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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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2022년  01월호 누가복음 17:11-19,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바르고 힘센 설교를 꿈꾸는 채경락 목사의 설교 클리닉(1)

설교는 경청의 대상이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설교 클리닉은 애초에 필요악인지도 모른다. 설교는 선포된 주의 말씀이기에, 말씀 앞에 합당한 자세는 열린 마음의 경청이지 결코 평가가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신학교에서 설교 실습을 담당했을 때 절대 다리를 꼬지 않았다. 무의식 중이라면 몰라도 의식적으로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고, 학생들에게도 엄하게 당부했다. 실습으로 선포되는 설교도 주의 말씀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교수로서 평가를 하고 소위 클리닉을 하고 있으니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을 품기도 했다. 

그럼에도 설교 클리닉의 의의를 찾는다면, 설교 역시 ‘인간이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주의 말씀이지만 인간이 그릇으로 사용된다. 이 대목에서 일정 부분에 대한 평가와 교정이 끼어들 틈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를 세우시고, 설교하시고, 설교를 활용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클리닉이 터치하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많이 부족한 설교라고 할지라도 설교의 주체이신 성령께서 얼마든지 귀하게 사용하실 수 있다. 사람이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장선에서, 설교 클리닉의 주도권은 조언자가 아니라 설교자에게 있다. 클리닉은 설교자로서 주께서 주신 소임을 신실하게 감당하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동역자의 조언일 뿐이다. 설교 준비를 위해 설교자는 다양한 자료들을 참고하는데, 설교 클리닉도 그 자료 가운데 하나다. 

설교는 결국 주님 앞에서 책임져야 할 설교자의 소임이다. 클리닉을 대하는 설교자의 마음이 결코 수동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받을 것은 받고 무시할 것은 무시할 줄 아는 담대한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 이래저래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설교 클리닉을 향한 첫발을 뗀다. 
 

클리닉 원칙 ­ 주제와 대지를 중심으로

평가를 하고 조언을 하려면 원칙이 필요하다. 본 클리닉은 필자가 쓴 《퇴고 설교학》과 《쉬운 설교》에 기초한다. ‘퇴고’라는 단어에 이미 클리닉에 대한 꿈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설교 준비는 담대한 작성과 함께 거듭된 퇴고로 이뤄진다. 단번에 좋은 설교를 완성할 수 있는 은사를 가진 설교자는 흔치 않다. 고치고 또 고쳐야 하는데, 필자는 네 가지 퇴고의 기준을 제시했다. 본문에 기초한 선명한 주제, 전략적인 구조와 대지, 충성된 예화와 이미지, 잘 들리는 말이다. 

주제, 대지, 예화, 말의 네 영역에 퇴고의 땀을 쏟아야 한다는 의미다. 본 클리닉에서는 주제와 대지를 중심으로 클리닉을 진행하려고 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는 지면의 한계로 설교 전문이 아닌 일부 요약문을 대상으로 하기에 예화와 말 표현에 대해서는 충분히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대지 퇴고만 제대로 돼도 설교의 완성도가 상당 부분 개선된다. 
또한 본 클리닉은 삼대지 설교를 대상으로 한다. 클리닉 지원자에게 삼대지 설교로 작성해줄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한국 설교단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설교 형식이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설교 형식이 많이 소개됐지만 절대 다수의 설교자는 지금도 삼대지 설교를 기본으로 하고, 필자도 그러하다. 두 번째는 삼대지 설교에 대한 작성과 퇴고 훈련이 충분히 이뤄지면 다른 형식의 설교에도 유사하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지의 작성과 퇴고의 원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대지는 본문에 기초한 완결된 메시지여야 한다. 대지는 작은 주제다. 완결된 메시지 셋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 삼대지 설교의 이상이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는 각 대지가 본문에 기초한 완결된 메시지를 구성해야 하고, 두 번째는 대지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합돼야 한다. 대지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이뤄야 한다는 의미다. 

대지의 협력에 관해 일반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는 통일성(unity), 효과적인 배열(order), 진전(progress)을 강조하는데, 설교에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원리다. 좋은 연설 혹은 우리의 관심인 좋은 설교를 위해서는 대지들이 하나의 주제를 향해 통일성을 이뤄야 하고, 또한 순서가 효과적이어야 한다. 같은 대지여도 배열하는 순서에 따라 설교의 효력이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각 대지는 다른 대지와 구별되는 고유한 메시지가 있어서, 한 대지에서 다음 대지로 넘어갈 때 진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중심으로 클리닉이 진행될 것이다. 

원칙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클리닉을 시작하려 한다. 이 연재를 위해 2021년 7월부터 12월까지 설교 클리닉을 진행했다. 참여한 목회자 가운데 두 분이 기쁨으로 설교문을 제공해 주셨다. 이 자리를 통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분량이나 표현에서 필자가 조금 수정할 수 있지만, 가능한 제출된 설교문 그대로를 소개하겠다. 이번 호, 누가복음을 시작으로 창세기, 로마서, 골로새서, 에스겔, 시편 등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본문을 다루도록 하겠다. 

누가복음 17:11-19은 나병환자 열 명이 깨끗함을 받고 그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사건이다. 


설교A.감사의 신앙고백

 

서론: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도 감사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보통 감사할 이유가 있으면 감사합니다. 그런데 감사할 이유가 없을 때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것을 권면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아픔과 염려, 근심과 고난 등 어떤 상황에도 감사하라는 뜻인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누가복음을 통해서 감사의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1.     불쌍히 여겨 달라는 외침에 반응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이었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먼 곳에서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13절에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절박한 외침입니다. 나병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나병이 찾아온 후 그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가까이 다가가면 어린아이들부터 돌을 던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절박한 외침에 예수님이 반응하셨습니다. 자신의 몸 하나 깨끗하길 바라는 그들의 외침에 예수님은 그들의 완전한 회복까지 생각하셨습니다. 나병은 단순히 몸의 회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여 회복됐다는 확정을 받아야 육신의 회복뿐만 아니라 삶의 회복까지 이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절박한 외침에 반응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회복보다 더 큰 회복을 이미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2.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치유자, 예수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회복을 알게 됩니다. 14절은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때 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돌이켜 예수님께로 돌아와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는 비록 유대인을 싫어하는 사마리아인이었지만, 유대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나병을 치유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치유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감사를 고백하기 위해 돌아온 사마리아인을 두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것이라고 평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연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고, 예수님이 하나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예수님도 스스로 인식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낫게 하는 선지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오신 완전한 치유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감사를 고백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개입해 나타내시는 모든 일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우리의 완전한 치유자이십니다. 그래서 사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치유자가 되시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3.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신앙고백이다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비천하고 비루한 자신의 외침을 들으시고 몸과 인생의 완전한 치유를 해 주셨다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마리아인의 감사를 예수님께서는 19절에서 믿음이라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감사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란 분명한 확신이 구원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는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감사는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몸과 삶에 완전한 치유와 회복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론: 감사의 신앙고백을 하라
우리에겐 어떤 상황, 어떤 마음에도 감사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감사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지 않으셔도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우리를 완전히 치유하고 회복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근심과 고난이 있어도 예수님을 향한 감사를 고백함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이 멈추지 않길 바랍니다. 아멘.

감사할 이유가 없을 때도 감사를 권면하는 설교다. 사람의 일반적인 정서는 감사할 일이 있으면 감사하고 어려움이나 억울한 일이 있으면 속상해한다. 그렇지만 성도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상황을 초월해 감사할 이유를 소개하는데, 먼저는 예수님이 우리의 절박한 외침을 외면하지 않고 반응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그분은 우리의 치유자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감사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신앙 고백이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1.     우산 질문과 대지가 보다 정밀하게 조율되기를
대지 설교의 대지는 설교의 중심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된다. 필자는 설교의 중심 질문을 ‘우산 질문’(우산Q)이라고 부르는데, 비오는 날 우산 아래 사람들이 모이듯이, 한 우산 아래 모든 대지들이 모여야 한다는 의미다. 
우산 질문은 설교가 견지해야 할 통일성의 구심점이 된다. 이를 위해 우산 질문과 대지들은 질문과 대답이라는 선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설교A를 질문과 대답만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감사할 수 있는가?
대지1    불쌍히 여겨 달라는 외침에 반응하시는 예수님
대지2.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치유자, 예수님
대지3.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신앙고백이다

보다시피 질문과 대답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감사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Yes 혹은 No의 단답형 대답이 떠오른다. 설교를 위한 질문은 열린 질문이어야 한다. 우산 질문도 조금 더 선명하게 바꾸고 그에 따라 대지 문장도 다듬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성도인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로 질문을 바꾸거나 “성도로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로 바꿀 수 있는데, 필자의 판단으로는 후자가 보다 선명하다. 여기에 맞춰 대지를 수정하면 다음과 같다. 

    성도로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지1.    주님은 우리의 외침에 반응하시기 때문에
대지2.    주님은 우리를 위한 온전한 치유자이기 때문에
대지3.    주님을 향한 감사는 그 자체로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대지1,2와 대지3의 방향은 다소 차이가 있다. 대지1,2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소개한다면, 대지3은 감사가 갖는 의의에 대한 내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위에 제시한 것처럼 표현을 기술적으로 다듬으면 한글이 갖는 풍성함을 통해 상당 부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2.     주제가 본문에 기초하고 있는지 엄밀하게 점검하기를
위 설교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기를 선포한다. 서론에서 “감사할 이유가 없을 때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설교의 초점이 상황을 초월한 감사에 맞춘다. 

그런데 이것이 본문에 기초하는지에 대해서는 엄밀한 점검이 필요하다. 본문의 나병환자들에게는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설교에서도 선포되지만 주님이 나병환자의 외침에 반응해 주셨고, 그들의 질병을 치유해 주셨다. 그러니 당연히 감사하는 것이 맞다. 상황을 초월해 감사하라는 메시지보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상황이면 적어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감사하라는 메시지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외침은 당연히 감사할 상황에서 감사하지 않는 아홉을 향한 안타까움이다. 대지 내용은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설교를 이끄는 우산 질문은 본문에 맞춰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성도로서 주님께 늘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지1.     주님은 우리의 외침에 반응하시기 때문에
대지2.     주님은 우리를 위한 온전한 치유자이기 때문에
대지3.     주님을 향한 감사는 그 자체로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성도들 중에는 투병 생활 중인 분들도 있다. 본문의 나병환자들처럼 치유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나는 감사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나병보다 더한 죄와 사망의 질병에서 우리를 건지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자는 선포로 설교를 이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설교B.은혜를 아는 성도가 됩시다

서론: 믿음의 성도는 어떤 성도일까?
주님 앞에 열 명의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이들은 어떤 병도 고치시는 능력의 주님을 알았고, 그분 앞에 간구했습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참된 성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주님께 구원받는 성도, 믿음의 성도는 과연 어떤 성도일까요? 
 
1.     불쌍히 여김을 받는 성도 
나병환자들이 주님을 향해 소리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그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무리를 보시며,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는 이들을 보고 품으신 그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순종했고 길을 가다가 고침을 받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이들을 즉각 고치지 않으시고,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을까요? 나병환자들은 부정하다는 이유로 제사와 공동체에서 격리됐습니다. 마을 외곽에서 맴도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주님이 보셨습니다. 이렇게 소외된 이들을 거룩한 제사를 섬기는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마을 외곽에서 중심부로 가라 하십니다. 육신도 고침받고, 영혼도 고침받고, 사회적으로도 회복되라는 뜻입니다. 
레위기에 의하면, 피부병 환자가 제사장을 만나는 경우는, 병이 완전히 나았음을 확인받을 때입니다. 아직 깨끗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은 깨끗하게 회복된 사람처럼 당당하게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그 당당함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고침을 받습니다. 이렇게 죄에서 고침을 받는 죄인이 바로 성도입니다. 
 
2.     은혜를 아는 자가 신자다 
이어서 특별한 장면이 나옵니다. 열 사람이 다 고침을 받았는데, 그중 단 한 사람만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대로 떠나가고 부정하다고 배척받던 이방인만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괘씸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아홉 인간 같으니라고. 그런데 왜 그들은 자기 길을 갔을까요? 보통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연인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본시 자기 이익에 따라 삽니다. 편하고 좋은 대로 자기 길을 갑니다. 급할 땐 주님께 와서 고쳐 달라고 매달리고, 급한 일이 끝나면 자기 길을 갑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한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 너만 믿음이 있구나. 네 안에 믿음이 있고, 너야말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이로구나. 유대인 병자들은 자기가 선민이어서 좋은 일이 생겼다고 교만을 부렸을 것입니다. 주님은 영적 자부심이 아니라 감사의 유무로 진실한 믿음을 판정하십니다. 참으로 믿음 있는 자들은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이 바로 신자입니다. 
 
3.     감사하는 성도
사람들은 자기가 잘 나고 똑똑해서 사는 줄 압니다. 착각입니다. 부모도 모르고, 스승도 모릅니다. 어려서 받은 사랑과 은덕을 다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거듭난 신자는 회귀 본능이 있습니다.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높은 파도와 돌, 천적의 위협과 난관을 거슬러서 연어가 돌아오듯이, 성도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내가 받은 구원과 생명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가능함을 알고 그 은혜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감사를 압니다. 찬송하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감사하지 않고는 못 삽니다. 
 
결론 : 은혜를 아는 성도가 됩시다. 
예배할 수 있는 은혜, 감격할 수 있는 은혜, 회개할 수 있고, 말씀 들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성도다움을 묻고 답하는 설교인데, 메시지의 중심에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다. 나병환자들을 통해 참된 성도의 모습, 혹은 그렇지 못한 모습을 발견한다. 우산 질문으로 주님께 구원받은 성도, 믿음의 성도는 과연 어떤 성도일지를 묻고 대지를 통해 대답하는 흐름이다. 

먼저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성도라고 답한다. 불쌍히 여김과 함께 주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사람이 성도다. 또한 은혜를 아는 사람이 참된 성도라고 선포하고, 마지막으로 그러니 감사하는 성도가 되자고 권면한다. 
 
1.     우산 질문의 방향을 더 선명하게 결정하기를
선명한 설교를 위해서는 우산 질문이 선명해야 한다. 우산 질문이 설교의 방향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제시한 우산 질문은 다음과 같다: “믿음의 성도는 어떤 성도일까?” 

좋은 성도를 믿음의 성도라고 칭하고는 좋은 성도가 되자는 선포로 보이는데, 설교가 달려가는 지향점이 다소 모호하다. 성도와 믿음 사이에 택일이 필요해 보인다. ‘참된 성도는 어떤 성도일까?’ 혹은 믿음에 집중한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그런데 “믿음의 성도”라는 표현은 첫째 대지와의 만남에서 보다 모호해진다. 불쌍히 여김을 받는 성도를 믿음의 성도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둘째, 셋째 대지는 비교적 성숙한 성도를 가리키는데 반해, 첫째 대지는 모든 성도에게 해당한다. 하나의 우산 아래 모이기엔 다소 이질적인 대지들이라는 말이다. 모든 대지를 아우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의 우산질문이 필요해 보인다. 성도보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면 다음과 같은 전개가 가능하다.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대지1.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
대지2.     우리에게 치유의 은혜를 주시는 분
대지3.     그래서 우리의 감사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 

내용적인 측면에서 설교는 크게 두 흐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선포하는 설교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권면하는 설교다. 오늘 소개한 설교A와 설교B는 공히 후자에 해당하지만, 전자의 흐름도 매우 요긴하다. 그런데 대지의 표현을 잘 다듬으면 두 흐름을 하나의 질문 아래 모을 수도 있다. 

대지3은 표면적으로는 주님에 대한 내용이지만, 선포하는 메시지는 우리를 향한 권면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치유의 은혜를 주신 주님을 향해 감사하자는 권면이다. 
 
2.      각 대지는 고유의 메시지를 품어야 한다
두 번째 대지와 세 번째 대지가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느낌이다. “은혜를 아는 자”와 “감사하는 성도”는 표현은 다르지만 사실상 같은 의미다. 앞서 소개했듯이, 일반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도 메시지 전개에 있어서 진전(progress)을 중시한다. 대지가 넘어갔음에도 유사한 메시지가 선포되면 설교가 맴도는 답답한 느낌이 든다. 

두 번째 대지에는 감사의 마음을 할애하고 세 번째 대지는 감사의 표현에 집중한다면, 진전의 원리를 준수하면서도 보다 선명한 메시지를 확보할 수 있다. 이를 기초로 담백하게 성도의 길을 선포하는 설교가 가능하다. 

    성도는 누구인가? 
대지1    주님의 긍휼 안에 거하는 사람
대지2.     주님을 향한 감사로 사는 사람
대지3.     표현할 줄 아는 사람

대지2의 감사와 대지3의 표현이 과연 따로 대지를 구성할 만큼 구별되는 사안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다. 국어사전에서 둘은 종이 한 장 차이의 미세한 차이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를 통해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감사와 표현은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니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전혀 다른 차원이 될 수도 있다. 마음에서 입에 이르는 길이 가장 멀고도 험한 길이라고 하지 않는가. 
 

같은 본문, 다양한 설교

필자는 설교 클리닉의 초점을 비판보다는 대안 제시에 둔다. 평가와 비판이 나름 가치가 있겠지만 대안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잔소리로 전락할 수 있다. 제출된 설교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좀 더 선명한 대지 문장 혹은 대지 구성을 제안하거나, 혹은 같은 본문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설교의 가능성을 소개함으로써, 설교자 스스로 설교의 지평을 넓히고 더 나은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에서 선포될 수 있는 설교의 길을 두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대지1.     부르짖음
대지2.     순종
대지3.     감사

설교A와 설교B는 공히 감사에 무게를 둠으로써 나병환자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가벼이 다뤘다. 본문을 살피면 나병환자들이 “소리를 높여” 주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는 장면도 비중 있게 소개된다. 여기에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할 때 믿음으로 순종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주님은 한 사람의 감사를 믿음이라고 선포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믿음으로 부르짖음과 순종 그리고 감사를 선포하는 설교가 가능할 것이다. 

감사에 집중하는 설교도 가능하다. 성도에게 감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고 답하는 설교인데 다음과 같은 구성이 가능하다. 
 
 성도에게 감사란 무엇일까? 
대지1.     염치 
대지2.     구원의 믿음
대지3.     더 큰 기적을 향한 문 

감사한 사마리아인이 귀하지만, 그 이전에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이 너무 염치가 없다. 입은 은혜가 있으면 감사하는 것이 일반 사람에게도 그렇지만 성도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염치다. “성도에게 감사는 염치입니다”라는 메시지는 “감사하라”라는 메시지보다 더 강한 선포가 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주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으니, 감사를 구원의 믿음으로 선포할 수 있다. 마지막 대지는 적용적인 선포인데, 감사하는 마음에 주께서 더 큰 은혜를 베푸신다는 기대를 담았다. 결국 감사하라는 명령의 메시지를, 명사형 풀이를 동원해 더 강력한 언어로 선포하는 설교다. 

채경락 샘물교회 담임목사. 미국 남침례신학교 (Ph.D.). 저서로 《쉬운 설교》, 《설교자들이 알아야 할 절기와 상황 설교》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