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시대, 소설의 힘에 주목하라
지금은 정보 통신 기술의 융합으로 이뤄진 4차 산업혁명 시대다. 핵심 분야인 빅데이터,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 인터넷, 자율 주행, 양자 암호,3D 프린팅, 나노 기술, 가상현실,생명공학 등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혁신의 핵심은 기술인데, 그 기술에 영감을 주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현실보다 강하다. 상상력이 현실을 만든다. 상상력은 시와 소설에 가득하다. 그 중에서도 소설은 상상력의 보고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소설에서 영감을 얻는다. 또한 현 시대는 꿈과 감성 그리고 ‘이야기’가 주도하는 사회다. 덴마크의 세계적인 미래학자 롤프 옌센 교수는 저서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래할 사회는 ‘드림 소사이어티’다. 이는 기업, 지역 사회,개인이 데이터나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를 바탕으로 성공하는 새로운 사회다.”
현대 사람들은 이제 상품을 사지 않고 그 상품 속에 들어 있는 ‘꿈과 이야기’, 즉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담긴 제품을 구매한다는 것이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 산업화 시대가 도래했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지금은 상상력과 이야기의 시대다. 소설은 상상력과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들은 이 시대를 읽고 더욱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소설의 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허구, 소설
1. 허구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미국의 명문 휘튼대학의 영문학 교수 리런드 라이켄은 《기독교와 문학》에서 인간이 허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내고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따라서 우리가 훌륭한 예술성이나 혹은 소설의 허구적 창조성을 즐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궁극적 근원이 되시는 그런 특성(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며,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물을 즐기시는 것과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적으로 생각하게 만드셨다. 인간이 가진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허구를 만들어 낼 줄 아는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2. 소설은 허구를 통해 진리를 드러낸다
소설은 허구다. 그래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왜 허구를 읽어야 하나?”라면서 불편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의 허구는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를 통해 진실을 드러낸다. 상상으로 꾸민 허구의 세계가 진짜 세계보다 문제를 더 명료하게 보여 줄 때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무엘하 12장에 나오는 다윗과 선지자 나단의 대화다. 충성스러운 신하인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신다. 나단은 다윗왕에게 허구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왕이시여,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은 많은 양과 소 떼를 거느린 부자이고, 한 사람은 암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잣집에 손님이 왔습니다. 이 부자는 자기의 양과 소 떼 중에 한 마리 잡는 것이 아까워서, 양 한 마리밖에 없는 그 가난한 사람에게서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이런 나쁜 놈 같으니라고! 그런 놈은 죽여 마땅하다”라면서 흥분했다. 그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러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오!”라고 말한다. 다윗은 이 이야기 속의 한 인물을 정죄함으로써 사실상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내린 셈이다. 허구의 이야기가 진리를 더욱 생생하게 드러낸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문학사에 길이 남아 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첫 문장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사람이 흉측한 벌레가 돼 있다니! 사람이 벌레로 변신하는 것은 불가능한 허구다. 카프카는 한 평범한 서민의 변신을 통해, 돈 버는 가치가 없어지면 여지없이 소외되는 인간 사회의 허무를 심층적으로 보여 준다. 벌레라는 허구를 동원하지 않았다면 산업사회의 인간 소외 양상을 이토록 명징하게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소설은 허구를 통해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가공이나 허구의 세계라고 해서 근거 없는 몽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딛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보다 더욱 사실 같은 허구다. 프랑스 예술가 장 콕토는 시인을 가리켜 “거짓말로 참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소설도 그러하다. 소설은 ‘지어낸 거짓말’이다. 그러나 소설은 사실보다도 더 사실적이어야 하고, 거짓말을 위한 진실이 있어야 한다. 한 가지 하얀 거짓말을 위해 아홉 가지 진실이 있어야 한다. 아홉 가지 거짓으로 한 가지 진실을 믿게 만들려는 것은 소설이 아니라 사기에 가깝다.
많은 사람이 《햄릿》에 공감해 잠 못 이루거나, 《돈키호테》를 읽으며 통쾌해한다. 단순히 대리 만족을 넘어 주인공의 삶을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그러하다. 동일시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글은 그럴듯한 거짓말로는 불가능하다. 진실이 있어야 한다. 설교와 성경 공부는 더 그러하다. 자신의 체험은 한 점 없고 적당히 베낀 것 가지고는 은혜를 끼칠 수 없다. 성령의 은혜와 진실이 담겨야 진정한 감동이 있을 것이다. 소설가들이 한 가지 하얀 거짓말을 위해 아홉 가지 진실을 몸서리치게 체험하듯이, 설교가들은 성령의 은혜를 영혼 깊이 체험해야 할 것이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 12:19).
소설처럼 공감성이 가득하고 생생하자
성경에는 수많은 ‘진리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는 설교 강단에서 점점 더 화석화되고, 규범적, 도그마적이 돼 딱딱한 바위처럼 굳어 간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현대인들은 ‘성경의 이야기가 진리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성경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라는 공감을 더욱 중요시한다. 성경 이야기가 하나의 화석화된 규범으로서가 아니라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 속으로 초대돼, 성경 속에서 웃고 울며 뛰놀며, 스스로를 그 이야기의 일부로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들의 ‘공감성’과 ‘생생함’이 좋은 울림을 준다.
1790년 8월 10일 종로의 한 담배 가게 앞에서 느닷없는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어떤 전기수가 《임경업전》을 낭독하고 있었는데, 간신 김자점이 임경업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는 대목에 이르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때 한 남자가 갑자기 담배 써는 칼을 들고 뛰어나와서는 “네가 그 김자점이냐?” 하면서 전기수를 찔렀다고 한다.
‘전기수’(傳奇)는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 주는 노인으로, 조선 후기에 나타난 이야기꾼이다. 이들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에 자리를 펴고 입담을 풀었다. 청중은 영웅의 활약상을 담은 소설을 가장 좋아했다. 청중의 마음과 생각을 읽을 줄 알았던 전기수는 당시 대중과 가깝게 교류했던 소통의 달인이었고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연희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고 웃으며 위로를 받고 즐거워했다. 전기수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1인 다역으로 연기하면서 청중을 쥐락펴락했다. 그 연기력과 낭송력이 얼마나 좋았는지 소설 속의 인물을 연기하는 전기수를 실제 인물로 착각해 칼로 찌르기까지 한 것이다. 칼을 맞을 정도로 실감이 났고 공감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생함과 공감성이 필요한 시대임을 역설한다.
똑같은 꿀을 따도 벌은 꽃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지만, 나비는 너울너울 춤추듯 날아서 간다. 꿀벌은 꿀을 따는 데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비는 꿀도 따고 춤도 추면서, 마치 놀이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욱 감동을 준다. 성경의 언어는 벌의 언어라기보다 나비의 언어가 많다. 성경의 문체가 나비처럼 감동의 춤을 춘다면 그것을 전하는 설교가들도 같이 춤을 추며 그 생생함과 감동을 그대로 전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작은 이야기’가 소중하다
들뢰즈, 데리다와 함께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 중 하나인 장 프랑수와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중요한 특성이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적인 경향이라고 했다. 즉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거대 담론이 더 이상 삶의 방향을 제시하거나 가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큰 이야기’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가고, 대신에 ‘작은 이야기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리하여 작은 이야기들의 주인공, 그들이 담고 있는 스토리와 다양하고 상이한 가치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가 소설에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 스탕달은 소설을 가리켜 “거리로 메고 다니는 거울”이라고 했다. 거울을 메고 거리를 걸어 다니면 그 거울에 나와 다를 것이 없는 친근한 우리 이웃들의 모습이 비칠 것이다. 소설(小說)이라는 말에는 ‘작은 것’을 뜻하는 ‘소’(小)자가 들어가 있다. 큰(大)이야기가 아닌 작은(小)이야기, 그러니까 소설은 나와 같은 이웃들의 민낯 이야기다. 담 너머에 살고 있는 나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이웃 사람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설을 좋아하며 공감을 갖는 것이다.
시인 안도현은 〈외로울 땐 외로워하자〉에서 “산과 들이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 차는 까닭은 아주 작은 풀잎 하나, 아주 작은 나뭇잎 한 장이 푸르름을 손 안에 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노래한다. 세상이 아직도 푸른 것은 이름 없는 여린 풀잎들이 그 작은 손에 푸르름을 손에 쥐고 그 푸른빛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직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풀잎 같은 작은 자들이 묵묵히 작은 일에 충성하며,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때문이다.
물론 ‘큰 이야기’가 그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더군다나 성경의 큰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의 큰 이야기에 포함된 성도의 작은 이야기들도 중요하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큰 섭리, 즉 창조, 구원, 종말이라는 ‘성경의 큰 이야기’ 속에서 개인의 ‘작은 이야기’를 가진다. 저마다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 작은 이야기를 하나님은 소중히 보신다. 또한 현대인들은 이런 작은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인다. 소설의 작은 이야기같이 성도들의 작은 이야기들을 존중해 주고 공감할 때, 교회는 더욱 생기가 넘칠 것이다. 또한 세상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하는 공감 있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렇다. 영웅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큰 업적, 큰 이야기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 또한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가. 이름 없는 들꽃 같으나 신실하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그 푸르름을 다하는 작은 자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포스트모던,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는 소설적 상상력과 생생함 그리고 공감을 중요시한다. 또한 소설처럼 작은 이야기가 존중받는 시대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소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