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 {{x.scr_name}}
  • 미분류

신학·설교 2021년  04월호 읽기 읽는다는 것, 그 사랑의 만남 이야기 심층기획 일상 신학

필자는 최근 ‘설교 쓰기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이미 책을 여러 권 낸 목사님과 부목사님들이같이 스터디도 하고, 설교 코칭도 해 주고 있다. 워크숍을 진행하는 목사님은 설교가 청중에게 들리지 않는 궁극의 이유를 ‘읽기’의 부족에서 찾았다. 읽지 않으니 생각이 없고, 생각이 없으니 말이 안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글은 더 말해 무엇할까.

독서 능력이 떨어져서 학습이 안 된다는 말을 초중고생은 물론이고 대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들에게서도 심심찮게 듣는다. 무슨 말을 해도 잘 못 알아듣는단다. 한숨을 푹푹 쉰다.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세계적으로 최저 수준이다. 우리 국민 절대 다수가 글자를 읽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문해력도 최저다. ‘문해력’은 OECD 국가 중 최하위라는 보고서도 있다. 

그렇다면 읽기 능력의 저하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읽기와 신앙의 상관관계는 없는 걸까? 문해력 저하가 사실이라면, 기독교인의 성경 독해 능력도 떨어지지 않을까? 성경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역으로 성경에 내 욕망을 덧씌울 공산이 크다. 하여, 묻는다. 읽느뇨? 읽는 것을 깨닫느뇨(행 8:30)?

읽기 = 만남 = 신학 

읽기와 신학은 별개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둘을 공통분모로 묶는 키워드가 있으니 바로 ‘만남’이다. 읽기도 신학도 만남이기에 읽기와 신학은 만남을 매개로 삼아 하나로 엮인다.

읽기가 왜 만남일까? 읽기 또는 독서에 관한 비유는 참 많다. 광산의 광맥을 캔다, 길을 걷는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자 여정이다 등등 멋진 표현도 있다. 여행과 흡사한 언어가 만남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 낯선 세계와의 낯선 만남이 여행일 테니까. 나 아닌 남, 나 아닌 것과의 조우가 인생이기도 하니까. 하여, 읽기는 만남이다.

김기현 로고스서원 대표. 침례신학대학교(Ph.D., 현대영미신학). 저서로 《불완전한 삶에게 말을 걸다》,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