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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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2020년  08월호 왜 신앙 인물의 전기를 읽어야 하는가 평전을 읽읍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목회자들은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 목회의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기능인 설교와 목양을 수행하기 위해서 습득해야 하는 지식은 너무도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주석을 섭렵해야 하며, 문학과 철학, 일반 에세이나 잡문들 역시 많이 읽어 두는 것이 좋다. 변증을 위해서도 그렇고 예화거리 역시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와 목양 전반의 근본을 탄탄하게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직신학 책들을 읽어야 하고, 교회 운영과 행정을 위해서도 다양한 실천신학서들을 읽어야 한다.

이렇듯 많은 종류의 글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간과되는 종류의 책이 신앙 인물의 전기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아는 목회자 중 상당수가 신앙 인물의 전기, 그중 진지하게 쓰인 평전들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평전 읽기가 주는 유익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평전의 유익을 〈목회와신학〉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교리문답서를 읽다’ 연재에 이어 앞으로 수개월 간 목회자에게 유익한 평전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에 앞서 이번 호에서는 신앙 인물의 평전을 읽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주는지를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신학을 깊게 이해하는 도구로서의 유익

필자는 신학 공부 초기에 김남준 목사(열린교회)에게서 아주 유익한 조언을 들었다. 신학을 깊이  이해할 뿐 아니라 재미있게 이해하려면, 한 명의 탁월한 신학자·목회자의 글들과 설교 전체를 전작 독서 해 보라는 말이었다. 이 조언은 이후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필자가 많은 동료 목회자에게 전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이 조언을 듣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작을 읽어 보기로 결심했다. 실제 전작을 읽지는 못했지만(그의 전작은 어마어마하게 방대하다!), 주요한 저술들 전체를 읽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배운 내용들은 아직도 내 설교와 목양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로 남아 있다.

모두가 추천했던 《신앙감정론》과 《대표설교선집》(이상 부흥과개혁사)을 읽은 후, 함께 에드워즈를 읽었던 친구가 추천해 준 책은 그의 전기였다. 처음 읽었던 전기는 이안 머레이가 쓴 평전이었는데(이레서원 역간),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그의 사상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에드워즈의 부흥과 연관된 모든 책과 목회적인 책들은 그가 노스햄튼에서 목회하던 시절에 쓰인 저술임을 알게 되었고, 《신앙감정론》 같은 위대한 저술이 어떠한 목회적 관심사에서 쓰인 책인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노스햄튼에서 쫓겨나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가장 위대한 철학적 저술들이 다 쓰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과 《의지의 자유》, 《참된 미덕의 본질》 등이 그것이다. 이 책들은 윤리와 철학의 가장 깊은 근원을 탐구하는데, 이는 그의 여유로워진 목회 환경과 연관이 있었다. 노스햄튼에서의 격무에서 벗어나 선교지에서의 상황은 훨씬 더 여유로웠던 것이었다(물론 이 때 에드워즈는 경제적으로 가혹한 시련을 겪긴 했다).

어쨌든 배경을 이해하고 나니 훨씬 그의 신학이 잘 보였다. 에드워즈가 소위 범재신론이라는 잘못된 방식의 신론을 말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그가 당대 수많은 이신론자와 논쟁을 벌여야 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니 훨씬 쉽게, 그리고 오해를 피해가면서 읽을 수 있었고, 그의 여러 가지 신앙 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나니 부흥에 관한 그의 저술들이 훨씬 쉽게 이해되었다.

이후 장 칼뱅, 존 오웬, 아우구스티누스, 헤르만 바빙크 등 신학자들의 저술을 계속해서 읽어 갔는데, 항상 먼저 그들의 전기를 읽고 난 후에 저술들을 읽기 시작했다. 또한 어떤 책을 읽을 때는 그 책들이 쓰인 시기에 저자가 어떤 읽을 겪었는지 꼭 전기를 통해서 확인했다. 이는 탁월한 신학자들의 위대한 전기를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역할 모델을 만나는 기쁨

칼뱅의 전기를 읽고, 그가 얼마나 바빴는지 알고 놀랐던 적이 있다. 그는 제네바에서 말 그대로 거의 매일 설교했다. 그는 주일마다 아주 충실하게 준비된 강해설교를 했고, 같은 기간에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그 와중에도 여러 가지 목회적인 일들을 함께 감당했는데, 병자를 심방하고 목회 상담을 수행했으며 다양한 편지에 답장을 보내고 여러 기관의 중책을 맡기도 했다. 게다가 1550년부터 1559년까지 무려 270회, 즉 두 주에 한 번 꼴로 결혼식을 주례했다(제네바는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도시였고, 그들은 칼뱅의 설교에 아주 매료되었다).

조지 휫필드는 한 주에 보통 40시간, 더 많을 때는 60시간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는 근면한 성경 연구가이기도 했는데, 그의 전기를 쓴 아놀드 델리모어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설교단에 선 휫필드는 한마디로 서재에 앉은 휫필드의 반영이었다. 성경과 헬라어 신약성경, 그리고 자기 앞에 펼쳐진 다양한 청교도 서적과 함께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시간은 이 바쁘고 힘이 넘치는 설교 사역을 위한 준비였다. 매튜 헨리의 주석이라는 우물에서 배부르게 물을 마셨던 탓에 그가 대중 앞에서 토해 놓는 말은 그 위대한 주석가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아원 사역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 사업을 수행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그 유명한 프랭클린 맞다) 휫필드의 사회사업에 대해 “휫필드가 온갖 선행을 하면서 보여 준 진실성, 청렴, 지칠 줄 모르는 열심은 과거에 누구에게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탁월한 사역은 종종 커다란 도전이었다. 맡겨진 목회 사역과 더불어 저술, 드물지 않게 해야 하는 외부 강의에 지친 필자는 종종 불평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앞서 간 선배들의 거대한 수고를 바라볼 때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필자가 가장 즐겁게 읽었던 전기도 휫필드의 전기였다. 필자는 그의 전기를 읽고 아래와 같은 일기를 썼다.

나는 이러한 설교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22세 때의 첫 설교부터 15명이나 미치게(회심하게) 만들었던 엄청난 파급 효과를 내는 설교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을 읽은 느낌이다. 처음에 나는 절망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휫필드라는 위대한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베푸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휫필드처럼 되지는 못할지라도 휫필드 같은 설교자를 다시 21세기 서울에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구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델리모어의 말과 같이, 여전히 “불법이 판을 치고 노골적 배교가 횡행하는” 21세기에도 이러한 설교자를 달라고 간청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고통스러운 시기에 우리의 유일한 해답은 하나님 말씀이며,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결심한다. 죽을 때까지 나는 이 땅에 이러한 설교자를 달라고 기도하겠다. 그리고 내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 그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설교를 들으며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내 기도가 나의 죽은 후에 응답된다 할지라도, 나는 하늘에서 그 설교를 들으며 기도를 응답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힘껏 찬양할 것이다.

평전에 나오는 대단한 신앙 선배들의 죄악은 평범한 목회자인 필자에게 일종의 위로를 주기도 한다. 웨슬리는 아내와의 관계가 끔찍했다. 그래서 종종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들에게서 정서적 위로를 얻으려 시도하기도 했다(아마 한 발만 더 나아갔다면 간음했을 것이다). 휫필드는 그보다는 나았지만 아내와의 친밀감과 사랑은 전혀 없었다. 스펄전은 몸무게가 130kg이 넘었고, 흡연으로 인해 구설수에 올랐다. 반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서 매번 음식의 양을 재서 먹었다. 하지만 종종 보이는 교구민들을 향한 냉담한 태도 때문에 결국 목회지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 그들 역시 사람일 뿐이고, 그들 역시 은혜로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은혜로 사역을 감당했다는 위로를 전해 준다.
 

좋은 설교 예화를 제공하는 유익

예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성경의 추상적인 교리를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 쓰는 예화(illustration)다. 예컨대 조나단 에드워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그렇게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를 가리켜 “가느다란 거미줄로 떨어지는 바위를 막으려는 것”과 같다고 부른다. 이는 우리의 감각 세계 안에서 가늠할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일반적 진술을 이해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사용할 때 청중들은 성경에 담긴 추상적 진리를 훨씬 더 생생하게 이해한다.

다른 하나는 간증(testimony)이다. 때로는 설교자 자신의 경험일 수도 있고, 교회 공동체 누군가의 경험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말씀이 구현된 삶의 예증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대로 사십시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말씀대로 산 이 모습을 보십시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뒤쪽의 설교가 훨씬 더 와 닿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보통 말씀이 구현된 삶을 바라볼 때 감동을 느낀다. 물론 설교자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때는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데 왜 당신들은 살지 못합니까?” 또는 “나는 이렇게 말씀대로 살아가는 훌륭한 사람이랍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할 위험도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둘다 성도들의 정서와 하나님 이해에 위험한 영향을 미치게 되니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과거에 살았던 신앙 인물의 전기를 통해서, 설교자들은 더 나은 예화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설교자들은 하나님께서 매일의 삶을 돌보신다는 예화를 조지 뮬러의 전기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가 고아원을 운영할 때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볼 때, 성도들에게 매일의 양식을 구하라고 담대히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올림픽 메달리스트이며 중국 선교사였던 에릭 리들의 전기를 읽을 때 성도들은 경건한 삶,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한 목적의 삶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정치가였으며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섰던 윌리엄 윌버포스의 전기를 통해 사명을 좇는 삶에 대한 예화를 사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예화는 단순히 의지를 자극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예를 보여 줄 수 있고, 성경의 교리가 어떻게 신앙에서 내재화되는지 드러낼 수 있다. 설교자들이 이렇듯 다양한 신앙 인물의 예를 들어 설교할 때 성도들은 더 분명하게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볼 수 있다.

존 파이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히브리서 11장은 신앙 전기를 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믿음을 들을 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히 12:1). 히브리서 저자에게 어떻게 우리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10:24)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10:25) 죽은 사람들의 격려를 통해서”(11:1-4)라고 답할 것입니다. 신앙인의 전기는 교회라는 생명체가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수단입니다.1

필자 역시 이것을 똑같이 고백할 수 있다. 필자는 1년에 한 명의 신앙 선배를 정해 그에 관한 신앙 전기 몇 권을 틈틈이 읽으며 그 사람과 교제한다. 올해는 조지 뮬러와 만나고 있다. 〈목회와신학〉의 독자들도 신앙 전기를 통해 유익을 누리기 바란다.




1) 존 파이퍼,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 (좋은씨앗, 2005), p. 152.

이정규 시광교회 담임목사. 고려신학대학원(M. DIV.). 저서로 《야근하는 당신에게》, 《회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