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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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9년  09월호 장로제를 중심으로 본 한국 교회의 직제 개선 - 루터와 칼뱅의 직제론에 비추어서 한국 교회와 장로직제

우리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래, 지난 30년 동안 민주화의 길을 달려왔다. 경제적으로도 세계 10위권에 근접했다. 또한 최근 동북아 평화와 남북한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러나 한국 개신 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수적, 양적으로 축소되었고, 사회를 걱정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회가 걱정하는 집단이 되었다. 목사와 장로의 부도덕성과 세습 행태, 세상의 도전에 대한 교회의 폐쇄성으로 인하여 우리 개신교는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렸다.

물론, ‘장로제’야말로 한국 교회의 초기부터 오늘까지 교회의 개척과 성장과 사회봉사 등에 있어서 지대하게 기여해 왔고, 아마도 이런 이유로 오늘날엔 감리교와 침례교와 오순절 교회 등도 장로제의 일부를 각 교회 정치 체제 안으로 흡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장로제’ 자체에 대한 자기반성이 요청되고 있다. 임기 문제와 목사·장로의 교회 내 대립 갈등 문제, 그리고 노회와 총회에서의 자리와 기능 문제로 고민하기 때문이다.

본고는 우선 루터와 칼뱅에 있어 기독교의 본질을 살펴보고, 직제론에 따른 장로직에 대해 살피려고 한다. 이 글의 목적은 개신교 종교개혁에 따른 기독교의 본질인 ‘복음과 구원’에 주목하면서, 루터의 ‘만인제사장론’과 칼뱅의 ‘장로직’에 대해 논하고 이에 비추어 한국 장로교회의 장로직 개선과 아울러 한국 교회 전체의 직제 개선에 대해서 논하는 데에 있다. 
 

두 종교개혁자의 기독교 본질과 직제

1 루터의 직제론
루터가 종교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재발견’에 있다. 그는 ‘복음’을 성서의 중심 메시지 혹은 통일성으로 보았고, 이 맥락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서와 전통’에 반대해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을 주장했다. 루터에게 성서의 중심 주제인 ‘복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필자는 좀 더 보편화된 입장으로서 1557년 〈슈말칼트 신앙조앙들〉이 선언하는 ‘복음과 구원’ 이해를 소개한다.

첫째 되고 주된 신앙 항목은 이것이다. 즉,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오직 그분만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이는 믿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어서 그 어떤 행위나 율법이나 공로에 의하여 획득될 수 없고 붙잡힐 수가 없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그와 같은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다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1

위의 인용문 중, 첫 단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다고 하는 은혜의 복음을 선포했고, 둘째 단락은 인간이 이것에 대한 믿음으로 ‘이신칭의’를 획득한다고 했다. 루터는 이를 ‘첫째 되고 주된 항목’이라 했으니, 은혜의 복음을 통한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교회론과 그 안에 포함된 직제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즉, ‘복음과 구원’이 교회론과 교회의 직제론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는 교회란 ‘복음’이 설교되고, 세례와 성만찬이 집례되며, 믿는 자들의 교제가 일어나는 하나의 회집된 공동체(eine Gemeinde= a congregation)라 했다. 즉, 그는 말씀 설교와 세례·성만찬을 교회의 표지(標識)로 보았다.

‘복음과 구원’ 다음으로 중요한 주제는 모든 직제론의 출발이요 근본이 되는 ‘만인제사장론’이다. 루터는 1520년에 쓴 《독일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각각 만인제사장론을 개진했다.2 수직적 관계에 의해서 ‘믿는 자들의 회집체’(congregatio fidelium)가 된 교회는 수평적인 차원에서 ‘성도의 교제’ 속에 있는데, 이 ‘성도의 교제’에서 각 성도는 다른 성도를 섬겨야 한다. 이것이 만인제사장직의 출발점인바, 이는 모든 교직의 근거요, 모든 기독교 윤리의 기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인 하나하나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a little Christ)로서 이웃을 향하여 ‘넘쳐흐르는 사랑’(quellende Liebe)을 베풀어야 하는바, (1)서로가 복음을 전할 수 있고, (2)서로가 죄의 고백과 용서를 할 수 있고, (3)서로가 서로를 위해 중보 기도할 수 있고, (4)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만인제사장직을 수행한다고 하는 것이다.

루터는 갈보리 언덕의 유일회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로 만족하지 않고, 미사를(이 미사의 핵심은 성만찬이다) 희생 제사로 생각하고 이 미사를 집전하는 성직자를 제사장이라고(bishop이 미사 집전 권을 갖고 있으며, 이 bishop이 priest=신부=사제에게 권한을 위임할 수 있다) 생각하는 중세의 성례주의적 성직론에 반대해, 사제직이란 ‘말씀의 사역’(the ministry of the Word)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했다.3 이런 중세적인 제사장직 개념에 비추어 볼 때, 루터의 만인제사장직은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하여,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은 중세 유럽의 계층 질서는 물론, 그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의 교회론과 직제론에 대한 큰 도전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1520년 《독일 귀족에게 고함》에서 만인제장직을 극단으로 몰고 갈 경우, 누구나 다툼으로 설교하고 성례를 베푼다고 하여, 교회 안에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을 보고, 회중교회식이고 개교회주의적 ‘특수 사역’, 곧 안수례 받은 사역직을 인정했고, 1550년대에 이르면, 영주국별 감독 체제를 수립하게 되어 ‘국가 교회’로 자리 잡게 된다.

2 칼뱅의 직제론
기본적으로 칼뱅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복음과 구원’을 성서의 중심 주제로 보면서 그것의 중요한 프레임을 제시했다. 즉, 그는 ‘복음’ 이해에 있어서 정통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내세웠고, 루터 신학에는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3중직을 통한 구속사역 혹은 화해사역을 주장했으며, 이와 같은 복음수용의 과정에서 믿는 자들이 성령의 사역으로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에 이른다고 하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예정론과 성화, 나아가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으며, 교회의 ‘표지’에 관하여도 기본적으로 앞에서 지적한 대로 ‘두 가지 표지’ 이외에 복음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사람의 신앙 고백과 삶의 모범을 덧붙였다.

하면 칼뱅 역시 위와 같은 성서의 중심 메시지 다음에 ‘만인제사장론’을 위치시켰는가? 물론, 칼뱅 역시 교회론과 직제론 앞에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성서의 통일성에 큰 방점을 두었으니, 논리적으로 루터처럼 ‘만인제사장직론’을 성서의 중심 메시지 바로 다음에 두었을 것이지만, 칼뱅은 루터 초기의 극단적인 ‘만인제사장론’이 ‘과격파 종교개혁’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목격하면서, 마르틴 부처 등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직제론을 배경으로 하여 4중직을 주장했는데, ‘장로제’가 바로 이 안에 포함되었다.

칼뱅은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성례전을 집례하고, 교회를 다스리는 목사, 교회 안에서 성서를 가르치는 교사들이나 신학교에서 교수하는 교수, 제네바 시의 병원이나 복지 시설과 교회에서 섬기는 집사에 대해 논했다. 칼뱅은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사직과 교사 및 교수직은 성서를 가르친다고 하는 부분에서 그 직무에 있어서 중첩된다고 보았다. “…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교리가 온전하고 순수하게 유지되게 하기 위하여 오직 성서해석을 책임져야 한다”.4 칼뱅은 목사직과 교사직을 성서적 직분(scriptural office)이라고 했다. “이것이 인간의 고안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제정되었다”(Ⅳ.ⅲ.7). 그리고 장로는 목사와 함께 치리와 권징을 시행하고, 설교와 성례전 집례 등 목사의 목양을 지원하는 직분이었다. 칼뱅은 슈트라스부르크 체류 직후, 1941년 제2차 제네바 종교개혁문서에서 4직분에 대해 주장하기 시작했고, 1549년 《기독교강요》에서부터 이 4중직을 확고히 장착시켰다. 필자는 1559년 최종판 《기독교강요》에서 장로직에 대한 주장을 인용한다.

칼뱅은 로마서 12:7-8에서 장로직의 성서적 근거로서 ‘다스리는 일’(government)과 ‘구제하는 일’(caring for the poor)을 언급하는 바, 아래의 인용에 의하면, 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내가 믿기에 다스리는 자들(governors)이란 회중으로부터 선출된 장로들(elders)로서 감독(목사-역자 주)과 함께 도덕과 견책과, 치리와 권징의 행사 책임을 맡았다. 아무도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게 하라’(롬 12:8)를 다르게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교회는 초기부터 경건하고 근엄하며 거룩한 사람들로부터 선출된 장로단(a senate)을 가지고 있었던 바, 이들은 악행을 교정하는 일에 대해 법적인 관리를 책임졌다. …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이런 종류의 직제(order)는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다스림의 직분’은 모든 시대에 걸쳐 반드시 있어야 한다(Ⅳ.ⅲ.8).

칼뱅은 위의 인용에서 장로는 목사와의 협의하에 제네바 시의회의 의원으로서 평신도 중에서 선출되어야 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꼭 있어야 할 직분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장로직 역시 성서적 직분이라 했으니, 슈트라스부르크 체류 이후 장로직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향후 그는 제네바에서 목사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콩시시트아르(la Consistoire the church court)를 운용했으니, 그것이 개 교회 차원에선 당회(session)요, 지역별 개 교회들로 구성되는 상회 차원에선 노회(presbytery)와 노회들을 총괄하는 총회(general assembly)를 말할 것이다.

필자는 본문에서 역사적으로 루터, 칼뱅이 주장하는 성서의 통일성과 중심에 대해 소개하고, 이를 교회론과 직제보다 선행(先行)시켜야 하고, 더 중요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무엇보다도 루터와 칼뱅에 있어서 ‘복음과 구원’과 같은 기독교의 본질 추구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 다음에 직제론 개선을 논해야 한다. 인간의 생사가 걸린 기독교의 본질을 떠난 직제론은 무미건조하다. 그도 그럴 것이 루터의 경우, 그리고 칼뱅 역시 ‘복음’에 대한 기본 이해인 ‘이신칭의’야말로 ‘만인제사장직론’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바탕으로 개신교 ‘직제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물론, 직제도 중요하다. 칼뱅은 교회의 직제를 뼈와 뼈를 잇는 인대 혹은 온몸을 연결시키는 신경 조직으로 보아(Ⅳ.ⅲ.2), 루터의 초기 직제론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장로제’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기독교의 본질이 직제론을 요청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는 ‘궁극적인 것’이고 후자는 이 ‘궁극적인 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장로제’든 다른 ‘직제론’이든, 기독교의 본질(esse)을 떠나서 교회와 직제(bene esse)에 대해서 논하면, 싸움만 하다가 끝날 것이다.
 

한국 교회 직제 개선 방안

한국 사회는 지난 30년 동안의 민주화 과정 속에서 더욱 더 다원화되고 복잡해졌으며, 직접 민주주의와 풀뿌리 민주주의로의 전환도 이루었다. 그래서 ‘장로제와 장로’는 개교회 안에서 더 이상 권위 질서이기를 멈춘 것으로 보고, 대의기구로서 당회 노회 총회가 더 이상 권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한국 장로교회는 교회의 청년들과 여성들과 장애인들과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을, 당회 노회 총회에 참여케 하지 않고, 구태의연하게 전통적인 대의체제만을 고수하며, 장로교헌법에 따른 권위주의 질서만을 내세우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장로제’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다변화되고 다기능화 된 오늘의 한국 사회의 요청에 따라서 우리는 16세기 칼뱅의 ‘장로제’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많은 장로교 개교회의 당회와 노회들 안에서 목사들과 장로들이 아주 금실 좋은 부부처럼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목회와 목양과 회무 처리 등을 잘해 오고 있으나, 최근으로 오면서 목사들의 목회 철학이 장로들의 억압 때문에 실행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특히 장로들이 권력 집단화하여 당회와 노회 안에서 조화를 깨뜨리고 당회와 노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장로들이 개교회 안에서 70세 정년까지 사역하다 보니 목회자 지원 등의 여러 기능들을 소홀히 하고,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 시대의 발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은 목사가 왕 같은 존재로 군림하는 것이 통하지 않으며, 장로 역시 권위와 권능을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목사와 장로는 ‘복음과 구원’으로 돌아가 ‘만인제사장직론’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우선 ‘만인제사장직론’의 정신을 다시금 확인하고 오늘날 직제 개선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루터는 그의 ‘복음과 구원’이라고 하는 주제로부터 ‘만인제사장직론’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는 그 당시 그가 몸담고 있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든 계층 질서적 교직 체제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복음을 통해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은 하나님 존전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등하게 ‘하나님 자녀 됨’의 신분(a status)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행히도 《세례 성만찬 직제》(BEM Text)와 제2바티칸 공의회(1962-65)의 공식 문서는 각각의 사역론에서 모든 세례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populus Dei)으로 전제하면서, 안수례 받은 ‘특수 사역직’을 주장한다. 물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여전히 교황의 으뜸 됨과 ‘교도권’(magisterium)을 주장하고, 나머지 주교들의 위계질서를 논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루터의 만인제사작직론이야말로 16세기에서나 20세기에서나 직제갱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출발점인 것이 확실하다. 칼뱅이 16세기 당시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의 극단적인 실천을 의식하고, 그의 4중직 중 장로제(presbyterianism)를 내세운 것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직제와 과격파 종교개혁의 철저한 ‘만인제사장론’의 실행 사이에서 중도(via media)를 택하는 처사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장로제의 정체성을 점검해야 한다. ‘장로제’는 오늘날도 감독제와 회중 교회 사이의 중도에 자리한다. 우편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그리고 감리교회가 있고, 좌편에는 복음주의 교회, 오순절교회, 침례교회, 그리고 회중교회가 있다. 장로교는 교회와 목사들에 대한 감독기능을 장로제에 맡기고, 감독교회들은 교황, 총대주교들, 감독회장에게 그것을 위임하며, 복음주의 교회 등은 그것을 개교회의 회중에게 맡긴다. 해당 지역 교회들과 목사들에 대한 감독기능으로서 교회의 사도성의 일부인 ‘장로제’는 노회에게 위임된 사도적 책무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장로제’는 감독기능이 교황이나 총대주교나 감독회장에 집중되어 발생하는 문제들과 감독 기능이 개교회에게 주어져 발생하는 폐단을 방지하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감독교회들은 위계질서를, 회중교회 등은 개인적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지만 칼뱅은 일반 정치체제나 교회정치 체제 모두에 있어서 ‘하나의 귀족주의적 민주주의’(an aristocratic democracy)를 내세우면서, 어디까지나 ‘대의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했다. ‘장로제’는 타 교파들 속에서 균형자 혹은 중간자로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 장로제는 개 교회 안에서나 노회와 총회에서도 이와 같은 ‘장로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목사들과 함께 교단 및 교단 간 지도력을 잘 발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장로제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 힘써야 한다. 루터와 칼뱅의 교회 표지(標識)론에 준하여, 장로교 목사는 예배하는 공동체 안에서 성령을 통해 말씀을 설교하고, 세례 성만찬을 집례하며, 성도들의 교제를 지도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을 고백하고 모범된 삶을 영위케 해야 한다. 또한 장로는 이를 진척시키기 위하여, 코이노니아, 행정, 교육, 예배예전, 선교, 사회참여, 에큐메니칼운동 등 여러 차원에서 목회자를 지원해야 한다. 큰 장로교회의 경우, 목사는 장로들을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서 이와 같은 목사 지원 사역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장로들은 총회 산하 장로계속교육기관을 통해 신학의 각 분야를 충분이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장로 임기제에 관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보수파와 우리나라 장로교회만이 종신직(70세 은퇴)을 시행하며, 미국 장로교회(PCUSA) 등 나머지 개혁교회들은 여러 형태의 임기제를 시행하고 있다. 칼뱅 자신은 1년 시무 후, 평가를 하여 연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보았다.5
 

한국 교회와 하나님 나라

한국 교회는 오늘날 글로벌 차원과 로컬 차원 모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넓은 사역(선교)의 공간으로 나올 것을 요청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 역사와 동북 아시아,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는 물론, 창조 세계 전체가 정의와 평화가 충만한 세계로 변혁되기를 원하신다. 창조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역사와 창조 세계 속에서 그의 주권 혹은 그의 나라를 실현해 가신다. 우리는 역사와 창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사야 65장 등과, 무엇보다도 인류와 창조 세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감당하시고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희망을 약속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희망을 품고 있는 ‘출애굽 교회’(the Exodus Church)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사도들의 모든 훈령들과, 나아가서 예수님의 메시아 선교 및 팔복을 따라 살아야 한다. 하여, 모든 세례 받은 ‘만인제사장들’과 ‘장로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선취하는 ‘전위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에 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장엄한 선교에 동참해야 한다. 교파들 사이의 직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보수와 진보, 친일과 항일, 민주와 반민주, 평화와 반평화 등의 이원론적 택일에 머물러 있지 말고, 사도들의 서한들과 복음서들에 준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분별하고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장로교는 무엇보다도 당회와 노회와 총회 차원에서 이와 같은 가치들을 구현해야 한다. 물론, ‘장로제’는 목사를 지도력의 초점으로 하여 이상과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담당해야 할 것이다. 비록, 장로들과 ‘만인제사장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1) The Book of Concord, trs.by Theodore G. Tappert(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59), p.292.
2) M. Luther,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1520), Works of Martin Luther, Vol.II, p.279, in Ibid., p.137에서 재인용. M. Luther, An open Letter to the Christian Nobility(1520), Works of Martin Luther, Vol.II, 69, in Ibid., p.137에서 재인용.
3) M. Luther,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Works of Martin Luther, Vol. II, 282f, in Ibid., pp.137-138.
4) 1559년 최종판 《기독교 강요》, Ⅳ.ⅲ.4.
5)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6), p.278 참조.

이형기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명예교수. 드류대학교(Ph.D.). 저서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역사 해석의 패러다임 이동》, 《세계 교회사》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