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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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말씀 2019년  07월호 교회사에 나타난 전도·선교 주제별 성경 연구

교회사에 나타난 전도·선교

존 스토트의 후계자로 로잔운동과 랭엄파트너십을 중심으로 세계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고 있는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는 《하나님의 선교》에서 신구약 내러티브 전체가 하나님께서 직접 진행하시고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패러다임으로 읽히고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통찰에 따르면, 선교라는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에 세워진 신약교회만의 유산이 아니다. 시간적으로는 신약 이후 교회 시대만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시행하는 장엄하고 영원한 사건이다. 공간적으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 이후 그리스와 로마,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이후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거점들을 거치며 선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전한 활동만이 선교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교 의지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존재했던, 영원 세계의 공간에서부터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 의지는 피조 세계, 선택받은 구약 족장들과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및 주변 열강, 팔레스타인과 로마를 넘어 지상의 전 세계로 인류 역사 속에서 투영되었다가, 그리스도와 재림과 종말의 때에 한 곳에 모인 모든 열방 민족의 삼위일체 찬송과 함께 송영으로 마무리된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선교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냄 받은 자(the Sent)로서,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였다. 성부는 보낸 자(the Sender)이며, 성령은 보내신 아버지의 영으로서 보냄 받아 선교하는 이와 영원히 함께 하는 선교의 영(the Missionary Spirit)이다. 

지상 첫 선교사인 성자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 이후 최초의 선교사들이다. 보냄 받은 선교사 그리스도는 자신의 선교사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요 17:18; 20:21)고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사도들의 사역으로 시작된 지상의 모든 교회는 선교를 행한다. 그러나 교회는 주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의 대리자다. 삼위 하나님은 언제나 교회에 앞서 자신의 선교를 행하고 계시며, 교회는 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그 영광을 함께 누리는 참여자다. 역사 속의 선교를 하나님의 선교로 볼 때 누리는 또 하나의 유익은 실패의 시기로 보이는 때, 즉 교회가 선교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선교 열매가 현저히 적어 보이는 때에도 절망하거나 낙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선교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주권자이시며 승리의 보증자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따라서 특정 시기에, 또는 특정 공간에서 실패로 보이는 경우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당신의 때에 이루신다. 지난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이런 패턴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과거 2000년간 교회 역사에서 사용된 ‘선교’라는 용어 자체에 다양한 개념상의 차이가 있었다. 용어에 대한 정의가 달랐기에, 시기별 선교의 패러다임도 달랐다. 각각의 패러다임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했다. 그러나 이 모든 패러다임이 합력해서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었고, 그래서 한편으론 부족하나 한편으로는 영광스러운 ‘하나의 거룩한 공교회’(One Holy Universal/Catholic/Ecumenical Church)가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다. 교회사의 각 시대별 선교의 패러다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초대교회 선교의 패러다임: 환대

기독교 교회와 선교의 공식 탄생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었다. 이 때 탄생한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은 초대교회 선교 모델의 이상을 보여준다. 즉 이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물건을 서로 통용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모이기를 힘쓰며, 함께 음식을 나누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는 교회였다. 이 이상적인 원시적 공산주의 공동체 교회의 존재는 사람들의 칭찬과 신자의 배가로 이어졌다(행 2:42-47).

실제로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되기 이전까지, 초대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선교적 미덕은 ‘사랑과 순결’이었다. 초대교회에도 바울과 바나바, 실라 등 거리에서 외치고 설득하고 토론하며 노방전도하는 일꾼들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여전히 소수 불법 종교인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선교는 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이 구절이 초대교회가 금과옥조로 여긴 황금률이었다. 이들은 같은 기독교인끼리 가족같이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가감 없이 순종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가 초대교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따라서 이들은 지극히 작은 소자, 즉 과부와 고아, 나그네 및 고난에 처한 이들 안에서 예수를 보고, 이들을 예수처럼 섬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이런 사랑의 계명을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전통으로 발전시켰는데, 이를 환대(hospitality) 혹은 손대접이라 부른다.  

두 번째 미덕인 ‘순결’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초대교인은 우상숭배와 황제숭배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신앙적 순결을 유지했고, 당대 우상숭배와 연결되어 있던 대부분의 오락이나 연극, 공연 참여 및 관람 행위도 거부했다. 당대 흔히 행해지던 인신매매, 낙태, 이혼, 중혼, 유아살해 등의 관습도 거부했다. 이런 모든 기준들은 당시 배경에 비하면 지독할 정도로 까다롭고 높았기에, 상대적으로 교회의 양적 성장을 보장하기는 어려웠을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질적 수준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동방교회의 선교 패러다임: 신앙 변증과 교리 정립

기독교 역사 초기 1000년간 교회의 중심지는 서방이 아니라 동방이었다. 교인 수, 신학자, 교부, 신학 및 교회의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지이자 순교지라는 이유로 보편교회의 상징적 중심지가 된 로마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중심지는 모두 동방에 있었다.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는 각각 로마 제국 제3, 제2의 도시로서 로마 이전부터 정치, 경제, 문화, 학문의 중심지였기에, 교회가 탄생한 후에도 교회, 특히 신학의 중심지 역할을 그대로 계승했다.

또한 313년에 기독교를 합법 종교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이탈리아 로마에서 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이 되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정치적 무게까지 동방으로 넘어갔다. 교회의 발상지 예루살렘과 함께 이 세 도시는 대주교가 거주하는 대주교좌가 되었다. 즉, 서방의 로마를 제외하고는, 네 대주교좌는 모두 동방에 있었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이탈리아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정도를 제외하면 초대교회의 주요 신학자와 교부 대부분도 동방에서 활약했다.

신론과 기독론 등 교리 체계를 확정하기 위해 처음으로 325년에 열린 니케아공의회 이래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 등 주요 교리가 확정된 공의회도 모두 동방에서 모였다. 실제로 동방 기독교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열등하고 비정상적인 저능아 집단의 기괴한 종교모임으로 폄하하는 그리스 철학자들에 맞서, 기독교의 순전성과 합리성, 정합성을 변호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자 정통교리가 되었다. 오늘날 개별 영혼에게 회개와 개종을 촉구하는 전도를 중심으로 선교를 규정하는 입장에서 볼 때, 동방교회가 선교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동방 그리스 세계의 지적 이교도 환경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지적으로 변증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선교였다. 즉 기독교 신학의 지적 종합, 신학화, 교리화, 교회화가 곧 동방교회의 선교 패러다임이었다.

중세 및 근대 초기 가톨릭의 선교 패러다임: 수도원과 십자군, 그 모순적 공존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연쇄 이동과 침략으로 붕괴되었다. 정치적, 국가적 실체로서의 서로마 제국은 정복자에 의해 무너지고 사라졌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정신 유산으로서의 기독교는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복자의 정신까지 정복해 버렸다. 로마 제국을 정복한 게르만족 대부분은 원래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파였거나 아예 기독교 신앙을 접한 일이 없는 전통 게르만 종교 숭배자들이었다. 이들은 침공 후 초기에는 정통 니케아-칼케돈 기독교를 박해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모두가 정통신앙으로 개종했다.

정통신앙 전파와 개종 과정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이들이 수도원의 수도사였다. 특히 6세기에 형성된 베네딕토 수도원 전통이 서방 수도원 전통의 대표자였다. 이들은 동방에서 먼저 형성된 수도원 전통과 몇 가지 다른 면이 있었다. 우선, 동방수도원이 자기 부인과 고행을 위해 광야로 들어간 반면, 서방수도원은 선교를 위해 준비하고 파송 받는 적극성을 지녔다. 둘째, 혼자 수도하기보다는 공동체성을 더 강조했다. 셋째, 교회 지배층과 갈등을 겪은 동방과는 달리 교황 및 지도층에 대한 순명을 강조했다. 필사, 연구, 번역이 학구적인 수도사들의 주요 업무가 되었고, 수도원이 도서관, 여관, 학교, 고아원, 병원 등의 기능도 수행하면서 사회기반 시설 등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하던 시대에 지성과 영성, 환대를 제공한 거의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베네딕토 수도회가 만든 선교적 기능을 더 훌륭하게 수행한 수도회는 13세기에 등장한 탁발(托鉢) 수도회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기독교 역사상 소위 이교도와 직접적인 대규모 조우가 있었던 십자군 시기에 중세교회와 교황이 표방한 살육의 성지탈환이라는, 당시의 규범적인 사고방식에 도전한 거의 유일한 중세 기독교인 집단이었다.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최소 여덟 차례에 걸쳐 십자군 원정이 벌어졌을 때, 교황을 포함해 그 누구도 사랑을 바탕으로 모슬렘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계획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지 탈환을 방해하는 유대인과 모슬렘을 군사적으로 패배시키거나 심지어 살육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다. 물론 예루살렘 탈환을 지지한 사실 자체로는 이들 수도회도 예외적이지 않았으나 이들은 십자군의 폭력 학살이나 강제 집단 개종 방식에는 반대하며 평화적 봉사와 섬김에 근거한 선교를 펼쳤다.

중세 가톨릭 선교 패러다임이 가장 두드러진 시기는 지리상 대발견이 있었던 대항해 시대였다. 특히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1492년 이후였다. 14-16세기는 가톨릭의 해외 확장이 가장 두드려졌던 시기였다. 가톨릭은 유럽의 절반가량을 개신교에 내어 준 대신, 그보다 몇 배나 넓은 해외 지역을 새로운 가톨릭 영토로 확보했다. 그 중심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었다. 신대륙에서의 스페인 종교정책은 중세 시대에 확립된 십자군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1492년에 스페인 남부에서 모슬렘 무어인을 몰아내는 재정복(Reconquista)을 완수한 스페인 가톨릭은 이 때 사용한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교화 방식을 신대륙 원주민에게도 그대로 활용했다. 무어인이 차지하고 있던 카나리아 제도와 그라나다를 스페인이 탈환하자, 교황은 이들이 정복한 지역의 교회를 총괄하는 권한(patronate real)을 왕실에 하사했는데, 이 방식이 그대로 신대륙에 적용되었다. 즉 아메리카 식민지 교회는 왕이 주교와 고위성직자를 임명하고 재정도 독립 관리했다.
그러나 이런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착취형 선교 이면에서, 성경적인 선교를 구현하기 위해 애쓴 이들이 있었다. 피선교지인과 같은 수준으로 가난하고 단순한 삶을 살면서 현지인과 동일시(identification)의 모범을 이루려 노력한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수사들의 헌신이 그것이다. 영화 〈미션〉에 나오는 예수회 가브리엘 신부가 보여준 모델이 바로 이런 전형이었다. 라틴아메리카 가톨릭 선교 패러다임에는 이처럼 극적인 대칭구조가 있었다. 상부에는 지배계층, 교구 주교나 재속 성직자, 스페인 정착민의 이익을 대변한 일부 성직자가 있었고, 하부에는 이를 비판하고 스스로 멸시의 대상이 되어 원주민과 함께 길을 걸어간 참된 선교사가 있었다. 이런 교회의 양면성은 오늘날까지도 가톨릭교회가 번성한 지역의 특징으로 남아 있다.                 
        

개신교 종교개혁과 선교 패러다임: 교회의 회복과 ‘위대한 세기’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에 독일 비텐베르크의 수도사이자 신학자였던 마르틴 루터가 발표한 95개 조항으로 태동했다. 신학적·도덕적으로 부패한 교회의 내부 개혁이 원래 목적이었지만 그가 제시한 개혁 프로그램을 거부한 가톨릭교회의 압박으로 결국 새롭게 개혁된 교회(改新敎) 전통, 즉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 탄생했다. 개신교와 선교의 관계는 애매모호하다. 태동기인 16세기부터 18세기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개신교는 선교에 거의 기력을 쏟지 않았다. 경건주의자들이 18세기 초반에 인도에서 선교를 시작하고, 영미권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가 역시 인도에서 선교를 시작한 18세기 말에야 개신교 선교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다른 말로, 개신교는 태동 후 약 250년 간 사실상 선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해설이 있다. 우선, 개신교가 선교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는 지적은 벌써 16세기에 제기되었다. 예수회의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이단들(개신교도)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을 개종시키는 데 실패했고, 오직 그리스도인을 변질시킨 무리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19세기에 현대 선교학의 아버지로 불린 독일 학자 구스타프 바르넥도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선교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 정의되는 선교의 개념조차 그들에게 없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홀스텐 같은 학자는 “종교개혁의 심판대 앞에 19세기 선교사역, 즉 인본주의와 경건주의, 계몽주의의 희생자이자 현대 정신의 자녀인 선교 개념을 소환해서 이 개념을 그보다 300년 전 인물에게 적용해 유죄로 선고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하고 묻는다. 이런 변호에도 종교개혁 시작 후 실제로 최소 200년간 개신교에 실제 활동으로서의 선교가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이 만든 장애 요인이 분명히 있었다.

우선, 개혁자들은 망가진 교회를 고치고, 무너진 담을 보수하며, 썩은 곳을 도려내고, 타락한 기성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소명이라 믿었다. 해외에 나가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사실 당시 개신교인은 기독교도가 아닌 이들과 접촉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독일과 스위스는 해양 활동을 거의 하지 않던 내륙국이었고,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며,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아직 해외로 나가 활동할 국력을 갖추지 못했다. 해외 식민지는 주로 14세기 이래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식민지와 해양로를 완전히 장악한 해양강국이자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거의 완전히 통제되고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와 18세기 영국이 이들 두 이베리아 국가를 누르고 대양에 진출한 시점과, 개신교 선교활동의 발흥 및 성장기가 맞아떨어진다는 사실로, 해상을 장악하는 것과 해외선교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개신교인은 종교개혁 기간에 생존 자체를 위해 투쟁해야 했다. 30년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1648년의 베스트팔리아 조약 이전에는 자신들의 목숨도 담보할 수 없었다. 한편 가톨릭교회의 가장 강력한 선교운동 구심점 역할을 했던 수도원을 개신교가 부정하고 폐기함으로써 개신교 내에서 선교의 동력이 되는 선교회가 탄생하기까지 2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더구나 개신교인은 종교개혁 당시 치열한 내부 논쟁, 개신교 각 전통 간의 전투로 완전히 소진되어 있어서 해외 활동에 힘을 쏟을 수 없었다.

이런 지체 현상에도, 18세기 이후에는 독일 경건주의 선교사들과 캐리를 비롯한 영미권 선교사들의 수고 덕에, 19-20세기를 ‘위대한 세기’로 부를 만큼 개신교 해외선교에 풍성한 열매가 맺혔다. 이 시기에 선교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성경해석의 변화다. ‘대위임령’(마 28:17-20)이 성경 시대 사도들에게만 제한된 명령이 아니라고 해석한 첫 개신교인들은 독일 경건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영향을 받은 영국 개신교인들을 통해 18세기 중후반기에는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명령임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둘째, 2차 대각성운동이다. 복음주의 갱신운동은 ‘회심’(신생)의 체험을 강조했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느냐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따라서 이 생명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전파되고 공유되어야 할 가치였다. 복음주의의 가장 중요한 4대 핵심가치가 성경, 십자가, 회심, 행동(전도)이 된 배경이다. 이 중 마지막 행동의 요소인 전도의 대상이 자신의 지역, 국가, 민족, 문화를 넘으면 그것이 바로 ‘선교’였다.  
  
셋째, 개신교 국가들의 해양 지배이다. 15-16세기에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 시대를 주도한 국가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기에 이들의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진출과 함께 가톨릭이 전파되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진출을 시작으로, 18세기 이후 해상을 장악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특히 영국의 해외진출, 무역장악,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해외선교의 중흥기는 일치한다. 여기에 기독교선교와 제국주의·식민주의 간 관계라는 딜레마가 발생했다.

넷째, ‘자원’ 선교단체의 탄생과 성장이다. 복음주의 대각성을 경험하면서 기존 교회가 신앙적으로, 행동적으로, 조직적으로 폐쇄적이고 정체되어 있다고 느낀 이들에 의해 더 효율적이고 목표지향적인 자신들만의 모임들이 만들어졌다. 수많은 해외·지역별 선교단체, 성서공회, 노예해방협회, 식민지협회, 여성 및 과부·고아협회, 주일학교협회, 소책자협회, 기독교서회 등이 그 사례인데, 이들이 오늘날 NGO(비정부기구)로 불리는 수많은 종교적, 세속적 사회 활동 기관들의 원조다.

결국 지난 2000년 교회 역사에서 선교는 다양한 내용과 강조점과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각 패러다임에는 이상적인 모범도 있고, 반면교사로 폐기하고 반성해야 할 내용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셨듯, 선교의 주권자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다양한 패러다임의 다단하고 다원적인 양상이 최고의 예술가의 손에서 버무려져서 오늘날 ‘하나님의 선교’의 열매인 전 세계의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재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선교와문화 교수, 광교산울교회 협동 목사.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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