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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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0년  07월호 그리스도인의 정신 건강과 목회 정신 건강과 목회상담

필자는 정신과 교수로서 신학교에서 강의도 했다. “정신 질환자와 귀신들린 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는 목회자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다. 어느 장로님이 경영하는 상점에 정신 질환자가 들어왔다고 한다. 장로님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셨다. 보고 있던 손님이 “사랑이 없으시군요” 하니 “마귀에게 인정을 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셨다. 

돌봄이 필요한 정신 질환자들

16세기에는 악령을 쫓는다고 튜레브에서 정신 장애인 7000명을 산채로 불태워 죽였고, 1515년 제네바에서는 한 해에 500명을 태워 죽였다. 사람을 태우는 장작의 불길이 독일까지 보였다고 한다. 타락한 중세 암흑 시대에 가톨릭이 행한 비정한 작태를 오늘도 일부 기독교인들이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귀신들린 자와 정신 질환자를 혼돈하기 때문이다.

교계에서 존경받는 장 목사라는 분이 있었다. 어느 여름 밤에 들려주신 정신 질환자 이야기는 꽤 감동적이었다. 장 목사가 신학교를 막 졸업하고,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청년 한 사람이 마을을 내려다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이 교회 목사입니다” 하고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약 한달 정도 지난 후였다. 캄캄한 밤중에 누군가 사택 문을 격렬히 두드렸다. 사택은 동네에서 산 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현관 불을 켜고 나가보니, 웬 사람이 발가벗은 채 칼을 들고 서있었다. 깜짝 놀랐지만, 자세히 보니 일전에 새벽기도 후에 인사를 나눈 그 청년이었었다. “웬일인가요? 이리 들어오세요.” 그는 순하게 목사님을 따랐다. 목사님은 청년을 기도실로 데리고 가서 떨고 있는 그의 몸을 담요로 감싸 주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데 괜찮겠소?”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사님은 그를 품에 안고 간절히 기도했다. 얼마 동안 기도하다 보니 청년은 잠이 들어 있었다. 아침이 되었다. 동네에서 사람들이 청년을 찾으러 올라왔다. 알고 보니 청년은 정신 질환자였다. 가끔 발작을 일으키는데 그때마다 부모는 동네 사람들을 동원해 묶어 놓았다고 했다. 이번에 또 묶이면 다시는 안 풀어줄지도 몰랐다. 그래서 청년은 위협하려고 칼을 들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몽둥이와 횃불을 들고 그를 추격했다.

이 청년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은 피난처와 보호자를 찾게 된다. 이때 청년의 머리에 떠오른 피난처는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 장 목사였다. 20여 년을 사귀어 온 친구들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었다. 사랑과 신뢰를 주는 사람만이 환자를 도울 수 있다. 딱 한 번밖에 본 일이 없었지만 목사님은 그에게 신뢰감을 주었고, 믿고 찾아온 그를 보호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에 청년의 부모가 그를 데리고 갔다. 청년은 그 뒤 교회에 다녔고, 닭, 쌀, 콩같은 좋은 것이 생길 때마다 목사님께 가지고 왔다고 한다. 장 목사님이 정신 질환자를 귀신들린 자로 보는 편견을 가졌었다면, 그날 밤 현관에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쳤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피난처를 찾아온 상처 입은 사슴 같은 청년의 실망과 절망감은 어떠했을까?

정신 질환자와 귀신들린 자의 구분

정신의학에서 정신 질환자라 하면 정신 분열증이나 조울 정신병 같은 정신병 환자를 말한다. 그러나 정신 질환자에 대한 일반인들의 개념은 좀 다르다. ‘헛소리를 하고 헛것을 보는 사람’, ‘혼자 웃기도 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 ‘불결하고 무서운 동물 같은 사람’, ‘귀신들린 사람’ 등 이런 사람들을 통틀어서 정신 질환자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정신 질환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많은 환자를 억울하게 괴롭혔다. 특히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정신 질환자를 짐승이나 마귀처럼 취급하는 수용소와 기도원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물론 서구 유럽에서도 16-17세기까지 정신 질환자를 ‘마귀 들렸다’고 불에 태워 죽였다. 20세기인 오늘날에도 우리 나라의 어느 기도원에서는 안찰기도로 정신 질환자에게서 마귀를 쫓아낸다고 때려 죽인 일이 보도되기도 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정신 질환자와 귀신들린 자의 구별을 알고자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정신 질환자’를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와 행동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귀신들린 자’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게 오류에 빠진 이들은 정신의학에 대해서, 인간 심리와 뇌의 생리에 대해서 배울 기회가 없었던 이들이다. 귀신들린 자와 정신 질환자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

마가복음 5:1-20을 통해 거라사 귀신들린 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그들은 사람과 접촉 없이 산속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만나거나 소문을 들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았다. 그때까지 아무도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일이 없었는데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외쳤다. 이런 초자연적인 능력은 정신 질환자에게는 없다. 2000마리나 되는 돼지를 가만히 앉아서 한꺼번에 강물에 몰아넣는 능력도 없고, 쇠고랑과 쇠사슬을 끊는 힘도 물론 없다. 이들에게는 초자연적인 힘이 없다. 정신 질환자는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인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에 걸리면 인간은 두려움 속에 있고 혼란을 경험하게 되므로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과 공간이 주어져야 한다. 교회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목마른 사람처럼 그들은 교회를 찾는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일부 교회들은 그들을 사랑하고 억울한 그들의 편이 되어 주기는커녕 마귀 취급하고 묶고 때리고 무서운 얼굴로 학대한다.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 곧 당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시대에 정신 질환자들보다 더 작은 자들이 있을까? 정신 질환자들을 마귀 취급하는 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그런 짓을 하려거든 교회 밖에서 하라. 주님의 이름으로 말고 마귀의 제자로서 하라. 그것이 오히려 정직한 태도일 것이다.” 이런 슬픈 현실을 접할 때마다 장 목사 같은 분들이 그리워진다.

약을 쓰는 행위와 믿음

‘약을 쓰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인가?’ 이것 또한 목회 현장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다. 대학병원 교수 시절에 만났던 이씨 부인이 생각난다. 이씨 부인은 36세였는데, 정신병적 상태였다. 순하고 착했던 이씨 부인이 어머니를 때리려 하고 집안 기물을 부순다. 밤낮 없이 돌아다니고 헛소리를 한다. 진찰실이 떠나갈 정도로 큰소리로 “나는 시키는 대로 했소잉” 하고 외쳤다. 사람을 몰라보기도 하고 알아보기도 한다. 입을 씰룩이며 한 쪽 팔다리에는 마비가 왔다.

 사연은 이러했다. 이씨 부인은 어릴 때부터 심한 간질이 있었다.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나 성격은 착하고 부지런했다. 품을 팔아 삯을 받으면 꼬박 꼬박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렸다. 같은 처지의 남자와 결혼했다. 아들도 낳았다. 그러나 남편의 구타가 심했다. 남편의 구박을 못 견뎌 아이도 빼앗기고 쫓겨났다. 친정에서 살게 되었다. 다행히 집 근처에 정신병원이 생겼다. 정신과 의사를 만나 항경련제 투여를 받기 시작했다. 약 효과는 아주 좋았다. 간질 발작의 빈도는 알아보게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병도 낫는다고 해서 열심히 다녔다. 이씨 부인이 정신병적인 상태로 악화되기 일주일 전, 목사님이 이씨 부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간질병은 귀신들린 병이다. 병은 믿음이 있어야 낫는다. 안수기도를 받아야 된다. 기도를 받으려면 약을 먹지 말아야 된다. 약을 먹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약을 의지하는 것이므로 믿음 없는 행동이다.  약이든지 하나님이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라” 이씨 부인은 목사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택했다. 당장에 약을 끊었다. 이틀이 지나면서 간질 발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이미 먹은 항경련제의 혈중 농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전에는 한 번 발작을 하고 정신이 돌아왔는데 이제는 연거푸 여러 번 발작을 할 지경이 되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토하며 전신 경련을 일으켰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급히 항경련제를 먹였다. 발작은 잡혔으나 이제는 몹시 흥분 상태가 되어 난폭해졌다. 아버지는 약을 먹지 말라고 한 교회를 원망했다. 교회 다니는 어머니는 죄인처럼 힘없이 변명을 했다.

간질은 뇌에 병소가 있어서 비정상적인 전류를 방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증상이다. 항경련제는 이 이상 전류의 방출이 뇌 전역으로 퍼지는 것을 막아 주는 약이다. 어떤 이유에서 이 억제를 갑자기 풀어주면 눌렸던 스프링이 반동으로 높이 튀어 오르듯이 이상 전류의 흐름이 왕성해진다. 이때 간질 발작이 연거푸 일어나게 된다. 이 상태를 간질 중첩 상태라 한다. 간질 중첩 상태는 생명을 위협한다. 뇌기능이 전반적으로 마비되고 호흡 곤란으로 인한 산소 결핍증으로 뇌세포는 파괴된다. 간질 중첩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응급처치를 통해 살아났지만 백치 상태가 되어 며칠 못살고 죽는 경우도 보았다. 이씨 부인의 정신병적 흥분 상태는 간질 중첩의 후유증이었다. 불쌍한 이씨 부인! 어려서는 뇌염으로 고생하고 초등학교 때부터는 간질병으로 소외당하고 남편에게도 버림받은 서러운 삶의 여인! 교회에 가면 복을 받는다고 해서 서럽고 고독한 삶을 보상받으려 나갔고 존경하는 목사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약을 끊었는데, 이제는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약을 먹는 것과 믿음을 갖는 것,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일까? 뇌염의 후유증으로 인한 간질 발작도 간질 귀신 때문이라고 해도 되는 것인가? 중첩 발작의 후유증으로 인한 정신병적 상태를 더 악한 귀신이 들어왔다고 안수기도를 해도 되는 것인가? 안타까운 눈으로 딸을 보며 “왜 그 사람들이 약을 못 먹게 했는지 모르겠어라우” 하는 가난하고 늙은 아버지의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무책임한 한마디가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지나친 단순화가 문제다. 하나님 아니면 마귀로 모든 자연 현상을 해석하려는 태도가 문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정직성의 결여가 문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눅 5:31). 예수님께서도 의사의 병 고침을 인정하셨다. 병에 대한 약물 치료의 효율성을 다음 성경 구절들이 말씀해 준다. “인자야 내가 애굽의 바로 왕의 팔을 꺾었더니 칼을 잡을 힘이 있도록 그것을 아주 싸매지도 못하였고 약을 붙여 싸매지도 못하였느니라”(겔 30:21).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겔 47:12). “네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이 없고 네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도다”(렘 30:13).

나가면서

예수님은 기적의 빵을 드시지 않고 농부가 수고하여 가꾸어 낸 빵을 주식으로 하셨다. 바다 위를 걸으실 수 있었지만 제자들이 노 젓는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법칙을 따르는 것은 신앙생활과 전혀 모순됨이 없다. 뇌에 병변이 있는 사람은 뇌의 현상을 공부하고 약을 아는 의사에게 치료받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의약과 의학적 지혜도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축복이기 때문이다.

정신 질환자와 귀신들린 자에게는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다. 가장 확실한 차이점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유무다. 귀신들린 자에게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 쇠고랑을 끊는 엄청남 힘이라든지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과 가족사를 아는 것 등이다. 공통점은 사람을 피하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정신 질환자는 사람에게 상처받은 이들이라 사람을 두려워하고 피한다. 귀신들린 자는 귀신이 시키기 때문에 고립된다. 가톨릭에서는 귀신들린 자를 위한 축사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정신과 의사의 진찰을 받게 한다고 들었다. 합리적인 조치라고 생각한다. 
 

이무석 전남의대 정신과 명예교수, 이무석정신분석연구소 소장. 저서로 《성격 아는 만큼 자유로워진다》,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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