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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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0년  02월호 환대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존재 의미 환대의 집, 교회

2018년 이 땅의 남단 제주도에 들이닥친 예멘 난민 사태는 우리 사회에 적잖은 도전과 후유증을 남겼다. 480여 명의 많은 인원이 먼 여정을 거쳐 이질적인 타자로 도래해 인류애적 보살핌을 요구한 것은 비단 제주도민만의 지역적 과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제주도 출도가 제한되었고, 일상의 삶에 불편함을 느낀 제주도민 중심으로 난민 혐오의 정서가 확산되었다. 거센 반대 여론 속에서도 틈틈이 온정 어린 손길이 이어졌다. 지루하게 이어진 난민 심사 결과 난민으로 인정받은 자들은 이들 중 고작 2명에 불과해 국가인권위에서조차 소극적 심사를 질타할 정도였다. 아시아 최초의 난민법 제정 국가로서 우리나라의 체면을 뭉개고 그 법의 명분을 한낱 허울뿐인 겉치레로 전락시킨 사례로 기억될 만했다.

그래도 희망을 주었던 것은 뜻있는 교회들과 NGO 단체를 중심으로 나그네 된 이들을 돌보면서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선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 사랑과 환대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원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지 않은 채 민관의 우후죽순 지원이 적잖은 혼선을 초래했고 난민의 성격에 대한 사전 이해 부족 등으로 부작용도 컸다.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은 예멘 난민들이 이슬람 세력의 교두보라도 되는 양 경기 들린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시행 착오를 극복하며 예멘 난민 사태는 점차로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다. 그중 예멘 청년을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 가족의 일원으로 영접해 한 식구로 어우러져 살면서 함께 노동하고 더불어 먹고 사는 모범을 실천하는 현장도 있다.

우리는 나와 생김새나 출신 성분, 그밖에 여러 생의 조건과 배경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낯섦과 함께 두려움을 느끼는 본능적인 성향이 있다. 그래서 끼리끼리 모이는 동류 의식을 편하게 느끼며 어울려 살기를 좋아한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가진 야수적 동물성에 대한 민감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나와 여러모로 다른 이질적인 타자가 내 생명과 안위에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경계심, 이질적인 변수의 출현으로 안온한 나와 우리의 공동체 질서에 혼선과 파괴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배타적 자세가 있는 것이다. 그 밑에는 기존의 공동체 성원이 애써 생산한 경제적 재화와 여러 복지 시설 등에 아무런 기여도 없는 외인들이 끼어들어 무임승차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타산적인 이기주의의 심성도 크게 작용한다. 이러한 타산적 마인드가 딴에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드는 성경의 교훈이 개입하면 어떤 관점이 올바를 것인가. 하나님은 죄인에 불과한 인간을 위해 지극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그 사랑의 극점에서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 제물로 제공하기까지 자격 없는 인간들을 오로지 믿음으로 영접하고 환대해 주셨다. 이 복음의 메시지가 이 땅에서 부름 받은 백성들에게 공히 적용된다면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특히 나그네와 같은 자들을 향해 어떤 자세로 대하는 것이 마땅할까.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공동체이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가 이 환대의 사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할 때 이 땅에 배회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각종 나그네 집단을 향한 선교적 책무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바람직할까. 또 오늘날 교회의 모체가 된 성서 시대의 신앙 공동체는 이 점에서 어떤 도전과 교훈을 던지며, 그 한가운데 환대의 모범적 실천자로 우뚝 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교 현장에서 그 구체적인 실례는 어떤 양상으로 드러날까. 그러한 관심사와 이를 뒷받침하는 신학적 관점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구원의 문제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오늘날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근본적인 존재 의미를 되묻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심각한 도전이 된다. 

환대, 교회 정체성의 표지

최근 나온 조슈아 W. 지프의 책 《환대와 구원》은 앞의 질문들에 응답하는 적절한 성서신학적 관점과 함께 오늘날 모든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해법을 제시해 준다. 책의 부제가 암시하듯이 이 책은 환대에 대한 성서신학적 조명을 통해 오늘날 기독교가 “혐오, 배제, 탐욕, 공포를 넘어 사랑의 종교로 나아가기” 위한 다양한 처방을 제시한다. 저자가 서론에서 밝히듯이 모든 환대의 신학적 기초는 성서의 하나님이 환대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백성을 향해 풍성하고 지속적인 환대를 베풀 뿐 아니라 이러한 신적인 환대에 기초해 자기 백성이 다른 이들에게 환대를 베풀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분이다. 그 환대가 구원의 문제에서도 필수적인 요인이 된다는 핵심 논지는 이 저자가 재발견해 제시하는 클레멘스1서의 중요한 본문 세 구절에 근거한다. 

주후 1세기 말엽(주후 95-97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서신은 당시 로마 교회 지도자였던 클레멘스가 고린도교회에 써 보낸 편지로 고린도전후서의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사도행전을 비롯해 신약성서의 후기문서들이 생산된 시점과 거의 동시대에 생산된 초대 교회의 문서다. 여기에서 클레멘스는 아브라함, 롯, 라합 등의 구약성서 인물을 거론하면서 그들이 받은 ‘이신칭의’의 구원에 환대의 요소가 결부되어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이를테면,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과 환대로 인해” 노년기에 아들을 얻게 되었고, 롯은 “그의 환대와 경건으로 인해” 소돔에 내려진 불과 유황 심판의 때에 구원을 받았으며, 기생 라합은 “그녀의 믿음과 환대로 인해” 여리고성 공략의 때 구원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게 된 것이나 롯과 라합이 생사의 기로에 처한 위기 상황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목숨의 구출이나 구명일 뿐 넓은 의미의 영혼의 구원과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클레멘스가 이들의 사례를 인용하는 것은 생명의 구원과 영혼의 구원을 분리하지 않는 통전적인 관점의 구원이 바로 그의 신앙적 선배 바울 사도가 언급한 이신칭의의 구원관과 접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믿음/경건과 나란히 환대가 구원론적 조건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이는 바울 서신이 강조하는 ‘이신칭의’ 구원론과 야고보서/산상수훈에서 강조하는 행위 지향적 구원론 사이에 나타는 미묘한 긴장에서 더욱 중요해진다. 기실 가만히 살펴보면 이러한 긴장 내지 교리적 부조화는 후대의 기계적인 논리가 만들어 낸 신학적 사유의 노폐물일 뿐, 성서시대 저자나 당시 신자들의 신앙생활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간단히 말해, 야고보서가 진실한 믿음이 구체적인 경건의 실천 행위로써 검증된다는 점(‘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을 강조했듯이, 바울 사도 역시 신자에게 의롭게 여김을 선사하는 그 믿음이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의 행위를 동반할 때만 진정한 믿음으로 작동한다는 점(‘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전통을 계승해 클레멘스가 다음 세대에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믿음과 함께 사랑의 실천 행위를 구체화해 ‘환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웠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제 아래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원리, 원칙이 드러난 현장을 클레멘스 이전 단계로 소급시켜, 누가복음/사도행전, 요한복음 등의 예수 사역에서 환대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지를 주석적인 맥락에서 예시한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서사적 파노라마 속에서 예수와 그 후예들이 신적 환대를 베풀되, 죄인과 종교인, 남자와 여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 등의 차별적 경계를 넘나들며 어떻게 그들을 포용하고 영접하며 섬겼는지 매우 풍성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차별 없는 환대와 환영의 전통은 일찍이 이사야 25:6-9 등에 나타난 ‘메시아의 향연’과 같은 식탁 교제의 현장에서 신적 환대의 형태로 예시되었고, 그것은 예수의 메시아 사역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며 실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은혜’는 희랍어 ‘dektos’의 번역어로 곧 ‘환영’, ‘환대’를 뜻한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희년’의 복음이 곧 모든 배제와 차별의 경계를 넘어 하나님이 그들을 환대하듯 그분의 백성들 또한 그런 하나님을 닮아 외인들을 친구처럼 영접하고 환대하라는 정언명령으로 선포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도한 예수의 개방적 식탁 교제는 과연 함께 식사할 만한 사람과 해서는 안 될 사람을 엄격하게 구별해 온 고대의 공동 식사 관행에 파격적인 도전이었다. 이는 잃어버린 생명을 찾아 회복시키는 예수의 구원 사역에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예수는 부정한 죄인 취급받는 세리나 창녀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당시 유대교의 배타적인 환대의 경계를 담대하게 넘어섰다. 가령, 그는 세리장 삭개오의 환대 제공에 응해 그의 집을 찾아 구원을 선포했고, 풀밭 위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공동의 식탁을 배설했으며, 마침내 죽음에 임박해서도 자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나눠주는 제의적 상징행위로써 극진한 환대의 정점을 체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환대의 전통은 예루살렘 성도들의 음식 교제와 공동체적 삶의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 사도행전 2:42-47과 4:32-35에 나타난 유무상통의 공유 경제는 이 교회가 종말론적 신앙에 의거한 전적인 환대의 공동체였음을 여실히 예증한다. 저자는 또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 중 그를 환대한 사람들의 사례를 언급하는데 특히 28:1-10에서 바울이 파선한 배의 죄수들과 함께 멜리데 섬에 상륙했을 때 그들이 ‘야만인’(barbaros)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인류애’(philanthrpia)를 실천한 사람임을 대조적으로 제시한 점을 주목한다. 야만인의 경계를 넘어선 인류애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지도 않은 상태의 이들 멜리데 섬 원주민들을 통해 어떻게 가능했는지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대의 현장은 사도들이 만나 교류하면서 환대를 주고받은 인물들, 가령 고넬료, 에티오피아 내시, 로마 백부장, 루디아 등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도행전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에 근거해 저자는 교회의 정체성 표지가 바로 하나님의 신적 환대를 받은 존재로서 부활하신 주 예수의 임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식탁 교제의 환대로써 낯선 외인들을 환영하며 그들이 안전하게 환대받는 공동체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환대의 공동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또 다른 사례들을 저자는 바울서신의 행간에서도 탐지한다. 예컨대, 저자는 환대의 위기 상황이 예시된 이른바 ‘안디옥 사건’(갈 2:11-14), 빌립보 교인들과의 코이노니아를 통해 드러난 환대, 고린도전서 10:1-13의 기록대로 광야 시절 이스라엘을 통해 유비적으로 투사된 환대의 여러 모습, 고린도전서 11:17-33에 나오는 주의 만찬과 관련한 환대의 문제와 교훈 등을 제시한다. 

특히 주의 만찬과 관련한 바울의 권고로서 흔히 인용되는 번역문 “너희가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라는 구절은 관련 희랍어 문구의 재해석을 통해 ‘서로에게 환대를 베풀라’(alllous ekdechesthe)는 의미로 재구성되어 당시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주의 만찬의 실패가 환대 정신의 결여에 있음을 설파한다. 마찬가지의 교훈이 로마서 13:8-15:13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음식 규례와 절기 이해에 대한 서로의 차이점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피차 용납하며 한 식탁에서 함께 먹고 더불어 예배하는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요한복음을 분석한다. 먼저 그는 이 복음서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가 하나님이 장차 그 언약 백성의 상태를 회복시켜 그들에게 풍성한 잔치상을 차려 주고 그들이 기쁨으로 함께 먹고 마시는 향유적 삶을 노래한 예언서의 말씀들(사 25:6; 암 9:13-14; 렘 31:12-13)에 기초해 좋은 포도주를 잔치의 자리에 제공한 기적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그밖에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이야기 또한 당시 유대인 남자로 상종하기 어려웠던 사마리아 여인과의 경계를 허물어 피차 영접하고 환대한 관계의 역전이 어떻게 생명수의 주인공을 발견해 전파하는 선교적 돌파구를 열어가게 되었는지 보여 준다. 이 두 이야기에 나오는 좋은 포도주와 생수 이미지는 요한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예수의 부활 생명이 이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신적 환대의 결정체다. 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하게 하시려는 뜻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일화도 당시 노예들이 감당하는 허드렛일을 주께서 손수 행해 모범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사회 관습의 위반을 무릅쓰면서까지 과감한 신적 환대를 실천한 사례로 예수께서 실행한 환대의 또 다른 급진성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이 세상의 인습과 통념의 족쇄에 묶여 있던 당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신적 사랑과 우정에 기초한 환대의 실천으로 노예 상태에서 하나님의 친구로 변화시켜주는 요한복음 고유의 환대 사상을 드러낸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환대의 풍성한 증거

그 밖에도 조슈아 W. 지프의 이 책은 사도행전 27-28장, 고린도전서 9:19-23, 누가복음 10:5-9, 키푸리아누스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자료, 창세기 18-19장, 사사기 19장 등의 자료에 대한 추가적인 주석을 통해 종족적 종교적 경제적 타자들과 소통하며 자기중심적 탐욕의 경제를 넘어 연대를 추구하는 보편적 환대의 공동체를 전망한다. 이로써 저자는 오늘날 미국 사회가 겪는 이민자와 난민의 문제 등에 대해 백인 기득권층 위주의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개방적인 그리스도의 환대를 구현할 것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그 최종적 메시지를 삼는다. 그것은 곧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상종할 수 없는 범주로 낙인 찍고 또 상대방에 의해 접근 불가의 대상으로 낙인 찍히는 배타적 타자화의 길을 지양하고 성서가 제시한 본연의 환대 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이다. 이 길만이 신적인 환대와 인간 사이의 환대를 공유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실현하는 최선의 교훈임을 저자는 역설한다.

이 책이 신약성서의 자료를 풍성하게 활용해 초대 교회가 환대의 공동체임을 논증하고 주장하면서도 중요한 두 자료를 누락한 점이 아쉽다. 그 한 가지는 빌레몬서에 나타난 바울과 오네시모, 빌레몬 사이의 삼각 관계에 나타나는 호혜적이고 포용적인 환대의 코이노니아에 대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삼각관계의 코이노니아는 이 세 사람이 서로 중개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바울은 도망친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이 서신과 함께 돌려보내면서 이전의 과실을 용서하고 형제로 포용하도록 권고함으로써 두 사람을 중개한다. 

오네시모는 이전에 복음 전도를 매개로 형성되었던 바울과 빌레몬의 신앙적 우정의 관계를 상기시켜 줌으로써 두 사람을 중개한다. 나아가 빌레몬이 이 편지를 읽고 추후 오네시모를 형제로 영접하고 환대했으리라는 전제 아래 빌레몬은 바울의 요청대로 오네시모를 바울에게 돌려보냄으로 오네시모와 바울 두 사람을 새로운 형태의 코이노니아 관계 가운데 중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서로 막힌 인간관계를 뚫고 봉쇄된 장벽을 소통의 길로 개척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우호적으로 소개하고 매개하는 빌레몬서의 삼각관계야말로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의 환대를 위한 시금석이라 할 만하다. 

또 한 가지 저자가 누락한 신약성서의 환대 관련 본문은 요한3서다. 이 서신의 이면에는 이중적 삼각 관계가 뒤얽혀 있다. 이 서신의 발신자 장로 요한은 이전에 한 신앙 공동체에 파송한 형제들이 문전박대를 당하다시피 거부된 아픈 경험이 있다. 그 공동체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때문이었다. 장로 요한은 이때의 수모를 잊을 수 없는데 디오드레베가 그 형제들과 함께 그들을 보낸 장로 요한을 비방했을 뿐 아니라 형제들을 환대하지 않았고 영접하고자 했던 사람들까지 금해 교회에서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장로 요한의 편에서 그 형제들을 영접하고자 했던 사람들 중에 데메드리오도 있었는데 그는 진리의 증인이었고 장로 요한과의 우호적인 환대 관계를 갖던 인물이었다. 이후 현재 시점에서 장로 요한은 이전의 사태가 반복될 가능성을 우려하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또 다른 제3의 인물 가이오에게 이 편지를 써서 보낸다. 가이오가 현재 당면한 이 신앙 공동체의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해 어떤 판단을 하고 장로 요한이 보낸 형제들을 맞이하는 현장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상황이 판가름 나게 되어 있었다. 장로 요한-데메드리오-가이오의 환대적 삼각 연대가 장로 요한-디오드레베-가이오의 파탄적 삼각관계를 압도할 때 이 편지와 함께 재시도하는 공동체적 환대의 미래가 순조롭게 열릴 것이었다. 따라서 요한3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복잡한 정치적인 역학관계 속에 나그네로 떠도는 형제들을 환대하는 일에 실패한 사례와 함께 미래지향적인 회복의 가능성까지 품는 거의 유일한 증거자료라고 볼 수 있다. 

한국 교회와 환대

오늘날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는 예멘 난민 사태에서 촉발된 외국인 환대의 문제에서 악화일로의 양극화 현실 가운데 처했다. 늘어나는 각종 사회경제적 약자들,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탈북자, 성소수자 등 기존 체제의 중심부에서 환영받지 못한 생명들을 향해 신적 환대를 어떻게 활성화해 실천할 수 있을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최후의 심판관으로서 천국으로 인도할 사람들로 굶주린 자들, 옥에 갇힌 자들, 헐벗은 자들, 병든 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심방하며 위로하는 등 구체적인 환대의 사랑을 실천한 자들을 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 가운데 예수께서 이른바 ‘지극히 작은 자들’을 영접한 것이 자신을 영접한 행동과 다를 바 없음을 천명하신 사실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빛이 되려면 온갖 유보적인 단서 조항을 내걸고 교인들 위주로 동종교배하는 유유상종의 공동체이길 멈추어야 한다. 그 대신 우리 사회의 각종 이질적인 타자들과 힘써 소통하면서 저들이 편히 쉬면서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환대의 공동체로 발돋움하는 것이 현재 당면한 절박한 과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된 최상급의 신적인 환대를 받아 은혜로 구원의 소망을 품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선교적 과제일 뿐 아니라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차정식 한일장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시카고대학교(Ph.D.). 저서로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예수 인문학》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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