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 {{x.scr_name}}
  • 미분류

신학·설교 2021년  10월호성 윤리와 종교개혁 심층기획

성직자의 결혼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과 변화를 초래한 종교개혁의 핵심 사건이다. 이것은 천주교와 개신교의 가장 큰 차이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성직자는 결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천주교가 내린 결론은 “없다”였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있다”라는 ‘가능’의 대답에 머물지 않고, “해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로 간주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목사는 결혼해야 한다”라고 외쳤으며, 개신교의 불문율이 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고 성직자의 결혼이 예외 없는 절대 법칙으로 자리 잡은 것도 아니다.

중세 시대의 결혼과 성: 영과 육의 이원론

중세 천주교에서 결혼은 일곱 가지 성례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성례를 ‘세례와 성찬’ 두 가지로 제한해 결혼을 더 이상 성례로 인정하지 않았다. 천주교는 결혼 자체를 성례로 정했지만 부부 관계를 거룩하다고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천주교에서 부부 관계는 육체적인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행위에는 어떤 영적 의미도 담겨 있지 않았다. 부부 관계는 자녀를 양산하기 위한 필요악에 불과한 것으로 봤고, 결코 즐거운 행위로 인정받지 못했다. 성욕은 중세 금욕의 첫 번째 대상이었다. 따라서 중세 사람들은 자녀 양산의 목적 이외의 성행위를 사실상 범죄라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중세 교회가 결혼 자체를 성례로 정하고 가르친 것은 일종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천주교에서 결혼이란 부부의 성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에 성직자가 그와 같은 육체적 관계의 결혼을 피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결혼이 성례였음에도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 관계, 즉 남자와 여자의 연합에 어떤 거룩한 영적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러한 중세적 모순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중세 교회의 남존여비 사상은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북부의 힙포(Hippo)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뿐만 아니라,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도 발견되는 중세 천 년의 보편적 사상이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 모두 이성적인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주신 이유는 땅에 충만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실행하기 위한 종족 번식의 목적 때문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그는 아담이 먼저 창조됐다는 사실과 하와가 아담의 육체로부터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따라서 남자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지만 남자의 배필로서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며, 남자와 연합할 때만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아담이 발광체라면 하와는 반사체와 같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여자가 남자처럼 인간의 영혼을 소유하지만 남자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일을 통해 인류의 번식을 돕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또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여자는 남자를 위해 창조된 존재이자 철저히 종속적임을 강조했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부부 사이의 평등 개념을 아우구스티누스보다 훨씬 더 제한적으로 적용했다. 그는 여자가 본성적으로 남자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봤다. 이러한 복종은 타락 이후에 나타난 주인에 대한 노예의 복종이나 지배자에 대한 백성의 복종과는 다르다. 아퀴나스는 타락 이전의 가정적인 복종으로 분류했다. 그의 이런 분류는 중세 스콜라주의의 전형이다.

중세 시대는 거룩한 영혼과 타락한 육체를 철저히 구분하는 이원론(Dualism)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결혼 자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로 거룩한 것이지만 자녀 생산 이외의 부부 관계는 육체적인 성욕이 지배하는 타락의 결과로 금해야 한다고 봤다. 이에 중세 교회는 결혼보다 독신을 더욱 거룩한 것으로 가르쳤다. 독신이란 남녀의 성관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홀로 사는 사람들, 즉 독신을 서약한 모든 수도사와 성직자는 천국으로 직행하는 입장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초대교회 말기부터 시작해 중세 천 년을 관통했다. 여자는 비록 성직자가 될 수 없지만 수도사 즉 수녀의 자격으로 그와 같은 천국 입장권을 소유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자의 결혼과 성: 거룩한 계약과 제도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성속 이원론을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불건전한 사상으로 간주해 철저히 배격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남녀 그리스도인은 모두 결혼해야 하며, 이는 성직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결혼관이었다. 그들에게 결혼은 성례가 아닌 거룩한 계약이다. 하나님과 교인들 앞에서 한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서의 연합을 약속하는 것이다.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관계는 지극히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상징하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연합이었다. 단순히 육체적인 연합이 아닌 영적인 연합을 의미했다.

결혼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거룩한 제도’로 거듭났다. 부부 관계에 대한 중세의 육체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와 소극적이고 금욕적인 관계는 제거됐다. 에베소서 5장을 근거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의 관계, 즉 교회론적 연합의 의미가 새롭게 회복됐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속 이원론이라는 중세 사상에 갇혀 있던 부부 관계를 해방시켰다. 부부 관계는 중세의 육체적이고 금욕적인 관계에서 사랑과 순종의 관계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있던 대표적인 인물은 비텐베르크의 마르틴 루터와 스트라스부르의 마르틴 부서, 그리고 제네바의 장 칼뱅이다.

성직자들의 직무 유기와 윤리적 타락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하는 14-15세기 유럽, 특히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중세의 가을》로 평가했다. 이 시각은 중세 말기 현상에 주목한 결과로, 두 세기를 르네상스 시대로 극찬한 중세 연구가들의 관점과 상반된다. 그의 평가에 따르면 “15세기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시대는 종말로 기울어졌고, 지상의 모든 것은 몰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1 한마디로, 종교개혁 직전인 15세기 중세는 무너져 가는 종말 현상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문학가와 예술가 대부분이 질병의 고통, 전쟁의 황폐, 죽음의 공포, 파벌주의의 심각성, 만연한 탐심과 탐욕 등을 절망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가을》은 수많은 사생아의 존재를 언급하면서도 성적인 타락을 중세 몰락의 전조나 결정적 원인으로 주목하지는 않는다. 성(sex)의 타락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현상, 즉 종교개혁의 발생 원인으로 보는 것은 부당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16세기 종교개혁을 수용한 도시에서조차 성적 문란 행위가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복음 설교 시점을 1516년 이후라고 주장한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도 사제로서 아인지델른에서 목회하던 시절(1516-1518) 여자들과 사통(私通)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당시 젊은 사제의 정교(情交)가 얼마나 흔했는지 사통, 정부, 자녀 생산 등 성직자들의 다양한 성 범죄는 그 경중에 따라 벌금을 책정했을 정도였다.

15-16세기에는 아예 정부(情婦)를 둔 사제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자녀도 몇 명씩이나 낳아 기르곤 했다. 이 자녀들은 모두 사생아로 등록될 수밖에 없었으나 돈과 권력을 가진 성직자들은 개의치 않고 여러 명의 정부를 두고 자녀를 여럿 낳기도 했다. 이는 종교개혁 직전의 교황들이 대표적이다. 모범적인 교황 니콜라우스 5세 이후 15세기 마지막 10명의 교황은 바티칸 타락의 끝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패했다. 부패의 핵심은 성직 매매와 족벌주의, 그리고 성적 타락이었다. 

예컨대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는 교황이 되기 전 이미 3명의 딸이 있었다. 유부녀들에게서 낳은 자녀만 모두 16명이었던 교황 이노켄티우스 8세와 후임자 알렉산더 6세는 성적 타락으로 능가할 교황이 없을 정도였다. 알렉산더 6세, 즉 로드리고 드 보르자의 비상한 지적 역량이 그를 부패 끝판왕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그는 성직 매매와 족벌주의, 그리고 성적 타락이라는 부패의 트라이앵글을 완벽하게 충족시킨 교황이었다.

교황이 된 후, 보르자는 18세의 아들 체자르 보르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두 번째 정부에게서 난 이 아들은 아버지의 악명을 높이는 데 일조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아들 보르자에게 영감을 받아 유명한 《군주론》을 저술했다. 알렉산더 6세는 공식 정부만 3명이었고, 두 번째 정부에게서 5-6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의 정부들과 이들에게서 낳은 아들들뿐만 아니라, 딸들의 이름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자녀들은 모두 아버지 덕분에 출세 가도를 달렸다. 심지어 알렉산더 6세는 어느 로마 여성에게서 낳은 아들까지도 살뜰히 챙겼다. 그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재산과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교황이 되려고 사력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종교개혁 직전의 교황과 추기경, 그리고 대주교들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사제들조차도 어마어마한 성 추문의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한마디로, 성직자들의 성 범죄가 만연한 시대였다. 수많은 수도원의 수사와 수녀도 성 추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중세 말기 성직자들의 이중 생활, 즉 명목상으로는 독신이지만 실제로는 아내와 자녀를 가진 가장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런 성직자들의 타락은 인문주의자들과 백성에게 가십거리였다. 

16세기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사람은 바로 성직자다. 그 원인은 성직자가 봉사자라는 직무를 유기하고 바른 말씀의 선포보다 돈과 명예를 추구하며, 비윤리적 행위를 서슴치 않은 데 있다. 

독신 제도 폐지와 성경적 가르침의 ‘결혼’

종교개혁은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한 천주교의 교리적 타락으로 성직자들의 직무 유기와 성 범죄 같은 윤리적 타락이 무시할 수 없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너무 만연해 무감각해진 성직자들의 다양한 성 범죄는 근본적으로 성직자의 독신 서약에서 비롯된 것임을 종교개혁자들은 간파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독신 서약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성직자의 결혼이 더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외쳤다. 나아가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증명이라도 하듯 비난을 무릅쓰고 결혼을 공공연하게 감행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직’으로 알려진 ‘말씀 봉사의 직분’이란 독신이 아닌 기혼자의 몫이요, 독신 성직자는 보편적이 아닌 예외의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1.    마르틴 루터: 올바른 성생활과 자녀 양육의 목적

가장 먼저 독신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폐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종교개혁자는 루터(1483-1546)다. 그는 1521년의 《수도원 서약에 관하여》와 1522년의 《결혼생활에 관하여》를 통해 독신 제도가 복음과 기독교 신앙에 반한다고 비판하며, 사제의 결혼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또한 1525년 만 42세의 나이에 자신보다 16세 어린 수녀원 출신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했다. 당시 그 결혼은 종교개혁이 적의 공격과 비난으로 좌초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사건이었다. 수도사와 사제 신분의 루터는 결혼을 주저하지 않았고, 결혼 후 아내를 “사랑스러운 카티”(Katie)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루터는 자녀를 결혼시키는 것이 모든 부모의 의무이며 임신과 출산이 여자의 창조 목적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중세 교회법이 허용한 비밀스러운 사적 결혼과 조혼을 반대했다. 부모가 자녀의 혼인을 강요하거나 방해하는 것, 자녀가 부모 동의 없이 결혼하는 것 등을 금했으나 예외도 인정했다. 루터는 결혼을 가족 구성원의 중대사로 간주한다. 그는 삶을 자비롭게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인 결혼 없이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에 남녀는 결혼을 통해 본성적으로 성생활 및 자식을 공유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이란 생명을 낳는 위대한 어머니이자 동물 같은 남편을 길들이는 매력적인 아내로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봤다.

아내에 대한 루터의 유명한 말이 그의 가르침을 증명한다. “나는 아랫 주인이요, 그녀가 윗 주인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론이고, 그녀가 나의 모세이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남자와 여자로서 인간이 간음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결혼뿐이었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만이 혼전 성관계의 치료책이었다. 그러므로 “아내는 인생의 즐거운 동반자다. 아내는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일에 익숙하며 집안을 관리하고 기꺼이 측은지심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아내는 아이를 낳고 남편을 즐겁게 하며 긍휼을 베풀도록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지음받았기 때문이다.”2 이렇게 루터는 남녀의 성관계를 결혼을 통한 부부 관계로 한정했다.

비밀 결혼을 불허한 종교개혁은 부모 동의, 증인들, 교회 등록과 축하 예식, 결혼 서약 등을 통해 모든 결혼을 ‘공개적인 제도’로 만들었다. 16세기에는 약혼과 결혼이 구분 없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지만, ‘독신’과 반대 개념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루터는 수도사와 사제의 신분을 공적으로 벗어던지지 않고 결혼했다. 그는 수도사와 사제의 독신 서약 자체를 비성경적으로 봤다. 루터에게 성직자의 독신 서약은 원천 무효였기 때문에 수도사 혹은 사제가 결혼하는 것은 결코 불법적인 일이 아니었다. 

2.    마르틴 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

하지만 루터와 달리 수도사였던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서는 수도원을 떠난 직후 자신의 수도원 서약 무효화를 신청했고, 이 신청이 받아들여져 공적으로 독신 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독신 서약에서는 해방됐지만 여전히 사제였던 부서는 1522년 여름 수녀원 출신 엘리사벳 질버아이즌과의 결혼을 감행했다. 그는 결혼한 최초의 사제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나 부서는 질버아이즌이 사망한 지 5개월 후, 1542년 4월 16일 페스트로 사망한 동료 볼프강 카피토의 미망인 비브란디스 로젠블라트와 재혼했다. 로젠블라트는 4명의 종교개혁자와 결혼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마지막 남편이 부서였다. 부서의 결혼과 재혼은 “감독”을 “한 아내의 남편”으로 규정한 디모데전서 3:2의 말씀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이 성경 구절을 근거로 부서는 감독에겐 평생 아내가 한 명뿐이어야 한다고 해석하는 중세 교회법을 거부했다. 

루터와 같이 부서에게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로 남자와 여자의 ‘연합과 결합’이요, 부부가 서로의 삶과 교제를 함께 나눌 의무를 갖는 것이었다. 이처럼 결혼에 대한 두 사람 사이의 생각은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결혼한 부부 상호 간의 사랑과 섬김이 지향해야 할 최고 목적에 대해서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부부가 서로를 섬겨야 할 첫 번째 이유와 목적이 루터에게는 부부가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일이었던 반면, 부서에게는 부부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 자체였다. 부서에게 있어 부부가 연합과 교제 속에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사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출발점이자 기초 단계였다.

어떤 종교개혁자보다 부서는 부부의 성관계를 결혼의 본질적인 목적으로 강조했다. 심지어 이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혼 제도를 세우셨다고 주장할 정도로 부서에게 성관계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는 말씀을 부서는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결혼을 통한 부부의 교제란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리스도와의 교제 및 성도와의 교제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루터와 카티 사이의 자녀는 모두 6명이었고, 부서와 질버아이즌 사이의 자녀는 아들 7명과 딸 4명으로 모두 11명이었다. 하지만 부서는 비록 자녀가 없는 부부일지라도 상호 간의 사랑으로 결혼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봤다. 사랑의 연합과 교제를 부서보다 더 강조한 종교개혁자는 찾기 힘들다.

3.    장 칼뱅: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자 불순한 성관계의 치료책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부서에 버금갈 만큼 사랑의 연합과 교제를 강조한 인물이다. 부서와 칼뱅 둘 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성관계 없는 ‘영적인 결혼’을 유지하는 문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칼뱅은 결혼한 부부가 출산의 시기가 지난 후에도 ‘건강한 성생활’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결혼이란 “불순한 성관계의 치료책”이라고 정의하면서 “남편과 아내의 성적 친교는 순수한 것이요, 영예롭고 거룩한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순수한 제도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다.

칼뱅은 절제하기 힘든 정욕을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발생하는 죄악으로 인정한다. 이에 결혼은 그 죄악을 가려 주는 휘장으로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정욕이 죄악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해 준다고 가르쳤다. 결국 남녀 사이의 성관계는 ‘결혼의 영예’라는 보호막을 벗어날 경우 결코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칼뱅은 남자든 여자든 성욕을 억제할 수 없다면 반드시 결혼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간음과 간통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짓는 성적 범죄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였으나, 간음과 간통의 범죄는 16세기 종교개혁을 수용한 도시들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했고, 제네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씀을 토대로 하나 됨의 이상적 모델, ‘결혼’

구약의 몇몇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경우들을 예외로 규정한다면 성경은 일부일처의 남녀 결혼제도를 일관성 있게 지지한다. 또한 성경은 결혼을 타락 이전의 사건으로 제시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일정한 나이에 도달한 남자와 여자가 짝을 이루는 결혼은 단순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라는 신적 소명을 완수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지상적인 연합은 ‘하나 됨’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결혼 모델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 사이의 연합, 즉 사랑과 복종으로 엮인 연합에도 적용한다.

결혼을 통해 이뤄진 가정은 최소 단위의 사회이자 교회다. 여기서 성경은 동성애를 철저히 배제한다. 이유는 ‘생육과 번성, 그리고 충만’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연의 조건으로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룰 수 없게 방해하는 장애물이자 죄악의 결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성애가 비록 사랑이 전제된 것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일탈적이고 일그러진 사랑이자 진정한 사랑의 심각한 왜곡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성 간의 우정은 결코 이런 왜곡된 사랑이 아니기에 금지 대상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남녀의 성적인 연합과 결합을 오직 결혼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로 인정한다. 남자든 여자든 그리스도인이 성적인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 성경이 허용하는 것은 이성 간의 결혼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타락한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면 성경의 경고처럼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이혼이 예사요, 졸혼(卒婚)이 유행하는 시대다. 자유분방한 성 문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은 어쩌면 너무나도 낯설고 원시적일 것이다. 하지만 결혼의 울타리를 벗어난 모든 성행위를 성경이 금한다는 사실은 변할 수도 없고 변경할 수도 없는 진리다. 점점 결혼 적령기가 늦어지고 비혼(非婚)이 증가하는 현실 속에 우리는 성경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종교개혁자들은 결혼하지 않는 비혼 상태를 인간 삶의 가장 큰 불행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방해될 경우의 결혼은 예외로 인정한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을 결코 장려하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 교회 내 성적 타락은 항상 발생해 왔던 문제다. 개혁의 소리가 가장 크게 울려 퍼진 16세기뿐만 아니라, 성령에 사로잡힌 사도들이 말씀의 사역자로서 교회를 세우고 돌보던 사도시대조차 교회 내 성적 타락은 오늘과 같이 심각한 문제였다. 이런 사실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단 한 순간도 성적 유혹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지속적이고도 일상적인 경고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찰나의 잊음 없이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주

1) Johan Huizinga, Herfsttij der middeleeuwen (Haarlem: Tjeenk Willink & Zoon, 1950), p. 34: “Hij zag den tijd neigend naar zijn einde en al het aardsche naar het verderf.” 이 책은 1919년 초판 이후, 1940년에 출간된 제5판의 재판이다.
2) Otto Clemen ed., Luthers Werke in Auswahl 8: Tischreden (Berlin: Verlag von Walter de Gruyter, 1950), 1. no.12, pp. 18-21: “... vitae iucunda socia mulier. Mulieres parere et educare solernt liberos, administrant oeconomiam, ad misericordiam propensae sunt, sunt enim a Deo in hoc conditae, ut pariant, ut delectent viros, ut misereantur.”

 

황대우 고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네덜란드 아펠도른신학대학교(Th.D.). 저서로 《칼빈과 개혁주의》, 《종교개혁과 교리》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목회와 신학

10월의 주요기사

추천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