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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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1년  12월호하이브리드 목회와 목회자 하이브리드 목회

2019년 11월 말, 중국 어느 한 지역에서 전염성이 큰 질환에 걸린 사람이 북경에 왔는데 그것이 사회적인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손바닥만한 작은 기사가 등장했다. 이 기사로부터 시작된 코로나19는 팬데믹 사태로 이어져 인류에게 문명사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인류 사회에 가져다 준 가장 큰 파장은 사회적 거리두기였다. 그것은 한 순간에 전 세계의 일상 체계를 ‘과거적인 일상’으로 바꿔 버렸다. 급작스럽게 인류는 ‘새로운 일상’이라는 도전에 직면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거적인 일상이었던 오프라인 목회가 일시에 멈추며, ‘온라인 목회’라는 새로운 목회 환경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또한 오프라인 목회와 온라인 목회를 아우르는 ‘하이브리드 목회’라는 새로운 목회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인 변곡점을 맞았다. 미래지향적으로 보면 코로나19 팬데믹은 변화에 눈을 감고 있던 교회에 더 늦기 전에, 마지막 기회를 붙잡을 수 있도록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개입하시는 기회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상치(相馳)하는 두 주제의 조화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하이브리드 목회’라는 주제와 ‘목회자’라는 두 주제는 그 내면에서 상치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하이브리드 목회’라는 주제는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이 급작스럽게 찾아온 시대적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목회 ‘형식’(form)의 문제다. 제기되는 목회 ‘형식’의 문제에 교회가 얼마만큼 유연할 수 있을까 하는 목회 실제의 문제다. 변화라는 것은 때로는 점진적으로, 때로는 과격하리만큼 급진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역이다.

반면에 ‘목회자’라는 주제는 목회 ‘형식’과 관련된 주제가 아니다. ‘목회자’의 문제는 변해서도 안 되고 변할 수도 없는 목회 ‘상수’(常數)의 문제다. 목회자는 ‘의미’(meaning)의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하는 사람이다. 목회자는 하드웨어의 영역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영역에 속해 있다. 이 둘의 우선순위를 굳이 따지자면 ‘하이브리드 목회’가 후순위의 문제고 ‘목회자’가 보다 더 우선하는 본질에 속하는 문제다. 이 둘은 서로 상치하는 관계다. 그러나 동시에 이 둘은 그 어떤 관계보다 항상 유연해야 하고, 서로 치밀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실 때, 문자 그대로 ‘하이브리드 목회’를 지향하셨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 9:14)라면서 ‘형식’의 문제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제기하는 형식의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 답하셨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6-17).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형식’과 ‘의미’가 서로 긴밀하게 조화를 이뤄야 하는 문제임을 밝히셨다. 

반면에 예수님과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켰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정결법의 문제, 안식일 법 등의 문제에서 자기들이 스스로 구축해 놓은 장로들의 전통인 ‘형식’을 예수님의 공생애와 함께 시작된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마 3:2; 4:17)의 도래 앞에서도 변하거나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끝까지 맞섰다. 그들의 입장은 하나님이 주신 토라의 본래의 ‘의미’를 무너뜨리고 거부하는 기형적인 율법주의로 고착됐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다 마치셨을 때, 무리의 반응이 놀라웠다. 이때,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놀란 무리의 반응은, 오늘 인류가 맞닥뜨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멈춘 일상과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일상에로 초대하는 지속적인 놀람 그 자체였다. 놀람의 이유는 더 충격적이다. 첫째,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의 랍비였던 서기관들의 가르침인 구전 율법 곧, 장로들의 전통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인류, 포노 사피엔스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의 주요 의제가 ‘4차 산업혁명’이었다. 그 이전 이미 세계에는, 스티브 잡스에 의한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21세기 신인류인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가 출현했다.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을 자기 신체의 일부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자들을 말한다. 2007년 스마트폰이 세상에 출현하자 불과 10년 만에 인류는 절대 역변이 없는 삶의 변화에 직면했다. 

스마트폰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가장 큰 변화는 인류의 생각을 바꾼 일이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포노 사피엔스가 무서운 이유는 방대한 정보의 선택권을 자신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보를 집중적으로 선택하고, 그 정보를 자기 생각으로 바꾸고, 자신의 삶의 가치관으로 삼고, 정보 안에서 극단적인 개인화 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포노 사피엔스다.

포노 사피엔스를 상대해야 하는 ‘하이브리드 목회’를 단순한 방법론적인 문제라고 보는 것은 너무 안일한 생각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초기에만 해도, 온라인 목회는 급작스러운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 세계에 접근하는 방법론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논의된 것이 사실이다. 온라인 목회 시스템의 환경을 구축하는 문제만 해도 아직까지 교회마다 대상마다 그 수준과 형편이 천차만별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하드웨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의 본질은 전혀 다른 데 있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하이브리드 목회’라는 시스템의 문제는 거의 해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하이브리드 목회’의 진짜 핵심적인 쟁점은 ‘하이브리드 목회’에서 거론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방법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 세계가 가진 특성의 문제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살아가는 대다수의 포노 사파엔스는 방대한 데이터 정보라는 세계에, 그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결정과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 포노 사피엔스는 자신이 선택한 정보를 통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바로 이 지점이 ‘하이브리드 목회’를 해야 하는 목회자들이 유념해야 하는 문제의 본질이다. 

이미 포노 사피엔스에게는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 세계에서 접근하는 방대한 데이터가 자신의 신이 됐다. 이런 포노 사피엔스들에게, 빅 데이터가 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에게 보내 주신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망 없는 자의 삶을 살아가던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구속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만이 유일한 신이심을, 어떻게 믿고 섬기게 할 수 있는가가 ‘하이브리드 목회’와 ‘목회자’ 문제의 핵심 쟁점이다.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에 몰려가 있는 포노 사피엔스들

코로나19 팬데믹이 일어나면서, 과거적인 목회 일상은 셧다운(shutdown) 됐다. 동시에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면서, 목회자의 목회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유일하게 열려 있는 영역이,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이라는 영역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인류 사회는 스마트폰을 손에 쥔 신인류인 포노 사피엔스의 출현과 함께 삶의 영역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이라는 영역으로 급속한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인류 사회의 전환이라는 물결에, 급발진 사태를 불러왔다.

어느 교회든, 목회자는 오늘이라는 목회 현장에서 10년 뒤의 미래를 디자인하면서 목회한다. 그렇게 보면,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는 교회와 목회자에게 20년 뒤의 미래 사회의 목회를 오늘 지금의 목회 현실로 가져와 버린 사태다. 교회들은 급작스럽게 닥친 20년 뒤의 미래적 목회 현실 앞에서 순간 방향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급발진적인 사태로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 시점에서라도 20년 뒤의 미래사회의 변동에 직면하면서, 그간 방관했던 신세계인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 세계로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 놓을 수 있게 됐다. 교회가 전방위적인 온라인 사역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온라인 플랫폼 세계 바로 그곳에, 신인류인 포노 사피엔스가 다 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며 살아온 어부 시몬을 제자로 부르실 때, 시몬에게 “(네가 평소에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게네사렛 호수의) ‘깊은 데로’(깊은 그 곳으로, 에이스 토 바도스   )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명령하셨다(눅 5:4). 그때, 시몬은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레마티 , 지금 숨결이 묻어나며 하시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했다(눅 5:5). 우리 시대의 ‘깊은 그 곳’은 어디인가?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가 있는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의 세계다.

광장에 서 있는 교회

앞서 ‘하이브리드 목회와 목회자’라는 두 주제를 생각할 때, 필자는 그 무게 중심이 ‘하이브리드 목회’라는 목회 방법론보다는 ‘목회자’에게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두 주제를 다룰 때, ‘목회자’의 영역은 달리 보면 목회하는 목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의 세계와 직결된 문제다. 그럴 때 하이브리드 목회라는 ‘형식’의 문제는 형식 자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의미’의 문제인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목회 신학이 하이브리드 목회 형식의 문제를 결정하게 하는 본질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한국 교회가 여지없이 드러내 보인 교회의 모습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교회의 대사회적인 공공성의 문제였다. 한국 교회가 그 동안 얼마나 심각하게 대 사회적인 공공성을 상실한 교회였는지를 여지없이 보여 줬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부터 이미 한국 교회는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교회성장주의 신학에 매몰돼서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하는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를 잃어버린 채, 구심력만 작동하는 교회로 키워가는 목회를 해 왔다. 

오른쪽 그림과 같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건강한 구심력이 작동하는 교회여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지지 않는다. 그러나 개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구심력이 작동하는 교회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로서,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에 힘쓰는 교회였다. 그래서 온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교회,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 가는 교회였지만 결코 온전한 교회는 아니었다. 유대인들만의 교회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스스로 자기들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예루살렘교회에 불어닥친 박해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서면서부터, 구심력만 강하게 작동하고 있던 교회의 체질을 일거에 벗어 던지는 변곡점을 가지게 됐다. 이방 세계를 향해 흩어지고 뻗어가는 원심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선교적인 교회로의 탈바꿈이 일어나는 대전환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선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선교조차도 개교회의 성장주의 목회라는 일환의 하나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선교하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 공동체 자체가 선교적인 공동체라는 새로운 목회 신학이 바탕이 돼야 한다. 이것은 오늘 한국 교회가 상실했던 교회의 대사회적인 공공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선교적인 교회로서 광장을 ‘떠나지 않으면서 광장 속에서 다르게 살아가기’(leaving without departing)를 보여 줄 때, 공적 복음과 공공 신학을 가진 대 사회적인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목회자 연대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하면서도 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만큼 큰 고통을 겪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티칸의 로마 교황청을 정점으로 각 나라 각 교구에 속한 전 세계에 흩어진 가톨릭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정치제도 때문이다. 

반면에 개신교회는 치리 기구인 각 교회의 당회와 노회와 총회가 있긴 하지만 매우 느슨한 정치적인 제도에 불과하다는 약점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개신교회는 대형교회든 작은 교회든 각자도생의 체제를 가지고 있다. 그와 더불어 고도로 정치 권력화가 된 쓴 뿌리와 같은 오늘의 개신교회의 정치제도는 사회적인 급변동이 수시로 일어나는 미래 사회 속에서의 지역 교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지금 개신교회 목회자들의 상호 관계는 대형 교회와 작은 교회, 그리고 그 중간 지대에 있는 다양한 중소형 교회들 사이에서 치밀하게 정치화된 권력의 먹이 사슬의 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오늘의 교회 실상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형성된 주님의 몸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라는 우리의 신앙고백과도 너무나 거리가 먼 분열된 교회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개신교회의 다양성, 그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 됨이라는 통일성과 일치를 지향해 가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앞으로 개신교회는 교회의 다양성과 통일성이라는 질서를 세워가기 위해서 건강한 교회 정치를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한다. 이는 우리의 해묵은 과제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인 요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라는 우리의 역사적인 신앙고백 위에서, 목회자들 간의 상호 친밀한 연대를 이뤄 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목회는 지역 교회 목회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동치는 사회적인 급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하는 무거운 과제는 목회자 개인이 풀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급격한 시대적인 변화 속에서, 개신교회는 긴밀한 목회자 연대 운동을 해 가야 한다. 이는 정치 권력화를 지향하는 연대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두 그림에서 제시한 것과 같이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로서 예배공동체(Leiturgia), 교육공동체(Didake), 친교공동체(Koinonia), 섬김공동체(Diakonia), 증인공동체(Missio)의 본질을 강화시켜 가기 위한 것이다. 둘째는 각 지역 교회 목회자들이 서로 연대해서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의 본질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대사회적인 공적인 교회로서의 선교적인 교회로 이 시대 광장 속에 존재하기 위해서다. 

더 이상의 정치 권력화를 지향하는 폐습인 목회자 연대는 일체 그만둬야 한다. 우리가 새롭게 추구해 할 목회자 연대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대사회적인 공공성을 넘어서는 선교적인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는 목회자 연대다. 달리 표현하면, 가까운 이웃 교회의 목회자들과 지역 교회의 목회자들,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목회자들이 상호 간에 형제 교회 운동을 펼쳐 나가야 한다. 개교회를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의 교회라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목회자 연대 운동이 필요하다. 

‘하이브리드 목회와 목회자’의 본질, 말씀 목회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직면하면서 대두된 ‘하이브리드 목회와 목회자’의 근간이 되는 본질은 ‘말씀 목회’다.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 ‘말씀 목회’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팬데믹 상황과 시대적인 변화에 대처하는 ‘하이브리드 목회’를 잘하는 목회자라고 해도,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해진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종교개혁의 본산지였던 비텐베르크에도 흑사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21세기 인류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과 비교할 때 16세기 당시의 흑사병 창궐은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현대 의학의 발전과 최첨단 의료 시설과 시스템을 갖춘 21세기 인류가 맞닥뜨린 치사율 2%인 코로나19 팬데믹과 16세기 유럽의 흑사병 팬데믹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당시의 흑사병은 발병 8일 만에 사망에 이르는 치사율이 75%나 되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흑사병으로 사투를 벌인 종교개혁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흑사병에 걸려서 거의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경험을 가진 개혁자였다. 루터는 흑사병이 창궐한 비텐베르크를 떠나지 않았고, 그 현장에 남아서 환자들을 돌보고 위로하기 위해서 자신의 집을 병원으로 제공하기까지 했다. 

이런 환경적인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그와 같은 흑사병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유례없는 ‘말씀 운동’을 전개해 갔다는 사실이다. 츠빙글리는 스위스의 취리히 그로스뮌스터교회 목회자로 부임하면서부터 가까운 동료 목회자들과 함께 모여서, 설교를 위한 성경주석을 해 나가는 프로페짜이 운동을 전개했다. 프로페짜이를 통해서 당시 목회자들은 성경을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그리고 독일어로 대조해 가면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 프로페짜이는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를 위한 모임이었지만, 점차 목회자 후보생과 심지어 일반 교인들도 참여하는 모임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취리히의 프로페짜이는 단순히 목회자들의 말씀 연구와 설교 준비를 넘어서는 그 파생적인 효과가 대단히 컸다. 

하이브리드 목회를 해야 하는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 시대 속에서도, 목회자의 최고 우선순위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말씀 운동이다. ‘말씀 목회’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교회 공동체가 우리 시대의 광장 한복판에 선 하나님 나라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시대 가치에 종속되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대의 가치가 난무하는 광장 한복판에서 시대 가치를 뒤집으면서 돌파해 오는 가치전복적인 거꾸로 서는 나라(The Upside-Down Kingdom)이기 때문이다. ‘말씀 목회’라는 중대한 과제는, 개교회의 목회자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뜻을 같이하는 목회자들이 함께 모여서, 말씀을 붙잡고 진지하게 씨름하고, 말씀으로 시대 가치에 대해 예언자적인 해석을 하면서, 광장 한복판에 거꾸로 서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말씀 목회’를 곳곳에서 펼쳐가야 한다. 

나가는 말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 팬데믹은,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를 ‘하이브리드 목회와 목회자’로 내몰고 있다. ‘하이브리드 목회’는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도전 앞에서 그 어떤 목회자도 거부할 수 없는 새로운 목회의 자리다. 시대적인 변화에 발맞춰서 복음을 담는 그릇을 유연하게 바꾸는 것이 목회자의 책무다. 새 포도주와 같은 복음은 새 가죽 부대에 넣을 때에만, 부대와 포도주 둘 다 보전할 수 있다. 
 

박은호 정릉교회 담임목사. 유나이티드신학교(Th.D.). 저서로 《슬로, 바이블》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