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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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9년  04월호 안식과 묵상 안식, 목회 회복의 첫걸음

강제된 휴식

20년 만이다. 내일 해야 할 일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채 오늘을 맞아 본 지가 그리도 오래되었다. 때가 되어 찾아온 휴식이 아니라, 쉬지 않으면, 당장 멈추지 않으면, 몇 가지를 정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 놓아 버릴 것 같았다.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아니라 아예 도망가 숨어버릴 것 같아서 그런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강제로 내게 준 휴식이었다. 강제된 휴식이라니. 그런 휴식도 있는가?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하던 일에 싫증이 난 것은 아니었다. 보람도 있었고 심지어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 보람과 재미조차도 길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큰일이 나겠다 싶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남들이 좋아하고 남들의 필요를 채워 주고 남들에게 소위 성숙으로 보이는 변화가 생기면 그렇게도 신나고 좋더라. 부탁을 해 오면 거절할 용기도 없거니와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을 찾으랴 싶어서 나서 주었다. 게다가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 같은 일이 아닌가. 아무리 나를 살펴봐도 기어이 뭔가를 이뤄야겠다는 대단한 야심을 품지도 않았다. 그렇게 새가슴이어서 멀리도 못보고 참 좁은 방에서 발밑만 보고 오래도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와 거의 구분되어 있지 않은 ‘가족’도 없었다. 아내와 자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몇 번 뵐 시간이 안 남은 부모님도 없었다. 뼈아픈 것은 내가 그토록 위한다고 했던 ‘성도들’도 없었다.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던 것을 추구하며 살았고, 누군가를 위해―하나님이든 이웃이든―이타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았다. 그게 옳은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고 또 우선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던 것을 하고 있으니 보람도 있었고 재미도 있었던 것이다. 쏟은 만큼 결과가 금방 나오지 않아도, 대가를 그때그때 돌려받지 못할 때에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나로서 살고 있는가?’ 이제 젊음이나 건강을 밑천 삼아 ―큰 이변이 없는 한― 살 수 있는 시간이 10여년 남았는데, ‘여태 살아왔던 대로 살아도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르렀을 때, 나는 선뜻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를 흉내 내며 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늘 나만의 목소리, 나만의 색깔, 나만의 주장을 가지려고 애를 썼지만, 내 욕망에 대해서 정직하지 못했고, 대의를 위해 가족들의 욕망을 소홀히 했으며, 부모님께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심한 사람이 되었다. 나의 편안함은 익숙함에서 나왔고, 나의 재미는 영향력에서 나왔고, 나의 보람은 명분에서 나왔다는 생각에 이르자 내 힘으로는 이런 나를 극복할 수 없는 듯이 보였다. “첨가된 지식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삶의 모판을 옮겨서 시간과 공간과 소유를 향한 무의식적인 내 몸의 반응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살던 대로 살아지겠구나 싶었다. ‘관성’을 거스르는 가장 강력한 대안으로 ‘멈춤’ 말고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상황과 여건을 거슬러 멈추고 떠나기로 하였다.

바쁨, 신성모독죄

“건강한 명사에는 형용사가 필요 없다. 형용사는 건강한 명사를 어수선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대표적인 단어가 ‘목사’가 아닐까. ‘목사’라는 단어 하나로 신뢰와 선한 영향력과 권위와 사랑 같은 것을 떠올린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영화 〈극한 직업〉의 대사 중에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다. 이것은 통닭인가 불고기인가?”가 있다. 이렇게 패러디 하고 싶다.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없었다. 그는 목사인가 세일즈맨인가?” “목사님은 목사 같이 안 보여요”라는 말이 칭찬이 되는 서글픈 시대다. “목사 같지 않다”는 말이 “목사답지 않다”는 뜻이 아닐 때는 최고의 찬사가 될 만큼, 목사라는 단어는 오염되었다.

영화 중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은, 오래 잠복한 끝에 드디어 용의자를 발견했고, 그를 추격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들을 잡기 위해 통닭집을 열었다. 그런데 정작 목표했던 그 일을 해야 하는 그 시간에 그 일을 해낼 여유가 있는 동료들이 하나도 없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자기 일에 열중하느라 바빠서 손을 보탤 수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닭을 좋아해서 찾아온 손님들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참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그들이 거기 있는 이유, 부름 받은 목적, 부여받은 사명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열심히 한다고, 남을 위해 한다고, 욕심 없이 한다고 다 잘한 일은 아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에 순종할 때만 충성스런 종이다. 우리 성도들에게 나는 늘 바쁜 목사였다. 그래서 전화하기도 미안하고, 도움이 필요해도 늘 자기 문제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목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성도들을 위해서 늘 부지런히 살았는데, 정작 성도들은 나를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렇게 나를 참아 주고 견뎌 주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내 보람과 재미에 취해서 그들을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참 많은 책을 쓰시고 전 세계에 두루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역을 하시면서도 29년 동안 ‘그리스도 우리 왕 장로교회’만을 섬겨 왔다. 그는 오염된 ‘목사’라는 명사를 회복하기 위해서 ‘형용사’의 조력이 필요한데, 그가 ‘목사’라는 명사를 살리기 위해 제안한 첫째 형용사가 ‘바쁘지 않은’이다. 그는 목사 앞에 ‘바쁜’이라는 형용사는 마치 ‘간음하는’ 아내나 ‘횡령하는’ 은행가라는 말과 같고, 심지어 신성모독적인 모욕이라고까지 한다. 투르의 힐라리우스(Hilarius of Tours)는 “목사가 바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려고 하는 신성모독적 불안(irreligiosa Sollicitudo pro Deo)이다”라고 하여 그의 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바쁨, 안식의 부재

바쁨은 부지런함이나 성실함 혹은 신실함과 같지 않다. 그것은 상황 통제력에 달려 있다. 바쁜 사람은 주체적으로 살지 못한다. 여백이나 숨구멍이 없이 사람이나 일에 치여 산다. 빽빽한 일정이 한 사람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시대에 ‘바쁜’ 목사는 중요한 목사의 요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더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무언가를 거절함으로써 한 사람이라도 실망시키느니 차라리 일의 노예가 되기로 선택한다. 하지만 노예는 누군가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없다. 내 안에 고요가 없는 사람은 타인에게 평화를 줄 수 없고, 침묵을 거치지 않는 말에는 울림이 없고, 기다림이 없는 관계에는 여백이 없다. 무엇보다도 바쁜 삶에는 믿음이 없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여지가 없다. 나의 삶을 뒤흔들고 뒤집고 뒤엎는 그분의 거룩한 습격을 용납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이 계획하고 실행하여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데서만 기쁨을 찾는 ‘자기 충족적 예언가’에 그치게 된다. 하나님보다 촘촘한 자신만의 인과율에 따라 질주한다.

절대적인 준거틀(잣대)이 사라진 우리 시대는 방향을 묻지 않고 속도만 높인다. 어디로 향하는지 묻지 못하게 한 채 그저 앞서 가려고만 한다. 그것은 단지 일의 속도를 높이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가속 페달을 밟는다. 제 뜻대로 전개되지 않는 현실을 참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을 전인격적인 주체가 아니라 물성화된 객체로 간주하여,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강요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자신이 원하는 때에 보려고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짓을 마다 않는다. 그것을 ‘갑질’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니체는 벌써 200년 전에 자기 시대를 향해서 “느리고 긴 시선을 상실한”, “천박한” 사회라고 부르며 우리 시대를 향한 예언자 같은 말을 했다. 천천히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고, 오래 보아야 그 진상이 낱낱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교회가 커질수록, 일이 많아지고 바빠져서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될수록 가족들이, 성도들이, 교회 리더들이 나의 질주하는 속도를 저해하는 방지턱 역할을 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것을 덜 중요한 사람들의 훼방이요 덜 신령한 사람들의 불신앙이요 뭘 모르는 사람들의 무지로 너무 쉽게 평가하였다. 그러고도 내가 정한 가치와 내가 부여한 의미 때문에 나는 내 바쁜 일상이 뿌듯했고, 잘 해내는 내 사역이 보람되었고, 그런 내 일상은 즐거웠다.

하지만 그런 게 주님이 나에게 궁극적으로 주시려고 한 ‘안식’이라는 선물은 아니었다. 거기엔 일만 있을 뿐, 내가 없고 네가 없고 하나님이 가물가물했기 때문이다. 안식은 서로를 자유하게 하는 관계다. 서로를 향하여 나의 자유를 양도하는,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안식이다. 자유와 사랑이 만든 ‘하나됨’의 관계가 안식이다. 따라서 안식은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안식의 땅’을 주시기 위해서다. 아니 인간 자체를 ‘안식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구원이 목표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제정하여 ‘안식’을 주신 것은 사실상 ‘시간의 거세’를 통하여 인간이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창조주 하나님께 넘기고, 그분의 자비와 은총으로 사는 안식의 존재가 되게 하려는 의도였다.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순종하여 그분께 최대의 자유를 드릴 때, 우리 인간이 비로소 인간다워지며 안식을 누릴 수 있게 의도하신 것이다. 이렇듯 안식은 하나님의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그것은 영생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모호한 말이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도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안식을 선물로 준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속상하지 않고 안식할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요, 이웃이 사망의 문화 속에서 결핍과 고난 속에 살지 않도록 안식을 주어 생명을 만끽하게 하는 일이 사랑이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또 예기치 않게 닥쳐오는 다채로운 삶의 조건들―좋게 보이든지 불운하게 보이든지 간에―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것을 목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안식을 주려면, 무엇보다도 내가 안식해야 한다. 노예는 누군가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없고, 안식이 없는 사람이 안식을 창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안식, 묵상의 여백을 마련하는 일

교회는 안식의 공동체이고, 목회는 성도들이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그들 간의 관계를 조율하고, 그들 속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샬롬의 관계에 대한 상상력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보기 심히 좋다 하셨던 창조의 관계성을 구축하는 일이다. 언약으로 구체화된 그 인간의 존재방식을 실현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속도와 리듬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관심과 눈높이를 따라 사고하며, 하나님의 열망과 바람을 따라 욕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눈’을 얻는 일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일이다. 즉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감과 촉이 예민해지는 문제다. 그 소통(communication) 혹은 교제(communion)를 ‘묵상’(meditation)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누구든 묵상을 한다. 다만 무엇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무엇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고 욕망하는지가 다를 뿐이다. 모든 사람의 삶의 방식과 삶의 목적은 저마다의 묵상의 결과다. 그 묵상을 따라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역사를 만들며, 자신이 기댈 큰 이야기(meta-narrative)를 선택한다. 따라서 묵상을 하지 않으면 묵상을 당한다.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남이 생각한 대로 살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묵상을 세상의 묵상과 차별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근거하고 있는 토대 혹은 기초다. 그러니까 기독교적 묵상(Christian meditation), 혹은 성경적 묵상(Biblical meditation)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여, 그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세계관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 세계관을 따라 어떻게 살지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묵상’을 세계관(觀)적 사유이고 세계감(感)적 실천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지식보다는 지혜의 차원이고, 기술(skill)보다는 예술(art)의 차원이며, 방법론의 문제라기보다는 태도(attitude)의 문제다. 성경은 묵상의 준거틀도 되지만, 묵상의 대상도 된다. 그것을 성경묵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성경이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해석하고 평가하는 대상, 즉 묵상의 대상은 나와 우리의 이웃과 우리의 시대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존재하는 모든 것,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하나님의 눈으로, 하늘의 눈으로, 영원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의 눈으로 바라보고, 내가 그 세계에 어떻게 참여할지를 우리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분명 의지적인 차원의 진지한 작업이 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이미 내재화된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갖고서 날마다 살아가는 나의 일상이 곧 묵상의 삶이 된다. 그 일상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과 잇닿아 있느냐에 따라서 ‘안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가난하고 빈 마음으로,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열려 있다면, 하나님께서 참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민감하게 잘 듣고, 잘 분별할 수 있다.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맞춰 조율하고, 이웃의 필요와 아픔에 공감하고 통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내 속이 시끄럽고 분주하고 혼란스러우면 결코 하나님과 온전히 소통할 수 없다. 바빠서 쫓기고 급하면 일의 결과를 지켜볼 수 없고 사람을 참아 줄 수 없다. 안식 없는 묵상은 없다. 안식은 묵상의 여백을 만들어 준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소통, 이웃과의 소통, 세상과의 소통, 즉 그 숨통 트이는 묵상, 그 진실한 사귐이 우리를 ‘안식’으로 이끌어 준다. 묵상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성을 탈피하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절대신(神)으로 숭배하는 소비적, 시장친화적 세상에서, 다시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을 회복하고, 관계를 추구하는 생명지향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샬롬과 안식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샬롬과 안식의 공동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인 교회를 수종드는 목사가 먼저 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인 ‘안식’을 누리고서야 그 하나님의 ‘눈’을 얻고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안식으로 회복된 묵상, 묵상으로 회복된 목회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전인적 개념이다. 몇 달 쉬는 동안 여러 영역에서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들여다보았다. 더하기보다는 빼려고 애를 썼다. 더 깊어지는 일만큼이나 더 넓어지고 싶었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에게도 갖고 싶은 것을 선물하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누리고 싶은 것을 취하여 내 욕망이 기지개를 펴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과 좋아하시는 것, 또 지금 명령하시는 것은 토 달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순종하고 싶었다. 어떤 가치와 의미와 명분을 위해서 사람을 동원하거나 희생시키지 않고, 내일을 위해서 오늘과 일상을 담보로 잡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추수를 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기다려 주시는 것처럼 나도 그분의 때를 기다려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고 감탄하고 감격하고 싶었다.

쉬는 동안 목사로서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남편과 자식으로, 빌라의 총무로 살았다. 오랜만에 학창 시절 친구들도 만났다. “요즘 손님들은 좀 오시냐?”라고 묻는 친구 때문에 많이 웃었다. 여전히 바쁘지만 지나치게 바쁘지 않는 아빠의 리듬을 얻었고, 아내와 차를 마실 때는 카톡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안 받는 정도의 남편은 되었다. 책 마감 기간인데 심방을 요청하고, 설교 준비에 한창인데 전화통을 2시간 붙들고 하소연 하는 성도들을 전보다는 아주 조금 더 성의 있게 대할 줄 알게 되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을 보면, 바다 괴물과 맞서는 아합 선장의 분주함과 대조되는 한 인물이 나온다. 그는 서로 부딪히며 욕설이 오가는 속에서도 저만치 떨어져서 항상 나른하게 앉아 있다. 노를 잡지도 않고 땀을 흘리지도 않는다. 그는 고래에게 작살을 꽂는 사람이다. 작가는 말한다.

“작살을 가장 효율적으로 던지려면 작살꾼들은 애쓰지 말고 나태하게 있다가 재빨리 일어서야 한다.”

작살을 꽂는 사람이 자기 임무를 제쳐두고 노를 젓느라 지쳐 있다면, 창을 던져야 할 때 던지지 못할 것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에게 원음 그대로 적실한 말로 적합한 때에 전달되게 하는 자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말씀으로 일하시게 하는 자다. 그러자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는 시편 기자의 말대로, 안식을 누리는 가운데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하고 해석할 줄 아는 능력, 즉 ‘묵상’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짧은 안식일지라도, 그 멈춤과 떠남의 시간이 나의 묵상을 회복시켜 주었다. 회복된 묵상이 목회의 회복을 선물로 안겨 주었다.
 묵상이 이끄는 안식의 목회: “being available”

강제적인 안식월로 나를 이끈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주님, 살아온 대로 살고 해온 대로 사역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주님 만나도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그렇다고 하신다. 나를 통해 무언가를 해내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너를 원한다. 너 하나면 된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생각해보니 그게 뭔가를 이루는 일보다 어렵겠다 싶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나를 사랑하는 일, 어떤 삶의 조건 속에서도 예술가 하나님의 창조적인 솜씨를 기대하며 서둘러 내 인생에 대하여 결론 내리지 않고, 잠잠히 그분이 하나님 노릇하시도록 맡겨드리는 일, 그것이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주님의 눈으로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느끼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은 하나님을 향하여 “있어 주기”(being available)이고, 목회는 성도들 곁에 “있어 주기”(being available)가 아닐까 싶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네”하고 대답하고, 성도들이 노크 하면 언제든 “네”라고 대답하여, 기꺼이 나를 사용해 주도록 곁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 목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돌아왔다. 내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계획하고 이루고 부리고 영향력을 미치는 삶이 아니라, 불확실과 신비와 의혹 가운데 기꺼이 머물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는 사람, 즉 묵상의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편한 숨, 고른 숨을 쉬는 안식의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박대영 광주소명교회 담임목사. 〈묵상과 설교〉 책임편집, 저서로《묵상의 여정》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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