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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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19년  08월호 고통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마음 류호준 교수의 심중소회(19)

 사도 바울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중심적 동기나 이기적 동기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을 내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십시오.’ ‘자신의 이익을 따지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따져 보세요.’ 어떻게 이런 태도나 마음가짐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태도와 마음가짐처럼 여러분도 그런 태도와 마음을 가지면 가능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본받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과 행동양식은 우리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행동 양식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셨습니까? 그분은 ‘하나님의 신분’을 가지셨습니다. 달리 말해 그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움켜쥐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과시하거나 행세하지도 않았습니다. 금은보화를 움켜쥐고 있는 구두쇠 스크루지처럼 영광과 위엄 속에 계시는 ‘하나님 권리’를 움켜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분을 훌훌 내려놓고 자신을 온전하게 비워 사람의 모습을 입고 노예의 신분을 가지셨습니다. 사람의 형태를 취하셨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하여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죽기까지 겸손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성육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시(詩)로 표현된 성육신

바울은 이 사실(성육신)을 논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노래’할 뿐입니다. 빌립보서 2:6-11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부른 ‘그리스도 찬미’(christological hymn)였고 이 가사를 바울이 인용하면서 읊조리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1-5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매너를 갖고 살라고 말합니다. 산문체 형식의 권면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부터 바울은 산문에서 시로 갈아탑니다(6-11절).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1-5절)에 대한 신학적 근거(6-11절)는 ‘논의’하는 것보다 시를 ‘읊조리는’ 편이 훨씬 낫다고 느낀 것입니다. 사실 심오한 진리는 객관적 진술보다는 시로 표현하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성육신)은 너무도 독특하고 유별난 사건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는 그 터질 듯한 장엄한 정서를 표현하지 못할 겁니다. 사실적 묘사는 뒤로 물러가야 하고 찬양의 언어, 송영의 언어가 전면에 등장해야 할 겁니다.

산문에서 시로 전환되는 구절,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에서 그리스도의 삶의 태도로 전환하는 구절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세와 마음가짐은 그리스도 예수의 자세와 마음가짐과 같아야 합니다.’(5절) 바울은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해서 먼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6-7절). 성육신에 관한 이 언어들은 궁극적으로 ‘고통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육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고통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은 고난을 경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고통, 복음의 핵심

세계 2차 대전 직후, 일본 사람들은 그들이 신봉했던 천황과 신도교(神道敎, Shinto)가 몰락하자 국가적으로 심한 고난의 기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일본 기독교인이 쓴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가죠 기다모리라는 신학자가 쓴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이란 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애’(痛愛)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아파하고 아프기에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단일한 주제는 ‘하나님의 통애(痛愛)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고통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고통과 애통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은 그저 한 기독교 창시자의 출생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고통과 통애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떤 종교적 이상주의자가 맞이한 비참한 죽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출생’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최초의 복음이 되었고, 놀랄 만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출생하였고 사람이 되신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소식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 사실을 ‘복음’ 즉 ‘복된 소식’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양극 대칭적 표현인 ‘그리스도의 요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포괄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고통과 통애가 펼쳐지고 있는 대하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요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복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출생의 상징인 요람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절정인 십자가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고통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출생에서 죽음까지

이런 이유 때문에 니케아 신조(381년)는 큼직한 걸음걸이로 베들레헴에서 골고다까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본디오 빌라도에게까지 뛰어넘으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들어보세요!

나는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육신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니케아 신조는 예수님의 사사로운 생애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니케아 신조는 그분의 출생에서 바로 십자가의 처형으로 훌쩍 뜁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조는 복음서의 모범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서 가운데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을 보십시오. 마가복음을 읽어보신 분들은 ‘곧’(즉시) ‘하자마자’라는 부사가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속도가 무지하게 빠릅니다.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급하게 서두릅니다. 어디로 그렇게 서두른다는 말입니까? 예수의 ‘십자가 형장’을 향해 급하게 서두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시시콜콜한 일생에 관심이 없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죽음에 깊은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마가는 하나님의 고통에 대한 복음서입니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드라마 속에 펼쳐졌던 하나님의 고통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수난과 고난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고통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성령으로 성육신하시고,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이 간략하고도 명쾌한 니케아 신조의 고백 문구는 예수님의 삶의 여정들과 발자취들이 하나님의 고통들로 수놓아졌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고통이 속속들이 가시적(可視的)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시 빌립보서 2:5-8을 읽어 보십시오. 귀담아 들어 보십시오. 이번에는 유진 피터슨 목사의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생각하셨던 방식으로 여러분도 자기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셨으나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셨고, 그 지위의 이익을 고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조금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자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특권을 버리고 종의 지위를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낮추는 과정이었습니다. 오히려 사심 없이 순종하여 사셨고, 사심 없이 순종하며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참혹하게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읽고 있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우주를 통해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오시는 과정을 기록하는 ‘여행 기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우리가 읽고 있는 바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통을 영원까지 뒤돌아 따라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슬픔의 길’(via dolorosa), 고난의 길, 수난의 길은 이 땅 위에서 시작한 길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기 전에 이미 통애(痛愛) 속에 계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적 영광의 옷을 벗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도다”(고후 8:9);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form)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신적(神的) ‘하라끼리’(harakiri, はらきり)를 자행했다.’
 

할복과 비움과 ‘케노시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들은 죽는 일이 있어도 항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받았기 때문입니다. 적군에 의해 죽느니 ‘하라끼리’를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라끼리’는 ‘할복(割腹)자살’입니다. ‘하라’는 ‘배’, ‘위장’, ‘내장’이고 ‘이리’는 ‘자르다’는 뜻입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에게 전투 장비 중에 하나로 할복단검도 주어졌답니다. 할복이란 배를 갈라 배 속의 내장을 따 꺼내놓는 행위였습니다. 자신을 파괴적으로 ‘비우는’ 행위입니다. 신학자들은 여기서 ‘케노시스’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합니다. ‘케노시스’는 ‘비우다’라는 그리스어입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케노시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헬라어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에케노센’(ekenoosen)하셨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의도적으로, 고의적으로, 희생적으로 자신의 신적 영광(divine glory)을 ‘비우고’ 여러분과 저와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적 타이틀’로 말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그것에 매달리거나 집착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케노시스’, 이 ‘자기 비움’, 이 ‘신적 할복’(하라끼리)은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어리둥절하게 하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복음이란 본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생각들을 산산조각 내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우리에게 내려온 ‘하나님 상’, ‘하나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인간 삶의 모든 고통들 너머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완전하시고 따라서 고통이란 것을 느낄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지 그 고통 속에 사시는 분은 아닙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알고 살아 왔을지도 모릅니다.
 

사랑과 고통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고통을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은 사랑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고통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겪는 고통을 함께 겪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뭐 하러 구차스럽게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야 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자신이 버림받음을 경험하셨기에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자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당하심을 통하여,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자발적 고통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당한 비극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크리스천 목각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나무로 조각하였습니다. 대략 150cm 크기의 목각 조각상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술적인 해석이 담긴 조각상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리스도의 손에는 못이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왼손으로 큰 대못을 잡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듯이 전통적인 십자가 상에는 예수의 양손에 대못이 박혀 있습니다. 이런 그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수동형)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에 못을 박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듯이 ‘주 예수여, 저입니다. 당신을 부인한 것은 저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도 저입니다. 제가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십자가 상은 파격적이었습니다. 못 박힌 손이 아닙니다. 못이 그의 양손을 꿰뚫은 것이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께서 왼손으로 못을 잡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몰론 이 조각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임을 아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덧붙여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십자가 상입니다. ‘인간이 그를 십자가에 죽이려고 결정했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가 그곳에 달리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은 아버지가 의도하신 죽음이었고 아들이 그 결정을 받아들인 죽음이었다.’ 달리 말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계획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역사적으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일어나지 않아도 될 뻔했던 사건이 아니란 말입니다.
 

넉넉한 삶, 회복된 삶

왜 사도 바울은 이 찬송을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가지 단순한 요점, 아주 중요한 단 한 가지 핵심, 즉 구원하고 구속하고 회복하기 위한 이유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구원받고 회복되는 일일까요? 어떻게 신앙 공동체가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마 당시의 빌립보교회 안에는 분리와 다툼과 과시와 시기 질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잘해보겠다고 하면서도 항상 자기 자신을 앞세우고 자기 자신의 위치나 체면을 더 중요시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각자 방식의 권면과, 사랑의 위로와, 성령의 교제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과 자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언제나 이기적 자아가 앞에 나왔습니다. 이런 현실을 개탄하면서 사도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시오. 같은 사랑을 가지시오. 뜻을 합하시오. 한마음을 품으시오’라고 반복해서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믿고 따르려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위는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한 올바른 앎에 기초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어떤 일을 하던 이기적인 야망이나 이기적인 자만심 때문에는 하지 마세요. 무슨 일을 하든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여러분보다 더 낫게 여기면서 하세요.’ 특별히 이 말씀은 교회 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지위를 비우고 내려놓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행동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와 같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비이기적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뽐내기를 잘하는 교만한 우리가 좀 더 겸손하게 될까요?

우리 마음을 불러다 철저히 조사해 보세요. 우리 마음을 내려놓으세요. 우리 마음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커다란 마음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종의 일을 하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도 높고 힘이 있다고 여겼던 자들의 발을 씻으신 그리스도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류호준 전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네덜란드 자유대학교(Dr.theol.). 저서로 《일상신학사전》, 《이사야서Ⅰ》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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