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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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19년  07월호 성경신학자의 눈으로 본 ‘바울의 새 관점’의 영향과 한계 창간 30주년 특별 기획 ‘바울에 대한 새 관점’ 길라잡이

바울의 새 관점은 1983년도부터 제임스 던이 그의 논문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 이제 더 이상 새 관점이라고 부르기에는 오래된 관점이 되었다. 그러나 새 관점은 바울 서신과 바울 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점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오래된 관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바울의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은 바울의 이신칭의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새 관점에 의하면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은 개인의 구원 문제를 다루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를 다루는 사회학적 이슈다. 새 관점(NPP)에 의하면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공로 사상이 아니라 언약 사상이 강했다. 따라서 바울 당시 유대인들도 행함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선택을 기초로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고 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바울의 이신칭의도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바울의 새 관점은 신약 학자들이 바울 서신의 이신칭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제안한 새로운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신칭의가 구원론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점 때문에 국내에서는 주로 조직신학자들이 교리신학적 관점에서 바울의 새 관점을 다루어 온 분위기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구원론이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애석한 점은 신약학자들이 바울의 새 관점을 평가하고 공헌도를 말하기 전에 조직신학자들이 내린 새 관점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본래 바울학자들이 다루고 제시한 ‘바울의 새 관점’과 바울 사도의 이신칭의 사이의 관계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본고의 목적은 새 관점의 출발선인 신약 신학의 관점에서 바울의 이신칭의를 다시 보는 데 있으며, 신약학자로서 필자가 바울의 새 관점이 가진 공헌도와 한계를 평가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데 있다.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이신칭의 가르침을 바울의 중심 사상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바울의 이신칭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함과 믿음을 대립 구도로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바울 당시 1세기 유대교는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수단을 율법 준수와 같은 인간의 행함이라고 믿었다고 파악하고, 사도 바울은 이런 공로주의적 사상에 대항해 사람이 의롭게 되는 수단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통적으로 이해해 왔다.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을 이렇게 믿음과 행함의 대립 구도로 파악하려는 전통적 해석에 도전장을 내민 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새로운 움직임을 학계에서는 바울의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이라고 부른다.

바울의 새 관점은 샌더스가 1977년에 쓴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그 공식적인 출발을 찾을 수 있다고 대다수 신약학자들은 동의한다. 물론 그 이전에 크리스터 스탠달 같은 학자가 새 관점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그는 종교개혁의 후계자들이 바울의 이신칭의에 관한 논의를 개인의 죄와 양심의 문제라는 관점으로 이해해 왔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관점은 바울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 후대에 일어난 서구의 개인주의적 양심의 문제에 기반을 둔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1 다시 말해 그는 바울의 다메섹 사건에 주목하면서 바울이 회심할 당시에 죄책과 양심의 문제로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또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신칭의를 전파했다고 파악한다. 이렇듯 개인주의적 구원의 문제로 인식되어 오던 바울의 이신칭의 논의에 대해 도전하는 학자들이 드물게 있었으나, 바울의 이신칭의에 전통적 이해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는 더 체계적인 바울의 새 관점은 샌더스(E. P. Sanders)의 책 《바울와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출발한다.2

샌더스는 이 책에서 주전 200-주후 200년 사이의 유대교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바울 당시 유대교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공로주의적 종교, 혹은 율법준수를 통해 구원을 얻는 종교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의 패턴을 가진 은혜의 종교였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 당시 유대교가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던 종교라는 기존의 관점을 완전히 뒤엎는 새로운 주장을 펼친다.3 샌더스는 이 언약적 율법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음과 같이 8가지로 요약한다.4

(1)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2)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이 율법은 다음 두 가지를 암시한다. 즉 (3)이스라엘의 선택을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4)순종을 요구하심. (5)하나님은 순종에 대해서는 상을 주시고,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하신다. (6)율법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며, 속죄를 통해 (7)언약 관계가 유지되거나 재정립된다. 마지막으로 (8)순종, 속죄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통해 언약 안에 머물러 있는 모든 자들은 미래에 구원받을 무리에 포함된다.

그리고 샌더스는 위의 (1)과 (8)이 의미하는 바가 아주 중요하다고 설명하면서, 선택(1항목)과 궁극적인 구원(8항목)은 인간의 업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5 전통적인 관점은 바울 당시의 유대교를 공로주의의 종교로 이해했지만, 샌더스는 바울 당시 유대교를 공로주의 종교로 보는 전통적 관점은 잘못된 견해라고 비판한다. 대신에 샌더스는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을 강조한 은혜의 종교였다고 본다.

바울의 새 관점

바울의 새 관점은 앞서 설명한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에 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Judaism)을 그 이론적 바탕에 두고 시작되었다. 새 관점은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을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교회론적, 사회학적 차원의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본래 주후 1세기 상황에서 이방인의 구원 문제였던 이신칭의를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회가 개인구원론의 차원으로 잘못 이해해 왔다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새 관점의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

바울 신학의 새 관점을 주창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제임스 던과 톰 라이트다. 둘 다 영국 신학자라는 점뿐만 아니라,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에 관한 새 관점을 수용했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물론 제임스 던은 E. P. 샌더스가 바울을 해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한다. 그는 샌더스가 바울서신의 “율법의 행위”이라는 표현을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라고 이해한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런 해석은 샌더스 자신이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파악한 내용과는 아주 모순된 해석이라고 그를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도 던은 샌더스가 제공한 주후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새 관점 즉 그 당시 유대교는 은혜의 종교였다는 주장을 그의 새 관점 이론의 전제로 삼는다고 밝힌다.

새 관점을 바울 해석에 체계적으로 받아들인 신약학자가 제임스 던이다. 그는 자신의 갈라디아 주석과 로마서 주석에서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 입장을 받아들여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율법의 행위”라는 표현을 재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바울이 이신칭의의 수단으로 부정하는 행위인 “율법의 행위”는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행동 다시 말해 인간의 공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별시켜 주는 선민으로서의 구별된 행위들을 의미한다. 이 율법의 행위를 대표하는 것이 할례, 음식법, 절기법이다. 따라서 새 관점에 의하면 전통적 관점이 이해한 이신칭의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이서 존재하지도 않은 공로주의적 사상을 반박하는 왜곡된 해석이다. 결국 바울의 새 관점은 기존의 이신칭의와 관련된 전통적 가르침을 주후 1세기 유대교의 상황과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의 상황을 무시한 탈역사적 해석이라고 비판한다.

새 관점에 의하면 바울 당시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은 한 개인의 구원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선민이 아닌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 즉 유대교로 개종하는 관문인 할례 그리고 유대인처럼 살아가는 행동 방식인 음식법과 절기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새 관점이 바울의 이신칭의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제임스 던과 맥을 같이 한 또 다른 사람은 톰 라이트다. 그 또한 바울의 “오직 믿음으로”의 가르침을 한 개인의 구원 문제가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톰 라이트 또한 바울 시대의 유대교에 관한 새로운 관점인 E. P.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 관점, 즉 바울 당시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는 전제를 맞다고 받아들이면서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을 기존의 방식처럼 행함과 믿음의 대립 구도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바울이 율법 자체를 부정하거나, 율법 준수를 비판하지 않았다고 본다. 대신에 그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문제가 되었던 장애물로서의 율법의 오용을 비판한다는 입장을 가진다. 결국 톰 라이트도 샌더스의 이론을 전제로 해서 새 관점 이론을 주장한다.6 그는 바울의 이신칭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고 보면서 유일신론(한 하나님), 선민(한 백성), 그리고 종말론(하나의 종말)의 관점으로 바울의 구원론을 설명한다.

바울의 새 관점은 새 관점 학자들 사이에서도 약간의 이견이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단순화시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새 관점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도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면 바울의 새 관점은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논쟁이다. 주후 1세기 바울 시대의 유대교가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공로주의적 종교가 아니라 대신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었던 은혜의 종교라고 보는 것, 그리고 바울의 이신칭의를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다루는 교회론적 논쟁거리라고 본다는 데 새 관점의 특징이 있다.

새 관점(NPP)의 공헌

과연 NPP가 바울 서신을 해석하고, 바울 신학을 이해하는 데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먼저 새 관점이 가져다 준 긍정적인 공헌이 무엇인가를 신약학자의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새 관점은 바울 당시 유대교가 가진 다양성을 보게 만들어 주었다. 전통적 관점은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율법을 준수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공로주의적 종교라고 생각해 왔다. 이런 잔잔한 호수에 새 관점이라는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던져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새 관점을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들은 바울 당시 유대교 안에 이미 공로주의적 사상, 다시 말해 율법을 잘 준수해야 최후심판대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가르침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공로주의적 요소가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하지만 바울 당시 유대교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언약과 선택 그리고 은혜를 강조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기존의 전통적 관점은 당대 유대교의 공로주의적 요소만을 보았다면 새 관점은 이 유대교 안에 은혜적 요소가 있었음을 새롭게 본 것이다. 따라서 바울 시대의 유대교가 다양한 신학적 스펙트럼을 가진 종교라는 점을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둘째, 바울의 이신칭의가 바울의 선교적 상황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 선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이방인의 사도다. 따라서 바울이 가르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한 개인의 구원 문제로만 보면 주후 1세기 바울의 이방인 선교 상황이 무시되고 만다. 바울은 자기의 서신 여러 군데에서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 사상을 강하게 비판하던 사도다. 로마서 2장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진 선민으로서의 배타주의를 배격하면서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구원하시기도 하고 심판하시기도 한다고 가르친다(롬 2:9-11). 또한 선민임을 잘 보여 주는 유대인들의 ‘율법 소유’나 ‘할례’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롬 2:13, 25).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가르치면서 유대인들의 선민 사상을 공격한다. 

또한 주목할 사실은 바울 사도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을 하면서 “오직 믿음으로”를 강조하는 문맥에서 항상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측면도 강조한다는 점이다. 로마서 3:27-28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지만 이어지는 로마서 3:29-30에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민족적 구분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을 덧붙인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베소서 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에베소서 2:1-10까지는 한 개인의 구원 문제 즉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가 생명 얻은 개인 차원의 구원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2:11-22에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셨다고 구원의 공동체적 측면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구원에 이방인들이 참여하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이렇듯 로마서나 에베소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울 사도가 배타적 선민 사상을 공격하면서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유대인이 되었든지 이방인이 되었든지 “누구든지” 의롭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물론 새 관점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바울이 이방인들도 선민이 되는 절차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을 때, 바울은 유대인들의 구원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는가를 반문한다. 바울은 분명히 한 개인의 구원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측면은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받으려면 유대교라는 인종적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야만 구원받을 수 있고, 유대교 외부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는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 사상을 공격한다는 점이다. 바울의 새 관점은 이신칭의 가르침을 AD1세기 바울의 이방인 선교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도록 도와준 값어치 있는 공헌을 한다.

셋째, 바울의 새 관점은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이 매우 중요한 신학임을 보여 준 공헌이 있다. 전통적으로 바울이 가장 많이 가르친 내용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르침은 이신칭의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새 관점 학자들은 바울 서신에서 의롭게 된다는 칭의 개념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로마서 1-4장까지는 주로 칭의 용어가 지배적이지만, 로마서 5-8장에 가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나타내는 개념이 더 많이 사용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사용되는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through Christ/ dia christou)라는 어구가 나타내는 신학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고(갈 2:17), 그리스도와 합하여 함께 세례를 받았고(롬 6:3),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갈 2:20).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늘 보좌에 앉음에도 동참하게 되었다(엡 2:5-6).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삶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은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께 일어난 모든 일이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났다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바울 서신에 사용되는 그리스도를 닮아감(imitation christi)이라는 주제 그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음(롬 13:14)이라는 주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과 관련이 있다.

새 관점 학자들은 바울 서신에서 칭의 개념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이 통계적으로 더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바울은 이신칭의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을 더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새 관점 학자들은 논리적으로도 ‘칭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논리적 순서를 따지면서 ‘의롭게 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가운데서 어떤 것이 더 먼저인가를 질문한다. 즉 성도들이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의롭게 된 것인가를 질문하면서 그리스도 안의 연합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의롭게 되는 칭의가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새 관점은 우리에게 바울에게서 칭의 용어 못지않게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이 중요한 신학이었음을 보게 만들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새 관점은 전통적 관점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미래적 칭의’ 개념을 재조명해 주었다. 우리는 칭의를 보통 과거 사건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의롭게 되었다고 보고, 칭의를 회심 사건 때에 일어난 사건으로만 본다. 하지만 새 관점은 칭의에 미래 시제가 있다는 점을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바울은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가르친다(갈 5:5). 의의 소망 즉 의가 소망이기 때문에 여기서 의는 앞으로 있을 ‘미래적 의’가 된다. 또한 로마서 2:13에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는 설명이든지, 또는 로마서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라는 구절들은 칭의가 미래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의롭게 되는 사건이 과거나 현재의 사건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사건임을 가리킨다.

물론 현재적 칭의와 미래적 칭의 사이의 관계가 중요한 신학적 논쟁거리임에는 틀림없다. 현재 받은 칭의와 앞으로 최후 심판대 앞에서 받을 미래적 칭의는 동일한 칭의인가 아니면 다른 칭의인가? 다시 말해 현재적 칭의가 최후 심판에 가서 취소될 수 있는가라는 미래적 칭의와 관련된 뜨거운 논쟁이 있다.7 이와 관련해 톰 라이트 같은 경우 현재적 칭의와 미래적 칭의를 연결하는 고리를 성령으로 본다. 그는 성령께서 성도들의 삶을 인도해 갈 것이고, 최후 심판대에서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았는지를 판단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중요한 점은 바울은 칭의를 현재의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미래에 있을 사건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바울 서신에 미래적 칭의 개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울의 새 관점을 통해 알게 된 칭의의 새로운 측면임에 틀림없다.

새 관점(NPP)의 한계

바울의 새 관점은 기존에 당연시된 바울의 이신칭의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접근하게 만든 귀중한 공헌을 했다. 그럼에도 새 관점은 바울 서신을 놓고 볼 때 한계점 또한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바울의 새 관점이 가진 한계는 이들이 긍정하는 부분이 아니라, 부정하는 부분과 관련이 있다. 새 관점은 바울의 이신칭의는 개인의 구원 문제가 아니고,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를 다루는 가르침이라고 본다. 여기서 새 관점이 긍정하는 부분은 이신칭의가 이방인의 구원 문제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내용이다. 그리고 부정하는 부분은 바울의 이신칭의가 한 개인의 구원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신칭의는 단순히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이고 유대인들의 구원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가? 다시 말해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원 문제에 별반 관심이 없었는가? 갈라디아서가 어느 정도 답을 준다. 예를 들면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계시 사건 이전 삶을 설명하면서 자기는 유대인 동년배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고 자기 조상의 전통에 더욱 열심히 있었다고 설명한다(갈 1:14). 주목할 점은 바울은 자신을 다른 동료 유대인들과 비교해서 율법을 더 철저히 지키던 사람이라고 소개한다는 점이다. 바울이 자신이 율법을 다른 유대인들보다 열심히 지키던 사람이라고 말한 점은 유대인들 사이에 누가 율법을 더 잘 지키는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새 관점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율법 준수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을 율법 준수에 더 철저한 자라고 설명하는 이 같은 바울의 진술은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은혜의 종교였기에 철저한 율법 준수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는 새 관점의 내용과 배치되는 내용이다.

또한 그 유명한 안디옥 사건(갈 2:11-14)과 깊은 관련이 있는 갈라디아서 2:16에 의하면 바울은 이신칭의를 설명하면서 예수를 믿어야만 의롭게 되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안디옥 교회에 있던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유대 기독교인들을 가리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의미심장한 것은 문맥상 ‘심지어’ 선민인 유대인들도 예수를 믿어야 의롭게 됨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은 단순히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민인 유대인들의 구원과도 관련이 있음을 갈라디아서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새 관점은 바울의 이신칭의가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를 다루는 가르침이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한 전통적 관점의 사각지대를 보여 주는 공헌은 있지만, 이신칭의가 결국 유대인들의 구원 문제와도 관련된 가르침이라는 점을 철저히 무시하는 한계가 있다. 바울의 이신칭의는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를 다루지만 동시에 중요하게 개인의 구원 문제도 다루는 구원론적 가르침이다.

나가는 글

바울의 새 관점은 기존의 전통적 관점이 이해한 바울의 이신칭의의 의미를 다시 한번 점검하게 만들었다. 새 관점은 바울의 이신칭의가 이방인의 구원 문제만을 다루는 교회론적인 가르침이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기존의 전통적 이신칭의 이해를 다시 살피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통해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의 핵심에 전통적 관점이 해석해 온 것처럼, 개인의 죄사함의 문제가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또한 인간의 공로적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입혀 주시는 의를 통해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됨이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임을 재확인하게 해 주었다. 동시에 새 관점은 이신칭의를 주후 1세기 바울의 선교 상황에서 이해해야 함을 가르쳐 주는 공헌을 했다.

결국 바울의 새 관점은 50%는 맞지만, 50%는 정확하지 않은 견해다. 그럼에도 새 관점으로 바울의 이신칭의가 새롭게 보이게 되었다. 새 관점을 통해 바울의 이신칭의에 관한 우리들의 이해의 지평이 훨씬 넓어진 것이다. 



1)  Krister Stendahl, “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 Harvard Theological Review 56.3 (July, 1963): pp.199-215. Krister Stendahl,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Philidelphia: Fortress Press, 1979), p.9.
2)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Minneapolis: Fortress, 1977).
3)  앞의 책, p.422.     
4)  앞의 책, p.442     
5)  앞의 책, p.442.
6)  N.T. Wright, "The Paul of History and the Apostle of Faith," Tyndale Bulletin 29 (1978), pp.79-80.
7)  필자는 현재적 칭의와 미래적 칭의의 관계를 구원의 확신과 경고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이미 다른 글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다. 김경식, “신약의 최후행위심판과 구원의 관계” 〈신약연구〉 제15권 1호, pp.88-130.

김경식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영국 에버딘대 신약학(Ph.D.).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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