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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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19년  09월호 선교적 교회를 위한 목회자와 평신도의 역할 창간 30주년 특별 기획 선교적 교회

 최근 선교적 교회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에서 출발한 현대 선교적 교회론이 서구를 거쳐 한국 교회에서 활발하게 논의 중이다. 목회 현장에서 실천되기에 앞서 신학적 토론이 먼저 일어났다는 점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의 가능성을 모두 함축한다. 긍정적이라 함은 좀 더 건전하게 발전할 동력이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고, 부정적이라 함은 특정한 현장 모델이 없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복음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선교적 교회론은 무엇보다도 평신도의 역할을 비중 있게 다룬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 자체임을 생각할 때 그 백성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목회자도 하나님의 백성임에 틀림이 없지만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 살아가는 평신도와는 사명과 역할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어쩌면 목회자의 역할은 평신도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 힘 있게,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돌보고 육성하는 데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선교적 교회에 관한 담론에서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에 관한 이해는 아직까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와 역할에 관한 이해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채 과거의 구태의연한 이해 방식에 얽매여 있다. 이렇게 고착된 이해 방식이 선교적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방해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먼저 한국 교회에 만연한 오해와 착각에 대해서 살펴보자.
 

오해와 착각

일반적으로 목회자와 평신도의 역할과 관계에 대해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오해는 계급적 관점에서 목회자의 지위는 높고 평신도의 지위는 낮다는 생각일 것이다. 목회자가 평신도에게 지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평신도는 목회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위계질서적인 사고방식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견고한 지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성경적인 시각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분명히 다양한 직분이 묘사되어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직분들 사이의 높고 낮음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목회자의 권위가 강화된 현상은 초대교회에서 출범한 기독교가 아직 충분히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이단 세력에 대처하기 위한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기원 후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화되면서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계급적 관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목회자의 역할이 사도 모델에서 제사장 모델로 바뀌게 되었다.1 이런 변화 양상은 크리스텐돔(Christendom) 시대의 등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크리스텐돔이란 기독교의 가치와 사상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됨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을 잃어버린 사회를 가리킨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성직주의’(clericalism)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성직주의는 목사직만이 거룩한 직분이라고 생각하거나 적어도 목사직이 평신도직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기초한다. 이 성직주의에서 성속이원론이 생겨난다. 이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시간과 공간으로 나눠서 보자면 주일은 거룩하고 주중은 속되다고 생각하고, 예배당 건물 안에서의 활동은 거룩하고 예배당 밖에서의 활동은 속되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예배당 내에서의 일은 주로 성직자의 몫이고, 세상에서의 일은 주로 평신도의 몫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성직자가 평신도보다 우월하고 더 고귀하게 평가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성직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신앙생활을 개교회 중심, 예배 중심, 목회자 중심으로 고착화하는 폐단을 낳았다. 신자들은 목회자가 주도하는 예배에서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만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하고 기도하며 그분과 교제함으로써 은혜를 받고 능력을 얻는 주체적인 신앙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목회자의 축복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강력한 통로요 수단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기도와는 근본적인 질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를 공격하거나 비판하면 죗값을 받게 된다는 사고방식도 이런 성직주의적인 사고방식과 관련이 깊다.
 

미완의 종교개혁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은 아직도 미완성의 과제로 남아 있다. 루터는 성경에서 만인제사장 이론의 근거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성직자나 평신도가 모두 동등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가 한 말을 직접 살펴보자.

“만일 집안을 청소하는 하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일한다면 광야에 있는 성 안토니(St. Anthony)보다 더 큰 봉사를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 교황, 주교, 사제 및 승려를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군주, 영주, 직공 및 농부들을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조작적인 것이다. … 모든 크리스천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2 “우리는 다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서 성별을 받는다.”3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의 활동만을 중시하는 태도는 평신도의 신앙생활을 크게 왜곡시켰다. 신자들은 ‘믿음이 좋은 신앙생활’을 위해 주일 예배당 안에서 행하는 활동에 집중한다. 반면에 평일에 예배당 밖(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세상을 뜻한다)에서 행하는 활동은 신앙생활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그 봉사와 섬김은 오직 예배당 안에서 행하는 활동으로 제한되며 세상에서 행하는 활동(그것이 직업과 관련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은 그런 봉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평신도의 이런 의식은 목회자의 설교로 형성된 것이다. 많은 목회자의 설교를 들어보라. 그들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라고 외치지만 그들이 말하는 봉사와 헌신은 대체로 예배당 안에서 행하는 봉사와 헌신에 집중되어 있다. 어쩌면 개교회 중심주의 또는 이기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신자들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부정적인 효과가 생길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이 세상에서의 다양한 봉사와 헌신을 강조하지 않는 이유일 수도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주일과 평일을 가르고 예배당 안과 밖을 구분하는 성속이원론, 그리고 목회자의 일과 평신도의 일을 나누고 목회자의 일을 더 가치 있고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독버섯처럼 개신교 안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또한 한국 교회를 지배한다는 데 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성경적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선교적 교회 운동은 성경의 원리에서 멀어진 이런 왜곡된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교회의 본질적 모습을 회복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모이고 흩어지는 평신도

‘선교적 교회’(the missional church)라는 말이 많은 목회자의 입에서 회자되자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선교적’이라는 용어가 붙는 점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교회’라는 말로 충분한데 왜 ‘선교적’이라는 말을 붙이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선교적 교회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선교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교회의 선교 활동 내지는 사업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자들이 자신의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 살아야 함을 뜻하는 정언적 표현이다.

선교적 교회론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교회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건물이나 조직 또는 재정 등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 곧 ‘에클레시아’(ecclesia)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1:2은 바로 이런 교회의 정의를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성경에 근거해서 보면 교회는 분명히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렇게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하면 교회를 단순히 모이기만 하는 집단으로 설명할 수 없다. 사람들은 활동하는 생명체, 다시 말하자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교회의 두 개념을 신학적으로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구조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맺으며 교회를 구성한다. 믿는 사람들인 교회는 서로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예배하고 교육하고 친교한 뒤에 다시 세상으로 흩어져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 살아간다. 주일과 평일, 공동체가 모이는 예배당과 세상이라는 두 개의 영역이 서로 순환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에서는 주로 모이는 교회만을 강조해 왔다. 반쪽만 강조해온 셈이다. 흩어지는 교회를 강조함으로써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선교적 교회론의 핵심이다. 흩어지는 영역은 세상이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모두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구현하는 데 필수지만 직접적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하는 구조는 흩어지는 교회다. 따라서 흩어지는 교회야말로 교회의 선교적 본질이 드러나는 직접적인 영역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평신도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야말로 선교적 교회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선교적 교회의 구체적인 실천이 흩어지는 교회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흩어지는 교회는 세상과 일상적인 삶에서 살아가는 개별적인 평신도에 의해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모이는 교회도 일정한 방식으로 선교적 교회의 실천과 관련된다. 모이는 교회는 에클레시아 곧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렇게 모인 공동체는 일정한 조직체로서 지역사회 또는 세상과 사회를 향해 다양한 선교적 실천을 행한다. 대개의 경우 공동체 또는 조직체로서 모이는 교회의 선교적 실천은 전체 교인들이 행하지만 그 실천의 종류와 방식은 목회자와 장로 등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선교적 교회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구조는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교는 집단적인 선교 행위보다도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신자들의 선교 활동을 통해서 더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신도가 교회로 살아가야 할 세상

그렇다면 평신도가 선교적 삶을 실천해야 할 세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세상이라고 하면 그만이지 다른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막연하게 말하거나 추상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자들이 접하는 세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세상이 넓고 수많은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선교적 관점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영역은 네 가지라고 생각한다. 가정, 일터, 이웃, 일상이 그것이다. 많은 경우에 기독교 신자들이 이 네 영역에서 기독교인,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제자답지 않다. 건물이나 조직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자체가 교회라면 이들은 세상, 특히 이 네 영역에서 교회로 살아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영역에서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드러내는 삶,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선교적 삶을 사는 세 가지 방식

골든게이트침례신학대학교 총장 제프 아이오그(Jeff Iorg)는 교회가 세상 사람을 대하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평신도의 선교적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첫째는 ‘초청’(attraction)이다. 교회가 이벤트와 프로그램을 만들어 비기독교인들을 초청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많이 해온 매우 익숙한 방식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로 ‘오라’(come)는 것이다.

둘째는 ‘참여’(engagement)다. 지역 사회가 행하는 활동에 교회가 참여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지역의 행정지원센터가 주관하는 불우 이웃 돕기 바자회에 교회 이름으로 여전도회가 참여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셋째는 ‘침투’(infiltration)다.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의 문화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가운데 복음의 증인이 되는 방식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교회가 야구팀을 창단하여 지역 리그에 참가하는 것은 ‘참여’ 방식에 해당하지만, 기독교인이 자신의 회사 야구팀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증인으로 사는 것은 ‘침투’ 방식에 해당한다.4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이 중에서도 세 번째 방식이 선교적 교회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다.

선교적 교회의 삶은 초청과 참여를 넘어서 침투 방식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침투’라는 번역어가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준다면 ‘infiltration’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를 새겨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infiltration’은 삼투압 작용과 같이 천천히 스며드는 현상을 가리킨다. 자연스러움과 진정성이 이 단어에 담긴 중요한 요소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자연스럽고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에이, 우리를 교회로 데려가려고 그러는 거지요?” 전도할 때 비기독교인들이 거부감을 느끼며 하는 말인데, 많은 경우에 자연스럽지도 않고 진정성도 없는 전도 방식으로 역효과가 일어난다.
 

성육신적 삶을 통한 선교

세상 사람들과 공감이 가능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진정성이 있는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모델을 찾아볼 수 있다.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과 동일한 모습으로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성육신적 선교’(incarnational mission)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5-11에서 예수의 성육신적 삶을 잘 묘사하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선교적 교회가 말하는 선교 방식은 바로 이 성육신적 삶을 가리킨다. 강제적이고 조작적이지 않은 선교, 인격적 공감과 연대를 통한 자연스럽고도 진정성 있는 선교가 필요한데, 이것이 성육신적 선교의 개념이며 흩어지는 교회로 살아가는 평신도가 세상 가운데서 드러내야 할 모습이다.
 

평신도 사도직과 선교적 교회

지금까지 선교적 교회에서 평신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1)교회는 선교적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2)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 자체이며, (3)선교의 영역은 비기독교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므로 (4)세상 가운데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평신도야말로 ‘선교적 교회됨’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5)그리고 평신도가 선교적 교회로 살아가는 방식은 성육신적 삶을 통해서 구현된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평신도야말로 선교적 교회의 주역이다. 이것을 평신도 사도직의 개념으로 풀어 보자. ‘사도’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apostolos)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도직(apostolate)이란 사도들처럼 복음의 증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직무를 가리킨다. 해롤드 돌라(Harold E. Dollar)는 “사도는 선교와 매우 유사한 말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5 그런데 이런 사도직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평신도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평신도야말로 선교적 교회의 중심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선교적 교회의 중심에 평신도 사도직이 있다는 말이다.
 

선교적 교회와 목회자의 역할

지금까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선교적 교회와 평신도의 관계에 관해서 설명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선교적 교회론을 말할 때 그 핵심 내용은 세상 가운데서 행하는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서 평신도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로 모여 은혜를 나누고 전열을 가다듬은 뒤에 세상으로 파송된다. 주중에 세상으로 흩어져서 성육신적인 삶을 통해 복음의 증인으로 살다가 주일을 맞아 다시 공동체로 모인다. 이런 순환 속에서 선교적 교회는 조금씩 힘 있게 성장해 나간다.
그렇다면 이런 평신도의 역할에 비해 목회자는 선교적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물론 목회자도 물리적으로는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맞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들의 삶은 직접적인 선교 활동과는 거리가 있다. 그들의 역할은 오히려 다른 데 있다고 봐야 한다. 모이는 교회 공동체를 조직하고 비전을 제시하며, 세상으로 파송되는 평신도를 위해 예배를 집전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역할이야말로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사도직의 주요 내용이다.

이런 역할의 구분은 성경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철저하게 소명과 은사를 따라 이루어진다. 누구는 왜 목회자가 되고 누구는 왜 평신도가 되는가? 하나님께서 그 일로 부르시고 그 일을 감당하도록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부류 사이에는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두 부류 사이에 성직주의가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다. 두 부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부류는 상보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도움이 없이는 진정한 선교적 교회를 이룰 수 없다.

최근에 한국에서 일어나는 선교적 교회 운동은 한국 교회의 어두운 현실을 타개할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는가? 필자는 최근에 한국의 선교적 교회 운동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리서치를 진행하고 있다. 샘플이 될 만한 교회들을 방문하고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이 운동이 한국 교회의 미래를 밝혀 줄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한 점들도 많이 보인다. 특히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많이 아쉬웠다. 여전히 목회자 중심의 활동, 조직 교회 중심의 프로그램과 행사들이 선교적 교회를 이루는 중심축으로 인식되는 현실은 분명히 개선될 필요가 있다.



1) Darrell L. Guder, ed., Missional Church (Grand Rapids: Eerdmans, 1998), pp.190-195.
2) 마틴 루터, 지원용 역,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서울: 컨콜디아사, 2003), p.29.
3) Ibid., 30.
4) Jeff Iorg, Live Like a Missionary (Birmingham, AL: New Hope Publishers, 2011), pp. 113-115.
5) Harold E. Dollar, “Apostle,” in Evangelical Dictionary of World Missions, ed. A. Scott Moreau (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0), p.73.

최동규 서울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풀러신학교(Ph.D.). 저서로 《미셔널 처치》, 《초기 한국 교회와 교회 개척》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