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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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19년  10월호성경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류호준 교수의 심중소회(21)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라.” “마지막 날들에 끔직한 시대가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을 시작하는 말입니다. ‘고통 하는’ ‘끔찍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신약성경에 단 두 번 나옵니다. 한 곳은 디모데후서 3:1이고, 다른 한 곳은 마태복음 8장의 귀신들린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마 8:28). ‘사납다’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글 성경에 “말세에 고통 하는 때”라고 말한 의미가 어떤 것인지 연상이 되실 것입니다. 마지막 날들에 우리가 지나가야 할 시대를 ‘거칠고’ ‘사납고’ ‘무섭고’ ‘두려운’ 시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은 ‘어려운 때’ ‘힘든 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마음 준비를 시키기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마치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네가 조용한 땅에서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요단강의 창일한 물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렘 12:5) 달리 말해 최악의 날을 대비하라, 조심하고 정신 차려라,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라, 말세에 거칠고 끔직하고 무서운 시기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세란?

그런데 말세라뇨? 언제가 말세입니까? 신약성경에 따르면 말세(마지막 날들)는 예수와 함께 도래했습니다.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기간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 가운데 “지금 우리가 말세에 살고 있다면서 무엇이 그리 끔직하고 사나운 시대입니까?” “좀 거친 일들이 있기는 해도 얼마나 살기에 좋은 세상입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냉전의 시대는 지나갔고, 공산주의도 지구상에서 거의 없어지고 세계에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 같은데 무슨 끔직하고 사납고 어려운 시대란 말입니까?”라고 질문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한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2-5절에서 바울 사도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 내용을 들어야 합니다. 왜 말세에 사납고 끔찍한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는 모두 열아홉 가지로 말세의 거칠고 사나운 시대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1.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2. 돈을 사랑하며, 3. 자랑하고 뽐내며, 4. 교만하며, 5. 비방하며, 즉 함부로 대하며, 부당하게 상대방을 좌지우지하는, 모욕적이고, 욕설을 퍼붓고, 6. 부모를 거역하며 불순종하며, 7. 감사하지 아니하며, 고마워하지 않으며, “덕분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자기 잘난 줄 알며, 8. 거룩하지 아니하며, 불순하고 불결하며, 9. 무정하고 냉정하고 사랑이 없으며,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용서하지 못하며, 꽁하니 복수의 기회를 잡으며, 두고 보자, 원한을 품으며, 11. 모함하며, 헐뜯고, 중상하고, 12. 절제하지 못하며,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며, 13. 사나우며, 잔인하고 모질고 가차 없고, 짐승 같고,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15. 배신하며, 믿을 수 없고, 불성실하고, 16. 조급하며, 성질이 불같고, 경솔하고 성급하고, 17. 자만하며, 젠 체하고 우쭐하고, 18.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

적극적 사고의 능력을 믿는 자라면, 긍정의 힘을 믿는 자라면, 가능성 사고의 능력을 신봉하는 자라면 이 구절들이 우리의 뒤통수를 세차게 내려쳐야 합니다. 이 목록의 어디에도 긍정적 음조가 없습니다. 이 구절은 사람이 정말로 무엇과 같은지,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가장 침통하고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는 주석입니다. 2-5절에 이르는 네 절은 그리스도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흉측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그리스도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보다 더 여실히 보여 주는 성경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

열아홉 가지 표현들 가운데 첫 번째 문구는 그들을 가리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두 문구는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보다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들이 무엇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그들의 사랑입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자기애’(自己愛)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먼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이며,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이며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나 먼저 신드롬’

열아홉 가지 표현을 요약하자면 ‘나 먼저 신드롬’(Me-First Syndrome)입니다. 말세의 끔찍함, 말세의 사나움, 말세의 공포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먼저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돈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쾌락을 사랑합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자기 사랑의 정신과 자기 사랑의 영과 자기 사랑의 바람은 교회 안에 흘러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자기 자신과 돈과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뜻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자기중심적인 문화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 성취’ ‘자기 만족’ ‘자기 발전’은 우리 시대의 주요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성공시대〉라는 TV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은 성공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받습니다. “하면 된다.” “나는 성공할 수 있다.” 게다가 자기 계발서가 얼마나 잘 팔리는 시대인지요. 이런 시대에 자주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까?”입니다.
 

자기중심적 종교 생활

자기중심적인 문화는 자연스럽게 자기중심적 종교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착하려는 시대정신은 종교와 신앙의 성격과 성품을 형성했습니다. 종교 역시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곧, 이 시대는 자신의 만족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종교와 신앙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현대의 복음 전도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를 할 때 가장 흔히 듣는 질문은 “예수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을까?” “내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내게 무엇을 해 주신다는 것인가?” “교회에 나오라고 하니 나가겠는데, 교회에 가면 나를 위해 무엇을 제공해 줍니까?”와 같은 식의 것들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나 중심적인 사고입니까? 개종하거나 교회에 나올 만한 가능성이 있는 분들에게 교회는 이렇게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실 겁니다.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만족을 느끼실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으실 것입니다. 번창할 것입니다. 사업도 잘 되고 건강도 좋아질 것입니다.” 이렇다 보니 예수님은 최상의 상품이 되어 갑니다. 매우 매력적으로 포장이 되었고, 경쟁적인 시장 체제 아래서 소비자의 구미에 맞게 매우 공격적으로 판매되는 상품이 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이렇게 ‘자기 연민의 문화’ 안으로 잘 맞춰져 주형(鑄型)되어 갑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개발하는 방법과 길로 제시됩니다.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잠재적 가능성들을 개발하여 개인적 성공, 사회적 성공, 사업적 성공을 이루기 위한 방법과 길이 복음의 메시지 안에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을 좀 더 잘하도록 돕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개선하고 개발하고 증진시키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속에는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바꾸고 개조하고 변화시키시는 분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개종과 회심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지 결코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채워 주실 수 있는지에 대해 물을 뿐, 우리가 그분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봉사할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자아 사랑과 무역사관

“말세에 사납고 거친 때가 올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자아 사랑(self-love)의 교활하고 음험한 특성은 우리를 과거와 미래에서 격리시킬 것입니다. 순수한 자아 사랑에는 과거로부터 길어 올릴 만한 역사가 없습니다. 오로지 ‘나 자신과 현재’에만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순수한 자아 사랑에는 미래 세대에 대한 관심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오로지 ‘나 자신과 지금’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아 중심 문화의 특색이라면 자아 중심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아 중심 종교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왔던 다양하고 풍성한 과거 역사는 상실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풍요와 찬란함 역시 상실됩니다.

자아 중심적 신앙은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의 필요를 어떻게 채우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백성의 역사 안으로 참여한 자라는 의식을 상실하게 됩니다.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과 연대감을 갖고 있다는 의식도 상실하게 됩니다. 오로지 자기 밖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가족, 자기 교회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자아 중심적 신앙은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런 신앙은 의미 있게 과거나 미래와 연관되어 있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을 현재처럼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끔찍한 시대, 사나운 때, 두려운 시대와 성경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성경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일까요?
 

성경에 기초한 삶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듯이 여러분의 신앙이 자기 사랑에 목숨을 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여러분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기초를 성경에 두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반을 두는 이유는, 성경이 여러분을 과거와 미래와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자아 중심적 문화 위로 여러분을 들어 올려 줍니다. 성경은 자아를 섬기는 종교 위로 여러분을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원한다면 성경을 읽으십시오. 여러분이 좋아하는 구절만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읽으십시오. 그러면 구원에 대해 발견할 것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신앙을 가르치고(교육), 잘못된 것을 고치고 교정하고(책망) 교육하고 책망함으로써 한 개인의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고(re-setting), 선한 삶을 사는 일에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이 갖추어야 할 포괄적인 연장 세트로서 그가 하는 모든 일들에 온전히 잘 맞게 하려 함이라.”
 

최상의 가이드

바울은 성경이 말세의 어렵고 사납고 거친 시대를 통과하는 데 있어서 온전한 최상의 가이드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더 사랑할 때, 그들의 눈이 돈과 성과 스포츠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사람들의 생각이 온통 단기적 목표들에만 집중할 때, 그들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걸어가야 할 제 트랙으로 돌려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성경으로 그들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성경이 존재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성경을 일종의 ‘통’으로 생각했습니다. 드럼통처럼 성경 안에 많은 진리와 규칙들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진리들과 규칙들을 담은 영감 받은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드럼통 속을 파고 들어가서 문제 해결에 적절한 본문이라고 생각하는 구절들을 들고 나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드럼통 이미지는 전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일 뿐입니다.
 

고정별 이미지

성경은 이것과 전혀 다른 자체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19:89에서는 성경을 ‘고정별’ ‘붙박이 별’ 이미지로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고대의 천문학에 따르면 하늘에는 세 가지 별들이 있습니다. 유성(流星) 혹은 별똥별(meteor), 행성(行星, planet) 즉 떠도는 별, 그리고 ‘고정별’(fixed star)입니다.

유성은 순간적인 효과를 냅니다. 일시적으로 찬란한 광채를 뽐냅니다. 밤하늘을 가로질러 찬란한 빛줄기가 좍 흘러갑니다. 순식간입니다. 유성이 흐르는 광경을 보면 사람들은 “와우, 저기 좀 봐”라고 소리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쳐다보는 순간 유성은 사라집니다. 이 세상에 출간된 모든 책들 가운데 99.9%가 유성과 같습니다. 별똥별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부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으로 출판 업계에는 ‘베스트셀러’라는 행성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유성보다는 훨씬 길게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책들도 다른 책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사라집니다. 성경은 이 범주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구식 천문학에서 말하는 세 번째 부류인 ‘고정별’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홀로 서 있습니다. 수세기, 수많은 세월이 지나지만 홀로 서 있는 천년 송(松)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말씀은 신실하게 우리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잘못 인도하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트랙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안내를 언제 어디서나 의존할 수 있습니다. 지금 견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 시대에도 그들을 위해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와 그 후손의 시대에도 그들을 위해 굳게 서 있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영원히 신실하고 영원히 믿을 만합니다.
 

등불 이미지

성경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가 있습니다. 등불 이미지입니다. 시편 119:105에 나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어두움 가운데 비추는 빛입니다. 이 등과 빛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넘어지거나 쓰러지거나 길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등잔으로 비유하는 것은, 우리는 오직 어둠 가운데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변 세상을 어두움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빛과 희망이 없는 메마른 시대로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런 도전도 받지 못한 채로, 아무런 마음에 거리낌도 없이 편안하게 잘 적응하여 안주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산다면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비춰 오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말세에 끔찍하고 사납고 어려운 시기를 통과할 때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조언해 주고, 자문해 주고 올바른 방향을 가리켜 주며 우리의 길 위에 빛을 비춰 주고 그리스도의 임재와 면전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러시아의 소설가이며 시인이며 종교사상가인 데미트리 메레젝코프스키(Dmitry Sergeyevich Merezhkovsky, 1866-1941)가 대략 30년 동안 사용했던 성경에 대해 남긴 명구를 소개합니다.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인용구이고 또한 오늘 말씀에 잘 부합된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인용함으로 이 글을 마치려 합니다.

“나는 매일 그것(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내 눈이 쇠할 때까지 계속해서 읽을 것입니다. 어떤 빛이든지 빛이 있을 때, 태양으로부터 오는 광선이든지, 마음에서 오는 광선이든지, 가장 찬란하게 밝은 대낮이든지, 가장 어둡고 깜깜한 밤이든지, 내가 행복할 때든지 행복하지 않을 때든지, 병들었을 때든지 건강할 때든지, 신앙으로 가득할 때든지, 의심으로 가득할 때든지 나는 이 성경을 읽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읽는 성경 안에는 매번 항상 새로운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깊이를 잴 수도 없고 그 끝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의 각 페이지마다 끝이 너덜하게 닳았습니다. … 새롭게 제본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내놓고서는 내 마음 안에서 그 성경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이 성경에서 내가 떨어진다는 생각만 해도, 잠시 떨어지는 것이 겨우 몇 날이라 할지라도 내 마음은 소스라쳐 두렵습니다.”
 

류호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네덜란드 자유대학교(Dr.theol.). 저서로 《일상신학사전》, 《이사야서Ⅰ》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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