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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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0년  08월호 늙어가는 것은 성장하는 것이다 고령 사회와 시니어 목회

흔히 6070 연령대를 ‘노인’으로 지칭한다. 이와 함께 ‘시니어’나 ‘어르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시니어’는 주니어에 상응하는 말로 ‘노인’보다는 상위, 연장자, 선배의 의미에 더 가깝다. 노년학자 리차드 존슨은 인생 후반부를 시작하는 45세 이상의 연령대를 ‘시니어 장년’(senior adults)으로 호칭한다. 

‘시니어’라는 말이 좁게 한정되기보다는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는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됨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어르신’이라는 말에는 우리 문화 속에서 존경과 돌봄의 대상이라는 이미지가 덧입혀져 있다.

최근 새로운 노화기 연령 구분 방식은 우리의 눈길을 끌 만하다. 기존의 중년층과 노년층으로 나누던 구분 방식에서 새롭게 5060 연령대를 ‘신(新) 중년’으로 분류하며 ‘50 플러스(50+) 세대’ 또는 ‘예비 노년층’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존의 60대 이상의 연령대를 노인이나 어르신의 호칭을 대신해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존경받는 노인으로서의 ‘선배 시민’(senior citizens)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2015년 UN은 인류의 평균 수명 변화를 근거로 연령 구분을 5단계로 나누며, 파격적으로 66-79세를 ‘중년’으로 분류했다. 18-65세는 청년, 80-99세는 노년으로 분류했다. 새로운 연령 구분 방식은, 노년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중년기를 더 넓게 보고 노년기를 늦추어 설명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기존의 6070을 단순히 노인으로 보는 연령 범주가 이제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제는 노인이 더 이상 노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노화기 구분 방식이 여전히 연령 차별적 가치 부여와 맞물리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아직 내가 알아 오던 그런 노인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노인이 아니다’라는 인식보다는 ‘나에게는 내가 알아 오던 그런 노인의 삶은 없다. 나는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살 것이다’라는 태도가 더 필요해 보인다. 우리에게는 합리적인 노화기 구분보다는 나이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 더 의미 있기 때문이다. 

추함(non-Aesthetic)인가? 아름다움(Aesthetic)인가?

건강한 노화 문화의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6070세대를 ‘나이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에 대한 집중’은 우리 자신을 추하게 만들고 추하게 살게 할 수 있다! 세속적인 노화 문화의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은 아직 젊어서 추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추하게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반면, ‘나 됨에 대한 집중’은 나이 듦 자체를 아름다워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더욱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안내한다. 자신의 나이를 늘 묵상하며 되뇌는 일은 그 나이를 떠올리는 것이기보다는, 그 나이에 덧붙여진 이미지, 생각, 역할, 죽음과의 거리감을 떠올리는 것이기 쉽다. 고령을 떠올리며 추하고, 무능하고, 무가치하고, 성가시고, 혐오스럽고, 비생산적이고, 부담스러운 이미지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백발, 탈모, 피부 노화, 신체 기능 저하, 기억력과 집중력 저하 등의 노화 현상을 경험할 때, 씁쓸함, 야속함, 서운함, 측은함, 서글픔, 불안감, 우울감, 절망감, 두려움이 동반된다. 나이에 집착할수록 ‘추함’으로 덧칠해진 노화 이미지가 더 굳어지며, 노화 현상을 추함으로 느끼게 된다.

하나님은 각각의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자기 됨’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들만의 기준으로 인종이나 성별에 따라 차별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구별이라는 은총’이 인간에 의해 ‘차별이라는 죄악’으로 변질된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만들어 내는 ‘차별의 죄악’에 이끌리며 하나님이 베푸신 ‘구별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기 쉽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나 됨’이 차별로 인해 가려진다. 구별은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절대적 가치로부터 나오고, 차별은 인간이 제멋대로 부여하는 상대적 가치로부터 나온다. 

그러한 차별 중 하나가 나이 차별이다. 연령주의는 저마다의 나이 든 모습들을 차별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멋대로 가격표를 붙이기(price-tagging)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름다움’이어야만 할 고유한 ‘나이 듦’이 나이 차별로 인해 ‘추함’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신학자이자 사회 활동가인 메리 레디(Mary Jo Leddy)는 연령주의를 나이 듦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플라스틱 커튼’(plastic curtain)에 비유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나이에 부여하시는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할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이 듦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이! 즉 ‘내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 횟수’가 왜 그리 중요한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나이에 큰 관심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성경 어디에서도 사람에게 나이를 물은 적이 없으시고, 특정 나이에 대해 특별한 배려도 차별도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러시듯 우리도 나이에 집착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유한 개성과 은사를 가진 존재로서의 ‘나 됨’을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노인을 일반화시키고 개별적인 개성이나 특성을 존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나 됨’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편견이 있다. 리차드 존슨은 노인에 대한 편견을 열거하는데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노인은 어느 정도 오래 살면 결국 노망이 든다. 둘째, 노인은 늙어가며 기본적으로 다 똑같게 되거나 서로 비슷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셋째, 노인은 모든 일에 있어서 젊은이들만큼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이지 못하다. 넷째, 노인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이 아주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다섯째, 노인은 경직된 태도를 가지고 있고 변화에 대해 개방적이지 않다. 여섯째, 노인은 성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되고 성관계에 대한 필요를 덜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노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알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아주 쉽게 노인에 대한 편견에 수긍하면서 노인을 왜곡해서 이해한다. 노인은 점점 몰개성화되고, 고유한 인간이기에 앞서 ‘노인’이라는 이미지로 전락한다. 노인의 ‘나 됨’에는 진지한 관심을 보내지 않고, 노인의 ‘나이’에만 관심을 보인다. 자신의 자아가 ‘나이’로 대표되는 경험 속에서 노인의 자기정체성이 서서히 퇴색되어 가게 된다. 스스로를 추하고 가치 없는 존재, 추한 존재로 여기며 위축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편견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노인과 노화에 편견은 노인에게 큰 해를 입힌다. 리처드 존슨은 “편견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사고와 태도를 경직시키고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떨쳐내기 어렵다”고 말하며, 편견이 노인에게 가져다주는 두 가지 해로운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자기 완수”(self-fulfilling)와 “자기 영속화”(self-perpetuating)다. 

첫째, 노인을 향한 편견 혹은 노인의 편견은 노인에게 그 편견대로 되게 할 수 있다. 노인이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고 살아갈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정확히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이다. 6070 세대는 자신이 어떻게 연령주의의 피해자이며 가해자로 살아왔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한 어느 정도 사회로부터 자신에게 부과된 그 고정관념을 일종의 자성예언(自成豫言)으로 여기며 살아왔는지 자문해야 한다. 둘째, 노인과 노화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노인에게 사회적으로 부과된 노인 역할이나 노인에 대한 기대에 길들여져서, 노인의 역할과 기대에 순응하는 태도를 고착화시키고, 지속적으로 그런 태도로 살아가도록 자기영속화를 부추긴다.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런 방식으로 노인으로 하여금 ‘나 됨’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기독교 영성은 노인을 참된 ‘나 됨’으로 안내할 수 있다. 영성은 내가 누구인지 온전히 알고자 하는 갈망, 내가 누구인지 온전히 아는 깨달음, 내가 누구인지에 따라 살아가는 소명의 삶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 됨’의 아름다움에서 핵심적 요소는 ‘소명’이다. ‘나 됨’을 온전히 살아가는 소명의 삶 속에서 노화는 온전하게 아름다울 수 있다. 6070 연령대는 인생의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나 됨을 더 깊고 선명하게 알아가고 살아갈 수 있는 시기다. 나 됨을 추구하는 소명의 삶은 노화나 은퇴에 의해 방식이 달라질 수는 있어도, 그 소명의 본질은 변함없이 지속된다. ‘나 됨’을 알고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움’이다. 

노화 저항(anti-Aging)인가? 노화 순응(well-Aging)인가?

건강한 노화 문화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6070세대를 ‘두려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노화(aging)는 ‘나이 들어감’이다. 사람은 나이 듦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노화에 어떻게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는가? 주된 대응 방식은 노화 저항(anti-aging)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노화를 두려워한다. 노화를 늦추고 감추려고 온갖 노력을 하며 마음과 정신과 에너지를 쏟는다. 노화를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는 과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 이론 중 하나인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행동의 기저에는 무의식적 죽음 공포가 있고, 모든 인간 행동은 죽음 공포에 대응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이나 소멸을 부인하고 싶은 무의식적 갈망으로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생성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삶 속에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공포는 노화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공포로 이어진다. 그래서 늙어가며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는 노인을 죽음 공포를 떠올리게 하고 위협을 느끼게 하는 존재로 경험한다. 이런 이유로 무의식적으로 노인을 죽음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공포 유발자로 느끼고, 노화 현상을 죽음 공포 유발 요인으로 경험한다. 자신의 노화를 죽음의 전주곡으로만 느끼는 노인은 자신과 다른 노인의 노화 현상을 보며 위협감과 두려움, 불안함과 우울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노인 집단 거주 아파트로 이사하는 한 노인이 “이제 죽으러 들어가는 거죠 뭐!”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신앙적인 노화 인식이 없이 죽음 공포에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노인은 다른 노인과 함께 살아갈 때, 자신을 보며 그리고 서로를 보며,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매일 죽음 공포 유발자로 경험하며 죽음 공포 유발 요인에 수시로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사람은 죽음 공포 유발 경험을 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노인이나 노화현상을 기피하고 저항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사망 권세를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에게는 6070은 죽음 공포 유발자가 아니라 부활 신앙의 열매로 경험될 수 있다. 부활 신앙의 첫 열매이신 예수그리스도에 이어지는 열매들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자신에게 찾아오는 노화에 저항하며 더 젊어 보이기 위한 사람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맞추어 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주된 관심을 갖는다면 노화에 저항하게 되고, 내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주된 관심을 갖는다면 노화에 순응하게 된다. 이 둘은 모두 ‘나이를 잊는 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노화 저항은 무의식적인 죽음 공포 대처 방식으로 하는 것이고, 노화 순응은 사망 권세를 이겨내는 방식인 것이다. 인위적인 노화 저항은 우리를 지치고 쫓기게 만들지만, 하나님께 이끌리는 노화 순응은 즐거워지고 성장에 이르도록 안내한다. 신앙을 가진 6070 세대는 선배 신앙인으로서 주니어들에게 좋은 노화 순응 모델을 보여 줄 책임을 가지고 있다. 

늙어 가는 사람(Age-ing)인가, 성장하는 사람(Sage-ing)인가?

건강한 노화 문화의 시각으로 보면 6070세대를 ‘늙어 가며 성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청년기 이후에 노화가 진행되며 우리는 육체의 강건함, 체력, 감각을 조금씩 잃어 가기 시작한다. 인간은 태어나는 일, 성장하는 일, 죽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며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나이 들어 가는 일’에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늙어 가게 하실 때에는 마땅한 이유와 분명한 목적이 있다. 

리처드 존슨은 묻는다; “하나님은 … 우리를 위해 최상의 것을 주시고, 우리가 가장 풍성하게 살아가길 원하신다. 그런데 왜 늙음을 주실까?” ‘만약 사람이 늙지 않는다면 더 건강한 모습으로 열정 넘치게 살아가며, 활력 있고 효율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늙어 가게 하실까? 영성신학자 유진 비안치는 늙어 가는 과정을 영적 성장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영성노년학자 리차드 존슨은 신앙 안에서 ‘에이징’(age-ing, 늙어 가는 것)은 ‘세이징’(sage-ing,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신체 기능을 점차 잃어간다. 하지만 상실은 고스란히 영적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상실을 통해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된다. 한 예로, 젊어서는 모든 것을 빨리 보며 띄엄띄엄 본다. 덕분에 많은 것을 놓치며 산다. 그런데 늙어서는 빨리 보는 능력을 잃게 된다. 그래서 천천히 보고 꼼꼼하게 본다. 그러느라 깊이 본다. 예전에는 독립적인 사물이나 사건이나 사람을 보는 데 치중했다면, 이제는 그 사물들 사이의 연결, 사건들 사이의 연결, 사람들 사이의 연결,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어우러짐과 조화로움을 보게 된다. 예전에는 개체를 보고 개별적으로 경험했다면, 이제는 전체를 보고 통합적으로 경험한다. 이것이 상실을 통한 성장의 증거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이해한다면, 노화는 소멸로 끝나는 연속된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실은 성장을 위한 필요 조건이기 때문에 상실이 아프기는 하지만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 상실을 경험할수록 본질을 점점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전생애 주기에 걸친 성장을 위해 이전 것들을 떠나보내야 한다. 우리의 시선이 옛 자아의 상실에만 머물러 있다면, 새 자아인 진정한 정체성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화 현상은 신앙인들에게 은혜로운 상실이고, 영적 성장의 신비를 깨닫고 경험하며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가도록 도와주는 복음의 유비이자 복음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리처드 존슨의 표현대로, 노화는 상실을 통해 우리에게서 하나하나 약탈해가는 ‘한밤중에 찾아오는 도둑’이 아니라 성장을 통해 우리의 참된 자아를 일깨워 주는 ‘위대한 스승’이다. 그래서 노화는 뺄셈의 나머지가 아니라 반복되는 덧셈이다. 상실의 슬픔보다 성장의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늙어 가게 하신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고 몸으로 느껴지는 것을 통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노화를 선명하게 보고 직접 느낄 때 영적 성장의 비밀을 더 잘 배울 수 있다. 우리에게 노화를 주신 이유다. 각각의 사람을 예쁜 포장지로 쌓인 보물로 상상해 보자! 노화를 통한 모든 상실은 마치 예쁜 포장지가 색 바래고 벗겨지고 찢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오래된 포장지가 점점 낡으며 포장지 틈으로 보물 내용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자신 안의 참된 영적 정체성이라는 선물이 점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영적 성장이다. 포장지가 급격하게 낡아가며 포장지로 감춰진 보물이 보이기 시작하듯, 하루가 다르게 급격한 상실을 경험하며 노인들은 가파른 영적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6070 시기는 영적 성장 경험이 잘 이루어지도록 집중적인 영성 훈련과 영적 돌봄이 필요한 때다. 신앙인들은 중년기를 지나며 영적으로 점차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상승 곡선은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 6070 연령대가 되면, 지금까지 해 왔던 신앙생활과 훈련의 자양분으로 계속 영적 건강이 유지되는 것으로 간주하며 ‘영적 자동 운항’(spiritual auto-pilot)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6070 시니어 회중을 위한 영적 돌봄과 훈련에 많은 에너지와 재정과 인력을 투입하는 데 인색한 경향이 있는데, 영적 돌봄과 훈련이 가장 효율적인 시기를 보내는 시니어 회중을 위한 사역을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초고령 교회는 위기로 보이는 기회다

우리나라는 2017년에 이미 고령 사회가 되었고, 통계청은 2025년에 초고령 사회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리는 고령 사회에 살며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는데, 초고령 사회에서의 사회 변화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추가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고령 교회와 초고령 교회에서의 변화와 이에 대한 적응이다. 교회 안에서도 젊은 세대가 줄고 상대적으로 고령 세대는 늘어가고 있다. 짐작하건대 교회 구성원 중 65세 이상의 고령층이 20%에 이르렀는지를 파악해 본다면, 일부 교회들은 이미 초고령 교회에 진입해 있을 것이다. 고령 교회를 맞이할 준비가 미처 되어 있지 못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초고령 교회가 이미 성큼 다가와 있다. 이로 인해 많은 목회자가 당황스러워하며 초고령교회를 위한 준비가 시급함을 깨닫게 된다. 이전 시대에 비해 시니어 회중이 늙음을 경험하는 기간이 늘어가고 있는데, 이 연장된 노화 경험에 대한 목회 철학, 목회 계획, 목회적 대안, 전문적인 노년 목회 인력과 프로그램이 미비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단지 초고령 교회라는 현실에 끌려가며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선제적으로 이 상황을 이끌고 오히려 ‘노년 목회의 변혁’을 통한 목회 전반의 변혁과 성장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런 새로운 도전을 뒷받침해 줄 ‘영성 노년학’이 있다. 신앙인의 건강한 노화와 노화기의 영적 성장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다루는 영성 노년학은 기본적으로 목회 상담, 영성, 노인 복지, 기독교 교육 등의 분야가 어우러지는 영역이다. 시니어 회중뿐만 아니라 인생 후반부의 노화기를 준비해야 하는 중년 회중을 위해 임상적으로 구성된 교육과 훈련 과정이다. 영성 노년학은 북미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지금도 지속적으로 발전하며,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중년과 노년을 위한 나눔식 소모임 영성 훈련, 성찰을 위한 소모임이나 독서 모임, 영적 연대감과 책임 의식에 기초하여 서로를 정서적·영적으로 격려하고 권면하는 소모임, 영적 멘토링 프로그램, 섬김과 나눔의 봉사 활동, 돌봄 제공을 하며 영적 성장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프로그램 등이 더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이런 나눔식 소모임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나누며 서로 돌보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지지그룹이다. 시니어가 독단적인 평가나 절망, 퇴보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도우며 아주 효율적인 영성 훈련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인생의 발달 단계마다 우리는 많은 배움을 얻는다. 노화기에는 더 크고 귀한 배움을 얻는다. 노화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일깨워 주시는 수단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특별히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인생 후반부의 임상적인 노화 커리큘럼(교육 내용)을 잘 소화해야 한다. 노화를 배울 준비가 되었는가? 그 배움을 즐길 준비가 되었는가? 이런 준비가 미흡할 때, 노화기는 그저 상실을 경험하며 소멸에 이르는 무익하고 힘든 시기가 되고 말 것이다. 조앤 치티스터(Joan Chittister)는 이렇게 말한다: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늙은 나이가 겨울이지만, 배운 사람에게 늙은 나이는 수확의 계절이다!” 
 

김기철 배재대학교 복지신학과 교수. 덴버대학교(Ph.D.). 저서로 《기독교 다시 보기》가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