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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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말씀 2019년  04월호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세례요한의 증언 책별 성경 연구 | 요한복음 3장

본문 사역 및 해설
[1]그러나 바리새인들 중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이며, 유대인들의 지도자였다. [2]이 사람이 밤에 그에게 와서 그에게 말했다: “랍비여, 우리는 선생이신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바로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들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3]예수께서 대답하며 그에게 말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만약 혹자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니고데모가 그에게 말했다: “늙었는데 어떻게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가?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의 배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태어날 수는 없지 않는가?” [5]예수께서 대답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만약 혹자가 물과 영으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6]육(肉)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육이다. 그러나 영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영이다. [7]너는 내가 너에게 ‘너희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한 것에 놀라지 마라. [8]바람은 그것이 원하는 곳에서 불지만 너는 그것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너는 그것이 어디서부터 오고 어디에서 떠나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영으로부터 태어난 모든 자가 이러하다.” [9]니고데모가 대답하며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이 일들이 있을 수 있는가?” [10]예수께서 대답하며 그에게 말했다: “너 자신이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그런데 너는 이 일들을 알지 못하는가? [11]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본 것을 우리는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취하지 않는다. [12]만약 내가 땅에 속한 것들을 너희에게 말했지만 너희가 믿지 않는다면, 만약 내가 너희에게 하늘에 속한 것들을 말한다면 어떻게 너희가 믿겠는가? [13]그렇기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 곧 인자(人子)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하늘 안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14]부연하자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였던 것처럼 이렇게 인자가 높이 들려야 한다. [15][[이는]]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영생(永生)을 소유하기 위한 것이다. [16]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했다. 그래서 유일무이한 아들을 주셨다. 이는 그를 믿는 모든 자가 멸망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이다. [17]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이는 그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세상이 구원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받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그리고 이것이 그 판결이다. 곧,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들이 악했기 때문이었다. [20]그러므로 저급한 것들을 실천하는 모든 자는 빛을 미워하니, 곧 빛에게 오지 않는다. 그 결과 그 사람의 일들이 드러나지 않는다. [21]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에게 온다. 그 결과 그 사람의 일들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22]이 일들 후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유대 땅으로 갔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그들과 지속적으로 함께했고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23]그리고 요한도 살렘 근처의 애논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많은 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와 세례를 받곤 했다. [24]물론 요한이 아직 감옥에 던져지지 않았다. [25]그러므로 정결에 대해 요한의 제자들 중 [일부와] 한 유대인과의 논쟁이 있었다. [26]그리고 그들이 요한에게 왔고 그에게 말했다: “랍비여, 요단 강 건너편에서 당신과 함께 있었던 분, 당신 자신이 증거 했던 사람, 보십시오, 이 사람이 세례를 주며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로 갑니다.” [27]요한이 대답하며 말했다: “사람은 만약 하늘로부터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것 하나도 취할 수 없다. [28]바로 너희가 나에 대해 ‘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저 사람 앞에 보냄을 받았다’고 내가 말했음을 증언하라. [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그러나 신랑의 친구, 곧 서서 그를 듣는 자는 신랑의 목소리 때문에 진정 기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 기쁨이 가득 찼다. [30]그는 흥해야 하고, 반면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 [31]위로부터 오는 자는 모든 것들 위에 있다. 땅에 속한 자는 땅에 속하고 땅으로부터 이야기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자는 [모든 것들 위에 있다]. [32]그가 보았고 들었던 것, 이것을 그가 증거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의 증거를 취하지 않는다. [33]그의 증거를 취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에 도장을 찍었다. [3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하나님의] 말씀들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을 측량치 않고 주시기 때문이다.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그의 손에 모든 것들을 주셨다. [36]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한다. 그러나 그 아들에게 불복하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며, 대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로 머문다.
[1]지도자 헬라어 ‘아르콘’(a;rcwn)은 일반적으로 ‘통치자’를 의미한다. 개역개정은 ‘관원’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요 1:10)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가 ‘관원’ 혹은 ‘통치자’보다는 ‘지도자’였음을 말해 준다.
[3]혹자가 헬라어 ‘띠스’(tij)는 불특정인을 가리킨다.
위로부터 개역개정은 헬라어 단어 ‘아노텐’(a;nwqen)을 ‘거듭나지’로 번역한다. 이는 전치사 ‘아노’가 ‘다시, 재차’라는 의미가 있으면 문맥상 예수님이 중생(中生)을 말씀하시는 것 같기에 선택된 번역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아노텐’은 문자 그대로 ‘위로’(아노)+‘부터’(텐)의 조합으로 본다.
[4]말했다 헬라어 ‘레게이’(le,gei)는 현재형 동사이다. 그러나 문맥상 과거로 해석했다(과거를 나타내는 현재형). 향후 번역에서 이를 반영했다.
자신의 ‘아우뚜’(auvtou)는 인칭대명사이지만 문맥상 재귀대명사로 번역했다.
다시 헬라어 ‘듀떼론’(deu,teron)은 문자적으로 ‘두 번째로’를 의미한다. 그러나 ‘들어가서’ 동사와 함께 ‘다시 들어가서’로 해석했다.1
[5]영 헬라어 ‘쁘뉴마또스’(pneu,matoj)를 개역개정은 ‘성령’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는 문맥에 적합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문자적으로는 단순히 ‘영’을 의미한다.
[8]바람 ‘바람’의 원어 ‘또 쁘뉴마’(to. pneu,ma)는 본 구절 마지막 부분의 ‘뚜 쁘뉴마또스’(tou/ pneu,matoj)와 동일한 단어다. 헬라어에서 ‘쁘뉴마’는 ‘바람’ 혹은 ‘영’을 의미함으로, 문맥에 맞게 ‘바람’으로 번역했다.
[13]그렇기에 헬라어 접속사 ‘까이’(kai,)는 ‘그리고’ 혹은 ‘그러나’를 언급한다. 그러나 13절의 ‘까이’는 앞서 언급된 ‘위로부터’와 연관되기에 느슨한 연결 관계를 표현하고자 번역했다.2
[14]부연하자면 헬라어 접속사 ‘까이’(kai,)는 종종 앞선 내용을 특정화 해서 부연하기도 한다. 14-21절의 내용이 13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도 요한의 정통 설명이라는 점에서 ‘까이’를 이 방식으로 번역했다.
[16]유일무이한 이 표현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14, 18의 설명을 참조하라.
이는 헬라어 접속사 ‘히나’(i[na)는 목적절을 이끈다. 다만, 문맥상 목적절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을 첨가했다.
[18]그 사람 동사의 숨은 주어가 ‘믿는 자’이다. 문맥상 ‘그’나 ‘그녀’로 번역하기 어려워 ‘그 사람’으로 번역했다. 
[19]판결 헬라어 ‘헤 끄리시스’(h` kri,sij)는 18절에 등장하는 ‘심판하다’(끄리노) 동사의 명사형이다. 따라서 단순히 ‘심판’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19절의 내용은 심판 행위를 가리키지 않고 심판의 내용, 즉 ‘판결’3로 번역했다.
[20-21]그 사람 18절의 해설을 참고하라.
[24] 물론 헬라어 접속사 “가르”(ga,r)는 이야기를 전환하는 기능이 있다.
[25][일부와] 헬라어 원문에는 없으나 ‘요한의 제자들 중’(evk tw/n maqhtw/n VIsa,nnou)이라는 표현이 부분을 나타내는 기능을 하기에 ‘일부’라는 표현을 첨가했다. 26절에서 동사 ‘엘톤’(h=lqon)의 주어 ‘그들’도 이 첨가가 적절함을 지지한다.
[28]증언하라 헬라어 ‘마르뛰레이떼’(marturei/te)는 ‘마르뛰레오’(marture,w) 동사의 현재형이다. 다만, 이 동사가 직설법일 수도 있고(개역개정, NRSV, NIV 등) 명령법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문맥상 명령형으로 번역했다.
[29]진정 기뻐한다 ‘카라 카이레이’(cara|/ cai,rei)의 번역. 동족 여격형이 등장하면 강조가 된다.4
[30]그는 헬라어 지시대명사 ‘에께이노스’(evkei/noj)는 ‘저 사람’을 의미하나 종종 3인칭 대명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문맥상 ‘그’라고 번역했다.
[31] [[모든 것들 위에 있다]] 헬라어 본문(예. NA28)에는 이 표현이 대괄호([])와 함께 제시된다. NA28에서 대괄호로의 읽기는 이문(variant)과의 증거 비중이 절반씩 됨을 가리킨다. 다만, 정황(예. 사본의 비중 및 전통 등)을 고려해 잠정적으로 원문으로 판단한 것을 의미한다.
[34][하나님은] 두 번째 등장하는 ‘하나님’은 원문에는 없다. 다만, 문맥을 고려해 주어를 ‘하나님’으로 표시했다(개역개정). 아래 설명을 참조하라.
 
단락 구분
3장의 내용은 두 단락으로 구분된다. 첫째 단락(1-21절)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1-13절)와 그에 대한 사도 요한의 부연 설명(14-21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설교이다. 둘째 단락(22-36절)은 세례 요한과 관련한 단락으로 대화의 배경(22-24절), 세례 요한의 설교(25-30절) 및 그에 대한 사도 요한의 부연 설명(31-36절)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흥해야 함을 가르친다.
1.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예수 오심의 의미(첫째 설교)(1-21절)
1) 설교: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1-13절)
2) 사도 요한의 부연 설명(14-21절) 
2. 세례 요한에 대해: 예수께서 흥해야 한다(22-36절)
1) 세례 요한의 설교 배경(22-24절)
2) 세례 요한의 설교(25-30절) 
3) 사도 요한의 부연 설명(31-36절) 

본문 해설
1.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예수 오심의 의미(첫째 설교)(1-21절)
[1] 그러나 바리새인들 중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이며, 유대인들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한 사람이 있었다’(+Hn de. a;nqrwpoj)로 시작한다. 이는 요한복음 1:6(‘한 사람이 있었는데’)을 연상하게 한다. 계사(‘이다’ 동사)+명사 구문은 사도 요한이 대상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전형구이다(참조, 1:1, 9).5 이 구문은 등장인물의 정체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다. 그 사람은 니고데모(참조, 요 7:45-52; 19:38-42)였고, 그는 ‘바리새인들 중’의 ‘한 사람’이요, 보충적으로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소개되어 향후 대화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한편 “그러나”는 이 단락이 니고데모가 요한복음 2:23-24에 등장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암시한다.    
[2] 이 사람이 밤에 그에게 와서 그에게 말했다: ‘밤에’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뉙또스’(nukto,j)는 ‘밤’을 의미하는 명사 ‘뉙스’(nu,x)의 단수, 소유격형이다. 시간의 명사가 소유격으로 사용될 때는 특정 시간을 나타낸다.6 따라서 이 표현은 니고데모가 특정한 시간인 ‘밤에’ 예수를 찾아온 것을 말한다.
니고데모가 밤에 나온 것에 대해 학자들은 많은 논의를 거쳤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밤’은 ‘영적이며 도덕적인 어둠의 의미’를 나타내곤 하기 때문이다(참조, 요 9:4; 11:10; 13:10).7 예를 들어, 키너는 그가 바리새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 시간을 이용했다고 보지만8 해리스는 예수님과의 방해받지 않는 대화를 위해 밤에 찾아왔다고 지적한다.9 그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요한복음 1:9은 선재하신 예수를 ‘참 빛’이라고 선포하고, 예수 자신께서는 스스로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8:12; 9:5)라고 선포하셨는데, ‘이 사람’ 니고데모는 그 빛 되신 예수께 밤에 나왔으며, ‘참 빛’되신 예수께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의 모습은 향후 그가 취할 행동을 암시한다. 즉, 니고데모는 처음에는 ‘밤에’ 예수님을 찾았으나 향후 예수님을 변호하기도 하고(요 7:50-52), 예수님의 무덤에 방문하기까지 성장했다. 한편, 인칭대명사 ‘그에게’(auvtw)라는 표현은 문맥상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에 대해 인칭대명사가 사용된 것은 3장의 내용이 2장과 연속되는 것을 암시하며(1절의 ‘그러나’, 참조), 특별히 학자들은 요한복음 2:23-25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2:23-25의 핵심은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고 많은 자들이 믿었으나(2:23) 예수께서는 그들을 의지하지 않으셨다는 내용이다(2:24). 니고데모 역시 예수님의 표적들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 중에 속했을 것이며, 이로부터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심을 인지하고 그에게 나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았던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그를 진리로 이끌어 가고자 하신다. 한편, 니고데모가 ‘우리는 … 안다’(oi;damen)라고 말한 것은 2:23의 내용처럼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을 드러낸다.
[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만약 혹자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 말한다’(avmh.n avmh.n le,gw)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 총 25회 등장하는 정형어구10로 예수님의 발언의 확증성을 전달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만약 …다면’(eva,n)이라는 조건문을 사용한다. 여기에 사용된 조건문은 헬라어 조건문 5식으로 결과를 위한 일반적인 조건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으려면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일반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한편 ‘혹자’(tij)는 불특정인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제시된 ‘조건에 맞는 사람이면 누구든지’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 내용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하늘에 근거한 새로운 창조 곧 중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11 이는 예수께서 8절에서 언급한바 ‘영으로 태어’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조건은 누구든지 하늘의 뜻에 따르는 자들이라면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 곧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4] 니고데모가 그에게 말했다: “늙었는데 어떻게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가?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의 배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태어날 수는 없지 않는가?” ‘늙었는데’(ge,rwn w;n)라는 표현은 3절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 개인의 답변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선생’(3:10)의 신분을 가진 니고데모의 나이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자신의 답변에서 이 중요한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사람’ 전체의 문제로 이해해 반응했다. 이러한 반응은 5절 이하의 대화가 지속되는 원동력이 된다. 한편, 니고데모는 ‘없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그 내용인즉 성인은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은 이 반문이 헬라어 불변화사 ‘메’(mh,)로 시작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헬라어의 의문문에서, 화자(話者)가 긍정의 대답을 기대할 때는 ‘우’(ouv)를, 부정의 대답을 기대할 때는 ‘메’를 사용한다. 따라서 이 반문은 예수께 부정의 대답을 기대하며 반문한 것이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왜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을까? 니고데모의 이런 대답은 3-4절에 나타나는 언어적 유희 때문이다. 즉, 3절에서 ‘위로부터’로 번역된 단어 ‘아노텐’은 개역개정의 경우에서처럼 ‘거듭’이라고도 이해되곤 한다. 즉, 예수님은 이 단어를 ‘위로부터’로 의도하고 말씀하셨지만 니고데모는 이를 ‘거듭’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렇기에 니고데모는 4절에서 “어머니의 배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태어날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부정의 대답을 기대하며 반문한 것이다.
[5] 예수께서 대답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만약 혹자가 물과 영으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3절에서 예수님은 “만약 혹자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5절은 4절에서 드러난 니고데모의 오해에 대해 보다 분명한 설명을 제공한다.
 
위의 표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위로부터’라는 말은 ‘물과 영으로부터’의 의미이며,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5절에서의 니고데모의 오해, 즉 물리적 재출생으로의 이해를 영적인 중생 혹은 재창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교정해 준다. ‘물과 영’은 동일한 개념의 양 측면을 그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영의 깨끗하게 하고 새롭게 하는 역할에서 기인한 중생”이 그것이다.12 한편, 3절에서 ‘보다’(ivdei/n) 동사가 5절에서는 ‘들어가다’(eivselqei/n) 동사로 번경된다. 이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개념은 단순히 목도(目睹)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6] 육(肉)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육이다. 그러나 영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영이다. 6절의 말씀은 병렬 구분으로 되어 있어 ‘육’과 ‘영’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여기서 말하는 육은 니고데모가 4절에서 언급한바 어머니의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가 태어나는 일을 가리킨다(즉, 자연 출산13). 그러나 니고데모 자신이 말했듯이 이 일은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으로는 이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3절에서 언급한바 ‘영’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닌 ‘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5절에서 이러한 ‘영’의 우월함 혹은 고유함을 하나님 나라와 연관시킨다.
[7] 너는 내가 너에게 ‘너희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한 것에 놀라지 마라. ‘놀라지 마라’(mh. qauma,sh|j)는 예수께서 니고데모가 기대하지 못한 답변을 들었을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추측은 9절 니고데모의 반응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10절에서 언급한바 이에 대한 지식은 ‘이스라엘 선생’이라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예수께서는 언급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갑작스러운 감정적 반응을 나타내는 동사 ‘타우마조’(qauma,zw)를 사용해(참조, 갈 1:6[‘이상히 여기노라’])14 니고데모에게 ‘놀라지 마라’라고, 그것도 보다 엄격한 부정의 명령을 전달하는 ‘메’(mh)+부정과거 가정법 구분을15 사용해 말씀하신다. 한편,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3절에서 조건문 제5식을 통해 일반적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만약 혹자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면’[eva.n mh, tij gennhqh|/ a;nwqen])을 당위를 나타내는 표현을 사용해 재차 언급하심(‘너희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dei/ u`ma/j gennhqh/nai a;nwqen])으로 앞서 말한 일반적 원리가 절대적임을 말씀한다. 이러한 일반적 원리는 동사의 주어가 ‘너’에서 ‘너희’로 변경된 것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참조, 3:2[‘우리는 … 안다’])
[8] 바람은 그것이 원하는 곳에서 불지만 너는 그것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너는 그것이 어디서부터 오고 어디에서 떠나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영으로부터 태어난 모든 자가 이러하다.” 8절에서 예수께서는 3-4절의 ‘아노텐’(‘위로부터’ 혹은 ‘거듭’)의 경우처럼 재차 언어유희를 사용한다. 즉, 헬라어 단어 ‘쁘뉴마’가 ‘바람’ 혹은 ‘영’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영으로부터 태어난 자’(참조, 요 3:6)의 특성을 드러낸다. 그 내용은 사람이 ‘바람’ 자체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부는 소리를 통해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바람’의 존재와 방향 따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16 이 ‘바람’의 유비를 통해 예수께서는 ‘영으로부터 태어난 자’를 이해함에 있어 6절에서 언급된 ‘육’과 ‘영’의 대조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며, 특별히 ‘영’의 독특성과 고유함을 고려해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9] 니고데모가 대답하며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이 일들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일들’(tau/ta)은 앞에 나온 예수님의 가르침들에 대한 것이다.
[10] 예수께서 대답하며 그에게 말했다: “너 자신이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그런데 너는 이 일들을 알지 못하는가? ‘이스라엘의 선생’(o` dida,skaloj tou/ VIsrah,l)에서 ‘선생’에 해당하는 명사는 관사를 포함하고 있다(o` dida,skaloj). 관사의 존재17는 니고데모가 ‘이스라엘’과 관련한 특별한 선생임을 가리킬 수도 있고 아니면 선생의 그룹의 일원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도 있다. 한편,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 나라나 민족을 나타낼 수도 있고 혹은 ‘이스라엘의 율법과 전통’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만약 전자라면 이는 니고데모의 출신이나 배경을 말해 주고, 후자라면 니고데모의 직업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니고데모가 2절에서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는 반면,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헬라어 단어 ‘디다스깔로스’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둘은 의미와 기능상 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2절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로 불렀으나 곧바로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자신도 스스로를 ‘디다스깔로스’를 사용해 불렀기 때문이다(요 11:28; 13:13, 14).
[11]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본 것을 우리는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취하지 않는다. ‘우리’와 ‘너희’가 대조된다. 동시에 ‘우리’가 하는 일과 ‘너희’가 하는 일 역시 대조된다. 즉, ‘우리’는 아는 것을 이야기하고 본 것을 증언하는 반면, ‘너희’는 ‘우리의 증언’, 곧 ‘우리’가 알고 보았던 것을 부정한다. 이 대조가 되는 두 그룹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 및 향후 제자가 될 자들을 가리키며, ‘너희’는 니고데모를 위시한 그의 제자들이나 유대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18 그러나 이러한 사항보다 중요한 점은 ‘너희’가 증언을 취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증언을 취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가 알았고 ‘우리’가 본 것들을 부정한 것이다. 이는 결국 진실에 대한 부정이요 ‘우리’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요한복음을 통해 제시될 사건들을 통해 예수를 ‘앎’과 ‘봄’을 통한 증거의 반응이 신앙에 있어 결정적인 것임을 암시해 준다(참조, 요 20:31).
[12] 만약 내가 땅에 속한 것들을 너희에게 말했지만 너희가 믿지 않는다면, 만약 내가 너희에게 하늘에 속한 것들을 말한다면 어떻게 너희가 믿겠는가? 12절은 사실과 관련된 조건절이다. 즉, 첫 번째 ‘만약’ 조건절은 일반적 조건을 지시하며(조건법 제1식), 이는 ‘어떻게’로 시작되는 귀결절의 결론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 문장에 ‘만약 … 말한다면’이 포함되어 다시 한 번 ‘어떻게 너희가 믿겠는가?’ 문장의 조건을 제시한다. 이때 두 번째 ‘만약’ 조건절은 조건에 따라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농후한 사항을 말한다(조건법 제3식).19 이 이중 조건절 문장을 통해 예수님은, 믿음은 예수님께 ‘말씀’을 듣는 것에서 나오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을 자들에게는 믿는 일이 결단코 쉬운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이는 앞서 언급한 ‘우리’와 ‘너희’의 확실한 구분을 드러낸다. 한편, 이 조건절에서는 ‘땅에 속한 것들’과 ‘하늘에 속한 것들’이 대조된다. 이 표현들이 하늘과 땅의 이원론적 대조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땅에 속한 것들’을 통한 설명을 믿을 수 있다면 ‘하늘에 속한 것들’도 믿을 수 있게 되는 연속성을 드러낸다(참조, 마 6:10). 다만 문맥상 이 두 사항이 대조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다. 한편 ‘땅에 속한 것들’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한 3-8절의 내용을 가리키며, ‘하늘에 속한 것들’은 향후 그에게 주실 13-15절의 내용을 가리킨다.20
[13] 그렇기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 곧 인자(人子)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하늘 안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13절에서 언급하는 내려옴과 올라감의 주제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위로부터’에 대한 대화를 보충한다.21 그러나 이전의 대화와 달리 내려옴(비교. ‘위로부터’[3, 4, 7절. 참조, 31절])의 의미를 자신을 나타내는 ‘인자’로 특정하고, 내려옴 곧 ‘위로부터’의 의미를 ‘하늘 안으로’ 올라감으로 설명함으로 하늘에 속한 즉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 준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 역시 그 사건을 목도(目睹)하고 알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12절). 13절의 말씀은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견한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물론 처음으로 예수님을 배우게 된 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배경(헬라 신화나 유대 신화)을 가지고 이 말을 이해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20:30-31에 언급되었듯이 사도 요한의 저술 목적은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혹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예수임)을 믿어 영생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시도했다. 그 부분이 바로 이후의 14-21절이다. 물론, 이 말은 소위 역사 비평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름 모를 편집자에 의한 편집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꼭 기억해야 한다. 반대로 초대교회 사도들과 그 외의 성경 저자들은 최초 성도들을 위해 성경 말씀을 기록하도록 선별된 이들로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목양의 사역을 감당했고, 하나님께서 그 점을 허락하시어 성경 말씀을 기록하게 했기에 이들에게는 성경을 대필할 자격과 더불어 진리를 분명히 드러낼 사명까지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14-21절의 내용은 그러한 사명 가운데 제시된 1-13절의 내용에 대한(특별히 13절의 말씀) 정통 설명으로 이해해야 한다.
[14] 부연하자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였던 것처럼 이렇게 인자가 높이 들려야 한다. 14절은 예수께서 13절에서 ‘인자’의 내려옴과 올라감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단락에서 사도 요한은 더 이상 내려옴 ― 올라감의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휩소오’(u`yo,w) 동사를 사용하는데, 이 용어는 향후 예수님에 의해 십자가 사건을 암시하는 용어로 사용된다(요 8:28; 12:32, 34[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예수님의 말씀 인용]). 주의할 점은 향후 이 용어가 예수님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14-15절의 내용이 1-13절에 속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절은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올라감’을 이 용어로 설명한 것은 이후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사용될 용어를 미리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참조, 요한복음 12:33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개역개정]라고 설명한다.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높아짐을 모세가 만든 놋 뱀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참조, 민 21:4-9). 사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들려야 한다는 설명을 하셨을 때(요 8:28; 12:32) 놋 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동시에 모세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요 5:45; 6:32; 7:19. 참조, 1:17, 45; 5:46; 7:22ab, 23; 8:5; 9:28, 29). 따라서 사도 요한의 설명의 초점은 놋 뱀을 든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모세에 의해) 들린 놋 뱀과 그것을 통해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에 놓여진다(민 21:8[“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사건이었음을 드러내며, 그 은혜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놋 뱀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모세가 하나님에 뜻에 순종해 행한 일이 은혜와 회복을 가져온 것과 같이 최초 청중인 유대인들이 사랑하는 모세처럼(요 9:28b[“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순종해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놋 뱀 사건으로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 [이는]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영생(永生)을 소유하기 위한 것이다. 14절에서 설명했듯이 십자가 사건의 본질적 목적과 더불어 그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데, 이 구절에 사용된 어휘들은 요한복음 20:31을 연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14절의 내용이 사도 요한의 정통 설명임을 지지해 준다.22
 
[16]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했다. 그래서 유일무이한 아들을 주셨다. 이는 그를 믿는 모든 자가 멸망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이다. 14-15절의 근거를 제공한다. 즉, 하나님께서 인자를 들리게 하시고 그를 믿는 자로 영생을 소유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거동사가 사용된 것은 이미 그러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를 14절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본다면,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다. 질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 세상 전부에 대한 보편 구원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혹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보편적이라며 만인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14-15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듯이 하나님께서 인자를 높이신 것은 그를 믿는 자들을 통해 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민수기의 비유를 통해 보건대 모두가 볼 수 있는 놋 뱀이지만 그것을 본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항을 통해 볼 때,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속성 혹은 본질과 실제로 구원 사역을 이루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결정에 따른 것임을 드러내 준다. 16절에서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의 구체적인 행동이 바로 ‘유일무이한 아들’을 주신 것이며,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즉, 그를 믿는 것)만이 그 구원에 동참할 수 있는 길임을 분명히 드러낸다(참조, 요 20:31). 그러나 여전히 사도 요한은 ‘믿는 모든 자’를 언급한다.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부연하는 단락이기에 이 사람들은 분명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는 사람들 모두(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23
[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이는 그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세상이 구원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16절에 언급된 사항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던’ 행위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해 세상이 구원받도록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곧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세상을 권하려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16절에 언급한 사랑의 증표이다.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받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우선 예수를 믿는 자에 대해 ‘심판을 받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현재 동사로 표현된 이 표현은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금언의 현재). 한편 ‘심판받았다’(ke,kritai)와 ‘믿지 않았기’(mh. pepi,steuken)에 사용된 완료형 헬라어 동사 역시 금언을 나타낸다.24 주의해야 할 사항은 비록 금언을 나타내는 것이 동일하더라도, 완료형태 동사가 현재형 동사보다 더욱 강조점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강조는 18절에 제시된 동사의 배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위의 배열을 보면 ‘믿다’ 동사와 ‘심판하다’ 동사가 교차적으로 등장한다(요 1:1의 ‘로고스’와 ‘하나님’의 교차배열 비교). 흥미로운 점은, 세 번째 ‘믿다’ 동사가 부정형이 되었을 때 네 번째 ‘심판하다’ 동사가 완료형이 되고, 다섯 번째 ‘믿다’ 동사 역시 완료형이 된다는 점이다. 마지막 ‘믿다’ 동사는 네 번째 ‘심판하다’ 동사의 의미, 곧 ‘심판을 받았다’의 이유를 나타내기에 동등한 비중이 있어 완료형으로 등장한다. 이에 반해, 세 번째 ‘믿다’ 동사와 네 번째 ‘심판하다’ 동사의 시제 변화는 ‘믿다’ 동사의 부정의 결과가 강조되기 때문이다(반면, 첫 번째와 두 번째 동사에서 보듯이 믿는 경우에 심판받지 않는 것은 단순한 사실로 제시된다). 따라서 18절이 분명히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심판과 관련해 중요한 사항이 된다는 것이다.
[19] 그리고 이것이 그 판결이다. 곧,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들이 악했기 때문이었다.  18절에서 언급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판결을 제시한다. 그 내용은 이미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의 서론(프롤로그, 요 1:1-18)에서도 언급한 사항과 관련된다. 요한복음 1:5와 1:11은 각각 “그리고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추고 있었으나 어둠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와 “그가 자신에게 속한 것들로 왔다. 그러나 자신에게 속한 이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이 구절들에는 19절에도 등장하는 ‘빛’과 ‘어두움’과 동일한 단어가 등장하며, 의미상 ‘세상’과 동일한 개념인 ‘자신에게 속한 것들’이 사용되었다. 또한 이것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개념은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사도 요한의 설명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믿을 자와 믿지 않을 자, 곧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의 구분이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그리고 하반절에서 믿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성격을 분명한 언어로 묘사한다: “그들의 일들이 악했기 때문이었다.” ‘악한’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뽀네라’(ponhra,)로 이 단어는 요한복음 7:7과 17:15에서 예수님과 반대되는 세력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19절의 ‘그들의 일들이 악했기 때문’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그들이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어두움을 더 사랑한 자들의 행위들이 예수님과 반대되는 것들이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악함은 헬라어 구문을 통해서도 더욱 분명히 강조된다:
 
이 구분에서 특이한 점은 ‘그들의’(①/ⓐ)라는 소유대명사가 ‘(그) 일들이’(③/ⓑ)라는 표현을 한정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헬라어 어순상 ‘(그) 일들이’라는 표현 뒤에 등장해야 하는데(즉, ‘따 에르가’ ‘아우똔’), 그 일반적 어순을 따르지 않고 ‘아우똔’이 앞에 놓였으며 더욱이 ‘악했기’를 나타내는 ‘뽀네라’(②/ⓒ)에 의해 두 단어가 분리되어, 결국 ‘그들의 행위들’이라는 표현 사이에 ‘악했기’라는 표현이 위치된 것처럼 보인다(국문은 이 표현을 전달할 수 없음). 이러한 배열은 분명히 정상 어순을 분리하고 들어간 어휘에 초점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들이 받은 판결의 가장 근본적 원인은 바로 ‘그들의 일들이 악했기’, 즉 예수님과 반대되는 일들 때문이었음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20-21] 그러므로 저급한 일들을 실천하는 모든 자는 빛을 미워하니, 곧 빛에게 오지 않는다. 그 결과 그 사람의 일들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에게 온다. 그 결과 그 사람의 일들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20절은 21절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19절과의 연관성을 고려해 우선 ‘빛’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21절에서는 이와 대조되는 ‘빛’으로 나오는 사람에 대해 언급한다. 이 두 경우 모두 19절에서 언급된 ‘일들’과 관련된 설명을 제공한다. 이 둘의 대조는 극명하다.
 
이러한 대조는 20-21절에 사용된 모호한 표현들의 의미를 분명히 드러낸다. 즉, 20절의 ‘간사한 것들’을 의미하는 단어 ‘파울라’(fau/la)의 의미는 21절의 ‘진리’에 견주지 못하거나 문맥상 반대되는 것, 즉 ‘저급한 것들’을 의미한다. 20절에서 ‘미워’하는 것은 그 빛에게 나오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고 언급되는데, 그렇다면 21절에 빛으로 온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한다(참조, 요 3:16). 그 결과 ‘저급한 것들을 실천’하는 자들의 일들은 감추어지는 반면 ‘진리를 행하는 자’의 일들은 밝히 드러날 것인데, 이는 전자의 일들이 19절에서 언급된바 악하기 때문, 곧 예수님과 반대되기 때문이고 전자의 일들은 21절에서 언급된바 하나님 안, 곧 그가 보내신 이와 관련해 이뤄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18절에 언급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분과 일맥상통한다. 
2. 세례 요한에 대해: 예수께서 흥해야 한다(22-36절).
[22] 이 일들 후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유대 땅으로 갔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그들과 지속적으로 함께했고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이 일들 후에’는 단순히 니고데모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절기에 행한 일들까지 가리킨다.25 사실 니고데모가 예수께서 절기에 행하신 일을 보고 밤에 찾아왔기에 그 사건들은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경우 가족은 함께하지 않았다)은 모든 사역을 마치고 ‘유대 땅’으로 갔다. 물론, 이 말은 예수께서 다른 지역에 있다가 ‘유대 땅’으로 왔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머물던 예수께서는(2:23), 그 좁은 경내를 벗어나 한 유대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으며,26 그곳에 머물며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라는 표현은 예수께서도 세례를 통한 사역을 감당했음을 보여 주며, 이제야 비로소 직접적인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27 다만, 요한복음 4:2를 참조해 보면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주시지는 않았다. 따라서 22절의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라는 표현은 세례를 주는 행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유대 사람들에 대해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했음 혹은 인지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시이다.
[23-24] 그리고 요한도 살렘 근처의 애논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많은 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와 세례를 받곤 했다. 물론 요한이 아직 감옥에 던져지지 않았다. 세례가 공식적 사역의 표시가 된다는 점은 23절에 언급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을 통해 확증된다. 세례 요한은 살렘 근처 애논에서 세례를 주었는데, 셈어로 ‘샘’을 의미하는 의미를 가진28 애논에는 물이 풍부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사역을 감당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이끌리어 나아와 세례를 받곤 했다. 다만, 애논은 사마리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로마의 유대 속주에 속한 지역이었기에29 ‘유대 땅’이라 불릴 수 있었다. 만약 23절이 22절과 연관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사역지가 가까운 지역임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이는 4장에서 언급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가에서의 만남을 부분적으로 암시해 주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30 다만, 요한복음 1:28은 세례 요한이 세례 주던 장소를 ‘요단 건너편 베다니’라고 언급하는데(그 장소는 명확하지 않지만 나사로의 고향 베다니가 아닌[여리고 맞은 편, 요 11:1], 갈릴리 근교인 것으로 추정된다[참조. 요 11:3, 6, 17-18, 54]31)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이 시점에 사역지를 남쪽으로 이동했으며 또한 헤롯에 의해 투옥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회개를 선포하는 세례의 사역을 감당했을 것이다(24절).
[25] 그러므로 정결에 대해 요한의 제자들 중 [일부와] 한 유대인과의 논쟁이 있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여는 문구이다. ‘그러므로’라는 표현은 세례 요한의 사역(23-24절)과 본 대화의 연관성을 명시적으로 연결해 준다. 흥미로운 것은 ‘정결’ 논쟁의 내용과 관련된 26-30절의 내용은 정결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세례 사역과 관련된 내용을 기술한다. 게다가 ‘한 유대인’이라는 불특정한 인물의 등장은 본 대화의 내용이 주제에 대한 대화가 아닌 일상적인 대화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한 유대인과의 대화로 발생한 ‘정결’ 논쟁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비교 혹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32
[26] 그리고 그들이 요한에게 왔고 그에게 말했다: “랍비여, 요단 강 건너편에서 당신과 함께 있었던 분, 당신 자신이 증거 했던 사람, 보십시오, 이 사람이 세례를 주며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로 갑니다.” ‘요단 강 건너편’은 요한복음 1:28 이후에 등장하는 기사를 지적한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 1:29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세례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선포만이 드러날 뿐 그가 예수님과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지만, 26절의 제자들의 말에서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과 함께했음이 암시된다. 물론, 이 말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함께 살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1장에서 받은 인상처럼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이 둘이 전혀 대화가 없었음을 말하지도 않는다. 한편 ‘당신 자신이 증거했던’(su. memartu,rhkaj)의 표현은 강조구문으로 되어 있다. 즉, 인칭대명사(su,)가 등장해 증거자가 강조되고, 동시에 ‘증거했던’의 동사를 완료형(memartu,rhkaj)으로 표현해 증거의 지속성을 드러내 강조하거나 완료형의 선택을 통해 증거 행위를 강조한다. 이 표현은 요한복음 1:34의 세례 요한의 말, “나 역시 …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다”(kavgw  memartu,rhka o[ti ou-to,j evstin o` ui`o.j tou/ qeou/)에 대한 일종의 인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밑줄 친 부분에 주의하라). 이는 이들이 세례 요한을 ‘랍비’로 부르는 제자들이었기 때문에33 이 증언을 문자 그대로 받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 보고에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주며(참조, 요 4:2)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로 간다’(pa,ntej e;rcontai pro.j auvto,n)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앞선 25절에서의 정결 논쟁에서 그 주제가 핵심이 아닌 세례자가 누구인가가 핵심이 된다는 근거가 된다. 한편, 근접 문맥에서 예수께 나아감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부분에 대해서는 21절을 참조하라(o` de. poiw/n th.n avlh,qeian e;rcetai pro.j to. fw/j 밑줄 친 부분에 주의하라).
[27] 요한이 대답하며 말했다: “사람은 만약 하늘로부터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것 하나도 취할 수 없다. 27절의 요한의 대답은 앞서 언급된 세례자에 대한 답변을 이룬다. 그 내용의 핵심은, 이미 요한복음 1:19-34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자신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 대답을 위해 세례 요한은 조건절을 사용해 보편적 진리를 언급한다(조건절 제5식). 즉, 만약 모든 자들이 예수께 간다면 그것은 ‘하늘’ 곧 하나님께서34 그에게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부정을 2회 반복하는 강한 부정으로 강조된다. 즉, ‘우 … 안트로뽀스’(ouv  a;nqrwpoj)와 ‘우데 헨’(ouvde. e[n)이다. 전자는 ‘아무도 아니’(nobody, none)에 대한 셈어적 표현(헬라어적 표현은  ouvdei,j)이며 후자는 하나마저 부정하는 표현이다.35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확신을 재차 확인해 준다.
[28] 바로 너희가 나에 대해 ‘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저 사람 앞에 보냄을 받았다고 내가 말했음을 증언하라. 27절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힘을 실은 세례 요한은 이제 자신의 증언을 넘어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존재와 사역의 한계점을 인지하고 증언할 것을 명령한다. 이러한 명령은 자신이 이미 자신의 존재와 사역의 의미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요 1:30) 여전히 자신과 예수님을 대조하려는 제자들에게(요 3:2636) 더 이상 혼란을 겪지 말고 자신의 제자라면 자신이 선포한 사항을 증거할 것을 명령한다.
[29-30]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그러나 신랑의 친구, 곧 서서 그를 듣는 자는 신랑의 목소리 때문에 진정 기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 기쁨이 가득 찼다. 그는 흥해야 하고, 반면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 29절에서 세례 요한은 결혼식 주인공을 주제로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비유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인기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26절). 그러나 오히려 28절에서 세례 요한은 제자들이 행해야 할 일은 질투가 아니라, 선생인 자신의 말 곧 자신이 예수님을 예비하기 위해 이 땅에 왔음을 ‘증거하라’라고 명했다. 이러한 중심을 세례 요한은 ‘신랑’과 ‘신랑의 친구’의 관계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설명했다. 고대 세계 결혼식에서 ‘신랑의 친구’는 친구(곧, 신랑)의 결혼식 전체를 주관할 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37 따라서 신랑의 친구는 결혼식에서 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신랑의 ‘들러리’였다. 결혼식의 진정한 목적, 즉 신부를 취해 가족을 이루는 결혼식의 참된 주인공은 바로 신랑이다. 그가 중요한 것은 ‘들러리’로서 신랑 곁에 서서 필요에 따른 요청을 듣고 실행해 결혼식이 온전히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임무 때문이다. 결혼식이 참된 기쁨으로 넘치도록 하는 일이 그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랑의 친구’의 ‘기쁨’은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신부를 취하는 일에 있지 않고, 결혼식이 잘 진행되어 신랑의 목소리로 모든 것들이 완전하게 끝마쳐졌을 때 진정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갔을 때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의 결과에 대해 “이러한 내 기쁨이 가득 찼다”라는 말로 기쁨을 표현했다. 주의해 보아야 할 점은 이 기쁨의 표현에 ‘이러한’이라는 지시 형용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지시 형용사의 등장은 자신의 기쁨이 특정일과 관련된 것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또한 기쁨이 ‘가득 찼다’(peplh,rwtai)라고 말할 때 완료형 동사를 사용하는데, 이는 예수께 나아가는 사람들로 인해 그가 현재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이며(완료의 상태 표시), 동시에 그의 기쁨은 완전함을 강조한 것이다(완료형의 두드러짐). 세례 요한은 30절에서 흥함과 쇠함의 대조를 통해 자신의 역할의 한계를 표현한다.
[31] 위로부터 오는 자는 모든 것들 위에 있다. 땅에 속한 자는 땅에 속하고 땅으로부터 이야기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자는[모든 것들 위에 있다]. 사도 요한은 31-36절에서 재차 부연 설명을 통해 예수께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분임을 명시한다. 우선,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핵심 단어인 ‘위로부터’에 대해 언급한다. 즉 ‘위로부터’ 온 자는 모든 것 위에 있고, 땅에 속한 것은 오직 땅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12절의 말씀을 반영한다. 한편, ‘위로부터’ 온 자가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온 자로 구체화된다. ‘하늘’과 관련된 사항은 27절을 연상하게 하며, 결국 그로부터 온 자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 요한은 1:6에서 세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께 적용된 ‘하늘로부터’에 사용된 전치사 ‘에끄’(evk)는 소속이나 출신을 가리키고, 세례 요한에게 적용된 ‘하나님으로부터’에 사용된 전치사 ‘빠라’(para,)는 ‘곁에’ 혹은 ‘~편에서’라는 위치의 의미를 갖는다. 물론, 간혹 전치사 ‘휘뽀’(u`po)처럼 ‘~에 의해’를 의미하기도 한다.38 ‘빠라’가 어떤 의미를 취하든지 간에 소속이나 출신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끄’와 차이를 보인다. 여하튼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모든 것들’ 위에 있는, 땅과는 비견할 수 없는 하늘에 속한 분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 사항을 니고데모와의 대화 내용과 세례 요한의 선언 내용을 염두에 두고 기술함으로 예수님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킨다.
[32-33] 그가 보았고 들었던 것, 이것을 그가 증거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의 증거를 취하지 않는다. 그의 증거를 취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에 도장을 찍었다. 32절은 ‘위로부터 오는 자’가 하늘 곧 하나님께 속했기에 그가 가진 우월성을 재차 표현한다. 그의 우월함은 ‘그가 보았고 들었던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특별히 그 보고 들은 것을 지시대명사 ‘이것’으로 한 번 표현함으로 강조한다(비교. 관계대명사만 제시한 경우, 요 3:11; 8:38. 참조, 요일 1:1, 3). 한편, 해리스는 그가 보고 들은 것은 그의 선재(preincarnate)와 성육신(incarnate) 때의 성부와의 교제의 결과라고 지적한다.39 이러한 예수님의 우월성은 그와 관련된 자들에게 부여된 은혜이기도 하다. 즉, 세례 요한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봄으로 선포했고(요 1:32-33),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인 사도 요한 역시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것을 증거했다(요 20:30; 21:24). 요한일서 1:3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보고 들은 바’를 전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그의 증거를 취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요한복음 1:10-11에서 언급되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태도를 보인 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요한복음 12:37은 다음과 같이 그들의 태도를 기술한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참조, 요 7:23). 그러나 ‘그의 증거를 취하는 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참되다’는 사실에 도장을 찍은 것이다. ‘도장을 찍었다’(evsfra,gisen)라는 표현은 고대 세계에서는 인장을 찍었다는 것을 말하며(개역개정, ‘인쳤느니라’), 이 행위를 통해 ‘어떤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증하거나 보증’하는 것을 말한다.40 이런 결과가 가능한 것은 오직 예수께서 행하신 증거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원문의 교차 배열로 잘 드러난다.
 

위의 표를 보면 ‘증거(a)-증거자(b)-취하지 않는 자(c)-취하는 자(c′)-증거자(b′)-증거(a′)’의 구조가 등장한다. 이런 구조의 경우 일반적으로 중앙에 위치한 c와 c′에 초점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32-33절에서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하는, 곧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증거를 취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3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하나님의]] 말씀들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을 측량치 않고 주시기 때문이다. 31절 이하의 보충 부분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35-36절에서 ‘아들’에 대한 언급이 등장해 앞서 언급한 대상이 예수님임을 분명히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34절의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누구이며, ‘영’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o]n ga.r avpe,steilen o` qeo,j)와 관련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사실, 이 사람은 세례 요한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6에서 그는 하나님께 보냄 받은 자(VEge,neto a;nqrwpoj( avpestalme,noj para. qeou/ 밑줄 친 부분을 주의하라)로 묘사되는데, 이때 34절에 사용된 동일한 단어들(avpe,steilen( o` qeo,j)로 소개되었다. 한편, 누가복음 3:2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evge,neto r`h/ma qeou/ evpi. VIwa,nnhn 밑줄 친 부분에 주의하라)이 세례 요한에게 임했고 그의 사역이 시작되었는데, 34절에서 동일한 단어들(ta. r`h,mata( tou/ qeou/)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세례 요한일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선 단락 25-30절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증언의 핵심과 31절 이후 사도 요한의 부연 설명의 핵심은 예수님의 우월함이기 때문이다. 다만, 변하지 않는 진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 곧 세례 요한은 물론 모든 성도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다(참조, 요 6:65). 그러나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시다(요 5:19-20, 30; 6:29). 이 점이 두 번째 질문과 연관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영’을 주시는 분(di,dwsin to. pneu/ma)이 누구신가? ‘주다’ 동사의 주어가 생략된 것을 볼 때, 앞선 구절의 ‘이야기하다’ 동사의 주어가 이 동사의 숨은 주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영’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 된다(사실, 이러한 측면에서 세례 요한이 앞선 문장의 주어가 될 수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영을 소유하셨을 뿐만 아니라(요 1:32, 33; 6:63) 영을 공급하는 분이시기도 했다(요 7:37-39; 14:16; 15:26; 20:22). 그러나 문맥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일반적으로 ‘영’의 수여자이지 공급자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성경의 역사를 통해 ‘영’을 공급하신 주체는 사명자를 보내신 하나님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비록 향후 예수께서도 이 사역을 감당하셨지만 적어도 세례 요한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34절의 ‘영’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41 ‘측량치 않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내셨고 보내실 사명자들(결정적인 사건으로 예수님. 아래 35-36절 참조)에게 ‘영’을 지속적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며,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보다 분명히 제공될 것임을 가리킨다(참조, 요 4:24; 7:39; 14:17; 16:13).
[35-36]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그의 손에 모든 것들을 주셨다.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한다. 그러나 그 아들에게 불복하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며, 대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로 머문다. 35-36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우월함의 근거를 아들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둔다(참조, 요 5:2042).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에게만 제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요한복음 3:16에서 언급된바 세상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세상이 구원 받도록 자신이 사랑하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육에 속하지 않았다(참조, 요 3:6). 그의 사랑은 자신의 뜻을 성취함과 관련된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하나’이셨기 때문에(요 10:30), 그의 뜻을 온전히 알아 그 일을 완전히 성취할 분이셨다(요 5:19-20, 30; 6:29).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에 ‘모든 것들’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단순히 소유권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36절에 언급된바 구원을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그 소유권을 주장하신 대표적인 예는 자신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따른 ‘양’에게 ‘영생’을 주며, 멸망당하지 않게 하고 또한 자신의 ‘손에서’빼앗기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다(요 10:27-28). 이는 예수님의 소유권이 결국 복음 사역을 위한 것임을 드러낸다(참조, 마 28:19). 이러한 사항은 36절의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확증된다. 그리고 이 점은 요한복음의 전체 목적 곧 ‘너희로 믿고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함’과도 조화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구절에서 사도 요한이 ‘영생’의 소유를 ‘소유한다’라는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영생’은 미래적 소망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영생’을 단순히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 누리는 실재(‘a present reality’)로 제시한다. 즉, 미래의 ‘영생’을 먼저 맛보는 것이다.43 반면에 ‘그 아들에게 불복하는 자’는 생명은커녕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참조, 롬 1:18).

현대적 적용
[10] 예수께서 대답하며 그에게 말했다: “너 자신이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그런데 너는 이 일들을 알지 못하는가? 개인의 능력에 따라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의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이 오늘날에는 그냥 재미있는 옛말이 되었다고 한다.44 사람들은 이제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보다는 혹자가 가진 배경과 힘에 따라 이미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어 있다고 본다. 인식들과 경험들은 사회를 양극화하며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불안 상태를 해소해야 할 책임자들이 준비가 부족해 오히려 정책들이 사회불안을 더 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데 있다. 결국 이러한 불신이 한국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으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교회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유서(由緖) 깊은 기독교 가정들이 오히려 깊은 신앙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아주 드물지만 신앙의 연수가 기득권화 되는 경우들이 있다. 이로 인해 새로 온 성도들이 교회를 섬길 기회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생기며, 이는 목회자 세계에서도 발생하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되는 주요 문제는 혜택을 누린 자들의 자질인데, 기득권층은 그들이 가진 내력(來歷) 자체가 실력이요 자질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계층 자체는 일차적으로 자질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신분에 불과한 것이다.
10절에 등장하는 니고데모 역시 유대 지도자의 신분을 지닌 자요, 더 나아가 예수님을 찾아올 만큼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다(1-2절). 그러나 정작 예수님을 만나 대화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3-9절). 단지, 니고데모는 지도자의 신분을 갖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 자신이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그런데 너는 이 일들을 알지 못하는가?”(10절). 이에 반해,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은 비록 그 신분과 처지가 예수님을 대면할 수 없는 자였지만, 결국 예수님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진리의 길로 나갔음을 성경의 증언을 통해 발견한다(요 4:5-30). 성도들은 기억해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 즉 형편으로 취하지 않으신다(삼상 16:7; 행 10:34. 참조. 약 2:1-13).
[25-26] 그러므로 정결에 대해 요한의 제자들 중 [일부와] 한 유대인과의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요한에게 왔고 그에게 말했다: “랍비여, 요단 강 건너편에서 당신과 함께 있었던 분, 당신 자신이 증거 했던 사람, 보십시오, 이 사람이 세례를 주며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로 갑니다.” 정보의 홍수 시대를 넘어서 가짜 뉴스가 기승을 부리는 시대가 되었다. 가짜 뉴스는 특정한 사항에 대해 부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거나 의도적으로 내용을 변경 및 조작한 뉴스를 말하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으로 이미 수년 전에 방송에서 이 문제를 다룬 경우도 있다.45 문제는 이런 가짜 뉴스를 통해 사회가 분열되고, 더 나아가 진실과 거짓이 혼동됨으로 사회 자체가 불신화 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사실, 가짜 뉴스를 드러내고 그 정보를 바로 잡는 것만으로도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소시키거나 경감시킬 수 있다.
이런 예가 성경에도 등장한다. 26-27절에서 잘못된 소식에 근거한 하나님 나라 사역의 분열 조짐이 발견된다. 특별히 26절에서 세례 요한의 한 제자가 그에게 와 “랍비여, 요단 강 건너편에서 당신과 함께 있었던 분, 당신 자신이 증거 했던 사람, 보십시오, 이 사람이 세례를 주며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로 갑니다”라고 불평하며 문제를 제기한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불평에 대해 27-31절에서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제자에게 자세히 설명함으로 불평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요한복음 4:2에서 사도 요한이 “하지만 예수 그 자신이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주곤 했다]”라고 보고한 것이다. 이 말은 제자가 언급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게다가 요한복음 4:2의 말씀은 4:1에서 언급된 내용,  즉“바리새인들이 ‘예수가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들을 만들로 세례를 준다’는 것을 들었다는 사실”을 교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 역시 세례 요한의 제자처럼 소문만 듣고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가짜 정보를 담은 소문이 적절하지 못한 판단과 반응을 야기한 것이다.
성도도 가짜 뉴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가 성도 자신의 생각에 나쁜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신앙의 모습에도 그릇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가짜 뉴스로 복음을 오염시켜 전하는 자들(거짓 교사들)로 인해 기독교 진리 자체가 일그러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따라서 성도 각자는 자신의 신앙과 생각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판단의 근거를 오직 성경에 두고 건전한 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설교: "사명에 붙잡힌 자가 되라!"(27-31절)
27-31절의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자신과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해 불평하는 맥락에서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바른 가르침으로 지도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사명자의 자세, 목적 및 태도에 대해 귀한 말씀을 전해 줍니다.
첫째, 자신이 부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27절에서 “사람은 만약 하늘로부터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것 하나도 취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적용되는 말씀이지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사명에 제자들을 초청했기에(마 28:16-20)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1-2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확신과 권고는 성도들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이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빌 3:14). 그러므로 현재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살피십시오.
둘째, 사명의 목표는 오직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29절에서 “신부를 취하는 것은 신랑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신랑의 결혼식에 비중 있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결국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하고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이 사실이 망각되곤 합니다. 성도들도 예수께 사명을 받아 일을 하다보면 이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특별히 이 땅을 살며 감당하는 사명은 세상의 기준에서 그 일의 종류와 분량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 차이는 성도들의 신분과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곤 합니다(참조, 고전 12:15-17).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각각을 ‘그 원하시는 대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2:18).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성도 각각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임을 명심하고(고전 12:27), 오직 예수의 이름을 위해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참조, 엡 2:20-22).  
셋째, 참된 기쁨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29-30절에서 예수님은 흥하고 자신은 더 작아질 때, 즉 오직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실 때 ‘내 기쁨’이 가득 찬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기쁨’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이는 임의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혹자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작아질 때조차 기뻐할 수 있을까요? 이는 내가 누구와 함께, 누구를 위해 있는 줄 알 때 가능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진 것을 알았기에(28절) 자신이 작아져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난 가운데 있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안에’ 있을 때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에게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7:38).  지금 이곳에서, 내 모습 그대로 사명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되길 바랍니다. 
82.
 
 

김주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한국성서대 신학대학원 출강. 안양석수교회 협동목사. 스텔렌보쉬대학교(Ph.D.). 저서로 《익스포지팅 요한이・삼서》 가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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