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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21년  01월호 중세 문명 다시 보기 심층기획 중세 교회사 다시 보기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재현

중세 미학과 기호학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로 명망을 얻은 이탈리아 학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는 1980년 수도원 독살 사건을 다룬 소설을 출판해 큰 주목을 받았다. 그의 첫 소설인 《장미의 이름》은 40여 개국에서 번역되었으며 1986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책 출판 직후 서구의 상당수 대학에서는 이 소설을 중세사 수업 교재로 사용했고, 역사학 분야 학회들에서 학술 토론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 학자들은 ‘장미의 이름 신드롬’을 계기로 중세를 대중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시사점을 얻고자 했다. 에코는 중세의 사료들을 읽으며 익힌 시대적 감각을 토대로 이 소설에서 당대의 문화와 종교, 일상과 사상을 묘사했다.1 그는 아드소라는 한 수련 수사가 경험했을 법한 14세기 초 세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수도원, 중세 필사본, 이단 재판, 빛의 미학, 청빈 논쟁, 육체적 본능과 사랑 등 다양한 소재를 섬세하게 배치해 재현했다. 뉴욕 타임즈에 실린 서평에서는 에코에게 “현대인 중 중세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제약으로 인해 한 편의 소설로 중세 전체를 오롯이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에코는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중세》를 주제로 한 일종의 방대한 백과사전도 기획했다. 그는 수백 명의 학자를 동원해 유럽의 중세가 얼마나 다채롭고 풍요로운 시대였는지 드러내고자 했다. 이 책의 ‘전체 서문’에서 에코는 중세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와 편견에 대해 여러 쪽에 걸쳐 해명했다. 그에 따르면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고전 문화나 과학을 무시하지 않았다. 또 교회가 내세운 정통 교리만 넘쳐나던 시대도 아니었다.2 이처럼 에코는 평생에 걸쳐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르네상스기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된 중세에 대한 폄훼와 왜곡을 불식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을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중세를 바르게 알리려는 그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대한 인식이 현재까지도 그다지 개선되지는 않은 듯하다.

‘암흑 시대’라는 평판

전통적으로 유럽의 중세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비잔티움 제국(혹은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한 1453년 혹은 에스파냐에서 무어인들이 추방되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 사이를 지칭하는 시기로 한정한다. 대다수 교과서에서도 이런 기준에 따라 서술되고 있다. 특정 해에 한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는 없기에 전문 연구자들은 통상 500년에서 1500년 사이 약 1000년 동안의 시간을 중세(中世)로 간주한다.3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세의 시공간적 맥락과 다양성을 깊이 고려하지 않고, 대체로 중세와 ‘암흑 시대’(The Dark Ages)를 동일시한다. 그 결과 ‘중세적’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동서양 모두에서 낡고 부정적인 시대상을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된다.4 이 용어가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 원인은 다양하지만, 고대나 근대와 달리 유독 중세에 대해서만 그토록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암흑 시대’(saeculum obscurum)라는 용어는 고대를 동경하던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이 14세기에 처음 사용했다. 그들이 볼 때 인류 역사상 문명의 두 정점이 있었는데, 로마와 피렌체로 상징되는 고대와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문화였다. 반면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중세에는 그에 비견할 정도로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중세의 고전 문명에 대한 무지를 강조하기 위해 ‘빛’과 대비되는 ‘암흑’이라는 당대인에게 익숙한 은유를 사용해 표현했다. 

이와 같은 중세상을 제안한 인물이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였다. 그는 1347년에서 52년 사이에 De secreto conflictu curarum mearum (비밀스러운 갈등에 대한 나의 고민)이라는 3부작을 집필했다. 그리스-로마의 고전이라는 우물에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길어 올리려 시도하던 페트라르카는 신앙, 인문주의 등을 다룬 이 책에서 고전고대에 대해 무지한 중세를 배제하고 고대(古代)와 자신이 살고 있던 당대(當代)를 연결시키면서 역사가 자연적 시간에 의해 동일한 속도로 진행된다는 전통적 시간관을 거부했다. 그는 중세를 ‘암흑 시대’로 평가절하한 반면, 당대와 미래에는 인간에게 긍정적인 발전이 가능하리라고 낙관했다.5

사실 이 책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조반니 보카치오와 필리포 빌라니 같이 긴밀히 교류하던 소규모 집단 내에서만 공유되었을 뿐이며, 좀더 광범위한 계층에게 알려진 것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인문주의 시대의 중세상은 특히 이성의 빛으로 비이성의 어둠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던 계몽주의 시대에 더욱 확산되고 나아가 고착화되었다. 대표적으로 볼테르는 계몽운동과 문명의 승리를 찬양하고, 중세를 “야만, 미신, 무지, 그리고 폭력이 지배했던” 시기라며 하찮게 여겼다.6

인문주의자들에서 유래된 중세에 대한 비판은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을 주도한 게르만들이 ‘위대한’ 로마 혹은 고전 문명을 파괴한 ‘반(反)문명주의자’라는 주장이다. 그들은 게르만을 야만족과 동일시하고 고도로 발달한 인간주의적 문명을 파괴한 주범이라 단정한다. 그러나 로마 문명 및 사회는 멸망 직전에 이미 여러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게르만 대이동은 이미 내적인 문제로 위기에 봉착한 제국을 재편하게 된 계기였을 뿐이다. 또 이들 새로운 이주민들은 로마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상당 수준의 문명을 이루고 있었기에 해체된 제국을 분할해 로마인을 피지배민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이동 과정에서 고대 문명이 적지 않게 파괴되기는 했지만, 게르만들은 로마 문명을 존중하고 있었기에 의도적으로 기존 문명을 파괴하지 않았다. 대다수 게르만 지배층은 대이동 전에 이미 로마화되었고, 기독교(아리우스파)까지 수용했으며, 제국의 유산들을 활용해 통치할 역량도 지녔다. 게르만들의 문명 파괴로 갑작스레 암흑 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니다. 

둘째, 종교 혹은 제도로서의 기독교가 중세 내내 인간의 자유를 억압했으며, 기독교는 ‘신본주의’,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이분법적인 논리로 비판한다. 이런 도식적인 해석은 인문주의자들의 사상을 왜곡한다. 르네상스 회화들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인문주의자들은 과거에 비해 인간주의적인 요소를 강조한 것이었지 반(反)기독교적 입장을 고수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중세 교회가 당대에 모든 영역을 통제하려 시도했고, 그로 인해 인간의 자유와 지성까지 억압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은 사실이나,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속성을 지녔다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이 종교가 인간의 문명적 발전을 견인하며 현재까지 존속할 수 있겠는가? 일부 인문주의자들이 고대-중세-근대를 극단적인 단절적 시각으로 인식하고, 특히 중세를 부정하려 든 것은 사실 자기 시대를 긍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종교개혁가들도 얼마 후 앞선 시대를 폄하하며 왜곡된 중세상 형성에 동조했다. 이들은 개혁에 대한 명분을 얻기 위해 중세를 ‘암흑 시대’로 치부하고 교회의 부패와 당대의 폐단을 과장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한편, 근대 초 지식인들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지나치게 미화한 반면, 암흑 시대로 간주한 중세 문명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만한 기준이나 척도를 제시한 바가 없다. 문명의 발전, 당대인의 삶의 질, 기술 발전 등 적절한 척도를 동원해 사회나 문명 전반을 비교하여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위대한’ 아테네와 로마 제국이 유지되기 위해 권력 투쟁과 전쟁을 끊임없이 반복했고, 생산을 담당한 무수한 노예들의 희생을 당연시했으며, 엄청난 부와 재산은 결국 소수의 지배 계층만이 독점했던 사실을 그 시대에 대한 평가에서 철저히 간과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던 고전 사상과 지식 문화 같은 일부 측면을 중심으로 단편적으로 비평했을 뿐이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 후 고대의 화려했던 도시들이 위축되어 모든 면에서 퇴보한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중세 농촌사회에서 진행되던 미시적이고 장구한 변화가 그리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중세에는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이 없었기에 고대에 비해서도 퇴보한 시대라는 일부 학자의 주장들에 대해서도 근래의 다양한 논의가 충분히 반박하고 있다.7 수도사들이 개발한 농업 기술과 자연 동력은 유럽의 농촌에 생산력 증가와 더불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선박의 발전과 대포의 주조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적인 혁신을 이루었다. 관개, 크랭크(crank), 야금술, 글라이더, 시계 등 중세 시대에 진행된 다양한 혁신과 시도가 없었더라면 근대적 성취가 불가능했다는 점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8 

유달리 중세인들에 대해서만 우리와 크게 다른 부류의 인간으로 간주하며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이유는 별로 없을 듯하다. 유럽의 여느 대도시에서나 우리의 시야를 사로잡는 고딕 성당들은 주로 12, 13세기에 건축되었다.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그렇게 높고 멋진 구조물을 쌓아 올린 기술만으로도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것은 당대의 신학 사상을 구현한 산물일 뿐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기술의 혁신과 축적의 결실이었다. 아울러 그와 같은 유물들에서 중세인들이 지닌 미적 감각마저도 우리 못지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20세기 초까지도 일반 교양서뿐 아니라 중세의 문학, 종교, 역사를 다루는 책들에서 중세를 암흑 시대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9 그러나 현재는 전문학술서는 물론이고, 일반 사전들에서도 더 이상 그와 같은 평가를 지지하지 않는다.10 그렇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오래된 낡은 관념이 여전히 강고하다. 중세를 암흑 시대로 보는 관점은 중세를 잘못 이해한 결과이고, 중세를 역사에서 없었더라면 좋았을 시대로 보는 태도는 다름 아닌 그 시대에 대한 무지와 편견 때문이다. 이는 한편으로 중세 연구자들이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한 탓이지만, 동시에 일반인들이 그 시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려 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중세에 대해 만연한 근대주의적 시각 혹은 ‘상상된 이미지’에서 벗어나야만 중세를 당대의 시각으로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다.11 앞서 언급한 에코의 소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중세에 대한 현대인의 판타지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광신주의, 이교에 대한 편협성, 만연한 역병, 빈곤, 전쟁, 대량 학살 등을 지적하며 중세를 암흑 시대라고 주장한다면 유럽의 경우 이는 기껏해야 중세의 처음 몇 세기에만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반인륜적인 마녀 사냥이나 노예 제도가 절정을 이루고 있었지만 당대인 대부분이 반성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시기는 다름 아닌 ‘근대’였다는 사실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끔찍한 세계대전이 두 차례나 반복된 시기는 합리성이 고도로 발달했다고 자부하던 20세기였다. 편견에 매몰되지 않고 한 시대 전체를 종합적이며 균형 있게 파악하는 것이 과거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방식이 될 터다.

중세는 신앙이 지배했던 시대?

중세 유럽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에는 ‘기독교 세계’(Christendom) 또는 ‘기독교 공동체’(civitas Christiana, Corpus Christianum)와 동일시하려는 입장이 있다. 기독교 세계라는 용어는 다양한 함의를 포함하는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혹은 기독교 신앙에 의해 운용된 사회 혹은 국가라고 정의한다. 역사적으로는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구축한 후기 로마 제국과 그 영향으로 형성된 중세 유럽을 지칭한다. 크리스토퍼 켈러(Christopher Keller, 1638-1707)가 이런 입장을 견지한 선구자였다.
 
켈러는 1694년 신설된 할레 대학 역사학 교수로 초빙되기 몇 해 전부터 고대사, 중세사,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던 17세기까지 포괄한 근대사를 각각 저술했다.12 이 책들에는 오늘날에도 친숙한, 역사 시대를 고대, 중세, 근대의 세 시대로 나누는 시대 구분이 처음 등장한다. 저자는 이른바 기독교적 관점으로 시대를 구분했으며, 중세를 ‘기독교 시대’라는 관점 하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기부터 오스만 튀르크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까지” 서술했다. 독일과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시대 구분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에 따르면, 고대는 이교도 시대였고, 중세는 기독교 시대였다. 반면 근대는 탈기독교 시대로 나아갔으며, 통상 20세기를 지칭하는 현대는 다종교사회라는 성격으로 구분된다. 

전통적인 역사문화적 관점에서는 서유럽이 중심된 기독교권을 ‘기독교 세계’로 상정하고,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서유럽과 라틴계 유럽만을 포함시켰다. 반면 그리스와 지중해 그리고 슬라브 지역을 아우르는 동방 기독교 영역은 배제했다. 한편 유럽이 애초부터 기독교적인 세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다 넓은 의미의 유럽 개념을 주장하는 견해들도 있다. 2세기 이래 소아시아와 그리스 및 지중해 주변에 퍼져 있던 기독교 공동체들이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기 혹독했던 박해의 종식을 계기로 이탈리아를 비롯한 로마 제국 중심부에도 받아들여졌으며, 정치적 후원으로 인해 제국의 경계 내에서 기독교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 후 서로마 제국이 몰락할 무렵 제국 너머에도 기독교가 전파되어 대략 1000년경에 이르면 현재 유럽 대륙을 아우르는 대부분의 지역에 기독교가 수용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유럽 내 일부 슬라브 지역은 비기독교적인 지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특히 리투아니아는 가장 늦은 1386년에 지배세력에 의해 기독교가 받아들여졌다. 이 종교가 개종을 적극 찬성하지 않은 민중의 의식에 깊이 뿌리내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중세 내내 유럽 대륙은 기독교화가 진행되던 과정이었다. 그와 같은 과정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공통적 역사적 경험이 미미하고 다양한 요소가 깃든 이 넓은 유럽 대륙과 긴 시간대를 포괄하는 중세 유럽 세계를 하나의 단편적인 성격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서유럽에 한정할지라도 중세가 진정 신앙이 지배했던 시대였으며, 이성과 합리성보다 신앙과 믿음이 우선한 기독교 세계였는지도 의문이다. 혹자는 7성사로 대변되는 성례전 체제가 확립되어 신자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기반이 신앙에 의해 구성되었다거나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체제가 전 유럽에 걸쳐 확립된 것을 근거로 이와 같이 주장한다. 그렇지만 신앙의 내용이나 민중 문화 등을 들여다보면, 그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남아 있는 대부분의 중세 사료는 성직자들의 기록이다.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종교인들이 무엇을 의도하고 또 어떤 사회를 만들려 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중세 성직자들은 자신의 시대를 성경에 근거하고 기독교라는 세계관에 기초한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즉 예수에 의해 시작되었고, 최후의 심판이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진행되는 구속사의 마지막 과정으로 보았다. 1300년경 독일 엡스토르프 수녀원에서 제작된 세계지도는 당대의 세계관을 잘 반영한다. 반면, 통치와 치리의 대상이었던 민중들이 그와 같은 지배적인 세계관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으며, 교회의 가르침대로 수용했는지 여부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로 인해 오랜 기간 민중들은 성직자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수용했으며, 중세 말에 가서야 집단 혹은 계층들 사이의 인식에 균열이 생기는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여러 새로운 연구는 그와 다른 결과를 시사한다. 

우선, 태양신 숭배자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교에 매우 관용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제국 말기의 기독교화가 이교 문화와의 혼합을 초래했다. 이는 이교가 번성하던 그리스와 에데사 등만이 아니라, 게르만들이 정착한 서유럽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방의 이교나 게르만의 토속종교는 풍년이나 건강을 기원하는 주술 형태로 중세 초에 살아남았으며, 기독교의 의식으로 폭넓게 수용되었다. 이교적 속성은 축제와 연극 등 중세 내내 민중들의 생활과 의식에 잔존했으며, 이는 다양한 자료에서 확인된다.13 

20세기 후반의 미시사 혹은 문화사 연구들도 감춰져 있던 중세의 민중 문화를 드러낸다. 카를로 진즈부르크가 집필한 《치즈와 구더기》는 메노키오라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한 방앗간 주인에 대한 이단 재판 기록을 토대로 했다.14 이 인물은 지식인이 아니었지만, 기독교를 교회의 가르침과 달리 자기 방식대로 독창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했다. 이는 종교기관들이 유럽에서 1000년에 걸쳐 기독교를 전수했지만, 민중들이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메노키오의 독자적 사고가 중세 민중 문화의 전통에서 기원했다고 해석한다. 메노키오는 이단 심문관과의 대화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 중 가장 완벽한 존재인 천사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혼돈과 무질서 중에 거대한 물질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도 재료가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며 세상의 창조에 대해 유물론적 인식을 표출했다.15 그는 이단으로 판결받고 목숨을 잃게 될 위기에서도 그 모든 생각이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저자는 중세 말 근대 초에 지배 문화였던 기독교와 결이 다른 민중 문화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엠마누엘 르루아 라뒤리의 《몽타이유》도 중세인의 삶과 신앙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16 여기에서도 라뒤리는 일차 사료인 재판기록을 활용해 1300년 전후 남부 프랑스의 농촌 문화를 성공적으로 재현했다. 당시 몽타이유 지역에서 성 풍속은 느슨했으며, 매춘도 관용했다. 그리고 성에 대해 문란한 것은 성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세를 거치며 교회는 민중에게 체계적인 기독교 교리와 윤리를 주입하려 애썼지만, 그에 성공하지 못했다. 몽타이유 사회에서 기독교는 그저 피상적으로 덧씌워진 것에 불과하다. 중세 내내 이교적인 문화가 유지되어 왔을 뿐 아니라, 민중에게 기독교 못지않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저자는 ‘기독교적 중세’는 하나의 신화라고까지 주장한다.

이와 같은 발견들을 염두에 둘 때 유럽 세계가 “16세기 이후 탈기독교화한 것이 아니”라거나(장 들뤼모, Jean Delumeau), 심지어 “중세는 결코 기독교화한 적이 없었다”(자크 투사에르, Jacques Toussaert)는 다소 과격한 주장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17 이들 새로운 연구들의 결론을 한마디로 줄이면, 중세 유럽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듯 교회가 신앙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던 기독교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몇몇 연구들만으로 중세 사회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완전히 전복시키기는 어렵겠지만, 전통적 관점이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도 명백해졌다.

중세 유럽에서는 사실상 기독교가 유일한 종교였다. 이교적 민중신앙과 유대교 및 이슬람교의 지분이 어느 정도 존재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교와 민중종교의 영향력은 미미했거나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중세 유럽인 스스로가 ‘기독교 세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카롤루스가 기독교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해 하나의 정치체로 통합한 798년에 카롤링 제국을 대표하던 지식인 알퀴누스는 그 정치적 단위의 성격을 “기독교 왕국”(Imperium Christianum)이라 표현했다. 이 이후로 기독교는 최소한 명분에 있어서라도 서유럽의 정치체와 사회를 대변했다. 그로 인해 중세 성기(中世盛期) 이래 유럽이 ‘기독교 세계’로 불린 것은 하나의 전통이자 관행이 되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이런 단편적 진술이나 판단을 근거로 중세를 ‘기독교화 되었던 세계’로 규정하는 것은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현재 문명의 어린 시절

중세가 암흑 시대도 아니고 기독교 세계도 아니라면 어떤 시대였다는 말인가? 에코는 《중세》의 전체 서문에서 중세의 시대적 성격이나 특성을 제시하기보다는, 무엇이 중세가 아닌지를 20쪽 이상에 걸쳐 설명했다. 그가 이런 방식으로 서술한 것은 중세의 성격을 단편적으로 규정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고대와 근대에 대해 단편적인 시대 규정이 없다는 점을 떠올리면 납득이 쉽다. 심지어 한 위인의 삶도 단편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데, 그 광활하고 오랜 시공간을 어찌 인상적인 몇 개의 단어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중세는 1000년에 걸쳐 계속 변신을 거듭했다. 개중에는 암흑시대로 보여지는 지점도 있고, 기독교가 지배한 듯이 보여지는 지점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내적 외적 요인이 어우러져 그 시대를 풍요롭게 하거나 위기로 내몰았고, 중세인들은 당대의 과제와 도전에 맞서며 근대 세계로 들어섰다. 중세의 성격을 명료하게 규정하는 것은 많은 부분을 생략하거나 왜곡을 각오해야 가능한 일이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중세는 한 성인의 육체 및 사고의 골격과 근육을 형성하는 시기였다. 한 인간에게 과거의 시간은 흘러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축적되며 다양한 특성으로 발현된다. 그로 인해 후에 어린 시절에 겪었던 다양한 경험과 성장통이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음을 회고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세는 현대 문명의 기반이 구축되던 “뿌리이자 출처이며 어린 시절”이었다.18 



1)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2), pp. 35-39.
2) 움베르토 에코 편, 《중세》 제1권, 김효정·최병진 옮김 (시공사, 2015), pp. 12-46.
3) ‘중세’가 아닌 다른 용어로 그 시대를 표현하려는 시도도 있으며, 1800년까지도 중세와 동질적인 시기로 간주하려는 입장도 있다. Dietrich Gerhard, Old Europe. A Study of Continuity, 1000-1800(New York, 1981), pp. 3-7.??4) 중세사가 로빈슨은 1984년의 글에서 미국에서 ‘중세적’이라는 용어가 주로 고문, 전쟁, 독재 등과 같은 명사를 수식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Fred C. Robinson, “Medieval, The Middle Ages”, Speculum 59(1984), pp. 752-754.
5) Theodor Ernst Mommsen, “Petrarch’s Conception of the Dark Ages”, Speculum 17(1942), pp. 226-242.
6) Voltaire, Essai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6).
7) Edward Grant, The Foundations of Modern Science in the Middle Ages. Their Religious, Institutional, and Intellectual Contexts(Cambridge/N.Y., 1996) 참조.
8) Jean Gimpel, The Medieval Machine: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Middle Ages(New York, 1976) 참조.
9) 윌리엄 페이튼 커는 1904년 출판한 저서 The Dark Ages의 서두에서 “암흑시대와 중세는 통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고 설명했다. William Paton Ker, The Dark Ages (New York, 1904).
10) Paul Fouracre(ed),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ume 1 c.500?c.700. (Cambridge, 2005), p. 90.
11) Otto Gerhard Oexle, “The Middle Ages through Modern Eyes. A Historical Problem”, Transactions of the Royal Historical Society 9(1999), pp. 121-142 참조.
12) 라틴어로 저술한 켈러의 저작은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가 각각 1685년, 1698년, 그리고 1702년 출판되었다. 1702년에는 Historia universalis, breviter ac perspicue exposita, in antiquam, et medii aevi ac novam divisa, cum notis perpetuis (고대, 중세, 근대로 구분하여 간명하게 서술한 보편사.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기존에 출판된 책들까지 모두 아울러 3권으로 간행되었다.
13) 아쉽지만 여기에서는 참고 문헌만 언급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Ramsay MacMullen, Christianity and Paganism in the Fourth to Eighth Centuries(New Haven, 1997) 참조.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하는 핼러윈 축제가 본래 북유럽의 게르만들이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축제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만성절은 이러한 이교적 민중 문화를 기독교의 체제 안으로 흡수하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간주된다.??14) 카를로 진즈부르크, 《치즈와 구더기: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김정하·유제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15) 카를로 진즈부르크, 앞의 책, pp. 187-193.??16) 엠마누엘 르루아 라뒤리, 《몽타이유: 중세 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 유희수 옮김 (길, 2006).
17) 유희수, 《사제와 광대: 중세 교회문화와 민중문화》 (문학과지성사, 2009), pp. 79-80에서 재인용.
18) 인용부호로 표시한 부분은 르고프에게서 빌려왔다. 자크 르 고프, 《서양 중세 문명》, 유희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개정판), p. 26.


 

박흥식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독일 괴팅엔 대학교(Dr. Phil., 교회사, 중세도시 전공). 저서로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공저로 《역사속의 질병, 사회속의 질병》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