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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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9년  08월호 목사와 당회의 소통 소통으로 살아나는 교회 공동체

기사 메인 사진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사공이 많아서 도리어 잘 가는 배가 있다. 조정 경기 이야기다. 조정은 단체 경기로 키잡이인 콕스웨인이 중심이 되어 팀원들의 소통과 협력으로 이뤄진다. 조정 경기의 핵심은 팀워크다. 물살을 가르며 날렵한 모습으로 질주하는 배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과 흥미를 선사한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신뢰를 잃어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기는커녕 지탄을 받고 있다. 201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국민의 20.2%만 교회를 신뢰하며, 특히 비개신교인은 10%만이 교회를 신뢰한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국민의 51.2%로 반수를 넘었다는 사실이다. ‘신뢰하는 종교’ 조사에서는 가톨릭과 불교에 뒤처진 18.9%로 3대 종교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조사 결과 중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응답자의 50%가 목사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것이다. ‘신뢰한다’는 응답은 20%에 불과했다. 이런 분위기인데, 신앙이 있어도 교회에 안 나가는 가나안 성도들이 늘고 이단이 극성을 부리는 것, 그리고 일반인들이 교회를 백안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교회와 목사의 신뢰도 추락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분쟁이 주요인이고, 그 분쟁의 중심에 목사와 장로의 갈등이 자리한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신본적 민주공화정치를 구현하지 않고 인본적 주도권 다툼이나 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할까? 당회장인 담임목사와 당회원인 장로들 사이의 불통을 해소하고 원활한 소통을 도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목사의 책임과 역할이 우선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소통의 출발점: 성경적인 당회 운영

한국 교회는 장로교회뿐 아니라 교파를 초월해서 대다수 교회에 당회가 조직되어 있고 당회 중심으로 교회가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교회에서 당회의 역할은 중차대하다. 당회가 얼마나 성경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느냐의 여부가 교회의 사활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신교의 교회 정치는 민주공화정치이다. 교회의 주권은 교인에게 있고, 그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해서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정치다. 가톨릭의 경우에는 교황의 절대권한으로 통제하는 교황 정치를 시행하는데 이는 비성경적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성경적 교리를 확립한 것은 물론이고, 교황 정치를 극복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당회를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의 정치는 성경적이고 이상적인 정치제도다. 민주국가의 정치제도가 이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민주공화정치 앞에 ‘신본적’이란 말을 붙여야 한다. 당회가 교인들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목사, 장로, 교인 등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교회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다. 요단강 도하 시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서 요단강을 건너라고 명령한다. 그때 제사장들이 넘실거리는 강물을 발바닥으로 밟았고 강이 갈라져 육지가 됐다. 백성들은 그들을 뒤따라 들어갔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요단강을 다 건너기까지 강 한가운데 서 있다가 제일 마지막으로 빠져나갔다.

당회는 마치 여호수아와 제사장들과 같다. 당회가 앞장서 나아감으로써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요단강 도하 사건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말씀을 받은 여호수아가 명령했고 제사장들이 먼저 순종하고 그 다음에 백성들이 순종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그의 뜻대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끄셨던 것이다(수 3:7-17).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는 성경대로 각자의 위치와 소임이 무엇인지 숙지하고 그대로 감당해야 한다. 거기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목사와 장로의 갈등이 불거지고 교회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당회의 소통은 바로 성경적 당회 운영에서 출발한다. 그럴 때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사공이 많아 오히려 물살을 잘 가르는 조정 경기의 배처럼 당회가 시너지를 이루어 교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의 장애물: 목사와 장로의 미성숙

삼성경제연구소는 2017년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OECD국가 가운데 터키에 이어 두 번째로 심각하다고 밝혔다. 연간 갈등 비용이 최대 246조 원에 이른다고 했는데, 정부의 1년 예산이 470조 원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한국 사회의 갈등 수준을 OECD 평균 수준으로만 개선해도 실질 GDP가 0.2% 올라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 한국 교회의 갈등 지수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갈등 비용은 얼마나 될까? 통계 자료가 없지만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죽하면 교회 소송 전담 변호사들이 증가하고 있을까? 많은 교회가 분쟁으로 갈등을 겪고, 그 중심에 목사와 장로의 소통 부재가 있다. 그 결과 교회 성장은 언감생심이 되고 은혜가 고갈되고 사역의 효율성이 추락하고 있다. 그래도 이 문제를 극복하기만 하면 한국 교회가 회복될 수 있다는 기대를 해 본다.

목사와 장로의 소통에서 제일 큰 장애물은 그들 자신의 미성숙이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 배경에는 미성숙의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세속적인 욕망과 자존심으로 분파를 만들고 서로 다투었다. 오늘의 한국 교회 모습이 그와 흡사하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미성숙을 지적하며 성숙을 권면했다(고전 3:3).   

지당한 말이지만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엡 1:22). 오직 그분의 뜻이 중요하고 오직 그분만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런데 미성숙한 목사나 장로는 주님의 뜻을 묻기 전에 자신의 생각과 뜻을 관철하려고 하고, 그러지 못할 경우 자존심을 빌미로 다툼을 벌이기 일쑤다.

신학생 시절에 들은 이야기이다. 실천신학 강사로 왔던 목사가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할 때 장로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이겨야 목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장로들에게 잡히면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였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에는 두 가지 유형의 교회가 존재하는데 목사가 독재하는 교회와 장로가 독재하는 교회가 있다고도 말했다. 목회를 잘 모르고 어리숙한 시절이었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몹시 불쾌했다. 그러면 교회가 세상의 조직과 다를 게 무엇인가 싶었다. 그것은 성경적인 교회도 아니고 성경적인 교회 정치도 아니다.

목사와 장로 사이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내려놓음이 필요하다. 자신의 욕심과 자존심 등 사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각자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성숙해져야 한다(엡 4:15). 개인 성도로서도 성화는 평생 추구할 구원의 과정이다. 그럴진대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목사와 장로는 교인들보다도 더 착실하게 성화를 이뤄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도를 배울 수 있고 서로를 인정하며 열린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다.

특히 목사가 솔선해야 한다.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다.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종에 불과하다. 종에게 무슨 뜻이 있고 주도권이 있겠는가? 단지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갈 뿐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리더십은 ‘이끄는 리더십’(leading leadership) 이전에 ‘따르는 리더십’(following leadership)이어야 한다. 교인들을 이끌기 전에 먼저 주님의 뜻을 잘 따르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양인 교인들을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처럼 솔선하며 본을 보이면 장로들의 마음이 열리고 목사를 따르게 된다.

주님이 보여 주신 리더십은 종의 리더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지만 종의 모습으로 섬겨 주셨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왕종(King-Servant)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목사도 장로도 섬김의 리더십으로 교인들을 섬길 때 당회의 소통을 넘어 교회의 소통을 이룰 수 있다. 그러면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로 화평을 이루고 그 가운데 은혜의 강물이 흐를 것이고, 더 나아가 복음 사역의 효율적 수행을 위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게 된다.

소통의 방안: 상호 존중, 의사 조율, 비전 공유, 역할 분담 

1.  상호 존중
소통의 단초는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 마음을 여는 비결은 상호 존중이다. 장로는 목사의 권위와 전문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 역시 장로의 권위와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딤전 3:1-7). 담임목사는 당회장으로 교회의 대표다. 장로는 당회원으로 교인의 대표이다. 목사는 장로를 일개인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교인들의 선거를 통해 교인의 대표로 세운 분으로 존중해야 한다.

성경적인 목회 리더십은 군림의 리더십(ruler leadership)도 수직적 리더십(pyramid leadership)도 아니다. 목사는 장로를 목회의 동역자로 인식해야 한다(고전 3:9). 그런 점에서 목사의 리더십은 종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요 공동 리더십(multiple leadership)이어야 마땅하다.

목사는 성경적 근거에 따라 장로를 조심해서 세우되 일단 세워지면 장로에게 합당한 존경을 표해야 한다(딤전 5:17). 물론 장로 역시 목사에게 합당한 존경을 표하고 그 가르침에 복종해야 한다(히 13:7). 그럴 때 상호 간에 마음이 열리고 소통이 원활해진다.
상호 존중은 경청으로 나타난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누구라도 무시당한 느낌을 갖게 된다. 장로는 교인의 대표라는 지위도 있고 자부심도 있기 때문에 그의 의견을 경청함으로 존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마음이 닫히게 된다. 그러면 관계가 나빠지고 소통은 물 건너간다. 물론 장로의 의견이 주님의 뜻이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충분히 경청한 후에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설득하면 충분히 이해를 시키고 소통할 수 있다. 

어느 지방의 작은 교회 이야기다. 장로가 한 명인 교회였는데 담임목사가 수시로 교체되어 목사의 무덤이란 별명이 붙게 됐다. 그 장로는 오랜 세월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는 데 공헌했으며 교회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목사를 마치 잠시 거쳐 가는 월급쟁이 정도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 기적이 일어났다.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가 오래 버틸 뿐 아니라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궁금해진 주위 목사들이 그 목사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특별한 게 없었고 그저 장로의 말을 계속 경청해 주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경청하자 그 장로는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목사의 권위와 전문성을 존중하고 매사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교회가 화평케 되고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부목사로 있다가 36세에 담임목사가 됐다. 1992년이었는데 당시 70세 시무 정년제가 없던 시절이라 당회원 중 대다수가 고령자들로 아버지뻘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2명은 필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장로로 임직하신 분들이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무시당해도 할 말이 없는 형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당회를 이끌어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장로 한 분 한 분을 존중하며 경청하자 목사가 연소해도 충분히 존중받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존중은 당회원의 마음을 활짝 열어 소통으로 직행하게 하는 열쇠다.

  2.  의사 조율
당회는 개교회의 컨트롤타워와 같다. 당회의 의사 결정을 통해 교회가 방향을 잡게 된다. 그러므로 당회로 하여금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도록 하는 게 당회 운영의 핵심이다. 목사의 뜻도 아니고 장로의 뜻도 아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당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목사와 장로 공히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사심, 그리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목사는 안건을 당회에 상정하기 전에 먼저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당회원 장로들의 동의가 필요하기에 의사 조율은 필수적이다. 목사의 권위와 전문성이 존중되어야 하지만 목사가 무오류의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이 교회에 장로를 세우고 당회를 구성하게 하신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 조율에 있어 유의 사항이 있다. 당회원 중 특정한 소수와 미리 사사로이 의논하면 곤란하다. 혹시라도 미리 몇이서 짜고 당회에 들어온다는 오해를 사면 당회원들의 마음이 닫히게 되고 의사 조율이 불가능해진다. 자칫 당회 안에 분파가 생겨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필자가 담임목사가 되어 처음 당회를 이끌게 됐을 때 공평무사하게 의사 조율을 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전임자의 경우 특정한 소수와 미리 의논해서 정해놓고 당회에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게 바로 당회의 소통에 지장을 주고 교회의 혼란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 폐해를 깨닫고 공평무사하게 일정한 원칙을 세워놓았다. 당회 회집 이전에는 오직 안건에 관련된 해당 위원장 장로와 의논하고 상정하기로 했다. 아주 중대한 안건의 경우에는 해당 위원장과 선임 장로 몇 분과 의논하고 상정했다. 목사의 독단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특정한 분파를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일단 안건이 상정되면 당회원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허용했다. 그러다 보니까 충분한 토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당회원 전부가 이해하고 동의하는 결정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만장일치로 의사를 결정하는 전통도 세워졌다. 담임목사 27년 동안 표결에 부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만장일치로 결정해도 의견이 달라 마음이 불편한 당회원이 더러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당회장인 목사와 의견이 다른 경우에는 피차 불편해질 수 있으므로 사후 관리를 잘해야 된다. 해당 장로를 별도로 만나 보충 설명을 드리고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승복하고 감정의 앙금이 남지 않게 되어 흔쾌한 마음으로 당회 운영에 협조하곤 했다.

당회의 의사 조율은 마치 심포니 연주와 같다. 지휘자가 악보에 기초해서 다양한 연주자를 하나로 묶어내듯 목사는 말씀에 의지해서 당회원 한 분 한 분의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의사를 조율해야 한다. 그럴 때 당회도 교회도 순항하게 된다.

  3.  비전 공유
당회의 소통은 상호 존중과 의사 조율을 넘어 비전의 공유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럴 때 팀 정신(team spirit)을 갖고 한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갈 동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목회 초기에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는 가운데 예루살렘 교회는 넘어 안디옥 교회의 모델로 예배와 교육을 기초로 선교를 지향하는 선교적 교회(Triangle Missionary Church)의 비전을 받았다. 처음에는 당회원들이 흔쾌히 공감하지 않아서 고충이 많았다. 하지만 훈련을 통해 비전을 나누고, 특별 세미나 등을 통해 꾸준히 비전을 설명하고 마음속에 각인시켰다. 그런 과정에서 선교에 반대하셨던 장로가 헌신해서 오히려 선교지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그 가정이 선교에 앞장서게 된 사례도 있다.  

그리고 연말에는 사역 세미나를 열어 당회원 전원이 위원회별로 사역을 발표하면서 평가하고 토의하여 다음 해 사역의 방향을 정한다. 그 결과물을 담임목사가 취합해서 목회자들과 최종 협의를 거쳐 한 해의 목회 계획서를 작성하고 실행한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비전을 공유하게 되고 온 교회가 한 방향으로 진력하게 되었다. 한 해 한 해 이런 과정이 쌓이면서 선교적 교회의 면모를 확립하고 감사하게도 이제는 국내외에 선교적 교회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4.  역할 분담
교회에는 목회자의 사역과 평신도의 사역이 공존한다. 고유한 영역도 있고 함께하는 영역도 있다. 한국 교회의 평신도 자원은 매우 우수하다. 성경과 영성 훈련도 충분히 받고, 사회에서의 경험과 실력도 갖춘 분도 많다. 목사와 온 교회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장로를 세우면 그들 중에서도 정말 우수한 평신도 사역자들을 확보할 수 있다. 그들을 교회 사역의 전반에 배치하면 아주 효과적이다. 목회자와 더불어 상호 존중하며 비전을 공유하는 가운데 멋진 팀워크를 이룰 수 있다.

필자의 교회에서는 장로가 위원장을 맡고 목회자가 담당 사역자로 배치되어 한 팀을 이루어 역할 분담을 한다. 이는 사역의 협력으로 이어져 시너지를 만들어 낸다. 목회자의 고유 영역을 존중하는 가운데 평신도 사역을 십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여타 평신도들의 사역 참여도 활발하다. 필자의 교회에는 사역의 필드가 많은데 그게 가능한 것은 평신도 사역이 활발하게 때문이다. 그런데 사역이나 교세의 규모에 비해 목회자의 수가 적은 편이다. 그 이유는 장로들을 필두로 평신도들이 사역을 적극 주도하며 활발하게 펼치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문자 그대로 운동경기의 감독과 코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할 뿐이다(엡 4:11-12). 평신도들이 모두 선수가 되고 장로는 주장 역할을 수행한다. 교회에는 관중석이 없고 필드만 있다. 모두가 선수이기 때문이다.

원활한 소통이 교회를 살린다

소통은 이 시대의 화두다. 행정의 달인이라 불리던 고건 전 총리는 행정의 90%가 소통이라고 했다. 불통은 공동체의 동맥경화를 유발한다. 교회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영적인 유기체인 교회가 동맥경화에 걸리면 손해가 막심하다. 소통하지 못하면 은혜의 물줄기가 막히고 사역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갈등 비용만 양산한다. 전도의 문도 닫힌다. 어부지리(漁父之利)처럼 마귀만 좋아하는 마귀지리(魔鬼之利)가 된다. 바라건대 한국 교회 담임목사들이 당회의 원활한 소통을 통해 교회의 화평을 이루고 더 나아가 대사회적 리더십을 회복하고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가기를 기대한다.

홍문수 신반포교회 담임목사. 리폼드신학교(D.Min.). 저서로 《크리스천 트라이앵글》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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