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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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진단 2020년  04월호 ‘코로나19’와 교회의 공공성 이달에 생각한다

기사 메인 사진 조선 시대에도 역병이 돌면 임금이 하늘에 제를 올렸다. 유럽에서도 흑사병으로 인구의 반이 죽어 나갈 때 사람들은 신앙에 의존해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한다. 그러나 이런 종교 행위가 전염병을 없애거나 보호해 주지는 못했다. 백신이 개발되고 의료 기술이 발전되면서 사람들은 의학적 가이드를 신뢰하게 됐고,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와 의료 당국의 지침에 협력하는 것은 이제 시민의 당연한 의무가 됐다.

최근 일부 대형 교회들이 ‘코로나19’에 걸린 경증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시설을 제공하겠다고 나섰고, 또 가장 심각한 지역과 중증 환자들을 위해서 기금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교회나 기독교 단체들도 ‘사회적 거리 두기’ 차원의 잠정적 예배 중단을 선언해 당국의 지침에 적극 협력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 코로나 확산의 진원지로 지목받는 신천지 집단과 분명히 차별되고, ‘정상적인’ 신앙 공동체의 면모를 표현하는 것이라 본다.

그러나 지역 교회의 목양적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이런 결정들이 앞으로 우리에게 던질 질문들은 그리 간단치 않다. 교회의 공공성과 신앙 행위의 특수성이 충돌해 ‘온라인 예배’나 ‘영상 예배’에 대한 찬반논란이 여기저기서 가열되고 있다. 당국의 협조 요청에 따라 예배당에서의 예배 행위를 중단한 것이 신자들의 안전과 공공성에 부합하다고 판단한 것이지만, 추후 한국 교회의 예배와 신앙생활의 양식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예측하기 쉽지 않다.

필자는 공공신학자로서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종결된 후 한국 사회의 종교 지형이 매우 달라질 것이고, 그때 사람들은 정통이라 말하는 우리에게 이단과는 무엇이 다른지 묻게 될 것이라 전망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쩌면 한 차원 더 깊은 질문이 필요한 것이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한국 교회는 이 사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 응답할 준비가 됐는가? 예컨대 지금껏 우리가 누린 성공과 번영의 사적 욕망은 ‘신천지’와 진정 다른가?
 

‘코로나19’와 한국 사회

이번 전염 바이러스의 공식 명칭은 ‘코로나19’다. 지금까지 나온 의학적 분석에 따르면, 이제껏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바이러스이며 치사율은 ‘메르스’나 ‘사스’때보다는 낮아서 고령자나 기저 질환자가 아니라면 가볍게 거치며, 정형화된 독감 형태로 인류와 함께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일부 선진국에서는 지나친 대응이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다며 마스크의 적극적 착용을 권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중국 우한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도되고 있지만,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행해 한국을 비롯해 일본과 유럽, 아프리카에서도 그 전염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인의 입국을 차단하는 나라가 현재(3월 4일) 80여 개국이 넘었다. 경제 활동이 위축되면서 실물 경제가 바닥을 치고 무역이 불가능해지니 향후 한국 경제에 큰 악재가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은 전문가의 입에서 나온다.

최근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쾌거를 이루었고, 아이돌 그룹인 BTS의 새 앨범이 유례없는 빅히트를 기록하는 등 전 세계에서 한류가 더욱 뜨거워지고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19’ 사태가 자칫 그동안 쌓아 올린 성과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겠다. 외부 전염원 차단에 실패했다며 정부의 초기 대응에 대한 비판도 많았는데, 지금 한국 정부의 대처를 선진국 정부나 해외 언론이 그나마 높이 평가하고 있어 다행이다.

더 큰 문제는 국내의 다양한 집단 간 의견 충돌이 빚어내는 내부 분열이다. 4월 총선을 앞둔 일부 정치권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 사태를 활용하려는 구태를 보이고 있고, 또 가짜 뉴스가 넘치도록 유포돼 일손이 부족한 방역 일선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들은 마스크를 구하고자 과도한 신경과 에너지를 낭비하며 극도의 불안과 불만에 가득 차 있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이 집단적 스트레스를 불러오고 있다.

정부의 정책 혼선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스크 사태’를 보면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이에 대한 공포와 불안 심리가 더 큰 바이러스인 듯하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보이는 실체로 대체해 자신들의 공포와 불안의 표상을 대입하고자 한다.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일들은 사회의 변동을 일으키는 큰 요인 중 하나다. 지금은 바로 ‘신천지’ 집단과 여러 종교의 종파들이 그 대상이 됐다.
 

‘코로나19’와 종교

자칭 구세주라는 교주의 공개적 사과가 있었지만, 이 집단이 바이러스 확산의 진원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드러났고, 확진자 대부분이 이 집단과 관련이 있거나 관계자라는 당국의 발표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그 책임을 공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 집단의 폐쇄적 운영과 비합리적인 포교 방식이 연일 미디어로 보도되면서 사람들은 ‘신천지’의 반사회적 특성을 명확히 알게 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왜 그토록 많은 이가 그 집단에 빠져들었을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앞으로 의료적 대처가 효과를 발휘하겠지만, 이 집단에 대한 사회적 처방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는 큰 과제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왜 사이비나 이단 종교에 빠지게 되며, 한국에는 왜 이런 비정상적인 종교 집단이 많은가? 이 질문들을 종합적으로 살피다 보면, 이것이 단지 저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로버트 치알디니 외 2인이 집필한 《사회심리학》에서는 ‘사회적 영향력’(social influence)을 “실제 상황이나 상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압력에 의해 일어나는 행동의 변화”로 정의한다(p.268). 동조(conformity), 순종(compliance), 복종(obedience)으로 이어지며 심리에서 행위로 강화되는 변화는 왜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집단에 매료되는지 잘 보여준다. 일단 집단에 발을 들여 놓으면, 그 집단의 망상과 권위에 복종하게 돼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종교 집단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삶도 비슷한 방식으로 비합리적인 ‘사회적 권위’에 휩쓸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영향력의 메커니즘이다. 즉 신천지와 같은 종교 집단이 아니더라도 그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공포심과 불안 심리 역시 전염성이 엄청나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과도한 에너지를 낭비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신천지 집단에 공적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바이러스 확산을 의학적으로 저지한 후에 공포와 불안의 심리를 냉정하게 내려놓고 이 집단에 대한 사회적 배상 및 법적 책임을 묻는 공개적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지금은 가짜 뉴스나 잘못된 정보를 차단하고, 신천지 집단이 오판하지 않고 바이러스 확산 방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그들을 포함한 모든 시민이 함께해야 할 일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교회가 한 차원 더 높은 공공성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공공신학자로서 교회가 공공(the public)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의 가치와 신앙의 고백을 번역해 사회적 공론장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여 일단 현재 교회들이 당국의 가이드를 따르고, 확진자들과 의료진들을 돕는 일에 협력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 본다. 합리적인 판단과 행위를 통해 사회적 신뢰를 높이고 공공성을 확보하는 노력이다.

이러한 대처 방식은 이미 각 교단 총회와 신학 교수들, 공적인 기독교 단체들이 모두 동의하며 해당 구성원들에게 권하고 있다. 당장 확진자들을 돕는 일과 위험에 처한 이들을 지원하는 일에 참여하고,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당국과 협력하는 것이 선교적 차원에서도 옳은 방향이라는 취지의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공공성과 관련해 한층 더 깊이 들추어 봐야 할 차원이 있다고 본다.

한국 교회에서 종교의 공공성에 대한 요청은 일부 극단적인 우파 세력들을 제외하면 진보나 보수나 모두 그 필요성에 공감한다. 사회적 감염 확산의 우려를 아랑곳 않고 야외 집회를 강행하려는 이들 중 종교적 색채를 띤 이들에 대한 비판은 신천지에 대한 비판과 그 결이 다르지 않다. 그러니 한국 교회가 신천지와 다른 공공성을 명확히 증언하려면, 신천지에 대한 비난과 구제와 기부에 동참하는 것을 넘어 차원이 다른 신앙적 실천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의 공공성,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의 종교적 지형은 이토록 강렬하다. 여러 통계에서 한국 사회가 탈종교화 돼 가고 있고, 특히 기존 교회에서 이탈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객관적인 수치를 볼 수 있으나, 이번 위기 국면에서 한국 사회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사회적 실체 중 가장 강력한 단위는 역시 종교다. 신천지뿐 아니라 연일 종교 단체들의 대처에 대한 보도가 넘쳐나고 있으니 사람들의 뇌리에 다시 한국 사회의 주요 변동의 한 요인으로 종교가 각인되는 기회가 됐다.

앞서 언급한 대로 많은 교계의 주체들이 교회가 이 상황을 공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교단은 임시적인 예배 중단을 제도적으로 허용했고, 신학 교수들은 그 근거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했다. 어떤 교회는 특정 지역을 위해 헌금을 지원했고, 또 어떤 교회들은 예배로 모이지 못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미자립 교회들을 지원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이런 실천을 통해 비난받는 이단 집단 신천지와는 다르게 교회는 나름 사회적 신뢰를 얻는 듯 보인다.

그런데 우리의 내부는 정말 성경적 가치에 토대를 둔 신앙의 공공성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준비가 됐는가? 우리의 속살도 그들과 전혀 다르다 말할 자신이 있는가? 당장 재정적 기부와 지원에 동참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에서 그런 일체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볼 일이 전혀 아니지만, 그러한 ‘선한 일’과는 별개로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단지 신천지를 부정하는 계기로만 삼을 일이 아니라 우리 안의 우상을 드러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어떤 교계 인사들은 이 사태가 특정 국가가 기독교를 박해한 까닭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거나 현 정부가 좌파라서 받는 징벌이라 소리치지만 모두 미신적인 또 하나의 광기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의 이름으로 극우적 민족주의나 반인종주의적 차별을 드러내는 것은 코로나19의 확산을 조장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될 뿐이다. 그들 자신이 말로는 신앙을 외치나 실제로는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에는 통일교에 현혹됐다가 지금은 통일교를 비판하는 일을 하는 핫산이라는 인물의 사례가 나온다. 그의 재교육 과정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몇 년 전 통일교 입문과 세뇌 과정에서 그랬듯 과거의 준거 집단을 대체하는 새로운 준거 집단, 가치, 목적 의식을 제공했기 때문”(p.319)라고 말한다. 정상적인 종교는 옳은 시민적 삶에 대한 지침과 가이드를 생산하는 ‘문화의 저장소’라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공공성을 요청하는 공공신학자들의 인식이다.

사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종교는 교리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물질과 재화를 축적할 뿐,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향해 어떤 사회적 규범도 제시하지 못한다. 겉으로는 종교적 정통성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사적인 혹은 집단적인 유익을 위해 단단히 결속돼 있다. 이런 종교는 그 사회에서 ‘규범’을 생산하는 공적 역할을 감당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계급적 특성을 반영한 이념을 주장하기 위해 신자들을 동원한다.

한국 교회가 신천지처럼 이단적 교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 사적(私的)인 집단처럼 보일 만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하게 된다. 과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교회들의 사례를 다시 거론하는 일은 시간 낭비다. 또 여전히 사회적 합의를 거스르며, 마치 예배당의 예배를 중단하는 일이 범죄인 양 떠들면서 당국을 비판하고 “신앙을 지키자!”는 식의 주장을 외치는 이들도 있으니 아마 사회적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일이다.

반면 반성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번 사태를 돌이켜보니 과거 돈과 영향력에 매혹돼 우리 안의 우상을 몰라봤던 한국 교회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다. 교회들이 사회적 구호와 구제를 위해 재정적 지원을 하는 행동은 의미 있는 일이다. 다만 교회의 공적 헌신이 물질로 계량화돼 나타나는 전시성 효과 때문에 정작 우리 자신이 돌아봐야 할 우리 안의 비신앙적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일에는 무디지 않을까 걱정이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인간의 번영》에서 지구화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종교며, 그렇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풍요를 허용하셨다는 고백으로 오늘의 지구화가 이뤄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임을 역설한다. 인간의 사적인 풍요나 이기적인 물질주의 욕망을 이기고 모두가 함께 풍요로운 ‘공동의 선’을 향하는 지구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종교의 공적 역할이란 지구적 전망에서 볼 때 이 일에 헌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과 갱신이 없는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에서 복의 근원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 떡으로만 살라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p.54.) 필자는 볼프의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지금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한국 교회를 향해 이런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도전이라 본다. 약한 자들을 돕는 동시에 어느새 우리 안에 깊이 파고든 물질주의와 집단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시기다.

공공 철학자 이사가키 히사가즈는 국가주도의 ‘공’과 개인적인 ‘사’의 중간지대인 ‘공공’의 시민 영역을 확장하는 일이 필요하고, 여기에 종교의 공적 기여가 필요한 지점이라 본다. 그는 저서 《공공복지》에서 ‘공공성’이란 “열려 있는 것, 관심을 공유하는 것과 더불어 자기에게 회수할 수 없는 ‘타자성’이 작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신천지와 같은 ‘사적 집단’과 다른 신앙 공동체의 ‘공공성’이라 할 것인데,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과 자기 성찰이 그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예배와 봉사 활동을 통해 훈련되는바, 한국 교회의 내적 구조가 신천지와 달리 예배와 봉사를 통해 공공성을 함양할 수 있는 공동체인지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마침 제기된 ‘예배 중단’에 대한 논쟁과 함께 우리의 존재 양식을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올바른 예배 행위를 다시 정립함으로써 그 실천으로 봉사와 헌신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회의 ‘공공성’을 사회적으로 증언하는 일이다.
 

‘코로나19’와 예배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혹은 ‘교회는 우리 자신이다’와 같은 진술은 ‘선교적 교회’의 중요한 고백들이다. 이는 성장주의 신학과 전략이 교회 건물을 넓히고 교세를 확장하는 것을 선교의 목적으로 인식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약화시켰다는 성찰 뒤에 나온 북미 교회들의 증언이었다. 그러나 건물과 공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생활 양식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예배의 공간이 곧 교회이며, 그것은 다시 공간을 통해 실현되는 사태를 곧 교회로 보게 만들었다.

이번에 많은 학자가 논의하고 있는 것처럼, 개혁 교회 본래의 교회론에 입각해서 볼 때 지금과 같이 감염 확산이 염려되는 비상 상황에서 예배를 잠시 중단하고 각 가정에서 예배하거나 방송 혹은 온라인을 통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는 주장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해 예배의 중단은 신앙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보수적인 입장들도 없지 않다.
신학자들과 달리 목회 현장은 더욱 복잡하다. 다들 걱정하듯이 규모가 작은 교회들은 당장 헌금의 감소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또 예정돼 있던 교회의 여러 활동과 행사가 취소, 연기됨으로써 신앙 훈련의 중단 사태를 우려하는 목회자도 많다. 어떤 목회자는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 중단을 실행하고 있지만, 적은 수라도 자신과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싶으나 주위의 눈치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것이 힘들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인간의 죄성은 편안함과 안락함을 거부하기 어렵다. 예배 중단이 신학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지,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는 우리 모두가 빠질 수 있는 인간의 본성적 연약함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인간중심적 편의주의로 흐르지 않으려면 보다 지혜로운 예배의 영성과 형식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과거에 녹화한 영상을 재송출하는 일은 최대한 삼가고, 교역자들만이라도 참여해 현장 생중계가 가능하면 좋으리라 본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앞서 언급한 바 ‘선교적 교회’의 주장처럼 이번 기회가 오히려 ‘흩어지는 교회’로서 ‘건물 중심의 교회’의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리라 전망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본다면 이런 예배 중단 사태와 탈교회적 예배의 경험이 오히려 개인적 영성을 강화하고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교인 수 감소를 더욱 부추기는 원인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하다.

전자가 가능하려면 ‘삶의 자리’가 진정한 ‘예배의 자리’가 되는 영성을 우선 구비해야 한다. 그것은 ‘공공의 영성’이다. 그는 단지 ‘골방의 기도’를 넘어 ‘타자를 품는 영성’으로 예배의 결단이 삶에서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과연 그런 준비가 돼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부정적 전망에 더 많이 대비해야 한다. 지금이야 신천지를 비판하지만, 곧 사태가 진정되면 공론장에서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지점을 다시 묻게 될 것이다.

예배를 중단하고 정부의 요구에 협력하는 것은 근대적 공공성에 합한 일이나, 신앙의 공공성은 이를 넘어 ‘이웃을 품는 영성’으로 성숙해질 때에 비로소 신앙인의 ‘삶의 자리’가 예배의 자리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회를 임시방편으로 넘기고 진정한 반성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신천지나 코로나19가 사라진다 해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될 보이지 않는 교회의 위기는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재정적 후원과 지원도 필요한 일이지만, 이제껏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증오한 이들에 대한 독설을 멈추고, 또 자신을 위해 축적한 맘몬의 부에 대해 재점검해 절제와 나눔의 삶을 예배의 열매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당국의 예배 중단에 협조했다면, 우리 사회를 파괴하는 더 무서운 배제와 혐오의 바이러스를 없애기 위해 공론장에서 성경이 증언하는 사랑과 용서의 원리를 전파해 사회의 도덕적 토대를 마련하는 한국 교회가 돼야 한다.

성석환 장신대 기독교와문화 교수. 도시공동체연구소 소장. 장신대 대학원(Th.D.). 저서로 《지역 공동체를 세우는 문화 선교》가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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