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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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19년  04월호 거룩의 부재시대에 거룩을 재발견하다 배정훈 교수의 거룩의 유산(1)

설교를 하기 위해 단에 올라갔을 때 수련회에 참석한 고등부 학생들의 둘째 날 열기는 고조되어 있었다. 꼭지를 따기만 하면 언제라도 터질 것 같은 성령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 열기의 현장으로 나를 밀어 넣어 학생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셨다. 거부할 수 없는 그 힘에 이끌려 단 위에 섰을 때 나는 아이들의 간절한 기다림 속에서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지쳐 있었던가? 오랜 시간 계속된 입시에 찌들고, 소통이 없는 가정에서, 틀어진 친구 관계에 상처 받은 영혼들이었다. 고 3병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전 휴학한 영인이의 측은한 눈빛, 고3 한 해가 너무 견디기 어려우면서도 힘든 친구를 위해 함께 울어 주던 선정이, 작년만 해도 수련회 오기가 겁났지만 이젠 가장 앞자리에서 기도 분위기를 이끌어 주는 명주, 내가 사람을 편애한다고 오해하고 짜증을 부리던 정현이, 그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앉아서 울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었다.

“하나님! 나는 아무 능력도 없지만 주님은 이들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늘 이 밤이 가기 전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저들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게 하옵소서!” 나의 설교는 간절한 탄식이었고, 죄악과 허물 속에 갇혀 절규하는 아이들을 대신한 울부짖음이었다. 체험적인 신앙과 뜨거운 신앙을 회피하고 도망치던 나였기에 아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그날 밤 우리에게 벅찬 감격으로 다가오셨다. 그날 아이들의 기도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서로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하며 기쁨으로 밤이 깊도록 기도했다. 이 얼마나 값진 순간인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상처를 치유받고, 기도하지 못하던 아이가 기도하는 경험이 수련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만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도 찾아오셔서 변화시키는 분이시다.

그날도 하나님은 오직 그분의 주권으로 임하셨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본격적으로 신앙을 접했으나 뜨거운 신앙 체험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경을 읽고 이론적으로 생각하고 토론하는 생활을 하던 나는 지적인 것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렇게 하나님 은혜가 임한 수련회도 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신앙적인 체험이 없어 신학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학교를 선택할 때도 망설였다. 사실상 열정적인 청년 시절에 낯설고 이질적인 하나님을 극복하기 위해, 친구들과 기도하는 곳을 찾아다니고 방언을 해보고 싶어서 애썼지만 좌절의 연속이었다. 수련회 때에 친구들은 기도하며 은혜를 받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구석으로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저 성경을 공부하는 것 이외에는 자신감이 없는, 온통 두려움을 간직한 신학생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피할 수 없는 그 자리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만 했다.

나는 수련회 한 달 전부터 아침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준비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순종하면서 그날을 기다렸다. 마음을 졸이면서 수련회가 시작되었고, 드디어 내가 단 위에 올라 설교하는 시간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이미 준비하셨고, 나는 단지 도구일 뿐이었다. 은사가 부족한 나를 사용하셔서 학생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나에게는 내가 가르치던 고등부 학생들에 대한 긍휼함과 안타까움만이 있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그분의 은혜만을 사모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이들을 만나 주셨다. 그날 하늘이 열렸다. 아이들의 마음이 열리고, 탄식하시는 성령의 음성이 들렸다. 아이들은 기뻐하며 울고, 기도하고, 사랑 가득한 대화를 나누었다. 

유학을 가기 전 전도사로서 마지막으로 가졌던 1991년도 여름 수련회에 하나님은 그렇게 임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계속 이어졌다. 미국 유학 중에 나는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담당 교육목사로 일했다. 평소에 주일학교 설교는 내가 하고, 중고등부는 영어를 잘하는 1.5세 교사에게 맡겼다. 그러나 매번 여름과 겨울의 수련회는 모두 내가 총 책임을 지고 진행해야 했다. 아이들이 낯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돕는 자리였다. 6년 동안 수련회를 진행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매번 경험했다.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기도 시간을 위해 철저한 준비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필요했다. 십자가를 지는 것, 묘비명을 쓰는 것, 아이들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 등등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세족식과 함께 교사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수련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들이 가장 좋아했다. 수련회에 다녀오기만 하면 하나님을 만난 감격으로 아이가 바뀌기 때문이었다. 능력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준비하는 사람일 뿐이다. 아이들을 끌어 안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성령의 임재는 언어를 초월해 아이들에게 임했고, 그들을 변화시켰다. 기도 시간마다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그 밤에 우리가 경험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였다.

아이들과 기도하면서 항상 질문했다. 내가 경험한 이 실재(實在=reality)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엄습하는 하나님의 임재. 그것은 과연 어떤 힘인가?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시달렸고 거부했던 억지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와 다르기에 놀라웠다. 누군가가 앞에서 열정적으로 기도를 인도할 때에도 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었다.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의 몸짓과 말투가 과장되게 느껴져셔일까?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님이 스스로 다가오시기보다는 우리가 그분을 끌어 내린다는 인상이 가득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분보다 앞서서 체험을 조작하면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고백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이 극에 달할 때 오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주권으로 그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때 다가오는 분이다. 그분은 자유롭게 임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분의 다가오심은 조용히 앉아서 말씀을 읽을 때 느끼는 하나님의 임재와 무엇인가 다르다. 그분이 나를 사용하여 아이들을 사로잡아 형언할 수 없는 거룩을 경험하게 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다가오심은 우리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를 정결케 하고, 결단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이 다가오시면 그분의 숨결을 느끼고, 그분으로 인해 하늘을 소망할 수 있다. 벅찬 감격과 함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느끼며, 죄에 저항할 수 있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임재 경험은 했지만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것은 평생 내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한국 교회에 외치라고 하는 거룩을 여는 출발이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 그것은 나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위기 때마다 성장시키고, 학문을 열어 주는 힘이었다.

거룩의 부재 시대

이 시대는 거룩의 부재 시대다. 거룩의 부재를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의 부재를 말하지 않고, 인간의 거룩의 부재를 문제 삼는다. 거룩에 실패한 기독교인들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모독을 받는 시대다. 거룩을 잃어버린 기독교, 거룩을 잃어버린 목회자, 거룩을 잃어버린 신앙인. 기독교인들의 슬픈 자화상이 연일 방송과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며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 목회자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소식보다는, 목회자의 타락으로 인해 세상 사람이 얼굴을 찌푸리는 시대다. 제도적인 남용과 금권 선거, 성적인 타락과 재물에 관한 탐욕 등으로 목회자는 이미 도를 넘어서서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의 안타까움과 조롱거리가 되었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의 역할보다는 악의 온상이라고 비판받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가치와 덕을 쌓기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귀영화와 영광을 얻기 위해 세상에 엎드려 절하고 있다. 거룩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존재감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악과 죄에 대해 오염되어 갈 뿐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교회와 거룩한 성도를 원하시는데, 교회와 세상에서 거룩의 부재를 초래한 이유는 무엇일까?

‘거룩’은 성경에서 성화만이 아니라 칭의에 함께 사용된다. 믿음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는 순간 우리는 존재론적인 거룩을 획득하여 칭의에 이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의 과정을 걸어감으로써 성화를 이룬다. 칭의가 신앙인의 출발이라면 성화는 계속적인 거룩의 과정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명령이다(레 19:2). 거룩은 하나님 백성이 된 후에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본받아 인간의 성품이 변화되는 것을 포함한다(벧후 1:4). 예수를 믿고 존재론적으로 거룩해졌지만, 우리는 아직 거룩의 종착점에 이르지 못했다.

거룩의 과정이 인간에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거룩의 부재는 교회사에서 반복되는 문제였다. 구약성경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시작된 랍비 유대교는 거룩의 왜곡을 통해 유대교 율법주의를 만들었고, 기독교는 유대교 율법주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형성되었다. 초대교회 때부터 기독교인들의 목표는 구원을 전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제도를 통해 시도했던 거룩의 추구가 거룩의 왜곡인 율법주의로 변질되자, 종교개혁자들은 칭의론의 재발견을 통해 교회를 초대교회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대는 칭의의 문제보다는 거룩의 문제가 대두되는 시대다. 종교개혁이 바울의 칭의론을 재발견했다면 다시 종교개혁 500년을 시작하는 이 시대는 바로 거룩을 재발견해야 하는 거룩의 부재 시대인 것이다.

거룩의 부재를 초래하는 장애물들

거룩이 신앙인의 삶에 그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룩의 부재를 경험하게 만드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거룩의 신학은 문제가 없는데 거룩의 실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의 신학부터 재정립이 필요하다. 거룩의 신학을 막는 몇 가지 장애물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 장애물은 전적 타자이시며 거룩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무관심이다. 거룩이라는 것은 전적 타자인 하나님을 대면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적 타자인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초월성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거룩의 여정을 시작하기 어렵다. 초월적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거룩은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는 자기 수양에 머물 뿐이다.

이성을 강조하던 모더니즘 시대에는 하나님의 초월성보다는 이신론적인 신관에 근거한 하나님의 내재성이 더 강조되었다. 이성과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모더니즘 시대가 가고 직관과 감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독교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시대에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불합리한 것으로 무시되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인간 중심의 사고가 사라지고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이 강조되면서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거룩, 하나님의 임재를 매개하는 성령, 그리고 성령과 관련되는 찬양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곧 기독교가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인간 중심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으로의 전환을 통해 거룩을 재발견하도록 도왔다.

두 번째 장애물은 레위기를 비롯한 구약의 제사장 문헌을 재해석하지 않고 무시하려는 시도다.2 개신교는 왜 제사장 문헌을 무시하게 되었는가?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 성취된 후에 제의적 계명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오직 윤리적인 계명만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제사장 문헌은 구원을 받은 후에 폐기될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거룩한 삶을 위해 필요한 성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 문헌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날마다 거룩해지는 경험을 했다. 개신교가 제사장 문헌을 폐기하지는 않았지만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거룩의 근원을 보여 주는 유산을 상실하고,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의 역동성을 상실하고, 삶에서는 거룩의 여정의 동력을 잃어버렸다.

세 번째 장애물은 제사장 문헌의 무시로 인해 개신교가 신명기 편향적인 신학을 견지하게 된 것이다. 구약성경은 선택과 계명을 강조하는 신명기와 거룩과 성화를 강조하는 제사장 문헌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제사장 문헌의 유산을 율법주의로 여기는 전제 아래 개신교는 구약성경을 신명기에서 나타나는 선택(칭의)과 계명(선행)으로 이해하게 된다. 신학의 한 축을 잃어버린 이러한 편향적인 신학은 곧 인간의 계명 준수를 강조하게 만들었다. 제사장 문헌을 무시한 결과, 기독교는 하나님의 임재를 고려하지 않음으로 예배가 역동적이지 않고 인간의 의지나 이성을 강조하는 종교가 되었다. 제사장 문헌과 균형을 이루지 못한 신명기 중심의 개신교 신학은 예배를 계명으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고려하지 않는 예배를 초래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배 가운데 계시의 내용인 진리는 강조하지만 계시의 형식인 하나님의 임재를 매개하는 성령을 무시함으로써 건조하고 차가운 예배, 의지와 이성이 강조되는 예배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임재를 중요시 하지 않는다면 예배는 목회자의 설교에 의존하는 불균형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말씀만을 강조하는 구조에서는 거룩의 신학이 나올 수 없고, 거룩을 무시한 말씀은 인간의 의지적인 산물이 될 위험이 있다. 거룩의 재발견이야말로 편향된 신학의 조정을 이루게 할 것이다.

네 번째 장애물은 거룩의 신학이 단지 예배만이 아니라 예배와 윤리로 이루어졌다는 인식의 부족이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가 없다면 거룩은 단지 인간의 윤리로 끝난다. 동시에 거룩을 체험한 결과가 일상적인 삶에서 인간의 윤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거룩은 일상의 삶을 무시하는 아편이 되고 말 것이다. 거룩을 일상의 삶과 유리된 것으로 이해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윤리 실종 시대가 되었다. 예배는 화려하게 드리면서도 예배가 윤리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부조화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배와 삶의 부조화는 오래전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회개하라고 부르짖었던 원인이고, 마침내 성전의 멸망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다시금 초래된 윤리 실종의 시대에 윤리의 동력을 얻기 위해 예배와 윤리로 이루어진 거룩을 재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장애물은 유대교 율법주의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유대교 율법주의는 왜곡된 거룩, 유사 거룩이다. 최근에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의 등장은 유대교 율법주의가 실제로는 없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대교 율법주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형성되었다. 유대교 율법주의 없이는 예수님과 바울의 메시지를 말하기 어렵다. 유대교 율법주의는 종교개혁자들이 직면했던 가톨릭 율법주의에서 다시 발견된다. 거룩의 왜곡이라고 볼 수 있는 유대교 율법주의나 가톨릭 율법주의는 처음부터 율법주의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더 완벽한 거룩의 과정을 제도적으로 추구하다가 왜곡되어 유사-거룩이 된 것이다. 유대교에서 거룩에 이르는 정결법과 로마 천주교에서 거룩에 이르는 성례전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상실했을 때에 유사-거룩인 율법주의에 빠졌다. 왜곡된 거룩인 율법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참된 거룩을 재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거룩의 전가와 거룩의 보존

제일 먼저 우리는 거룩의 근원(source)에 대해 살펴야 한다. 거룩은 인간이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거룩의 근원은 하나님이기에, 전적 타자(the Other)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에만 거룩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거룩을 경험한 사람에게 거룩의 여정이 시작된다. 거룩을 경험할 때 제사 또는 예수의 피로 인해 인간은 모든 악으로부터 정화되고, 원죄로 인해 타락했던 성품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벧후 1:4). 변화된 자들은 죄와 악을 멀리하고 선행을 한다.

거룩의 과정에는 거룩의 전가(轉嫁, transfer)와 거룩의 보존(保存, preservation)이 있다. 거룩의 전가란 인간이 거룩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는 거룩해질 수 없고 거룩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대면함으로써 하나님으로 인해 거룩해지는 것을 뜻한다. 거룩의 능력이 약해질 때마다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거룩을 전가 받아야 한다. 거룩의 보존이란 자신의 능력으로 거룩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룩을 전제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으로부터 전가 받은 거룩을 일상의 삶에서 보존하여 죄와 악을 처리하고 치유하여 성품의 변화에 이르게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거룩의 전가가 없다면 보존할 거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오는 거룩의 경험이 없이 인간의 의지나 제도로 거룩을 이루려다가 율법주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율법주의의 극복은 제도나 프로그램의 개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룩을 경험하기 위해 조작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 죄와 악의 노예로 어두운 삶을 사는 사람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임재에 노출되어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많이 체험할 필요가 있다. 거룩을 경험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전가된 거룩 가운데 더 많이 머물러야 한다.

이와 같이 거룩의 여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룩의 전가와 보존을 통해 이루어진다. 거룩의 여정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을 전가 받고, 일상을 거룩하게 살면서 선행을 하고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할지의 과정이 포함된다. 거룩의 여정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함으로 가능하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룩을 지키고 보존함으로써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 역사적으로 동방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룩의 전가를 강조하는 데 반해 서방 교회는 인간의 자기 수양을 통해 거룩에 이르는 거룩의 보존을 강조한다. 거룩의 원천은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거룩을 위해 완전히 수동적인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전가 받은 이 거룩을 보존하기 위해 악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세속적인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선행을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룩의 전가와 거룩의 보존 관점에서 보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성화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3 성화를 추진하는 거룩의 동력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는 것은 동방교회의 전통에서 나타난 신화(神化)의 개념과 유사하다. 동방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신화의 소명이 있었다. 타락한 이후 신화의 잠재력이 사라졌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통해 신화의 길이 열렸다. 신화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는 성령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동방 교회에 따르면 성령은 성화의 에너지이며, 신적 에너지인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은혜에 의해 신화가 구체화된다. 이러한 이해는 신비주의적인 영성의 발전을 가져왔다.4

동방 교회가 추구하는 신적인 에너지로서의 성령 이해는 구약의 제사장 문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유사하다. 이 에너지는 하나님의 다가오심에 노출될 때만 가능하다. 거룩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에너지가 되어 거룩하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경향은 인간이 신이 되려는 위험성이 있기에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자기 한계를 반드시 전제하며 전개해야 한다.

동방 교회와 다른 서방 교회의 전통은 성화를 하나님의 임재보다는 도덕적 수련으로 이해하면서, 중세에 금욕주의와 수도원주의라는 맥락에서 시도되었다. 이 연속선상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같은 책들이 종교개혁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정통주의 이후의 운동들에서 대륙의 경건주의, 영미의 청교도주의 그리고 웨슬리의 완전주의 형태로 강화되었다.5 이러한 시도는 성화를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을 통한 본성 자체의 고양에 머물러 자칫 도덕적 이상에 그치게 할 위험이 있다.

거룩의 여정을 위해 두 가지 교회의 유산은 서로 보완해야 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룩을 강조하는 동방 교회의 전통과 인간의 자기수양을 강조하는 서방 교회의 전통의 조화가 필요하다.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하지만, 이 감격과 에너지를 통해 계속적인 본성의 변화와 선행을 위한 인간의 노력도 중요하다. 본고에서 인간의 의지를 통해 이루는 거룩을 강조하는 그동안의 시도에 반하여 초월적인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체험에서 시작되는 거룩의 여정을 강조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체험은 이론이나 프로그램 또는 문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경외감을 가지고 피조물로 서야 가능한 역동적인 것이다. 거룩의 부재 시대에 전적 타자인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여정으로서의 거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비-제사장문헌에서 이스라엘의 거룩은 선택의 결과이다. 제사장 문헌에서 거룩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대상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본성의 방출이다.” Baruch J. Schwartz, “Israel’s Holiness: The Torah’s Traditions,” in M. J. H. M. Poorthuis & J. Schwartz eds, Purity and Holiness: The Heritage of Leviticus (Brill: Leiden, 2000), p. 58.
2) 모세오경 중에서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 제도와 관련된 문헌을 제사장 문헌(Priestly Literature)이라고 부르는데 제사장 문헌은 제사법전(Priestly Code)과 성결법전(Holiness)으로 이루어졌다. 제사법전의 주요 부분은 성막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성막 제작을 완료하는 출애굽기 25-31장; 35-40장, 그리고 제사제도와 정결법과 관련된 레위기 1-16장이다. 또한 창세기, 출애굽기 그리고 민수기 등에 나타나는 여러 구절들이 제사법전에 속한다. 성결법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삶을 다루는 레위기 17-26장을 가리킨다.
3)  이정석, 《하나님의 흔드심: 칼 바르트의 성화론》(서울: 새물결플러스, 2010), pp. 201-202.

4)  D. 클렌데닌, 《동방 정교회 신학》 주승민 옮김 (서울: 은성출판사, 1997).

5)  J.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5 vols. (Chicago, 1971-1989).

배정훈 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GTU(Ph.D.) 저서로 《하늘에서 오는 지혜》, 《정경 해석으로 바라본 묵시 문학》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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