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 {{x.scr_name}}
  • 미분류

신학·설교 2020년  04월호 본회퍼의 윤리와 ‘타자를 위한 교회’ 심층기획 본회퍼의 신학과 목회

 1945년 4월 9일은 장미빛 미래를 보장받았던 독일의 개신교 목회자이자 신학자였던 본회퍼가 나치의 정치범 수용소, 플로센뷔르크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날이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맞서 싸운 결과, 본회퍼는 39세의 이른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신학이 남긴 영향력은 적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본회퍼는 20세기 후반기에 특별히 독재 정권 하에서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했던 한국을 포함해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제 3세계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 신앙과 정치의 상관성 등과 같은 예민한 질문들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본회퍼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연관해 필자는 이 글에서 본회퍼의 윤리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본회퍼에게 선은 무엇이며, 기독교 윤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회퍼의 윤리 사상의 신학적 기초와 특징은 무엇인가? 그의 윤리 사상은 약 2년 동안의 감옥 생활에서 어떻게 발전했는가? 세상을 향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한국 교회의 위기를 해결하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현실과 길-예비

일반적으로 윤리학은 선에 대해 질문하고 그 답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윤리학은 선과 악이 무엇인가에 질문하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와 같은 질문 방식에 내재된 문제를 지적한다. 여기에서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찾는 주체가 인간의 자아이고, 인간이 현실 세계의 중심이 된다. 본회퍼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길 원했다. 본회퍼의 확신에 의하면 현실 세계의 궁극적인 중심과 윤리의 근원은 인간의 자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실이다.1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둘 중의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에 대한 참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현실은 나를 전적으로 이 세상의 현실 안으로 인도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세상의 현실은 언제나 하나님의 현실 안에서 이미 감당됐고, 용납됐으며, 화해됐다. 이것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우리의 세상 안에서 현실화되는 것에 대해 질문한다.”2

본회퍼에 의하면 적대적 관계였던 하나님과 세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화해됐다. 이제는 두 개의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실’이라고 하는 하나의 현실이 존재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현실에 근거해 경직되고 그릇된 ‘두 영역의 사고’를 뛰어넘는다. 그 당시의 루터주의자들은 두 영역 사고를 바탕으로 기독교적인 것과 비기독교적인 것을 대립시켰고,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분리시켰다. 또한 그들은 신앙과 이성을 서로 대적하는 것으로 파악했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리시킴으로써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된 현실을 부정했다.3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실을 실현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윤리적인 삶을 어떻게 해야 살아갈 수 있을까? 본회퍼는 여기에서 ‘길-예비’의 윤리를 강조한다. 본회퍼가 인용하고 있듯이 길-예비의 윤리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미리 준비하는 사역을 소개하는 누가복음 3:4에 근거한다.

길-예비의 윤리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현실 안에서 구별되는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현실은 궁극적인 것이고, 반면에 세상의 현실은 궁극 이전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은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고 화해됐지만 둘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존재한다. 그 둘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궁극 이전의 것은 자기의 가치를 궁극적인 것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획득한다.4

이러한 맥락에서 본회퍼는 궁극 이전의 영역에서 궁극적인 것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기독교윤리의 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궁극적인 현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즉 교회는 궁극 이전의 영역에서 악한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선한 것과 인간적인 것으로 개혁함으로써 복음이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굶주리는 자에게는 빵이 필요하고, 노숙자에게는 집이 필요하고, 권리를 빼앗긴 자들에게는 정의가 필요하고, 고독한 자에게는 사귐이 필요하고, 방종에 빠진 자에게는 질서가 필요하고, 노예에게는 자유가 필요하다. 굶주리는 자를 굶주리게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큰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가장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시듯이 굶주린 자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굶주린 자와 빵을 나누며 집을 나눈다. 만일 굶주린 자가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책임은 그에게 빵을 주는 것을 거절한 자에게 돌아간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제공하는 것은 은혜의 도래를 위해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5

여기에서 필자는 본회퍼의 사회 윤리, 특히 정치 윤리의 핵심을 보게 된다. 히틀러의 독재정치에서 유대인들이 받았던 고난의 현실에 끝까지 참여했던 본회퍼의 신앙이 길-예비의 윤리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주장일까?
 

책임 윤리와 현실 적합성

본회퍼의 윤리에서 책임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책임의 사회학적·정치학적인 의미를 중요하게 여겼다. 베버는 윤리를 심정 윤리와 책임 윤리로 구별해 생각했다. 전자는 행위자의 기본 의도와 법의 준수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종교에서 발견된다. 이와는 달리 후자는 사람들의 윤리적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책임 윤리는 때로는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용인하는 현실의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된다.

본회퍼는 책임에 대한 베버의 견해를 신학적으로 수용하지만 그것의 단점을 해결한다. 본회퍼는 베버와는 다르게 행위의 의도와 결과를 통합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현실에 근거해 인간을 ‘전체’로서의 인간으로 이해한다. 전체로서의 인간의 행위에서 의도와 결과는 분리되지 않고, 그 둘은 서로 구별될 뿐이다. 그리고 본회퍼는 책임의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책임은 인간의 궁극적인 현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응답으로 규정된다.6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해 응답하는 (우리의 생명을 긍정하고 부정하는) 이 생명을 우리는 ‘책임’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책임의 개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한 응답의 포괄적 전체성과 통일성은 우리가 예컨대 유용성을 고려한 결과로, 혹은 특별한 원리로부터 내릴 수 있는 부분적인 응답과 구별된다.”7

책임은 성경 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응답이다. 그 응답은 우리 삶의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생명까지 요구하는 전체로서의 응답이다.

예를 들어서 본회퍼는 의사의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본회퍼는 의사로서의 명확한 소명이 있는 의사의 책임의 범주가 어디에 이르는지 고민한다. 의사의 책임은 자기 병원의 병실에 누워 있는 환자들만 잘 돌보는 데서 멈추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 병원의 바깥에서 일어난 나치 정권의 비인간적인 의술에 대해 비판하고, 밖의 희생자들까지 치료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가?8 본회퍼의 경우, 책임의 한계는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하는 수준까지 이른다. 이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희생하신 나사렛 예수의 삶에 대한 응답을 책임으로 이해하는 본회퍼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본회퍼의 책임 윤리는 현실 적합성의 특징이 있다. 본회퍼는 구체적인 현실과 구체적인 상황에 가장 적합한 책임 윤리에 주목한다. 책임 윤리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적합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함으로써 현실에 가장 적합한 행위를 실천한다. 책임 윤리는 ‘절대적인 선’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악한 수단을 선택한다. 그럼으로써 책임 윤리는 ‘상대적인 선’을 실현한다. 이와 같은 행동은 ‘현실에 적합한 것’으로 이해된다.

흥미롭게도 본회퍼는 현실에 적합한 행동의 사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다. ‘궁극적인 현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현실적인 분’이다. 율법주의에 함몰된 안식일 법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보다는 생명의 가치를 훼손시켰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 법의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다. 본회퍼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윤리적 이념을 소유하거나 또는 윤리적 이상을 실천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들을 사랑하신 ‘현실적인 분’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회퍼는 ‘현실에 적합한 행위’를 ‘그리스도에게 적합한 행위’로 이해한다.9
본회퍼는 히틀러를 죽이는 암살 음모에 가담함으로써 국가의 실정법을 위반했고,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까지 위반했다. 그러나 본회퍼의 행위는 유대인의 대학살을 멈추게 하고, 무고한 생명을 더 많이 구하기 위한 그 당시에 가장 적합한 행위로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본회퍼는 폭력의 사용을 모든 경우에 처음부터 용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계 상황 속에서 ‘마지막 수단’으로서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수준에서 폭력을 허용했다. 이것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의 불의한 폭력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과 연관해 생각할 수 있다.
 

비종교적인 기독교와 타자를 위한 교회10

본회퍼는 1944년 3월에 히틀러에 대한 저항 그룹과 연관돼 있다는 의심을 사면서 베를린의 테겔 감옥에 갇힌다. 지역을 옮겨 여러 곳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본회퍼는 새로운 관점에서 자기의 신학 사상을 전개했다. 본회퍼의 새로운 신학적 사유는 기존의 종교 비판에 근거해 비종교적인 기독교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됐다. 기존의 종교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이성의 능력을 최고로 여기는 시대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본회퍼는 단순한 말이나 설명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길 원한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의 삶의 영역에서도 주님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는 비종교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그는 먼저 종교적인 것과 비종교적인 것을 구별한다. 종교에는 형이상학적인 것과 개인주의적인 것이 포함된다. 먼저, 형이상학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고난의 현실과 무관한 하나님, 하나의 관념으로 존재하는 절대자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전지하시고, 지고하신 최선의 존재로서 영원한 하늘에만 거하시는 분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무종교 시대에 하나님의 전능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력함과 고난받으심을 통해 나타난다.

둘째, 하나님을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 내면성의 한계와 사적인 영역의 범주 안에서만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은 개인의 경건성과 개인의 영혼 구원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본회퍼는 하나님에 대한 비종교적인 신앙, 즉 기독교 신앙을 삶의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삶의 행위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종교 비판을 바탕으로 본회퍼는 종교적 공동체로 전락한 당시의 독일 기독교를 비판한다. 본회퍼는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비종교적인 교회 공동체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은 독일 교회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 ‘타자를 위한 교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타자를 위한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앙’을 끝까지 견지하지 못했던 그 당시의 고백교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아래의 인용문은 고백교회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려할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교회는 타자를 위해서 현존할 때, 교회가 된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 교회는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목사들은 전적으로 교회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살아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세속적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인간 공동체의 세상적 과제에 참여해야 하지만, 지배하면서가 아니라 돕고 봉사하는 방식으로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삶이 어떤 것이며, 또 ‘타자를 위한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해 주어야 한다.”11

본회퍼는 자기만을 위하는 종교적인 기관으로 변질된 기독교와 교회를 비판하고 있다. 그 당시의 독일 교회들은 히틀러를 독일 민족의 부흥을 위한 정치적 메시아로 받아들였고 그의 말에 전적으로 복종했다. 독일 제국교회에 속한 ‘독일 그리스도인들’ 교파는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을 교회 건물 내부와 개인 경건 생활의 내면으로 제한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인·종교적인 해석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히틀러를 삶의 새로운 주님으로 받아들인 ‘독일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히틀러와 그들을 비판했던 고백교회조차 나중에는 타자를 위한 비종교적인 삶을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독일 제국교회는 고백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에게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고백교회 총회(1938년 7월 31일)는 이 중요한 사항을 전체 총회의 결의로 정하지 않았고, 목회자들이 개인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고백교회에 속한 다수의 목회자들은 충성 맹세에 서약했지만 본회퍼를 포함한 소수의 목회자들은 충성 맹세를 거부하고 끝까지 투쟁했다.12 히틀러를 따르는 거짓 교회와 오직 그리스도만을 주로 고백하고 따른 참된 교회 사이의 투쟁, 즉 ‘교회 투쟁’은 본회퍼가 그의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시간까지 이어졌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 주목을 받았던 세속화 신학은 본회퍼를 전통적인 기독교와 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나서 사회적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본회퍼는 세상과 분리된 기독교와 자기 보전에만 집착하는 종교적인 교회 공동체를 비판했다. 그 비판은 세상을 향해,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기독교와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마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교회마다 연말이 되면 새해를 맞이하면서 부르는 찬송이 있다. 본회퍼가 감옥에서 직접 쓴 “선한 능력으로”가 바로 그것이다. 본회퍼는 이 시를 성탄절 선물(1944년 12월)로 부모님과 약혼자에게 편지에 담아 보냈다. 그 시는 본회퍼의 절친인 베트게가 본회퍼의 사후에 모아서 출간한 책의 원문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선한 힘들에 신실하고 조용히 둘러싸여 놀랍게 보호받고 위로받으며, 나는 이날을 그대들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고, 그대들과 더불어 새로운 해를 향해 나아가기를 원한다, 지나간 해는 아직도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고 악한 날은 여전히 우리를 짓누른다. 아, 주님, 우리의 놀란 영혼에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구원을 주소서. 당신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가득 찬 쓰디 쓴 고난의 무거운 잔을 주신다면 당신의 선하고 사랑스런 손으로부터 그것을 두려움 없이 감사히 받겠나이다. … 선한 힘들에 의해서 신실하고 조용히 감싸인 채 우리는 위로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을 기다린다. 하나님은 저녁과 아침 그리고 새날에도 분명히 우리 곁에 계신다.”13

본회퍼는 차가운 감옥에서 지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본회퍼가 저항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증거를 담은 조센 서류가 발각된 이후, 석방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본회퍼의 신앙은 중단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극단적인 현실도 본회퍼의 행동하는 신앙과 삶으로서의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1999년에 본회퍼의 생애와 저항을 그린 영화의 마지막은 본회퍼가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 독일군 장교는 이제는 끝이라고 하면서 조롱한다. 그때 본회퍼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No”, 아니라고 말한다.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본회퍼는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아니,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야!” 이와 같이 본회퍼는 1945년 4월 9일 이른 아침, 그 순간까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았고, 타자를 위해 죽기까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많은 사람이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한국 교회는 위기에 이미 깊이 빠진 상태이며 쇠락의 길로 들어선 지 오래됐다고 한다. 교회에서는 더 이상 젊은 청년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고, 주일 오후예배와 저녁예배 자리는 교회의 어르신들로만 채워지고 있을 뿐이다. 오래전에 이미 추락한 한국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때에 본회퍼의 윤리와 ‘타자를 위한 교회’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첫째, 한국 교회는 경직된 두 영역의 사고, 이원론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향한 책임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체적인 책임을 실현하는 장소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나타난 희생적인 사랑의 가치를 실천해야 한다.

둘째, 한국 교회는 책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악한 것은 선한 것으로 만들어 나가고, 비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으로 개선함으로써 주님 오심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지금은 길-예비의 윤리를 실천하는 한국 교회가 더 많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셋째, 한국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임의 소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만약의 경우, 국민들을 향한 국가의 폭력이 지속된다면 교회는 불의한 국가를 향한 예언자적 선포의 임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는 종교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비종교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돼야 한다. 교회는 더 이상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종교적인 기관이 돼서는 안 되고, 타자를 위하고 타자와 함께하는 비종교적인 교회 공동체가 돼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적인 상황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앙’을 의연하게 지켜나가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1) 디트리히 본회퍼, 《윤리학》, 손규태·이신건·오성현 옮김(대한기독교서회, 2010), pp. 37-38.
2) 앞의 책, p. 48.
3) 앞의 책, pp. 53-54.
4) 앞의 책, pp. 181-185.
5) 앞의 책, pp. 186-187.
6) 고재길, 《한국 교회, 본회퍼에게 듣다》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4), p. 165.
7) 디트리히 본회퍼, 《윤리학》, p. 304.
8) 앞의 책, p. 352.
9) 앞의 책, pp. 311-314.
10) 이하의 글은 필자의 글, “본회퍼, 비종교적인 기독교를 논하다”를 다시 정리하고 보충한 내용이다. 고재길, 《한국 교회, 본회퍼에게 듣다》, pp. 179-200.
11) 디트히리 본회퍼, 《저항과 복종: 옥중서간》, 손규태·정지련 옮김(대한기독교서회, 2010), pp. 713-714.
12) 나치 정권에 맞서 싸웠던 독일 고백교회의 저항에 대한 자세한 것은 필자의 다음의 연구 논문을 참고하라. 고재길, “독일 고백교회의 저항에 대한 연구” 〈신학과 사회〉 (2016) vol. 30, pp. 47-77.
13) 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옥중서간》, pp. 775-776.


 

 

 

고재길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 문화 교수. 훔볼트대학교(Dr.theol.). 저서로 《본회퍼, 한국 교회에 말하다》, 《개혁교회의 목회리더십과 16세기 신학 교육》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목회와 신학

4월의 주요기사

추천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