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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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진단 2021년  12월호드라마 〈오징어 게임〉 미디어 속 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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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역할을 배제한 정치적 진보에 대한 전망

근대 후기 계몽주의 사상 발흥의 초석을 놓은 이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사고 실험을 수행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Bellum omnium contra omnes”(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는 이 유명한 문구는 문명화가 덜 이뤄진 자연 상태 속 인류의 삶을 집약한 표현이다. 홉스에 따르면, 사회적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 개개인은 생존을 위해 지극히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되고, 결국 정글 생태계와 같이 먹고 먹히는 무한 생존경쟁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래서 ‘국가’로 대표되는 사회 계약이 등장했다. 서로를 끝없이 파괴하기만 하는 소모적 경쟁을 멈추고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지적, 도덕적 가능성을 보다 온전하게 현실화하기 위해 특정한 형태의 계약이 필요하다. 경험론자였던 홉스의 관점으로 볼 때, 이런 계약을 성사시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삶의 경험을 통한 학습이다. 인간 상호 간의 경쟁적 혹은 협력적 상호작용 경험이 누적되고 전수되면서 사회 질서를 구축하고 보존하는 지혜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의 삶의 현실은 바로 이 근대 정치사상가들이 촘촘하게 짜 놓은 제도의 얼개와 그물망 속에 갇혀 있다. 대부분의 선진화된 국가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됐다. 대신 자유, 인권, 그리고 평화를 바라는 인간의 집단적 선의지에 대한 신뢰를 밑바탕 삼는 민주주의 체계가 구축됐다. 인류 전반을 휘감고 있는 이 역사적 조류는 홉스가 꿈꿨던 질서 잡힌 세계의 이상을 조금이나마 현실화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정치학자 아자 가트는 그의 저서 《문명과 전쟁》에서 지난 1970년대 이래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가 서로 전쟁을 치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는 평화를 유지하며 상호작용하는 것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이익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익은 단순히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삶의 질과 문화적, 기술적 역량 증진에까지 이른다고 가트는 밝히고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근대적 사회 계약에 기반을 둔 현대 정치 체제가 모든 부조리와 폭력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 것은 아니다. 홉스 등이 활동했던 근대 전기와 달리, 오늘날의 정치 철학은 실존철학과 포스트 구조주의 영향으로 정치적, 사회적 체계에 의한 인간 개개인의 자유 억압과 소외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물리적 살상을 동반하는 전쟁만이 폭력은 아니다. 소극적 평화의 상태(강자가 폭력으로 약자를 억누름으로써 유지되는 평화, 평화 유지를 명분으로 약자의 저항을 억누르는 폭력)에서도 폭력은 만연해 있다.

〈오징어 게임〉이 풍자한 한국 사회의 소극적 평화

최근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오징어 게임〉은 현재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런 소극적 평화의 상태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오징어 게임〉에 주로 묘사되는 소극적 평화 속 은밀한 폭력은 자본주의 체제의 어두운 일면에 깃들어 있다. 자본, 정보, 재능을 갖지 못한 소시민들의 경제적 실패는 이들의 삶을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이런 비판 의식은 기훈과 상우라는 두 주요 인물의 설정을 통해 분명하게 표명된다. 치밀하지 못한 성격에 인정만 많아서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하고 이제는 사채업자들의 압박에 시달리는 주인공 기훈(이정재 분)은 기반 없고 재능 없는 소시민의 전형이다. 상당한 수준의 학력을 자랑하는 상우(박해수 분) 역시 서민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금융 시장 레버리지의 덫에 빠져 몰락한 인물이다. 이처럼 두 사람의 경제적 실패와 그에 따른 삶의 피폐함은 분명 이들 스스로 자초한 면이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실패는 우리 사회의 교육과 경제 시스템이 결코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기훈과 상우 외에도 이 생존 게임에 참가한 대부분은 대한민국이라는 열악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다. 이들에게 한국 사회는 결코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직접적인 살육이 펼쳐지는 전쟁 상황은 아니지만, 생존의 기반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이런 가짜 평화는 아주 작은 계기만으로 무자비한 폭력 상황으로 돌변할 수 있다. 〈오징어 게임〉은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발전된 형태의 정치·경제 체제 속에 숨겨져 있는 저열한 부분을 드러내 조명한다. 기본적인 인권, 물질적 풍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고 약속하는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라는 것이 결국 이처럼 얄팍하고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하는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 이것은 인간 스스로가 구축한 정치·경제 체제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를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홉스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인간을 자연 상태 그대로 뒀을 경우,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이 펼쳐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의 합리적 혹은 이성적 판단과 선택이 이런 투쟁 상황을 온전히 극복하게 해 줄 것이라 여겼던 그의 전망은 수긍하기 어렵다. 현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 결국 원초적 투쟁 상태를 약간 순화한 것에 불과하며,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파괴적인 생존 경쟁 상황으로 회귀할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구태의연한 인간 이해로부터 기인한 서사의 질적 저하

인류 역사를 살펴볼 때, 인류에 의해 고안된 정치·경제 체제의 잠재적 폭력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해 온 유일한 영역이 종교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제도적 집단으로서의 종교는 그 한계를 온전히, 항구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목격되는 여러 고등종교 공동체의 헌신적 선행, 그리고 개개인의 숭고한 종교적 열망을 들여다보면 도무지 인간의 사회 체제에서는 나오기 힘든 특별함이 존재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과 약자, 그리고 이방인에 대한 헌신적이고 순전한 온정은 신앙의 힘이 아니고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기독교 신앙인들은 세속의 정치·경제 체제에 배태된 근본적인 삭막함에 맞서 이웃과 이방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 온정을 지속하는 삶을 살아왔고, 이를 공동체의 규범 및 문화로 발전시켜 왔다. 교회가 부와 권력을 탐하면서 타락한 시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부적으로 자정 노력을 반복하며 이웃과 이방인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 힘쓰는 이들이 등장해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곤 했다. 

구한말 한민족의 자주적 생존과 개화, 그리고 생활과 문화의 개혁을 이룰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것은 주로 미국에서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의 일관된 노력과 헌신적 선교 활동은 부패한 세도가와 무력한 왕가의 노예로 살아가던 한민족에게 내세를 향한 소망과 함께 선(善)을 향한 강한 의지를 일깨워 줬다. 한국 현대사에서 기독교회는 대규모 전쟁, 빈곤, 북한의 침략 위협 그리고 독재의 그늘 아래에서도 많은 이들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소망과 믿음을 잃지 않고 근면 성실하게 살아갈 동기를 제공해 왔다. 교회는 신앙의 모범에 감화된 이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초월적인 가치를 위해 힘쓰는 삶을 살도록 지도했다. 

〈오징어 게임〉은 소극적 평화 속에 만연된 은밀한 폭력에 희생된 이들이 잔혹한 생존 게임에 휘말리는 서사를 다룬 작품이다. 따라서 치밀한 심리 묘사, 인간성의 질적 저하에 대한 고찰, 그리고 한국인 고유의 삶의 정황에서 나오는 도덕률과 사회의식을 개연성 있게 표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은 작품이다. 시리즈 전반부, 5번 에피소드까지는 이런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해 나간다. 숙련된 연기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절박한 심리가 적절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는 데스 게임이라는 비교적 마이너한 장르의 콘텐츠를 전 세계적으로 흥행시킨 원동력이다. 그러나 후반부, 6번 에피소드의 구슬 게임에 들어서면서 서사의 개연성을 점차 잃어버린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기독교 신앙의 가치에 대한 일방적인 폄하 때문이고, 둘째는 무리하게 권선징악형 결말로 마무리되는 서사 때문이다. 우선 지영(이유미 분)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한 거짓 기독교 교역자의 극악한 성범죄를 폭로하는 방식은 조악하기 그지없다. 기독교 신앙인들의 위선적 면모에 대한 감독의 노골적인 반감이 드러나는 대목인데, 거짓 교역자의 악행에 대한 비판 의식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비판 방법이 심하게 편파적이다. 교회가 우리 사회에 역사적, 현실적으로 기여한 바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기독교 신앙을 위선을 포장하는 일종의 절대 악으로 취급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고유하고 본질적인 가치는 일방적으로 은폐하고, 거짓된 신앙인들의 악행만을 부각시켜 신앙 전반이 무가치할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메시지를 강요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상우의 자살 선택, 그리고 시리즈 마지막 기훈의 새로운 게임 참가 선택 장면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양심의 힘에 기대어 파괴적인 경쟁의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감독의 신념이 표명되고 있다. 결국 지영의 불행과 자살, 그리고 상우의 마지막 개과천선과 자살이 서로 이어지면서 기독교 신앙의 가치에 대한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회의감과 반감을 부추기고, 믿을 것은 오로지 인간 자신의 도덕적 각성밖에 없다는 신념을 내세운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마지막 비행기 탑승 장면에서 더 극적으로 표현된다. 기훈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가족과 재결합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선택지를 포기하고 데스게임에 다시 참가한다. 이는 기훈의 정의감, 불의에 대한 분노가 당장 눈앞에 보장된 가족과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다시 기어 들어갈 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로써 〈오징어 게임〉은 한 양심적이고 인정 많은 인간을 거의 순교자급의 영웅으로 격상시킨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문하고 싶은 점이 있다. 어린 딸을 힘써 돌보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죽을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선택을 할 아버지가 현실에 과연 존재할까?

이와 같은 서사의 허점은 결국 기독교 신앙 전반의 가치에 대한 무지와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혹은 현실을 간과할 정도로 과도하게 낙관적인 감독의 인간 이해가 낳은 무리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인류의 도덕적 진보와 각성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사상사 속에서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포기된 바 있다. 두 번의 궤멸적이고 반인륜적인 전쟁을 거치면서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같은 실존철학자들이 확인한 사실은 인간이 그 무지, 죄성, 그리고 죽음 앞에 한없이 나약해지는 유한성을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는 부족하고 허망한 존재자라는 점이다. 물론 그 부족한 가능성 가운데서라도 어떻게든 더 고결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겠지만, 그래 봤자 인간에게는 죽음에의 공포를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엄연한 존재적, 도덕적 한계가 존재한다. 

〈오징어 게임〉은 이런 현대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이해를 도외시한 채, 기독교 신앙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그 가치를 부정하면서,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된 인류 진보에 대한 계몽주의적, 변증법적 신념을 붙들고 있다. 이러한 신념은 과거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최근 유행하는 정치적 이념 가운데 엿보이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궤를 같이한다. 진보적 정치 사상, 정치적 올바름 이념을 내세워 무리하게 인간 스스로의 진보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설파하려다가 인간에 대한 치밀하고 현실적인 이해를 놓치는 것이다. 이런 약점은 생존이나 신앙과 같이 인간 삶의 가장 근본적이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 속에서 서사의 설득력을 크게 약화시킨다. 전달하려는 메시지 자체에 결함이 있는 까닭에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 또한 격하된다. 이는 향후 K-콘텐츠가 해결해야 할 중추적인 과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역사적 현실을 올바르게 관통하는 통시적인 인문학적 고찰에 힘입어 서사의 개연성과 설득력을 높일 때 비로소 〈오징어 게임〉의 서사에 드러난 것과 같은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박욱주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강사. 연세대학교(Ph.D.).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