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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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말씀 2019년  07월호 조직신학과 전도·선교 주제별 성경 연구

들어가는 말

조직신학과 선교는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 선교의 관점에서 조직신학이 새롭게 기술될 수 있을까? 선교는 선교학에서만 다뤄야 하는 주제인가? 아니면 조직신학도 선교를 진지하게 다뤄야 하는가? 이런 중요한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조직신학과 선교의 관련성을 천착해 보고자 한다. 이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 먼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서의 선교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조직신학의 세부 분야들이 어떻게 선교라는 실천을 염두에 두고 재기술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연구를 통해서 일선의 목회자들의 설교와 사역에 좀 더 구체적인 유익을 줄 수 있기 바란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선교'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많은 주제들이 있다. 그 주제들 중에는 하나님의 나라, 언약, 성전, 결혼, 통치, 속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상 선교도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에도 선교라는 주제와 관련된 구절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창세기 1:28에 나오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위임 또는 복의 선언과 약속이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첫 번째 복인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참되고 의로운 백성이 점점 많아지게 할 것을 요구하는 위임 명령이면서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헌신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위임과 복의 성취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태어난다. 이것은 창세기 1:28의 원래 의도와 반대되는 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 하나님의 원수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수들이 생육, 번성하는 것을 막고, 다시 타락 이전에 하나님이 품으셨던 계획이 성취되게 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3:15에 나타난 소위 ‘최초의 복음’ 또는 ‘원시복음’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 내용은 여자의 후손, 즉 메시아가 오면 그는 마귀의 머리를 격파하고 자신의 통치권과 왕권을 견고하게 세울 것임을 예언으로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 메시아를 통해서 참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을 가장 극적으로 약속하는 구절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약속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이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크게 두 가지를 약속해 주셨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첫 번째 약속은 이스라엘 나라를 강대한 나라로 만드시는 역사 과정을 통해 성취되었다. 이 약속의 세부 사항은 바로 창세기 1:28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다. 물론 인류 역사 전체의 맥락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맥락에서의 반복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손의 생육 번성, 약속의 땅의 정복, 그리고 다스리는 왕들이 나타나고 왕조가 세워질 것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그대로 성취하신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약속이 성취되는 역사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담과 세운 약속을 인류 역사 전체의 맥락에서 신실하게 이룰 것을 모형적으로 계시한다.

두 번째 약속은 결국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음으로 성취되었다. 여기서 복이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지만 크게 보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 ‘구원받음’, ‘의롭다함을 얻음’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육 번성, 하나님 나라 땅의 정복, 하나님 나라 통치와 다스림의 성취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육 번성은 죄인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연결되며, 하나님 나라 땅의 정복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의 땅과 삶의 땅이 점진적으로 거룩한 심령, 거룩한 삶으로 정복되는 것과 연결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통치의 완성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은 결국 선교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진보사 또는 확장사이고, 그것은 또한 선교의 역사다.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되고 진보해 갈 것임을, 즉 선교의 역사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임을 주님은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선교대위임명령인 마태복음 28:18-20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사도행전 1:8 말씀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대주제들 중 하나이며, 성경 전체를 열어주는 중요한 열쇠들 중 하나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선교라는 대주제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조직화하는 것은 성경신학적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신학적 작업은 목회자들의 설교와 사역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선교라는 주제 외에도 수십 가지의 다양한 주제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조직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직신학 작업은 무엇인가? 조직신학은 전통적으로 7가지 대주제 아래 성경 전체의 진리를 조직화하고 동시에 일반 학문과 철학, 역사학, 과학 등과의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 진리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서 7가지 대주제란 신론,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성경신학 작업은 조직신학 작업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경신학이 성경의 내재적 가르침을 체계화하는 것이라면, 조직신학은 성경의 내재적 진리를 외재적 진리 주장과 비교하면서 기독교 진리의 총체적 체계를 세워나가는 데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선교라는 주제를 매개로 기독교 진리의 총체적 체계를 세워나가는 것은 필요한가?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왜냐하면 선교는 조직신학의 모든 영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론과 선교

우선적으로 신론은 선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시며, 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선교적인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아버지와 아들은 교회와 세상에 성령을 보내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교회를 세상에 보내셔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선교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미리 생각하고 계획하신 사안이지, 인간의 타락이라는 비상사태에 대한 하나님의 응급조치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조직신학의 신론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삼위일체로 규정할 때, 그것은 역으로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본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조직신학적 주제일 뿐 아니라 조직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론의 중핵과 연결되어 있다. 선교는 단순히 실천신학적 주제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선교는 신론의 중요 관심들 중 하나이다.

인간론과 선교

그렇다면 선교는 조직신학의 인간론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조직신학의 인간론은 인간의 본질, 인간의 구성, 하나님의 형상, 죄, 인간의 사중상태, 인간의 사명과 의미와 목적 등을 다룬다. 선교는 인간론을 구성하는 중요 주제인 하나님의 형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하나님을 반사하도록 만들어졌다. 여기서 하나님을 반영하고, 반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선교적임을 일깨워 준다.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은 결국 인간의 사명 자체가 선교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언이다.

또한 타락한 인간이 회심과 중생을 경험해 새사람이 된 목적에 대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우리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은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다. 즉 선교의 사명을 감당케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의 인간론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과 연결된 인간 존재의 본연이 바로 선교적임을, 그리고 타락했다가 구속된 새로운 인류의 사명 또한 선교적임을 바르게 강조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는 인간론의 본질적 사안이지, 부록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기독론과 선교

일반적으로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신성, 인성, 성육신, 삶, 고난과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 등을 다룬다. 그렇다면 기독론과 선교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기독론 역시 선교와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 기독론과 선교와의 관계에 대한 가장 중요한 통찰들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아버지가 보내신 최초의 선교사였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표들 중 하나가 바로 선교에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가지는 세 가지 직분을 논의해 온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세 가지 직분이란 왕직, 제사장직, 선지자직인데,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과 뚜렷하게 관련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드러내고 알리는 역할 즉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한 그리스도인은 그 존재론과 정체성에 있어서 작은 그리스도, 작은 예수다. 작은 그리스도, 작은 예수로서 그리스도인들 역시 왕직과 제사장직과 선지자직을 소유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난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셨던 선지자직 또는 선교적 직무를 감당하는 것과 연결된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는 기독론의 부차적인 주제로 남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독론의 중심주제로 취급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선교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과 사명의 중심적인 요소임을 바르게 강조해야 한다.

성령론과 선교

일반적으로 성령론은 성령의 본질, 신성, 인격성, 사역, 성령세례와 내주, 성령충만, 성령의 은사와 열매 등을 취급하는 조직신학의 한 분과이다. 그렇다면 성령론과 선교는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가장 근본적인 통찰들 중 하나는 바로 성령이 선교의 영이라는 사실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세상에 오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력하게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케 하시는 동력인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영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교회 위에 능력으로 임해 그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요컨대 성령은 진리의 영이며, 거룩의 영일뿐 아니라 선교의 영이다.

선교의 영이신 성령은 성도 개인의 심령에 내주하며, 성도 개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성령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 거하시면서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인도하시며 힘을 공급하신다. 그러므로 선교는 성령론의 부차적인 또는 지엽적인 주제가 아니라 핵심적인 주제이다. 성령론과 선교는 반드시 바르게 연결되어야 한다.

구원론과 선교

일반적으로 구원론은 구원의 본질, 구원의 필요성, 구원의 방법, 구원의 서정 등을 다룬다. 그렇다면 구원론 역시 선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 당연히 그 대답은 긍정적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죄의 본성을 가진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회심할 때 놀라운 사건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거듭남, 성령의 내주, 그리스도와의 연합, 죄사함, 칭의, 양자, 확정적 성화 등이그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사건을 통해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그 새로운 정체성의 다양한 측면들 중에서 신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의 증인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가 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종교개혁이 재발견한 위대한 진리들 중 하나가 만인제사장론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믿는 모든 신자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즉 모든 신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하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영적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만인제사장론은 오늘날 만인선교사론으로 확대될 수 있다. 특정한 교회나 선교단체로부터 파송을 받아 풀타임으로 선교 사역에 헌신하는 전문적인 선교사들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바로 선교사라는 의미다. 구원론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목적과 사명이 선교적인 것임을 일깨워 준다. 그러므로 선교는 구원론의 부차적인 주제가 될 수 없고, 오히려 구원론의 핵심적인 주제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교회론과 선교

교회론은 교회의 본질, 사역/기능, 성찬과 세례, 교회의 정치 등을 다룬다. 조직신학 분과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선교와 관련된 분과는 당연히 교회론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선교는 교회의 사역과 기능들 중 중요한 요소로 취급되고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등장한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ecclesiology)은, 선교를 교회가 감당하는 여러 기능들 중 하나로 보지 않고 교회의 존재론적 본질이라는 통찰을 재발견하고 그 통찰에 기초한 교회론과 선교론을 제시해 왔다. 물론 선교적 교회론이 주장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성경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존재론적 본질을 선교로 보려는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있다. 현대 조직신학은 선교적 교회론의 정당한 통찰들을 활용해서 교회론을 재구성해야 한다.

종말론과 선교

종말론은 인생의 죽음과 중간 상태와 최종적 운명을 다루는 ‘개인적 종말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과 새하늘과 새땅을 다루는 ‘우주적 종말론’으로 나뉜다. 종말론과 선교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가장 중요한 관련성은 선교의 완성이 곧 예수 재림의 최종적 징조라는 점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일이 완성될 때 그제야 역사의 끝 즉 종말이 올 것이기에 선교는 종말론적 징조로서 너무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요한계시록 7장이 증거하는 것처럼 세계 선교가 완성되어 주님이 재림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목적이 완성될 때, 모든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예배하는 일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계 7:9-12).

선교의 완성은 구원받은 모든 백성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예배를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적 교회론은 사실상 한 차원 더 나아가서 종말론적 교회론, 예배적 교회론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나가는 말

결론적으로 선교는 성경 전체의 계시를 관통하는 큰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성경신학적 작업으로 더 풍성하게 밝혀져야 한다. 더 나아가서 신론,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과 같은 현대의 조직신학의 세부적인 분과들은 선교라는 주제를 좀 더 본질적인 사안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통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의 조직신학은 ‘선교적 조직신학’(missional systematic theology)으로 발전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예배적 조직신학’(doxological systematic theology)으로 전진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신학은 무미건조한 사변적 학문이 아니라, 살아 있고 생동감이 넘치는 학문으로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과 교회의 사역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정성욱 미국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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