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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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2020년  08월호 전통적인 경계선 밖에서 나누는 성찬식 온라인 성찬식의 가능성과 사례 목회를 위한 예배와 예전 레시피(8)

〈목회와신학〉 5월호에서 교회 밖에서 드리는 대안적 예배에 대한 필자의 의견과 예문을 제시했다.1 이후 개인적 경건 행위와 가정예배의 적합성과 교회론에 대한 질문을 몇 차례 받았다. 이번 호에서는 그러한 질문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과 더불어 교회 밖에서 드리는 성찬식의 사례를 나누고자 한다. 

그간 독자들은 온라인 예배와 성찬에 대한 수많은 찬반의 의견과 논의를 보아왔을 것이고 아마도 적잖은 혼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목적은 확실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개신교 예배의 다양성의 측면에서 그간의 논의들을 살펴보고 여러 가지 사례들을 서술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데 있다. 

전통적인 경계선에 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미 다루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필자는 ‘경계선’이라는 용어를 통해 기독교 예배, 특별히 성찬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교회와 예배를 구별하기 위해 만든 경계선이 참 많기도 하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이라는 장소적 분리, 주일예배와 주중 일상의 괴리, 개인적인 경건 행위와 공적 예배의 기계적이고 경직된 구분,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자격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 등 상당히 두껍고 높은 장벽들이다. 

첫째, 장소로 교회를 구분하는 방식은 기준으로서의 정당한 가치를 보유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교회론에 대한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내용은 교회를 결정하는 물리적 ‘경계선’이 공간적, 교파적 개념으로부터 실존적, 공동체적 개념으로 즉, 비물리적 경계선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모이는 장소로서의 교회, 교파에 따라 분류되는 교회로부터 신앙의 고백과 성도의 삶이 교회 정체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는 의미다. 보편적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아도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인식에 공감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심리적 경계선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공간의 예전적, 목양적 측면에서의 중요성과 가치를 무시하면 안 되지만 ‘건물’로서의 교회를 절대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장소적 한계를 뛰어넘을 때 교회의 범주는 우주적으로 확대된다. 건물 위주의 교회관은 주일 교회에서의 예배와 주중의 일상을 구분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거룩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서의 언어와 행동 방식의 괴리가 낳는 비극적 결과물은 신행불일치의 이율배반적 삶이다. 교회 밖에서의 예배를 장려함으로써 주일과 주중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예배의 정의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다. 물론 개인적 헌신과 공적인 예배의 영역을 구분할 때 얻는 지혜는 분명하다. 작금의 심각한 신앙의 사유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예배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을 공고히 해 준다. 다만 개인과 공동체라는 산술적, 문자적 구분에 집착하게 되면 이 둘 사이의 유기적이고 본질적인 관계를 간과하게 된다. 전명수가 예로 든 성 다미안(St. Peter Damian/Pier Damiano, 1007-1072)의 경우가 좋은 사례일 것이다. 수도자들, 은둔자들의 경건 행위를 단순히 개인적인 수련이 아니라 보편적 교회 안에서 전 세계의 성도들과 함께하는 예배 행위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2 기존의 교회론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의 편재성과 예배 행위의 우주적 보편성을 감안하면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이다. 개인적 헌신 행위와 공적인 예배는 나누기보다는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연장으로서 공적 예배를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경건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아가 교회 안에서의 공적 예배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예를 들면 직장이나 동호회와 같은 모임에서의 경건 활동도 오히려 더욱 장려할 필요가 있다.

셋째, 성찬에 참여하는 자격에 대한 경계선이 심각하다. 원래 세례와 성찬이 가지고 있었던 급진적 평등과 환대의 정신은 희미해지고, 그저 자격 조건에 맞지 않으면 서슴없이 빼고, 심지어 정죄하고 소외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거룩한 구별과 예전에 참여하기 위한 자격을 갖추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 앞서 있는 주님의 부르시는 은혜를 잊어버릴 수는 없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경건과 성찰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어찌할 수 없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부르시는 그 자리로 감히 가고 싶은, 주님께 다가서는 겸손한 마음이야말로 성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합당치 않음에도 부어지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예배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3 선물은 받아 누릴 때 비로소 그 진가가 완성되어 드러나는 것처럼, 은혜는 베드로와 같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발을 내미는 순간 회복과 구원의 기적을 만들어 낸다.

경계선들을 이야기한 이유는 바로 교회 안에서, 예배 시간에 즉 같은 공간과 시간 안에서만 나누는 소위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의 성찬에 대한 경직된 이해를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의 성찬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4 필자는 경계선 밖에서 나누는 성찬이나 애찬을 완벽한 대안이라고 보는 입장에 있지 않다. 경계선을 완전히 지우자는 의견도 아니다. 개신교 예배의 다양성의 측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전향적으로 검토하자고 제안하려는 것이다. 온라인 성찬과 같은 대안적 성례전의 수용 여부는 각기 높낮이와 두께가 다른 경계선을 가진 교단과 교회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자는 입장이다. 

전통에 비추어 새로운 전통 만들기 

기독교 예전의 역사는 신학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앙의 고백이 예배에서 먼저 이루어졌기에 신학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예배가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전통’이라고 여기는 초대 교회의 예전들은 애초에 구전의 형태를 가졌을 확률이 매우 높고, 처음부터 정교함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 진지하고 겸손한 기도가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신앙의 선조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중 일부는 세밀하게 정리해 읽고 수정하며 문서화하는 데 열정을 바쳤다. 그 거룩한 분투의 흔적이 후대에 유산으로 남은 교회의 예문들이다. 알고 보면 삼위일체 신학이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기 전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했던 기도를 이미 교회에서 광범위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주후 3세기에 편집된 사도전승은 그러한 역사적, 신학적, 예전적 발전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렇듯 초대 교회의 예전이 갖는 의미는 지대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절대적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C.S. 루이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의 임무는 영원한 것(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한 것)을 우리 시대의 고유한 언어로 제시하는 일입니다. 엉터리 설교자는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우리 시대의 사상을 기독교의 전통적 언어로 치장해서 내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핵심을 현대의 옷을 입혀 가르쳐야 합니다.5

루이스의 표현에서 설교를 예배로 바꿔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다. 과거의 예전적 표현을 전통으로 여기고 지켜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배에 ‘현대의 옷’을 입히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와 예문은 살아 있는 존재고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그 겉모습을 달리한다. 따라서 작금의 다양한 예배 형태에 대한 논의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팬데믹 상황 이후 대안적 예배로서 온라인 예배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불가피한 상황에서 긍정적 대안으로 기능한다는 것에 대해 다수의 동의가 이루어졌다. 물론 온라인 예배를 드려도 되는가에 대한 논의는 분명한 결론에 이르기 어렵다. 개신교 예배는 하나의 기준을 갖기보다 교단과 교회의 결정을 존중하기에 이러한 신학적 견해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여전히 신학적 적합성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지만,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경험들을 공간과 시간, 더 나아가 교리적 잣대로 분석하고 검증하는 것이 과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인지 의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일에, 교회 안에서, 그 교회에 속한 이들이 드리는 공적 예배의 가치뿐만 아니라, 공간과 시간의 경계선 밖에서 어떻게 무슨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는 ‘본질’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다. 즉 예배의 불변적 요소, 반드시 지켜야 할 항구적 요소가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두고 이제 본격적으로 온라인 성찬의 유형과 가능성을 살펴보자. 

온라인 성찬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사례들

현재 온라인 예배에 대한 이야기들이 성찬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져도 되는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 찬반 양론이 왕성하게 제기되는 상황이다. 온라인 성찬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성찬의 우주적 보편성과 성도에 대한 배려, 영성의 고양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6 안선희는 르페브르의 공간 이론을 인용하면서 온라인은 ‘공간의 재현’을 통해 ‘재현의 공간’을 제공하는데 이 공간이 오히려 사제 중심의 위계적 공간에서 평등한 탈중심적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보며 온라인 성찬의 긍정적 측면을 논했다.7 

온라인 성찬을 반대하는 의견들은 대체로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의 성례전적 경건성의 확보가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8 더불어 온라인 성찬이 성례전의 공동체적 속성을 구현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동일한 빵과 포도주를 사용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 예도 있다.9

신학적으로는 반대하면서도 상황을 고려하여 어쩔 수 없이 허락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온라인 성찬의 타당성을 수용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 중도적 입장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는 온라인 성찬을 위해 “교회는 성찬 예식문을 미리 만들어 배포한다든지, 떡과 포도주를 교우들에게 심방하면서 나눠 준다든지 하는 방식은 바람직하다. 이런 준비를 통해 교회는 공동체성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교회가 책임감을 가지고 교회의 공동체성과 보편성의 유지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면서 성도들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가정을 하나의 교회로 여기고 성례전의 세 가지 요소 즉 말씀과 물질(떡과 포도주)과 믿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10 김명실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례전의 중계와 성찬에서 사용한 떡과 포도주를 참석하지 못한 이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제안하기도 했다.11

다양한 신학적 입장만큼이나 성찬을 진행 혹은 집례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성찬 장면을 중계하면서 미리 준비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라면 개인이나 소그룹에게 준비와 집례를 위임한다. 증강 현실(Virtual Reality)을 시도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가톨릭교회의 경우 영적 성찬(신영 성체)을 주장하며 온라인으로 성찬을 중계한다. 집례하는 신부의 축성 기도(consecration prayer)의 중요성은 화체설의 토대가 되기에 온라인 성찬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영적’이라는 표현으로 의외로 간단하게 이 문제를 설명한다.12

예로 든 사례들 중에서 실제 교회와 가정에서 시도할만한 예는 많지 않다. 기술적인 한계와 디지털 격차 때문이다. 따라서 본지에서는 첫째로 인터넷으로 라이브 성찬을 할 때 사용한 예문을 예로 들고 둘째로 인터넷 중계와 더불어 가정이나 소그룹에서 할 수 있는 성찬식을 위한 제언과 위로를 주제로 한 실제 예문을 다룰 것이다. 

1.    온라인 라이브 성찬(중계를 통해 현장과 온라인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성찬)
지구촌교회에서는 2020년 4월 24일 현장과 온라인을 통해 성금요일 성찬 예배를 드렸다. 설교 후 성찬 예식을 진행했는데 그 순서는 〈표 1〉과 같다.13

독자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 예식이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한국 교회의 성찬 진행 방식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성찬의 네 가지 의미에 대한 설명과 성찬 후 목회자의 결단의 기도가 눈에 띈다. 지면 관계상 목회자의 결단의 기도만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주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묵상합니다. 동시에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증거하며 한마음으로 한 몸으로 공동체를 섬겨야 하는 책임과 사명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주님의 공동체로 하나로 묶어 주셔서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이 놀라운 예식을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에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가 더욱 의미 있는 줄 믿습니다. 부활이 우리의 소망임을 믿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이 외침이 저희의 평생의 외침이 되도록 주여 인도하소서.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그렇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개인적 고백과 공동체적 책임, 교회력을 고려한 부활절을 소망을 담은 기도문이다. 일선 교회에서 만약 여건이 된다면 이런 방식을 응용해 사용하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순서와 내용에 앞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지구촌교회의 경우 성찬식의 집례를 위해 담임목사가 위임을 하여 가정이나 목장에서의 성찬식이 낯설지 않은 교회직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14 회중 교회의 경우 이러한 달라진 방식의 수용이 비교적 자연스럽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위임이 허락되지 않는 교단의 경우 앞서 인용한 다른 사례들을 참고하여 교회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면 될 것이다. 

지구촌교회 성금요일 성찬 예식
설교 후 기도
찬양(세개의 못, 갈보리산 위에)
성찬으로의 초대 
(기도와 준비의 시간-영상으로 “가정에서는 주의 만찬을 준비해 주세요”라고 안내한다.)
성찬의 의미에 대한 설명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함. 둘째,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살펴봄. 셋째,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고 준비. 넷째, 시공을 초월하여 서로가 연결되고 연합함)
성찬제정사(고전 11:24; 히브리서 9:13-14) 
분병(찬양: 예수 나를 위하여 1절)
분잔(찬양: 예수 나를 위하여 3절)
결단의 기도
찬양(갈보리산 위에) 

2. 온라인 성찬에 대한 제언과 위로를 주제로 한 실제 예문 
많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온라인 성찬 예식에서 특별히 신학적으로 문제 삼을 부분은 없다. 거의 비슷한 형태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고 간소화하는 것이 원활한 진행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다 보니 성찬의 풍부한 메타포나 성도들의 참여가 어쩔 수 없이 부족하게 된다. 성찬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의미, 지켜야 할 예전적 요소를 염두에 두고 몇 가지 제안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감사,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억, 성령의 임재의 간구를 현대적 언어로 표현하면 좋을 것이다. 
둘째, 보편적 교회 안에서 연합하고 있음을 성찬에 대한 안내나 기도문이나 교독을 통해 포함하라. 개인적인 경건 행위가 아닌 모든 교우들이 함께 나누는 성례전으로써 우주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셋째, 다양한 찬양을 포함하라. 비대면 상황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고 아무래도 성도들의 참여가 소극적 혹은 제한적일 수 있는데 찬양은 그런 부분을 보완해 주고 주지하다시피 교육적으로도 매우 효과적인 예배의 요소다. 성찬을 나누는 시간에도 찬양 혹은 반주와 더불어 하기를 권고한다. 

넷째, 다양한 분병, 분잔 방식을 시도하라. 교단과 교회의 신학적 입장과 부딪치지 않고 여건이 허락한다면 서로 빵을 떼어주는 등 새로운 방식도 시도해 볼 만하다. 

다섯째, 성도들의 참여를 극대화하기 위해 따라서 읽을 수 있는 기도문을 제공하라. 많은 교회들의 온라인 성찬은 주로 시작부터 끝까지 집례자를 보는 것에 국한된다. 심지어 집례자가 모든 기도를 담당하는데 이는 온라인 예배의 약점을 더욱 심화시킬 수도 있다. 미리 예문을 나누어 주거나 자막을 통해 기도문을 함께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면 성도들의 참여를 극대화하고 그들을 보다 능동적인 예배자로 참여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되도록 동일한 종류의 빵과 포도주(주스)를 준비해 제공하라. 당연한 이야기인 듯싶지만 의외로 실천이 용이하지 않은 부분이다. 빵과 포도주를 성도들에게 배송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어색하고 힘들겠지만 일단 새로운 시도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일곱째,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라. 예를 들면 유튜브(Youtube) 중계가 어려운 경우 줌(Zoom)과 같은 화상회의 플랫폼을 활용하거나 미리 녹화한 것을 사용할 수도 있다. 최근 파워포인트를 사용한 녹화도 가능하다. 아마도 이러한 여건은 사용자의 요구에 맞춰 더욱 발전할 것이다. 기술적인 도구의 적극적인 선용이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인터넷 환경이 열악한 이들을 고려하여 사정이 허락하면 방문 성찬을 할 수도 있고, 개인 성찬을 위한 예문을 제공하는 것도 추천한다. 이 경우 예배에서 사용하고 남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가는 것도 고려하라.

여덟째, 여건이 허락된다면 동영상을 통해 성경 구절이나 관련 영상을 보여 줌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소모임에서 온라인을 통해 동영상을 함께 시청하고 기도 제목을 나눈 사례들도 있다. 비대면이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공동체적 나눔을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표 2〉는 필자가 제시하는 온라인 성찬 예문이다. 하나의 사례이기에 참고 자료로 활용하고 교회의 상황과 형편에 맞게 수정/보완하고 응용하기를 기대한다. 영상의 송출이 가능한 경우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법도 좋을 것이다. 팬데믹 상황을 고려하여 위로와 소망을 주제로 했는데 꼭 이런 상황이 아니어도 설교의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 가능할 것이다. 이 예문은 현장에서의 성찬과 온라인 성찬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인데 환자를 심방하여 나누는 성찬과 같은 상황에서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집례자와 회중으로 나뉜 기도문의 경우 묶어서 할 수도 있다. 예문이 길다고 느껴진다면 과감하게 줄이고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쉽게 고쳐서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온라인 성찬 예문

성찬으로의 초대 (자막과 영상 송출이 가능한 경우-고린도전서 12:26-27의 말씀을 보여 준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위의 자막과 더불어 팬데믹 상황 속에서 투병 중인 환자, 의료진, 그리고 예배나 기도의 장면을 번갈아 보여 준다.)

집례자: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은혜 가운데 자녀 삼아 주신 주님,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봅니다. 반복되는 어려움 속에서 쉽게 낙담하고 절망하며 주님의 은혜를 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를 다시 부르시고 주님의 몸과 보혈을 내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거룩한 양식을 함께 나누며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힘과 소망을 맛보기 원합니다. 

다 함께: 주여, 주님의 몸과 보혈을 함께 나누는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옵소서.

집례자: 주님의 밝은 빛을 비추시어 회복시켜 주시고 저희를 소망의 길로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 함께: 아멘.

(비예전적인 교회에서 보다 비형식적인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집례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의 아픔과 연약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절감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친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우리의 고통을 몸소 느끼며 애통해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의지하며 이 세상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실 새로운 힘과 소망을 기대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거룩한 주님의 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 주님의 몸과 보혈을 함께 나누는 거룩한 곳으로 인도하심에 감사합니다. 주님의 빛을 비추시어 모든 어둠을 몰아내시고 우리의 마음과 이 세상에 참 소망과 기쁨과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찬송가 - “영혼의 햇빛 예수여”(67장), “주 예수 해변서”(198장)(시간을 고려하여 절 수 조정) 

죄의 고백과 용서의 선언(형편에 따라 유연성 있게 적용)

집례자: ?자비하신 하나님,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정작 어려움이 닥치니 겁내고 불안해했습니다. 위축되고 움츠리며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들을 망각했습니다. 핑계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다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데 게을렀습니다. 자신의 안위에만 몰입하여 주위의 소중한 생명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닫았습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조용히 기도하며 우리의 연약함과 고집스러움과 게으름을 내려놓습니다. 

침묵의 기도(약 1분 정도 침묵하며 개인적인 기도를 드린다.) 

용서의 선언: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혹은 다음과 같이 풀어서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잔치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감사와 성령 임재의 기도 

집례자: ?혼돈과 흑암을 걷으신 창조의 하나님,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오늘도 회한과 탄식 가운데 있는 우리를 밝은 빛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 

다 함께: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주님, 로뎀나무 아래 절망하여 체념하고 엎드린 엘리야에게 찾아오신 주님,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 위로하신 주님, 마가의 다락방에서 낙심 가운데 있던 이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신 성령님, 우리의 슬픔과 애통, 질병과 연약함, 고통과 상처, 소외와 억울함을 보시옵소서. 

집례자: ?이제 주님의 환한 빛 앞으로 나아옵니다. 우리를 환히 비추사 주님의 생명이 우리를 치유하여 다시 소생케 하옵소서. 
다 함께: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나누는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고 이곳에 임하셔서 우리 모두를 풍성한 복음의 신비 가운데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집례자: 이 시간 주님이 주시는 참된 회복의 기적을 맛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 함께: 아멘

성찬 제정사

집례자: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나누는 이 빵과 포도주는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것을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그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니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또한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제자들에게 그 잔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을 마셔라. 너희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흘리는 새로운 약속의 피다.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당하며 죽으실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약속을 기념하며 준비한 빵과 잔을 나누겠습니다. 

분병/분잔 

집례자: 당신을 위해 주신 주님의 몸입니다. 

회중: 아멘

집례자: 당신을 위해 흘리신 주님의 보혈입니다. 

회중: 아멘

찬양을 부르며 빵과 포도주를 나눈다. 평소에 많이 부르는 찬양을 추천한다. “사랑의 나눔”이나 “나 같은 죄인 살리신”과 같은 단순한 찬양 혹은 위로와 소망과 관련된 찬양, 예를 들어 “죄짐 맡은 우리 구주”(487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495장) 

찬양 -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거룩하신 하나님”, “주의 옷자락 만지며” 혹은 주님의 동행과 관련된 찬양

마침 기도 

집례자: 주님, 새로운 숨결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셔서 주님과 더불어 숨 쉬게 하옵소서. 

다 함께: ?모든 교회들과 어둠 속에 고통받는 피조 세계가 절망과 분노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앞에 겸손히 나와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하소서. 

집례자: ?살얼음판을 걷는 듯 불안함이 엄습할 때에, 마른 사막과 같은 삭막함에 낙심될 때 주님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사랑과 평화의 걸음을 힘차게 내딛게 하소서.

다 함께: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누리게 하시고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일들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이루어 가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위탁의 말씀(필요한 경우)

성도 여러분,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 주신 그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 주님이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통을 묵상하지 말고 생명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 의지하며 두려움 없이 주님을 따라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제자들의 두려움과 어둠을 몰아내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깊은 탄식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하며 늘 찾아오시는 성령의 따뜻한 생명의 숨결로 날마다 새롭게 호흡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흑암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전하는 주님의 복된 자녀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소망을 전하며 살아야겠습니다. 하늘로부터 받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의 기준이 되며, 우리의 입술이 위로의 말을 전하고 우리의 손과 발이 주님의 긍휼을 전하는 아름다운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사명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소중한 삶 속에 주님께서 동행하시고 기쁨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나가는 글

예배에서 평신도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나, 교회와 예배의 전통적인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변화의 움직임은 여러 개신교회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해 왔다. 교회의 위기라고 하지만 위기는 해석하는 이에 따라 그 얼굴을 달리한다. 필자는 교회가 마주한 현실이 지금은 암담해 보일지라도 달리 보면 새로운 안목을 발견하는 기회요,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다양한 시도를 위한 진지하면서도 독창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다. 물론 필자는 현장 예배와 교회에서의 성찬식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그 가치와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다만 교회 밖에서의 예배와 성찬을 전통적인 경계선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의는 필요하지만 적어도 개신교회에서는 하나의 결론을 내릴 당위성이나 필연성은 없어 보인다. 교단과 교회의 결정에 최종 권위를 두는 개신교회의 속성을 감안하여 일종의 제안을 주고 교회가 실천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다만 전제해야 할 것들은 분명하다.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우리의 신실한 신앙고백, 그리고 나눔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물질과 방식이다. 물론 이 모든 절차의 토대인 주님의 ‘은혜’와 조건 없이 부르시는 ‘환대’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 전통적인 교회관, 예배와 예전에 대한 경계선이 모호해지면서 당연히 시행착오가 예상되며 논란과 혼란, 정보 과잉과 오독의 여지도 높아진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하나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성급하게 다가서기보다 다양한 시도를 너그러운 시선으로 봐야겠다. 지금이야말로 독창적인 시도를 격려하고 새로운 실수를 용납해야 할 때다. 뺄셈에서 덧셈으로, 소외에서 환대로, 모이는 은혜로부터 흩어지는 소명으로 향하는 것이 예배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던가? 



1)    안덕원, “교회 밖 대안예배를 위한 예전적 제안”, 〈목회와신학〉 371(2020. 5): pp. 86-93. 덧붙여 이 글의 내용 중 일부는 필자의 다음 논문과 공유한다. 안덕원,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기독교 예배-전통적인 경계선 밖에서 드리는 대안 예배를 위한 제언”, 〈복음과 실천신학〉 56(2020) 게재 예정. 
2)    안선희, “예배 연구 주제로서의 ‘온라인 예배 실행’”, 〈신학과 실천〉 69(2020): p. 26. 안선희가 인용한 것은 다음 논문이다. 전명수, “정보화 사회와 종교문화의 변용-교회의 인터넷 활용과 그 의의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33(2003): p. 24. 
3)    로렌스 훌 스투키, 《성찬, 어떻게 알고 실행할 것인가?》, 김순환 옮김(대한기독교서회, 2017), p. 53. 
4)    이원론적 교회 이해를 경계성과 커뮤니타스로 접근하여 설명한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앨런 허쉬, 《잊혀진 교회의 길》, 오찬규 옮김(아르카, 2020). 특별히 pp. 271-311을 보라. 덧붙여 성찬신학에 대한 의견도 전통적인 경계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종교개혁기의 구분법이 21세기에도 과연 유효한지에 대한 비판적 논의 대신 그들의 의견에 대한 각주만 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다음 글을 참고하라. 조지 헌싱어,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 김진혁, 안덕원 옮김 〈횃불트리니티저널〉 제18권 제1호(2015), pp. 147-160. 성찬의 자격에 대한 논의는 “계속해서 논의되고 토의되고, 수정, 발전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 열린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김진혁, 《질문하는 신학》(복있는 사람, 2019), p. 697.
5)    홍종락, 《오리지널 에필로그: 번역가 홍종락의 C.S. 루이스 에세이》(홍성사, 2019), p. 26.
6)    박해정, “부활주일 온라인 성찬, 가능한가?” http://www.news
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0521 2020년 6월 1일 접속. 
7)    안선희, “예배 연구 주제로서의 ‘온라인 예배 실행’”, pp. 19-20. 
8)    우병훈, “인터넷 성찬이 가능한가?”, 〈개혁정론〉 http://reformedjr.com/board05_03/10222, 2020년 5월 20일 접속. 
9)    김병훈, “영상 예배로 성찬식을 행해도 될까요?”, http://m.news
power.co.kr/a.html?uid=45730&sc=sc4. 2020년 6월 1일 접속. 
10)    https://392766.tistory.com/4797 2020년 6월 1일 접속. 
11)    김성진, “온라인 성찬 시기 상조…”, 〈한국기독공보〉, https://www.pckworld.com/article.php?aid=8472426250, 2020년 6월 1일 접속.
12)    성찬식을 집례하는 신부의 옆에서 수화로 통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개신교회 중 일부 교회도 수화 통역을 제공하고 있는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3)    https://www.jiguchon.or.kr/bbs/board.php?bo_table=C01&wr_id=7253 2020년 6월 1일 접속. 원래 절기보다 2주 늦게 드린 것이다. 자료제공: 차두진. 
14)    한재동, “회중교파, 침례교파, 크리스쳔교파 및 하나님의 성회교단의 직제”, 바른교회 아카데미 편, 《교회직제론》(예영, 2012), pp. 191-220. 

안덕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드류대학교 대학원(Ph.D.). 저서로 《우리의 예배를 찾아서》가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