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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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19년  08월호 네 페이지 설교 창간 30주년 특별 기획 7가지 설교 형태와 작성법

참된 공동체

본문: 요한복음 11:45-53

네 페이지 설교는 캐나다 토론토 낙스(Knox)칼리지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던 폴 스캇 윌슨이 1999년 제안한 방식으로 일종의 스토리텔링 설교의 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이 방식을 제안하게 된 것은 탈권위적 분위기, 다원주의, 자기주장, 비디오 시대, 집중력의 약화 등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회학적인 원인들(sociological reasions)과 탈종교화 탈신화 등 신학적 원인들(theological reasions)의 변화 때문이다. 이처럼 변화된 상황에서 전통적인 연역적 지시적 설교가 갖는 한계를 인지한 윌슨이 어떻게 하면 전달되는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고민을 담고 제안한 방식이 바로 네 페이지 설교다.

네 페이지 설교란 무엇인가?

이런 맥락에서 윌슨은 새로운 설교학 운동(New Homiletics)이 주창해 온 ‘이야기’에 주목하면서도 동시에 이야기가 보기(see), 맛보기(taste), 만지기(touch) 등의 요소에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야기를 넘어서서 현대 영상 문화의 상징인 영화와 TV드라마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즉 사람들의 가슴에, 감각에 그리고 생각에 통전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만드는 사고(move making idea)를 가지고 설교를 작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고 그 대안이 바로 네 페이지 설교다.

윌슨이 사용하는 ‘페이지’라는 단어는 영화라는 말의 대용어다. 영화가 각본(scripts)이 있어야 하고 각본은 지면(pages)을 갖기 마련이라면 바로 이 지면이 윌슨이 말하는 페이지 개념이다. 또한 페이지는 인터넷의 웹 페이지의 기능도 갖는다. 웹 페이지는 말(word)과 그림(pictures), 정보(information)와 영화(moves)를 동시에 갖는 등 영화와 같은 이미지 효과를 충분히 낼 수 있으면서도 서술적 묘사의 삽입이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따라서 Four Pages는 단순히 ‘네 쪽’이 아닌 ‘네 쪽의 웹 페이지’ 혹은 알렌이 명명한 것처럼 ‘네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마디로 네 페이지 설교는 한 편의 설교에서 네 번에 걸친 장면 전환이 일어나는 설교라 할 수 있다.

네 페이지 설교를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반드시 이야기(갈등+해결)가 있는 성경 본문이어야 한다. 둘째, 네 페이지 설교를 수행하려면 설교자가 능숙한 이야기꾼(storyteller)이 되어야 한다.

페이지의 구성

설교의 페이지식 구성은 모두 네 개의 페이지로 이루어진다. 네 페이지 설교는 크게 갈등과 해결로 구성된다. 갈등은 성경 본문 속에서의 갈등과 회중의 현실 속에서의 갈등으로 이루어진다. 이 두 개의 갈등은 설교의 전반부에 위치하며 설교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개의 갈등은 질적으로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 속의 갈등이 오늘 우리 안에 다양한 양태로 상존한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설교의 후반부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표명되는 ‘해결’ 부분인데 성경 본문 속에서의 해결과 현실 속에서의 해결로 이루어진다. 각 페이지의 핵심 사항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설교를 위한 본문 주해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요한복음 11:45-53은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다룬다. 본문은 나사로의 부활(11:1-44)과 옥합을 깨뜨리는 마리아 기사(12:1-8) 사이에 위치한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나타낸다면 마리아의 옥합은 예수님의 메시아 등극에 대한 상징이자 예표의 성격을 갖는다. 이 두 사건만 놓고 보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 되시는 예수의 위상이 잘 드러난다. 이 두 사건 사이에 위치한 본문은 예수에 대한 유대 산헤드린 공의회의 부정적 시각을 다룬다. 예수의 죽임을 모의하는 사안으로 본문은 전후 사건들과 대립적이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 대속이라는 구속 사역에서 보면 본문은 예수의 목적을 촉진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바로 이런 모순적인 구조 속에 우리가 다루려는 공동체 문제가 역설적으로 담겨 있다.

나사로의 부활 소식으로 산헤드린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그 공의회에서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예수의 죽음으로 민족이 살 수 있다는 연설을 하고 그 이후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이 예수 죽이기를 모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다. 설교자가 공동체라는 주제를 본문에서 다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 차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본문의 핵심을 이루는 산헤드린 및 가야바에 대해 심도 있는 이해를 하는 것과 둘째,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다.

우선 설교자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산헤드린 공의회다. 47절에 나오는 공회의 헬라어 ‘수네드리온’은 좌석, 앉음을 의미하는 ‘헤드라’에 ‘함께’를 의미하는 접두어 ‘순’이 결합된 합성어다. 산헤드린은 유대인 최고 자치 의결기구로 광야에서 모세가 처음 구성했고(민 11:16-24), 귀환한 뒤 에스라가 재조직할 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로마 시대에 공의회는 대사제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파 사람, 사두개파 사람 등 71명으로 구성된 예루살렘 공의회 그리고 여리고, 갈릴리의 세포리스, 하마테, 가다라의 네 곳에 23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일종의 고등법원격인 법정이 있었고 지방에는 3인으로 구성된 재판소가 있었다. 이 중에서 예루살렘 공의회는 가장 큰 세력으로 사법권뿐 아니라 유대 율법에 따른 재판권도 행사했다. 이들은 39대까지 태형을 행할 수 있었지만(고후 11:24) 사람을 죽일 권한은 없었다(요 18:31). 단 이방인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죄를 범할 경우에는 사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공의회의 자리는 대법정 남쪽에 있는 ‘깎은 돌로 만든 홀’(The Room Gazeth)이라는 곳이었다. 중대한 사건인 경우에는 70명의 의원이 전원 출석했지만 일반적인 사건에는 23명만 출석하면 열릴 수 있었다. 재판은 보통 월요일과 목요일에 열렸고, 안식일과 대축제일에는 피했다. 죄수는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했고, 상복을 입었다. 판관(법관)의 결정은 다음날 반드시 한번 더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판결을 위한 투표는 가장 나이가 어린 의원부터 시작되었다. 무죄 선고는 과반수로 충분했지만 사형 선고는 절대 다수여야 했다. 판결의 집행은 무죄의 경우 즉시 석방되었지만 유죄의 경우에는 24시간 연기되었다.

재판관의 자격은 까다로웠다. 민사(民事)에서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재판에 참여할 자격이 있으나 형사(刑事)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딸을 제사장과 결혼시킬 수 있는 가문의 사람만이 재판관으로 선출되었다. 산헤드린의 내규에는 완전한 재판관의 자격으로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70가지 언어”를 말할 것, 마술사나 무술사의 간책을 간파할 수 있을 만큼 이 방면에 조예가 깊을 것, 그리고 고결한 인격을 갖출 것 등을 명시하고 있다. 재판관에게는 보수가 없었고 보수를 받은 사람의 재판은 무효가 되었다.
산헤드린 공의회에 이어 우리가 주목할 인물이 대제사장 가야바다. 가야바는 종교 지도자이면서도 종교 자체보다는 권력에 대한 집착력이 매우 큰 자(마 26:66; 행 4:1, 2)였다. 로마 황실, 유대 종교 지도자, 군중의 요구에 민감하게 대처하며 자신의 입지를 견고히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정치적 처세술에 밝은 자였다(마 26:57-68; 요 11:47-68). 특히 불법적인 재판으로 예수를 사형 선고한 것으로 보아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 유지를 위해 공적을 남용한 비양심적인 자라 할 수 있다(마 26:57-68).

원래 대제사장 직책은 레위 지파 아론 계열 중 선임 제사장에게 승계된 종신 세습직이었다(아론을 이은 엘르아살은 아론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이후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장남에게 승계됨, 민 20:23-29; 25:10-13; 27:18-23). 하지만 신구약 중간기 이후 신약 시대로 오면서 외세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대제사장은 통치자들에 의해 임명되었다. 특히 로마의 지배하에서 대제사장의 임명권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대제사장은 정치적 이해관계나 이권(利權)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할 경우 1년을 채우지 못하는 대제사장들이 허다했으며, 성직 매매는 보통이었다. 자연히 생존해 있는 전임 대제사장이 수두룩하게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이들 역시 ‘대제사장’이라 호칭함). 그래서 혼란을 막기 위해 현직 대제사장은 ‘그 해의 대제사장’(요 18:13)이라 표현해 전직 대제사장과 구분하기도 했다. 예수님 당시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고(마 26:57), ‘안나스’는 전직이었다(요 18:24).

본문의 주요 사항에 대한 주석에 이어 설교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설교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제에 대한 연구다. 성경 본문에서 공동체라는 주제를 다루려 할 경우 설교자는 공동체라는 개념의 다양한 면을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설교란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에서 행해지는 해석적 작업이라는 것이다. 즉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 속으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해 넣는 것이 설교다.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연스레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이야기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공동체와 개인의 상호 관계 양자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은 개인화되었다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인간은 단수와 복수 동일체인 ‘엘로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단수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은 다른 사람으로 대치할 수 없는 천부 인권의 고귀한 존재다. 동시에 복수로서의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오직 다른 사람과 함께 함으로써 진정 사람일 수 있는 존재다. 즉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공동체는 개인을 위해 선하고 아름다운 교환을 이루어야 한다.

개인은 공동체를 위한 소모품이 아니다. 공동체는 개인을 위한 바람막이가 아니다. 이 양자는 공생의 관계다. 개인이 살아야 공동체가 살고, 공동체가 살아야 개인이 산다. 공동체를 위한 한 사람의 희생은 개인과 공동체가 갈림 없음을 드러내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표징이고 개인의 영예이며 공동체의 힘이다. 성숙한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 하지만 공동체가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사유화되면 그들은 공동체를 빌미로 삼아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다.

인간 역사는 이러한 사유화된 소수에 의한 권력 독점으로 점철되어 왔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대속적 희생의 방법을 결정하셨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도구가 된 것은 사유화된 권력이었다. 바로 이러한 아이러니의 시각에서 가야바를 보아야 한다면 본문에서 발견하는 공동체라는 주제는 진실을 한번 비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읽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거짓 예언자인 발람을 통해 진리를 예언하셨듯 가야바라는 왜곡된 지도자를 통해 진리를 말하게 하고 하나님 계획의 한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가서는 안 되는 길을 간 인간을 보시고 그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그 인간들이 즐겨 사용하는 개인 희생의 방식에 독생자의 생명을 넘기신 것이다.

네 페이지 설교를 위한 설계


모든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에서 핵심적인 메시지를 추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금번에 다루는 네 페이지 설교는 주어진 주제가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다. 네 페이지 설교는 말 그대로 각각의 페이지에 주어진 기능이 있고 운영하는 방법이 정해져 있다. 따라서 공동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각각의 페이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면 된다.

1.  1페이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첫 번째 페이지의 기능은 성경 본문 속의 갈등을 파악하고 도출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먼저 성경 본문 속에서 설교의 주제인 공동체와 연관된 ‘갈등’을 찾아야 한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서는 47-48절의 내용이 갈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가 나사로를 살리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소집된 공의회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이적으로 야기될 수 있는 유대 민족 공동체의 파멸을 염려함이 그것이다. 즉 예수의 이적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유대 민족이 고대하던 메시아로 믿고 추종할 경우 로마제국이 이런 움직임을 자신들에 대한 반항으로 보고 군사를 일으켜 유대 땅을 초토화시킬 것에 대한 우려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갈등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이 속한 민족 공동체의 와해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물론 본문에서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도 당대의 권세와 영화를 누렸던 기득권 세력이기에 고통받는 민초들에 대해 염려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더 큰 게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대인의 메시아 대망에 대해 익히 아는 로마 제국이 체제수호를 위해 감행하는 피의 보복은 유대 공동체 전체를 송두리째 날려 보내고도 남을 만큼 가공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비록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의 기득권 유지에서 발아된 염려라 하더라도 유대 공동체의 파괴는 가장 중요한 본문의 갈등일 수밖에 없다.

설교자는 위에서 언급한 갈등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묘사해야 한다. 성경은 핵심적인 사실 위주로 기록하기에 소소하고 세부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언급하지 않는다. 설교자는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상상력을 동원해 무대를 만들어 회중 앞에 보여 주어야 한다. 즉 회중은 설교를 들으며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이를 위해 ‘있을 법한 개연성’이라는 원칙 하에서 설교자는 상상의 나래를 펴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흐름을 만들고 대화 독백, 의성어와 의태어 등의 요철을 깔아야 한다. 하지만 상상력은 무대 건설을 위해 있을 법한 사실을 바탕으로 작동시키는 것일 뿐 핵심적인 메시지의 경우 상상력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성경상의 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사실 한국 강단의 성인 설교에서 동화식 구연 같은 스토리텔링 기법은 여전히 낯선 게 사실이다. 또 설교자들 역시 이런 훈련이 부족하다. 따라서 성인 대상일수록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줄이고 내레이터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문에 대한 주석 작업을 통해 얻어진 정보들을 내레이터를 통해 제공하는 형식이 효과적이다. 반면 네 페이지 설교의 회중이 중고등부나 주일 학교 등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등장인물들의 비중은 늘리고 내레이터의 비중은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2.  2페이지
두 번째 페이지의 기능은 성경 속에 드러난 갈등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상존한다는 ‘현실의 갈등’을 진술하는 것이다. 1페이지에서 유대 공동체의 파괴에 대한 우려가 갈등이었다면 이런 갈등이 우리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를 밝혀야 한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구체적인 실화, 문학 작품, 시사 문제 등 다양한 자료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어느 특정한 한 가지 소재에만 국한하기보다는 다양한 소재와 이슈를 조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작업을 통해 이 갈등이 특정한 부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연관된 것임을 회중이 공감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성경 본문에서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공동체 파괴의 원인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으로 인해 야기되는 경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의적 의미에서 미국과 중국 간에 벌어지는 세계 패권을 둘러싼 갈등은 국가라는 단위의 공동체 존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런 경우 새로운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패권국가가 두려움을 느끼고 무력을 통해 두려움을 해소하려며 전쟁이 발생한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소중한 소재가 될 수 있다. 특히 국가나 공동체의 몰락의 상당 부분이 ‘배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와타 슈젠이 편저한 《배신과 음모의 세계사》(매일경제신문사, 2014)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스처럼 사회주의 정권의 포퓰리즘이 공동체를 파탄으로 몰고 간 경우라든지 좌파 세력의 타락으로 대혼란을 겪은 브라질의 경우 등도 참조할 만하다.

협의적으로는 가정이나 교회 혹은 회사나 다양한 모임이 특정인으로 인해 파괴되는 사례 등을 인용할 수 있다. 특히 성도들의 사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의도라면 서점가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나오는 ‘리틀 피플’ 개념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결핍과 사회(공동체)의 과잉이 결합되었을 때 나타나는, 집단적 광기 즉 대중 전체주의의 폐해는 우리 시대에 당면한 난제다. 중요한 것은 2페이지가 다루는 시제가 ‘현재’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설교자가 매혹적인 예화나 소재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거에 해당되거나 성경 속 이야기라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1페이지에서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썼다면 여기서는 통상의 설교 기법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

3.  3페이지
세 번째 페이지의 핵심 기능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본문 속의 하나님의 행동을 추출하는 것이다. 1페이지에서 설교자가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본문 속의 갈등을 도출했다면 여기에서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갈등 이후 이야기의 해결과 종결까지 진행한다. 그런 다음 설교 기법으로 전환해 성경 속에 제시된 갈등과 해결을 신학적으로 해석함으로 설교의 메시지를 제공한다. 3페이지 후반부가 본 설교의 핵심 메시지가 나오는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본문에서 보이는 갈등의 해결은 49-50절에 나오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이다. 가야바 발언의 핵심은 백성의 안위를 위해 한 사람, 즉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파멸의 원인 제공자가 예수이기에 그를 없앰으로 공동체도 살고 자신들의 지위도 유지된다는 것이 가야바 발언의 핵심 내용이다.

일반적인 진단이라면 가야바의 제안은 정확한 해답이다. 하지만 그가 제거하고자 하는 ‘원인’이 예수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특히 명분은 유대 공동체의 존속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문제는 51-52절에 나오는 가야바 발언에 대한 성경의 해석이다. 특히 52절의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라는 내용은 우리의 예단을 벗어난다.

나아가 우리 성경에는 “미리 말함이러라”라고 했지만 원어를 보면 ‘에프로페튜센’, 즉 예언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도록 주도한 인물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가야바에게 성령이 임해 예언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공동체의 안위를 핑계 대며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사악한 가야바의 이기적 논리를 인간의 구원이라는 선을 위해 잠정적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설교자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가야바를 사용하신 것은 일종의 진리 비틀기다. 하나님의 본심은 온 천하보다 한 인간의 목숨이 더 귀하다는 것이다. 그 인간 전체를 살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라는 모순을 충족시키기 위해 성삼위 하나님이 내리신 아주 예외적인 결정이 성자 하나님의 희생이다. 그 결정은 말 그대로 인간 구원을 위한 아주 특별한 예외일 뿐이다. 개인에 대한 소중함을 피력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은 공동체를 위해 개인은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설교자는 3페이지 후반부의 갈등과 해결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사도행전 5:27-32을 보면 공의회는 베드로와 사도들을 석방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공동체의 이름으로 진리를 파괴하는 일을 자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으로서의 사도들은 그 그릇된 명령을 거부한 채 쉬지 않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했다.

이것이 비단 종교적 진리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공동체든 국가든 거기에 인간적 이기심이 개입되고 특정한 이념이 주입될 경우 진리를 추구하는 개인은 억압당하기 마련이다. 이런 공동체는 참된 공동체가 아니라 사유화된 공동체일 뿐이다. 그렇게 개인들이 공동체를 빌미로 삼아 다른 개인들의 희생을 강요한다. 이런 경우라면 진정 공동체를 위하는 길은 공동체를 사유한 사람들 손에서 공동체를 구해내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진정 참된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이 스스로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다. 설교자는 이러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판단을 내려주어야 한다. 특별히 공동체의 존립에서 한 개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본문의 흐름으로 볼 때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4.  4페이지
네 번째 페이지의 기능은 세상 속의 하나님 행동을 추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1-3 페이지가 짝을 이루어 성경 속의 갈등과 해결을 다루었다면 2페이지에서 제기한 우리 시대의 갈등 부분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바로 4페이지라 할 수 있다. 즉 성경 속에 드러난 갈등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결되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갈등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4페이지에서 하는 것이다.

이때 설교자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반드시 성경 속에 드러난 갈등과 해결이라는 구도와 유사한 현실적인 ‘예화’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설교의 집중도가 가장 떨어지는 3페이지 후반부에서 설명의 방식으로 핵심 메시지를 다루었는데 이어지는 현실 적용에서도 만일 설명의 방법을 사용한다면 회중의 집중도는 확연하게 저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론

결론에서는 설교의 전체적인 주제를 회중이 분명히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며, 가급적 간결하게 맺는 것이 좋다. 이미 4페이지에서 이야기를 통한 스토리텔링을 시도했기 때문에 또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굳이 설교자가 감성적 터치를 하려 한다면 천 목사라는 분이 지은 “나 우리 그리고 민족” 같은 공동체와 연관된 ‘시’를 낭송하며 끝내는 것도 좋다.

정든 세상 속에 같은 말로 기쁨을 나눈 자들이여
영혼의 교감을 통해 믿음을 공유했던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거대한 원을 그리며 둥글게 살자 다짐하며 반만년을 함께 한 우리들이여
빛바랜 과거의 깃발에 얽매이지 말고
유유히 흐르는 시대 물결에 그대 나 우리 함께 흐르자고
그렇게 손잡고 가자고
다 같이 자유하자 하네. .

 

정인교 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 독일 본대학교(Dr.theol.). 저서로 《설교자여, 승부수를 던져라》, 《설교학 총론》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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