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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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21년  06월호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심층기획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참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에드워즈의 기본적인 문제 의식이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삶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에드워즈는 의문이 생겼다. 부흥의 때에 받았던 은혜는 참된 은혜인가? 부흥의 때에 고백했던 신앙은 참된 신앙인가? 참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

감정이란 무엇인가?

감정(affection)이란 무엇인가? 에드워즈의 정교한 논의를 생략하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감정은 지성의 기초 위에서 의지가 움직이게 만드는 마음의 작용이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감정은 반드시 지성과 관련이 있고 의지와 연결된다. 

예를 들어, 내가 탁구를 하고 싶은 감정이 있다고 가정하자. 탁구를 하고 싶어서 마음이 뜨거웠지만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탁구를 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 사람은 탁구에 대한 진짜 감정이 없는 것이다. 탁구에 대한 진짜 감정이 있다면, 먼저는 탁구를 알려고 노력하고 다음으로는 실제로 탁구를 칠 것이다. 탁구 용품, 게임의 규칙, 손과 발의 움직임, 그리고 탁구공의 회전량과 궤적 등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실제로 탁구장에 가서 탁구를 칠 것이며, 결과적으로 실력이 점점 좋아질 것이다. 

영적인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영적인 일에 대해서 마음이 뜨겁지만 영적인 일에 대한 지식도 없고 의지적인 실천도 없다면, 그것은 가짜 감정이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이 뜨겁고 하나님의 계시 말씀을 통해서 그분을 알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순종하는 삶을 산다면, 참된 신앙 감정이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가 말하는 감정(affection)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느낌(feeling)이나 정서(emotion)가 아니고, 어떤 특정한 순간에 불타오르는 듯한 뜨거운 격정(passion)도 아니다. 에드워즈의 감정은 지성을 품고 의지를 움직여서 한 사람의 삶의 표면에 인격의 흔적으로 표현되게 만드는 힘이다. 그래서 감정은 중요하다. 

감정은 마음에서 나온다. 성경은 마음을 인간 존재의 중심으로 본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마음에서 나오는 감정은 인간 행동의 근원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감정 안에 존재해야 한다. 신앙에 속한 일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에 생생하고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신앙에 속한 일이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았는데 감정이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다.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곳에는 신앙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은혜의 수단들인 기도, 찬양, 세례와 성찬, 설교 등은 마음을 감정적으로 고양시키고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감정이 중요하다고 해서 감정적 뜨거움을 무조건 인정하는 것은 올바른 입장이 아니다. 

반대로 감정적 뜨거움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은 검증이 필요하다. 감정들을 잘 구별해 참된 감정을 승인하고 거짓 감정을 거부해야 한다. 참된 감정과 거짓 감정을 구별하고 검증하는 일은 가능한가? 완벽한 검증은 불가능하다.

100% 완벽하게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특권이다.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죄와 부패 때문에 은혜와 은혜 아닌 것을 완벽하게 구별할 수 없다. 눈에 병이 나면 사물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입에 병이 나면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성도라면 어느 정도는 구별할 수 있다.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여기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는 에드워즈의 기본 명제를 다시 한 번 떠올려야 한다. 신앙 본질의 핵심 요소인 감정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감정을 보고 검증하고 구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완벽하게 은혜와 은혜 아닌 것을 구별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중심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밖에 없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중에는 신앙의 핵심 요소인 감정을 검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신앙 감정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삼으려고 했다. 

신앙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검증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에드워즈는 어떤 것들은 기준으로 삼기에는 불확실하고 애매하고, 다른 어떤 것들은 확실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확실한 기준 12가지와 확실한 기준 12가지를 소개한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이런 기준으로 한 사람의 신앙이 참된 신앙인지 거짓 신앙인지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한계가 있으나 노력할 필요는 있다. 이것이 에드워즈의 입장이었다.

불확실한 검증 기준

참된 신앙 감정과 거짓된 신앙 감정을 구별하는 검증 기준으로 삼기에는 불확실하고 불충분한 것들이 있다. 에드워즈는 불확실한 검증 기준 12가지를 제시했다(에드워즈는 “검증 기준”이 아니라 “표지”(sign)라는 용어를 썼지만, 우리는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서 검증 기준이라는 용어를 쓸 것이다). 12가지 기준들을 다 소개할 수 없어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계가 많은 부분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첫째, 마음이 뜨거우냐 아니냐는 확실한 검증 기준이 아니다. 물론 참된 신앙은 거룩한 감정에 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일이 영혼을 사로잡았다면 강력한 감정이 생긴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마음이 뜨겁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참된 신앙에서 나오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뜨거워져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후 광야 여행길에서 하나님께 불평하고 심지어 배신하기까지 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수많은 무리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찬양하고 기쁨으로 환호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 한두 번 부흥 집회나 찬양 집회에 가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온몸이 떨리는 전율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신앙이 참되다고 판단할 수 없다. 

둘째,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확실한 검증 기준이 될 수 없다. 신앙 체험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생각난다고 하더라도, 그때 생기는 감정이 반드시 참된 감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마귀도 성경 구절을 사람 마음에 떠올리게 할 수 있다. 심지어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성경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성경 구절이 갑자기 떠오르고 마음의 감정이 고양됐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 은혜로운 감정인지, 마귀의 속임수로 인한 가짜 감정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확실한 검증 기준이 될 수 없다.

셋째, 외관상으로 사랑의 모습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검증 기준이 될 수 없다. 원래 좋은 것일수록 모조품도 많다. 사랑의 모조품은 매우 많다. 구원의 은혜가 없어도 사람들은 참된 사랑의 겉모습을 모방할 수 있다. 
넷째, 신앙적인 일들(성경 읽기, 기도, 찬양, 그리고 설교 듣기 등)을 외적으로 많이 행하고 그 일에 열심을 내고 기뻐하며 시간을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 확실하게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나 기준이라고 할 수 없다.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양할 것이다. 하지만 가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외적으로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확실한 검증 기준이 아니다. 
다섯째, 자기 스스로 과도하게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 “저 사람의 신앙은 진짜야”라고 인정해 주는 것은 확실한 검증 기준이 아니다. 참되고 경건한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누가 참되고 믿는 자들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없다. 그들은 사람의 중심을 볼 수 없고 단지 외면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확실한 검증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확실한 검증 기준

그렇다면 확실한 검증 기준은 무엇인가?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확실한 검증 기준이 될 수 있는 것들의 기본적인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에드워즈의 논의는 감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감정이 신앙 본질의 핵심 요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확실한 검증 기준 12가지는 참된 신앙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둘째, 신앙 감정의 관점에서 보면, 확실한 검증 기준 12가지는 감정의 원천에 관한 것, 감정이 수반하는 것, 그리고 감정 자체의 속성이라는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겠다. 에드워즈의 참된 감정은 중생과 회심을 체험하고 올바른 영적 지식을 가진 성도의 마음에서 나온다. 필자가 보기에는 너무 당연한 말을 약간 새로운 관점에서 새롭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참된 성도의 마음에서 나오는 감정은 언제나 인간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리고 이 감정은 기본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자 하며 반드시 실천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셋째, 이러한 신앙 감정의 기준으로 100% 확실한 검증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에드워즈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제시할 뿐이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확실한 검증 기준 12가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편의상 이 검증 기준 12가지를 6개의 항목으로 나눠 살펴보려고 한다.

1.     성령의 내주와 새로운 마음의 감각
성령의 내주와 새로운 마음의 감각에서 나오는 신앙 감정은 확실한 검증 기준이고, 참된 신앙 감정이며,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령님께서 성도의 영혼 속에 지속적으로 내주하시면서 새로운 본성의 원리 혹은 생명의 원리로서 자신을 발휘하시고 거룩을 전달하신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면 성도는 중생과 회심을 체험하는데, 중생과 회심의 체험은 인간 존재 전체가 변화하는 순간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인간 존재 전체의 변화를 새로운 영적 감각이 생긴 것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이 내주하시면 새로운 마음의 감각이 생긴다고 이해해도 좋다(새로운 영적 감각과 새로운 마음의 감각은 거의 동의어다). 새로운 마음의 감각(new sense of heart)은 에드워즈의 전문 용어다. 새로운 마음의 감각은 영적인 일들을 보고 느끼고 깨닫는 감각으로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 새로운 마음의 감각이 없다. 

하지만 이 새로운 마음의 감각은 인간 영혼에 추가된 새로운 기능이 아니고 이미 존재하는 인간 본성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본성의 새로운 원리다. 인간의 본성적인 5가지 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및 촉각-과는 별개의 것으로 추가된 제6의 감각이 아닌, 신체적 오감의 새로운 작동 원리 같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에드워즈는 꿀을 맛보는 비유를 든다. 한 사람은 정상적으로 미각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날 때부터 미각이 없다고 하자. 전자는 꿀의 달콤한 맛을 알기 때문에 좋아하지만, 후자는 꿀의 색깔이나 촉감을 좋아한다. 둘 다 꿀을 좋아하는 것은 공통점이지만 꿀을 좋아하는 감각의 근원적인 토대는 전혀 다르다. 새로운 마음의 감각(새로운 영적 감각)도 이와 같다. 영적이고 신앙적인 일에 속한 것의 본래의 맛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과, 영적인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마음의 감각에서 나오는 신앙 감정이 참된 신앙 감정이다.

2.    하나님의 도덕적 거룩함
새로운 마음의 감각은 하나님의 도덕적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맛보는 감각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맛볼 때 참된 신앙 감정이 생긴다. 하나님의 도덕적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논하기 이전에 에드워즈가 강조한 한 가지를 소개하겠다. 신적인 일들의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질 그 자체를 맛보고 느낌으로써 생생한 신앙 감정이 생긴다면 그 감정은 참된 신앙 감정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내가 얻게 될 영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에 마음이 더 많이 끌려서 어떤 감정이 생긴다면 참된 신앙 감정이 아니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입장을 좀 더 극단화시켜서 해석하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감격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자기 이익(물론 영적 이익이다)에 마음이 더 많이 끌렸기 때문일 수도 있어서 불충분한 감사와 찬양이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일이 너무나 탁월하고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본질에 더 적합하다. 
한편, “하나님의 도덕적 거룩의 아름다움”에 대한 에드워즈의 생각은 매우 중요하다. 에드워즈는 참된 성도라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더 마음이 끌리고 더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마귀를 예로 들었다. 마귀는 강한 힘과 대단한 지식을 갖고 있지만 사랑스럽기보다는 혐오감을 준다. 능력과 지식이 있어도 거룩함이 없다면 사랑스럽지 않고 오히려 혐오스럽다. 거룩함이 있어야 능력과 지식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울 수 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도덕적 거룩함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했다. 참된 성도가 새로운 마음의 감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러한 신앙 감정은 참된 신앙 감정의 본질에 속한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논의는 기독교 신학을 미학적 차원으로 확장시켜 놓은 중요한 공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3.     영적인 지식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생긴 새로운 마음의 감각을 통해 얻은 영적인 지식에서 참된 신앙 감정이 나온다. 에드워즈는 지식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감각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이다. 자연인도 감각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을 갖고 있고, 성도들도 감각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을 갖고 있다. 단순화시키면, 성도들의 감각적 지식이 영적인 지식이다. 영적인 지식은 일반적인 지식이나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교리적인 지식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지만, 그것이 영적인 지식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말한다. 영적인 지식은 일차적으로 선하고 거룩한 것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영적인 감각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도덕적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채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모든 것들은 교리적인 지식일 수는 있어도 영적인 지식일 수는 없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은 수학자처럼 음의 비율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추론하지 않아도 한 번 들으면 음의 조화를 안다. 미식가도 음식을 맛보면 긴 추론의 과정 없이 바로 그것이 좋은 음식인지 아닌지 안다. 영적인 지식은 신앙에 속한 일들을 맛볼 때, 그것이 참된 신앙의 맛인지 거짓 신앙의 맛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다. 이러한 영적인 지식에서 참된 신앙 감정이 나온다. 그러므로 신앙 감정은 빛 없는 열이 아니다. 신앙 감정은 신적인 일들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의 빛이 비췰 때 그 빛에서 솟아나는 밝은 뜨거움이다.

4.     본성의 변화
참된 신앙 감정은 본성의 변화, 성품의 변화, 인격의 변화를 수반한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은혜로운 감정은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본성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신앙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앙 감정이 먼저이고, 본성의 변화가 뒤를 따른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성도의 영혼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시면 새로운 마음의 감각이 생기고 이것이 새로운 본성의 영적 원리로 작동하면 영적인 지식이 생기고 여기에서 영적인 감정이 흘러나오고 성도의 전 인격에 걸쳐서 전반적인 성품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에드워즈가 그리스도인의 성품 중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겸손, 온유, 사랑, 용서 및 자비와 같은 것들이다. 

에드워즈가 이런 신앙적인 성품들을 어떤 근거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강조하는가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온유라는 성품을 설명한 방식을 살펴보겠다. 온유는 용기와 열정과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온유한 사람의 용기는 야수적인 맹렬함이 아니고 악과 정욕과 감정을 다스리고 통제하며 죄와 싸우고 선한 감정과 성향을 따라가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의 열정은 달콤한 불꽃과 같다. 그의 열정은 이글거리며 사람들을 불태워 버리는 거친 열정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부드럽고 충만한 열정이다. 내 생각에는, 에드워즈가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성품 중에서 강하고 남성적인 측면보다는 부드럽고 여성적인 측면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이 있는 감정
참된 신앙 감정은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이 있다. 에드워즈는 성도와 위선자를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위선자란 거짓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의미와 좀 다르다. 위선자는 구원의 기쁨은 크지만 죄의 슬픔은 별로 없다. 성도는 구원을 기뻐하지만 이와 동시에 죄에 대해서 슬퍼한다. 위선자는 은혜를 기뻐하지만 두려워하며 떨지는 않는다. 성도는 소망과 기쁨이 있지만 이와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이 있다. 위선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크고 강해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자비의 정신은 별로 없다. 위선자는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지만, 반대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납게 대한다. 어떤 위선자는 이웃과 해외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좋아하는 척 하지만 자신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에는 태만하다. 어떤 위선자는 다른 사람들의 물질적인 생활에는 사랑을 베풀지만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는다. 반대로 다른 어떤 위선자는 사람의 영혼을 많이 사랑하는 척 하지만 그들의 물질적인 생활을 돌보고 자비와 자선을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 

위선자들의 신앙 감정에는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이 전혀 없다. 위선자들은 유성과 같아서 잠시 동안 화려하고 강력하게 불타오르지만 얼마 후에는 사라져 버린다. 참된 성도는 별과 같아서 떴다가 지고 종종 구름에 가리지만 지속적으로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언제나 빛을 발한다.

6.     기독교적 실천
참된 신앙 감정은 반드시 실천이 따른다. 기독교적 실천은 신앙 감정의 확실한 검증 기준 12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신앙감정론》에서 실천에 대한 내용은 책 전체의 20%에 해당하는 분량을 차지한다. 이 사실은 에드워즈가 기독교적 실천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은혜가 주입되는 하나님의 역사인 중생은 실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실천은 은혜의 목표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다”(엡 2:10). 참으로 실천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표다. 실천은 은혜의 목표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목표라는 선언은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강력한 진술이다. 구원의 은혜는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변화된 성품을 통해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활동한다. 실천은 구원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증거고 기준이다. 

한편, 에드워즈에게는 실천이 내적 체험과 연합을 이루는 중요한 체험이기도 하다. 에드워즈는 영혼과 몸의 불가분리적 연합의 성격을 강조한다. 동일한 은혜의 작용이 영혼의 내적 체험과 몸의 외적 실천이라는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몸의 외적 실천은 영혼의 내적 체험을 외부적으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기독교적 체험을 실천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모든 기독교적 실천을 체험이라고 부를 수는 있다. (중략) 실천은 체험 중에서 중요하고 특징적인 부분이다.” 

에드워즈는 실천을 마음과 연합된 몸이 외부 세계와 사물과 부딪침으로써 겪는 체험이라고 생각했다. 내적인 체험이 얼마나 영적이고 올바른지는 그 사람의 실천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겠다.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실천에 대한 강조가 결코 이신칭의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실천은 은혜의 근거가 아니라 은혜를 증명하는 증거이고 기준이다. 종교개혁자들뿐만 아니라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도 실천 혹은 성화는 칭의를 증명한다.

허락된 지면의 제한으로 논리의 비약이나 설명이 불충분한 부분이 있다. 그래도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에드워즈를 더 잘 알고 싶은 분들은 그의 대표적 저서인 《신앙감정론》을 꼭 읽어 보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이진락 목동반석교회 부목사. 총신대학교 (Ph.D.). 저서로 《신앙과 감정》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