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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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19년  07월호 바울을 바라보는 새 관점 - 기원, 발전, 분화 그리고 그 이후 창간 30주년 특별 기획 ‘바울에 대한 새 관점’ 길라잡이

본고는 현재 학계에서 고유명사가 된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학계의 반응과 후속 연구를 살피고 그 장·단점을 간략히 짚어 보는 시도다.

“바울을 바라보는 새 관점”이라고 불리는 바울 연구의 한 흐름을 지칭하는 표현에서 ‘새로운’(new)이라는 형용사는 2019년 현재 상황에서 그리 적절하지 않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바울을 바라보는 새 관점’이 제임스 던에 의해 처음 주창되었을 때가 1982년이었으니 햇수로 따지면 37년이 흘렀다. 어느 학자(R. Barry Matlock)가 농담처럼 지적했듯이 소위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이제 중년기에 접어들었다. 둘째, 제임스 던이 1982년 맨체스터대학 만손 강의(Manson Lecture)에서 내놓은 해석과 매우 비슷한 견해가 사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중반에 몇 학자에 의해 이미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예로 1897년 스위스 신학자인 폴 베른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는 구성원이자 성도들과 똑같은 ‘시민’,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룹에 온전한 일원으로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바울의 선교 사역 모든 측면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 믿음으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아브라함 ‘부족’의 멤버가 되었다. … 이신칭의 교리는 순전히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반대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이방인들에게 덧붙여야 할 요구사항이 없다고 설명했다.”1

베른리가 위와 같은 관찰을 한 뒤 약 70년 후 하버드대학 교수 크리스터 스텐달은 1963년에 〈하버드 신학 리뷰〉에 발표된 기념비적인 소논문에서 베른리가 주장했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체계화시켰다. 스텐달의 해석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다. “바울의 고민과 루터의 고민은 다르다! 루터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두려워했던, 그의 내면의 양심의 갈등은 바울이 씨름했던 문제와 관련이 없다. 빌립보서 3:6에서 바울이 분명히 이야기했듯이 바울 자신은 ‘율법의 의에 관한 한 흠이 없다’라고 확신했다. 다시 말해 바울은 루터에 비해 아주 튼튼하고 부끄러움 없는 양심을 가졌다.” 스텐달은 이신칭의 교리가 루터와 같이 내면의 양심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킨 구원의 원리가 아니라 이방인 신자들이 어떻게 유대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라는 교회적이고 사회적 차원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시되었다고 역설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이방인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이신칭의 교리라는 것이다.2

칼 바르트의 아들 마커스 바르트도 스텐달의 견해와 유사하게 이신칭의 교리의 사회적 차원(social dimension)을 강조했다.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3 이러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해 2019년 현재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다. 하지만 바울학계에 끼친 엄청난 영향력을 고려할 때, 그리고 신약학계의 관행에 따라 하나의 고유명사로 사용해도 무방하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 이전의 바울 연구

20세기 초중반에 루터파적(Lutheran) 바울 해석은 루돌프 불트만과 그의 제자 에른스트 케제만에 의해 창조적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는 이후 신약학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두 사람은 중요한 차이점(불트만은 개인적/실존적 차원, 케제만은 피조물 전체를 변화시키는 우주적 차원의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보였지만, 고대 유대교에 관한 한 크게 다르지 않은 이해를 보였다. 불트만이 보기에 유대인들과 율법의 잘못된 점은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처지를 잊고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 자체가 이미 죄라고 불트만은 역설했다.4 케제만은 이신칭의 교리에 상황적 요소가 있음을 보았으나, 유대교의 잘못된 점에 관한 그의 이전 세대 학자들의 유대교 이해를 별다른 문제 의식 없이 받아들였다.

불트만과 케제만은 날카로운 지성으로 바울의 문서들을 세밀히 읽었으나, 그들의 유대교 이해는 여전히 루터파의 유산 안에 있었다. 유대교는 율법주의적인 종교이며 인간 스스로 의를 얻으려는, 흠결이 큰 종교라는 관점이 신약학계에 계속 지속되었다.

제2성전기 유대교와 랍비 유대교에 대한 새 관점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고대 유대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에 대한 응답이다. 1977년 E. P. 샌더스는 “초기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라는 논지를 강력한 증거와 논증을 통해 제시했다. 이러한 유대교에 대한 새 관점은 이전까지 당연하게 여겨진 ‘율법의 행위들’을 바울이 반대한 이유를 재고하게 만들었다. 유대교가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은혜의 종교라면 바울은 왜 ‘율법의 행위’를 그토록 비난했을까? 그가 보기에 유대교의 잘못된 점은 무엇인가?

종교개혁 이래 율법과 복음은 늘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페르디난트 베버는 1880년 《탈굼, 미드라쉬, 탈무드에 나타난 고대 팔레스타인 유대교 회당의 신학적 체계》라는 영향력 있는 저서를 출간했다.5 이 책에서 베버는 유대교를 외식적인 율법주의로 규정했다. 그 후 독어권의 많은 학자가 베버의 유대교 이해를 이어나갔다.

일부 유대인 학자들이 이러한 개신교 학자들의 율법주의적 유대교 이해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별다른 반향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러나 1977년 미국인 학자 E. P. 샌더스가 주전200년부터 주후200년까지의 유대 문헌을 원문으로 읽고 반박이 불가능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고대 유대교의 초상을 제시했다. 샌더스는 유대교의 기본적 토대 혹은 전제를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명명했다. 그는 언약적 율법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선택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왕이라는 역할을 따라 이스라엘에게 최선을 다해 순종해야 할 계명을 주셨다. 순종에는 보상이 주어지고, 불순종에는 형벌이 따른다. 하지만 순종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정하신 속죄 수단에 의지하며, 모든 속죄 수단에는 참회가 함께 따라야 한다. 그가 언약 안에 머물려는 욕구를 유지하는 한, 그는 내세에 누릴 생명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따르는 약속들의 분깃을 가진다. 순종하려는 의도와 노력이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조건을 이루지만, 그 의도와 노력으로 그런 조건을 얻는 것은 아니다.”6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샌더스가 보기에 “유대교의 문제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7 율법의 문제는 율법을 완벽히 지키기 어렵다던가 그것이 자기-의로움(self-righteousness)으로 이끈다는 데 있지 않다. 단지 하나님이 ‘예수를 믿음’이라는 단 하나의 수단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들이 인류가 지닌 문제의 답이 될 수 없다는 논리다. 샌더스는 바울이 선택, 토라, 언약 이 모두를 부정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학자들이 샌더스를 ‘새 관점’ 학파의 일원으로 간주하지만 샌더스는 바울을 해석에 있어 언약 개념과 유대적 유산을 강조하는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와 자기의 입장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출현과 그 요지

1982년 제임스 던의 맨체스터대학 만손 강의 제목은 ‘The New Perspective on Paul’이었다. 던은 이 강연에서 샌더스의 새로운 유대교 이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의 바울 해석은 부족한 점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은 길게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바울 신학의 배경과 맥락을 재구성한 20세기의 틀이 자비로운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루터의 노력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보여 주면서 스텐달이 그 틀에 금이 가게 했다면, 샌더스는 이같은 루터적 재구성이 1세기 유대 문헌에 나타난 유대교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줌으로써 그 틀을 완전히 부수었다. 우리는 바울을 현대화시키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제 샌더스는 바울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우리에게 준다. 샌더스는 16세기가 아닌 1세기로 우리의 관점을 옮겼다. 모든 학자가 바라는 것, 즉 바울을 바울 당대의 배경에서 정확하게 보는 것과 당대의 맥락에서 바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바울이 정말 바울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샌더스의 책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틀을 파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틀에서 바울을 새롭게 이해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 유대교 언약 신학의 영광과 위대함으로부터 임의적이고 비이성적인 태도로 등을 돌리고, 단지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대교를 저버린 유별나게 특이한 바울이 루터적 바울을 대체했을 뿐이다.”8

이같은 비판을 하면서 던이 제시한 ‘율법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율법의 행위들’로 의롭게 된다는 사고를 바울이 거부할 때(단 한 구절[verse]에서 “율법의 행위들에 의하지 않고”라는 문구가 3번이나 등장한다), 그는 무엇을 공격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바울의 공격 대상은 언약적 행위들, 언약과 연관된 행위들, 언약의 율법에 순종으로써 하는 행위들이다. 갈라디아서 2:16의 바로 앞의 구절과 문맥이 이러한 답을 확증해 주고 명료하게 만들어 준다. … 그 문맥을 살펴보자. 갈라디아서 2:16 바로 앞에서 바울은 예루살렘과 안디옥에서 일어났던 논쟁을 두 개의 이슈로 다룬다. 예루살렘에서는 할례, 안디옥에서는 유대 음식 율법들과 더불어 명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암시된 게 분명한 제의적 정결에 대한 모든 질문이 이슈였다. 율법의 행위로 인한 의화(justification)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거부는 이 두 가지 이슈에 대한 그의 응답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 행위로 인한 의를 바울이 거부한 것은 의로움이 할례나 유대교 정결법 준행 혹은 음식에 대한 금기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을 할 수 있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편지(갈라디아서)의 청중들이 할례나 음식법 같은 특정한 율법의 준수를 떠올리기를 원했다. 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편지 후반부에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또 하나의 율법 준수를 떠올렸을 것이다 ― 특별한 날들과 축제의 준수(갈 4:10). 그런데 왜 이같은 특정한 ‘율법의 행위’를 염두에 두었을까? 좀 더 넓은 배경을 살펴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 바울의 당대 그리스-로마 문헌에 근거한 넓은 배경 맥락으로부터 보자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율법들의 준행이 유대교의 고유한 특징으로 널리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9

이러한 관찰에 따르면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식, 유대 민족중심주의, 유대교의 배타주의, 언약에 대한 협소한 이해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던이 보기에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한 지점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를 갈라놓는 율법의 사회적 기능에 있다. 그리스도-사건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그동안 지녔던 가치 체계와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언약에 대한 협소한 이해(던은 때때로 이것을 ‘언약에 대한 오해’라고 말한다)를 모두 뛰어넘은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faith in Christ)만이 유일하고도 충분한 칭의의 근거로 작용한다, 이러한 관점은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 관점 학파로 분류되는 학자 대부분이 동의한다. 그렇다면, 새 관점 ‘학파’로 제임스 던과 늘 함께 거론되는 톰 라이트는 어떤 바울 해석을 내놓았을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샌더스와 마찬가지로 라이트는 자신의 바울 해석이 ‘새 관점’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한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새 관점’은 사실 ‘새 관점들’이라는 복수형으로 표현되어야 맞다. 라이트나 던이 ‘율법의 행위들’의 의미에 대해 거의 비슷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새 관점’ 주창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학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가족 유사성이라는 개념을 차용한다면, 다양성 속에서 일종의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새 관점들’이라는 복수형 명사를 쓸 수는 있다.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 관점’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단일한 일관된 실체라는 것이 애초에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겠다. 사람들은 종종 샌더스와 던과 내가 마치 공동전선을 형성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집단이나 운동이었던 적도 없고, 함께 만난 적도, 함께 어떤 계획을 세운 적도 없으며, 서로 간에 늘 심각하고 의미심장한 의견 차이가 존재했다.”10
 
톰 라이트는 자신의 바울 해석을 새 관점보다는 ‘신선한 관점’(fresh perspective)이라는 표현으로 명명하길 선호한다. 라이트는 다른 학자들보다 특히 ‘언약’이라는 개념을 크게 확장하여 바울 신학의 중심 주제이자 키워드로 사용한다. 톰 라이트는 언약을 이렇게 바라본다.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펼쳐지는 수단이 바로 이스라엘과 맺으신 그의 언약이었다. …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하나님의 단일 계획에서 중요한 사실은, 그분이 그 일을 이루실 때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11 다시 말해,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통해, 전 세계에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단일 계획”이다.12

이러한 ‘언약’ 개념 안에서 해석된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 즉 그리스도-사건(the Christ-event)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모세가 전해 준 토라 아래에서 진행된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실제로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전 역사가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세계와 인류를 구원하시는 단일 계획을 언제나 갖고 계셨다는 사실, 그리고 이 단일 계획은 이스라엘의 소명을 그 구심점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소명이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메시아 안에서 열매를 맺는 모습을 바울이 보았다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다.13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 안에서 집결되는 인물”이다.14 메시아의 업적은 “이스라엘을 - 통한 ? 세계를 - 위한 - 단일 - 계획을 정해진 목표에 이르게 하는 것 …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려야 했지만 드리지 못했던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15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서로 다른 바울 이해를 가진 학자들을 ‘새 관점 학파’라고 부르는 주요 이유는 각 학자가 ‘율법의 행위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일종의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유대인처럼 사는 것”과 “‘이방 죄인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자 “유대인이 나머지 인류로부터 구분되어 하나님의 백성에 속했다는 상태를 보장”받았다는 신념으로 표현한다.16 “현재에 있어서 그러한 것들(토라와 계약을 열심으로 굳게 붙잡는 것)을 수행하는 자들은 내세가 마침내 개시될 미래에 있어서 어떤 심판이 내려질 지를 현재적으로도 이미 확신 있게 알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AD 1세기의 한 바리새인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의 의미라고 믿는다”17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아의 신실함을 통해 그분의 백성을 재정의하셨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들’이 하던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는 역할은 이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18

새 관점을 넘어서려는 노력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 주류 학계에서 지배적인 견해로 자리매김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한동안 널리 받아들여진 이론은 결국 자연스레 다양한 반론을 마주하게 된다. 새 관점의 태동은 거의 출발점부터 전통적 바울 해석 ― 바울이 율법 공로주의를 배격했다는 시각 ― 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전통적 바울 이해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가 지나치게 하나님의 선택과 무조건적 언약을 강조했다고 비판하며, 초기 유대교에서 율법주의/공로주의라는 요소가 구원에 차지하는 비중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러한 시도는 샌더스의 논점, 즉 언약이 유대인과 유대 문헌의 기저에 있는 확신이어서, 어떤 유대인이 어떤 주장을 하던 이미 언약 백성이라는 지위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논박하지도 못했다.

최근 샌더스의 유대교 이해와 던과 라이트의 바울 해석에 주목할 만한 도전이 제기되었다. 존 바클레이, 프란시스 왓슨, 프리드리히 아베마리 이 세 학자의 저작은 들여다 볼 가치가 있다.

바클레이는 주저 《바울과 선물》에서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그는 샌더스의 견해의 근간을 이루는 은혜 개념을 보다 세분화시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바클레이는 고대 유대인들에게 (샌더스가 말한 대로) 은혜 개념이 매우 중요했으나, 은혜라는 개념이 ‘조건 없는 선물’의 의미 말고도 다양한 뉘앙스가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을 포함한 그리스 ― 로마 시대 사람들은 ‘은혜/선물’이라는 단어가 다음과 같은 다양한 함의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 초충만성, 단일성, 우선성, 비상응성, 유효성, 비순환성. 고대 사회에서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은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좋은 선물은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신중하게 주었다. 선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은 사려 깊지 않은 행위로 간주되었다. 또한, 선물을 받은 사람은 선물을 준 사람에게 어떤 형태로든 되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다. 쉽게 말해, 현대인들이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조건 없이 주어진 은혜’라는 개념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에 기대어 바클레이는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가 은혜의 ‘우선성’(하나님이 먼저 택하시고 은혜를 주심)만 강조한 나머지, 은혜라는 개념이 지닐 수 있는 다른 의미를 간과함으로써 고대 유대 문헌의 다양성을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틀로 뭉뚱그려 이해했다고 비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물이 받는 자의 가치나 자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주어졌다고 선포했다(즉, 선물의 비상응성[incongruity]을 강조했다). 이는 인간 사회의 가치 기준을 완전히 무시하시는 하나님을 부각시킨다. 유대인들은 다양한 은혜에 대한 이해를 가졌는데, 바울은 그들 중에서도 유난히 ‘가치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사람이 세운 모든 규범과 가치를 재조정하고 재평가해야 한다. 한편, 바클레이는 선물이 수혜자의 가치와 자격과 상관없이 주어질 수도 있지만(unconditioned),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선물 받은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되갚을 답례의 의무가 없다(unconditional)라는 함의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찰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의무― 예를 들어 ‘믿음의 순종’과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성취함”― 가 있다고 역설한 바울의 강조점을 다시 부각시키는 데 기여한다.19

그렇다면 바클레이는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의 행위들이 지닌 문제점은 선물의 수혜자가 지닌 가치와 상관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에 또 다른 가치 규범(유대인이라는 민족적 특권이라는 가치)을 더한다고 본다.20 이 지점에서 바클레이는 ‘새 관점’의 해석, 즉 바울의 비판 대상이 유대 민족 중심주의라는 관점을 비판한다.

“그리스도-선물은 왜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요청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걸까? 바울은 할례를 하나의 의식으로서 또는 유대인이라는 민족성의 육체적 표징으로서 반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사건을 유대교 전통에 따라 규정된 가치 기준 안에 가두는 것이 되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선물은 외부의 다른 어떤 것에 제한을 받게 되며, 이 경우 외부의 다른 어떤 것은 바로 유대인의 민족성과 율법, 이 둘의 가치가 된다.21

프란시스 왓슨은 바울 신학의 특징으로 간주되어 온 ‘무조건적 약속’(창세기)과 ‘(조건부 약속으로서의) 시내산 율법’ 사이의 긴장과 대립이 (스텐달 이후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 바울의 이방인 사역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구약(토라)에 존재했던 것이고, 바울의 신학은 구약에 존재하는 양극성과 화해시킬 수 없는 긴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조건부 약속’과 ‘무조건적 구원’의 대조를 (구약에서) 발견하고 강조했다.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유대인들의 성서에 대한 해석 행위(interpretation)와 해석학(hermeneutics)의 산물이다.”22

그렇다면 ‘새 관점’ 학파들이 집중했던 문제, 즉 ‘율법’의 어떤 측면이 바울이 보기에 잘못된 것인가? 왓슨에 의하면 ‘율법’은 약속의 성취를 ‘율법의 행위들’의 수행에 의존케 함으로써 (약속의) 무조건적인 특질을 훼손시킨다.”23
아베마리는24 랍비 유대교에 샌더스가 말한 언약적 율법주의만 아니라 율법 준수가 가진 구원론적 가치를 존중하는 두 가지 요소 -은혜와 보상이라는 대립 원리- 가 긴장 가운데 공존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샌더스의 주요 논지를 어느 정도 인정하기도 했다.25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 지닌 목회적 함의

‘바울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은 오랜 시간 학자들 사이에서만 논의되었던 주제였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새로운 관점이 함의하는 실천적이고 목회적 측면을 간과하지 않았다. ‘바울을 바라보는 새 관점’은 바울이 그토록 반대한 ‘율법의 행위들’(works of the law)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새 관점 학자들 대부분은 ‘율법의 행위들’이 지닌,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는 유대인들의 민족중심주의 혹은 배타주의를 바울이 공격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들’과 이신칭의 교리가 지닌 사회적 기능(social function)에 주목했다. 이러한 새 관점 학파의 통찰은 21세기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커다란 도전을 준다. 교회가 분쟁 가운데 있을 때, 적대 관계에 있는 그룹들은 종종 자기 그룹의 견해가 더 우월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에 대해 많은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교회 내 분쟁의 기저에 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바울의 복음이 교회 내 신자들이 모두 동일하게 죄인이었고, 동일한 근거인 예수님을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또는 의롭다고 선언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점을 복음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모든 차별과 우월 의식, 신도들 사이의 반목과 벽,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복음이 끊임없이 강조될 때, 교회 내의 분쟁을 해소하고 해결하는 강력한 출발점과 근거를 우리는 갖게 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늘 교회 구성원들의 일치를 강조했다. 이러한 복음의 함의를 좀 더 확장해 본다면, 기독교인들은 교회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 더 나아가 세계의 여러 분쟁 지역에 관심을 쏟고 분쟁과 싸움을 종식시키는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예를 들어 제임스 던은 현대 기독교인들 사이의 대립과 반목을 갈라디아서에 기술된 ‘안디옥 사건’에 비교하기도 하고, 북 아일랜드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의 반목, 르완다에서의 학살 등을 언급하며 이러한 일들이 바울의 복음과 얼마나 상충되는지 잘 지적했다.26 하나님의 복음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점, 즉 민족 정체성, 사회 계급, 신분, 빈부, 성별은 이신칭의라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크게 외친다.

성서학은 종종 교회 현장과 유리되어 실천적 통찰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본 논고에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듯이, 성서를 세밀하게 그 본래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정체성, 그리고 실천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 



1) Paul Wernle, Der Christ und die Sunde bei Paulus (Freiburg: Mohr, 1897), pp.83-84. Michael Wolter, Paulus: Ein Grundriss seiner Theologie (Neukirchen: Neukirchener, 2011), pp.341-342에서 재인용.
2) Krister Stendahl, “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 Harvard Theological Review 56.3 (1963): pp.199-215.    
3) Markus Barth, “Jews and Gentiles: The Social Character of Justification,” JES 5 (1948): p.256.
4)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Scribner, 1951), 1:264.
5) Ferdinand Weber, Judische Theologie auf Grund des Talmud und verwandter Schriften (Leipzig: Dorffling & Franke, 1897).
6)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Minneapolis: Fortress, 1977), p.180. ;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종교 패턴 비교》, 박규태 옮김 (서울: 알맹e, 2018), p.315.
7) E. P. 샌더스, 앞의 책(원서), p.552. 
8) James D. G. Dun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i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rev. ed (Grand Rapids: Eerdmans, 2008), p.103; 《바울에 관한 새 관점》, 김선용 옮김 (서울: 감은사, 2018), pp.33-34.
9) 제임스 던, 앞의 책 (역서), pp.48-49.
10) 톰 라이트,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개정판. 최현만 옮김 (평택: 에클레시아북스, 2016), p.15. 
11) 톰 라이트, 앞의 책, p.106.    
12) 톰 라이트, 앞의 책, p.108. 
13) 톰 라이트, 앞의 책, pp.63-64    
14) 톰 라이트, 앞의 책, p.162.    
15) 톰 라이트, 앞의 책, p.163.    
16) 톰 라이트, 앞의 책, p. 182.
17) 톰 라이트.,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박문재 옮김 (파주: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15), 1.298.
18) 톰 라이트,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p.184.
19) 존 M. G. 바클레이, 《바울과 선물》, 송일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9), p.936. 20) 존 M. G. 바클레이, 앞의 책, p.663.     21) 존 M. G. 바클레이, 앞의 책, p.663.
22) Francis Watson, Paul and the Hermeneutics of Faith,2ed. (London/Oxford: Bloomsbury T&TClark, 2016), p.69.     23) Watson, Paul and the Hermeneutics of Faith, p.191.
24) F. Avemarie, Tora und Leben. Untersuchungen zur Heilsbedeutung der Tora in derfruhen rabbinischen Literatur (TSAJ 55: Tubingen: Mohr/Siebeck, 1996).
25) Avemarie, “Erwahlung und Vergeltung: Zur optionalen Struktur rabbinischer Soteriologie.” NTS 45 (1999): pp.108?126.
26) James Dunn, “The New Perspective: whence, what and whither?” i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p.35.

 

김선용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객원 교수. 미국 시카고대학교 성서학(Ph.D.). 역서로 《제임스 던,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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