁기까지 이어졌다. 잊혀지지는 않았으나, 충분한 가치 평가가 이뤘졌다고 하기도 어려운 이 공동체를 읽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헤르트 호르테와 데보티오 모데르나

데보티오 모데르나는 1370년대에 헤르트 흐로테가 시작해 네덜란드 저지대와 독일 지역에서 번창했던 종교 운동이다. ‘새로운 경건’이라 할 때, 무엇이 새로우며 그와 대비되는 ‘옛 경건’은 무엇인가? 중세인들에게 구원은 매우 실제적인 문제였고, 내세에 대한 신앙은 종교의 핵심 요소였다. 가톨릭 교회는 구원과 내세에 대한 교리를 엄격하게 통제해 성사를 제정하고,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성화와 성상은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십자가와 부활 등을 설명하기 위해 활용됐다.

하지만 14세기 중반에 출몰해 서유럽의 모든 기초를 뒤흔든 흑사병은 가톨릭 교회가 제기하는 종교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구원에 대한 불안감과 내세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는 중재자로서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 대한 의존을 높였다. 성물 숭배, 면벌부 판매 등은 중세 말 혼탁한 종교성의 상징이다.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정한 신앙 방식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믿었다. 교회는 종교생활을 지나치게 간섭했고, 개인 내면의 종교성을 심화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주의 가르침은 옛 방식(via antiqua)으로 불렸다.

이와 반대되는 새로운 방식(via moderna)은 그리스도를 따라 겸손한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데 초점을 뒀다.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의 창시자인 헤르트 흐로테는 네덜란드 데벤테르(Deventer)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파리, 쾰른, 프라하 등지에서 의학, 신학, 교회법, 천문학 등을 공부했다. 자신의 경력 정점에 선 1372년, 신비로운 내면의 변화를 경험하고 과거와 결별하고 금욕적인 삶을 받아들였다. 회심 후, 수도사나 사제의 길을 걷는 대신, 서유럽을 순회하는 설교자로서 대중과 성직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삶의 자취를 따라 사랑, 헌신, 단순한 삶을 살 것을 촉구했다.

헤르트 흐로테는 세속적 직책과 성직자로 진출할 기회를 버리고, 자신의 집을 가난한 여성 종교 공동체에 내어 줬다. 이 여성들은 흐로테가 정한 공동체의 규칙에 따르기로 동의하면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들은 공동생활 자매단(Sisters of the Common Life)으로 알려졌다. 1381년에는 동일한 가치를 따르는 남성 종교 단체인 공동생활 형제단(Brethren of the common life)이 설립됐고, 빈데스하임에 공동체를 형성해 삶과 재산을 공유했다.

특히, 신생 빈데스하임 공동체는 1410년경부터 지역 주교들과 성직자들이 추구하던 수도회 개혁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의 추종자들은 일반 신자들이 미신적인 종교 상태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인 신앙을 갖도록 돕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신앙 서적과 기도서 등을 저술하고 보급했다. 때로 반종교적이거나 체제 저항적으로 평가되지만, 오히려 이 운동은 일반 신자들이 수도사 같은 삶을 추구하는 종교 공동체를 제공하려는 운동이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은 성직자 서품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동등한 형제자매였다. 그들은 제도교회나 사제의 중재가 아닌, 자신의 주체적인 종교 생활을 통해서 정결한 삶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삶을 성취했다. 이 운동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에 대한 특별한 비전을 갖고 새로운 제도 구조 속에서 헌신을 추구한 일반 신자들이었다.2 경건한 삶을 성취하고, 그 삶의 유지에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고, 동일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공동체를 설립했다.3

빈데스하임 공동체는 몇 가지 점에서 당시 수도회와 차별성을 지녔다. 우선, 수도 서약을 하지 않고 공동생활을 추구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였다. 헤르트 흐로테는 수도 서약이 전적으로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최초의 형제단은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로만 구성됐기 때문에 이 운동은 ‘속인 운동’(lay movement)으로 불린다. 수도 서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도사와의 삶과 대중의 삶 사이의 우월을 구분하던 당대의 종교적 관념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부유한 당시 수도회들과 달리 노동을 통한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추구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단순하고 겸손한 삶의 태도와 내면적 성찰을 핵심 가치로 삼았다.4

공동체에서는 단순하지만 규칙적인, 자유롭지만 질서가 있는 종교 생활을 영위했다.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의 강조가 영성의 핵심이었다.5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나누고 때로 필사하며 공동체 내의 남성들은 밭일을, 여성들은 바느질 등의 육체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 생계를 꾸렸다.6 흐로테는 노동을 하면 타인에 대한 의존에서 자유로워지며, 노동 자체는 사람을 더욱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에 주어진 모든 일을 열정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노동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청빈 정신을 몸에 익힐 수 있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노동의 가치를 알 때 그리스도인은 불평등한 사회, 경제적 구조와 맞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이 수도사의 삶 못지않게 신성함을 강조하니, 일의 가치가 재고됐다. 수도 서약을 하지 않았으니 공동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도시 사회의 상업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사회, 경제 활동은 네덜란드를 포함한 저지대 지방의 초기 자본주의 발전 사이의 연결고리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8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의 참여자들은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삶을 실천했다. 그들은 종교적 덕성을 계발하는 데 지성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 공동체에서는 성경과 교부들의 저작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활동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흐로테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동시대에 잉글랜드에서는 위클리프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고, 뒤이어 모국어로 된 다양한 종교 저작이 출현했다. 당시 네덜란드나 독일에서 모국어 성경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데보티오 모데르나 공동체에서 책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성직자 계층이 아닌 사람이 성경을 읽고 토론한다는 것은 가톨릭 교회에서는 위험스러운 행동이었다. 모국어 서적은 일반 신자들이 전통적인 가르침을 순응하는 데서 벗어나 스스로 종교적 자각과 해방을 실천하는 도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흐로테의 공동체에서 생성되고 확산된 저작은 전통적인 반성직주의 저술로 읽히지 않는다. 저작들의 주요 독자는 공동체 밖의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이었다. 흐로테의 관심이 종교적 삶을 갈망하는 이들을 지도하는 것이었기에 공동체 외부로 널리 유통됐다.
이 공동체가 배출한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10대 시절 데벤테르에서 공동생활 형제단을 접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과 겸손을 실천하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명상하는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던 그에게 이 공동체는 큰 매력이 있었다. 그는 1420년대에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신앙 서적을 출간했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할 당시 서유럽 가톨릭 교회는 끝을 모르게 추락하고 있었다. 1378-1417년 유럽은 2인, 때로는 3인의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누는 교회대분열의 시기였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 분열을 끝냈지만 존 위클리프에 대한 사후 파문과 얀 후스의 화형이라는 극단의 결정을 내렸다. 대중 사이에 교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 환멸에 가까운 반성직주의는 노골화됐다. 교회의 지적 토대이던 대학의 스콜라학은 더 이상 교회가 마주한 숙제를 풀어낼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보헤미아의 후스파를 제압하기 위해 십자군이 결성됐다.

이 혼란의 시기에 토마스는 교회가 처한 문제와 한계의 극복은 각자가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근원적인 돌이킴에 있음을 일깨웠다. 교회가 부과하는 외적인 경건 행위가 아닌, 내면의 삶을 되돌아보는 자아 성찰을 참된 종교성 회복의 출발로 여겼다. 참된 신앙이 성례전 등의 외적 지표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와의 내면적인 만남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정신적인 혁명이었다. 이 책은 독일과 네덜란드를 넘어 프랑스와 이탈리아, 잉글랜드 등지까지 확산되면서 성직자, 수도자 및 일반 대중이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성을 재구성하는 데 기여했다.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은 15세기 중반 서유럽에 도입된 인쇄술과 더불어 크게 확장됐다. 수많은 수도원과 수녀원 및 신생 공동체들이 탄생했고, 라틴어와 모국어로 된 서적 생산이 급증했다. 데보르나 모데르나 운동의 공동체는 공동체에서 생산해 내는 저작들을 통해 영향력을 확보하고, 더 큰 커뮤니티에 봉사했다.

이 운동이 추구한 공동체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회심 공동체였다. 중세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하는 성인들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열광이 그리스도라는 본질을 흐리기도 했다. 흐로테는 그리스도 자체에 대한 집중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임을 자각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경건성을 재구성했다.9 특히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흐로테가 지향하는 핵심 가치였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종의 모습으로 낮아진 자기 비움과 세상에 대한 헌신의 상징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이런 가치를 자신이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삶에서 회심하는 전환이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믿음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바꿔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함께한다는 진정한 지표다. 그러기에 이 회심은 공동체가 서로 북돋우며 계속 진행해야 하는 과정이다. 이 공동체에서는 서로에 대한 돌봄이 있어야 하며, 따를 만한 좋은 모범이 나와야 한다.

제도 교회 내에서, 제도 제도를 넘어서

중세 말 성직주의에 대항하는 일련의 대안 흐름은, 반성직주의가 한 극단으로 간 이단의 흐름과 체제 내의 개혁 운동으로 나뉜다. 데보티오 모데르나는 도덕적인 경건함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교회가 제도화한 구원의 보조물인 의식, 성례, 면벌부의 효과를 재고했다. 이 운동은 교회가 구원의 여정을 돕기 위해 정한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일상의 삶과 기도를 통해 명상하며 그 자취를 따라가는 내면의 경건에 초점을 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내적이고 개인적인 종교성 속에서 형성된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이 중심이 되고 그의 삶을 따라가는 지속적인 회심을 강조하는 특성은 훗날 루터와 프로테스탄티즘이 공유한 핵심 가치다.
흐로테의 공동체는 수도 서약을 불필요하다고 여기고 정식 수도회에 가입하지 않았기에 교회 당국과 기존의 수도 공동체와 긴장을 이어갔다. 그는 독신 의무를 어긴 사제가 사목 활동을 하는 것에 반대하고, 파문을 주장했다. 이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신부의 성사를 거절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은총 가운데 있지 않은 사제의 성례전은 효력이 없다는 주장은, 사제의 윤리 도덕성과 무관하게 성례 자체의 효력 때문에 유효하다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주장은 교회 권위에 대한 불신과 불복종, 더 나아가 저항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었다.

위트레흐트의 주교는 교회의 공식 교리에 어긋나는 흐로테의 설교를 선동적이라고 판단하고, 설교 금지령을 내렸다. 결국 흐로테는 주변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제도화의 길을 수용했다. 1384년 헤르트 흐로테가 죽은 후 빈데스하임 공동체는 아우구스티누스회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에 편입됐다. 아우구스티누스회는 13세기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정한 수도 규칙과 수도 생활의 이상을 도시 속에서 추구하던 탁발수도회 운동의 하나로 출발해, 1243년 교황 이노센트 4세으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은 수도회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탁발수도회들은 공동생활 형제(자매)단이 자신들이 고수하는 가치를 위협한다고 여겼다. 수도 서약을 하지 않은 일반 신자의 신분으로 참여하고 있기에 수도회라고 할 수 없으며, 탁발수도회로 편입된 공동체조차도 탁발(구걸) 대신 육체 노동으로 생활하는 것이 수도회 정신과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과 공동생활 형제(자매)단은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에 공식 조사 대상이 되는 상황으로 몰렸다. 자칫 1415년 위클리프와 후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겪은 것과 같은 운명에 처할 뻔했다. 다행히 이 공의회 시작 전에 공동생활 형제(자매)단의 생활 모델이 프랑스 추기경이자 공의회의 실권자 피에르 다이에 의해 공식 승인됐다.

흐로테의 공동체 운동은 15세기 종교 운동 중 가장 급진적인 성격을 띤 운동 중의 하나였다.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미사에 참여하는 외적인 행위보다 개인적으로 내밀하게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강조하는 흐름이 중세 말 개혁가들과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롤라드파나 후스파의 길을 걷지 않고, 체재 내에서 존속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에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교육을 받았다.10 르네상스기의 대표적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1475-1484년 데벤테르의 라틴 학교에서 수학했다. 데보티오 모데르나를 중세 말 종교 쇄신 운동, 일반 신자들의 종교 운동, 종교개혁의 선구적 운동, 개인의 주체성과 삶을 강조하는 휴머니즘 운동 등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이 데보티오 모데르나의 부산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가며: ­ 반성직주의를 넘어서

16세기 초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삼켜졌다. 프로테스탄트 국가에 수도회 해산이 이뤄지면서 종교개혁기에 이 운동은 급격히 쇠퇴했다. 대부분의 개혁 운동이 남유럽, 알프스 이남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이 운동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알프스 이북 지역인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발생했다.

일상적인 삶의 가치와 노동의 가치를 강조한 점은 루터와 칼뱅 소명론의 배경이 됐다. 성례와 같은 외적 지표가 아닌, 신자들의 내적 경건과 신앙의 개인성에 주목했다는 점은 만인사제론 형성의 근거가 된다. 이 공동생활 형제(자매)단은 종교개혁의 가교였다. 마리아와 성인들에게서 오직 그리스도로, 수동적으로 참여하고 보는 제도 종교에서 주체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개인 종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동시대에 번영한 이 운동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단절된 것이 아니라, 더 큰 바다에 합류한 것이다.

성직주의가 노정하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해서, 반성직주의가 모든 문제의 해답일 수는 없다. 오히려 느리지만 체제 내 개혁이 한국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재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분석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대안에 대한 열린 태도가 필요하다. 어려운 목회 현실로 인해 많이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중세의 성직주의 못지않게 목회자 중심주의는 극복해야 할 첫 관문이다. 다름에 대한 개방성과 전통에 대한 존중이 모두 필요하다. 또한 21세기의 시점에 용기 있게 스스로를 경계에 서게 할 새로운 경건 운동에 대한 요청은 긴박하다. 시대에 대한 통찰과 대안 공동체를 제시하는 것이 그 필요조건이다. 


1) Francis J. Samoylo, “The 15th Century Devotio Moderna and the Call to Holiness of Vatican Council II,” The Dunwoodie Review 24 (2001), pp. 177-184.
2) John Van Engen, trans., Devotio Moderna, Basic Writings, New York: Paulist Press, 1988, p. 10.
3) 앞의 책, p. 10.
4) 앞의 책, p. 15.
5) 앞의 책, p. 15.
6) 앞의 책, p. 14.
7) 앞의 책, p. 158.
8) R Jay, Magill Jr. “Turn Away the World: How a Curious Fifteenth-Century Spiritual Guidebook Shaped the Contours of the Reformation and Taught Readers to Turn Inward,” Christianity and Literature 67, no. 1 (2017), p. 37.
9) Van Engen, Devotio Moderna, p. 25.
10) Magill, “Turn Away the World,” p. 38.



 

최종원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 버밍엄대학교(Ph.D.). 저서로 《중세 교회사 다시 읽기》, 《공의회 역사를 걷다》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