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 {{x.scr_name}}
  • 미분류

신학·설교 2019년  03월호 3.1운동과 민족 독립에 힘썼던 길선주 · 안창호 3.1운동과 한국 교회(3)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목사


1. 신앙의 힘으로 민족의 아픔을 품다
길선주는 성균관 박사를 지냈던 야은 길재(1353-1419)의 19대손으로 1869년 3월 15일 평남도 안주읍에서 길봉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길선주의 어린 시절은 나라 안팎의 정세가 매우 어지러웠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던 청년 길선주는 책을 통해 읽고 배운 세상과 너무도 다른 현실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열아홉 되던 해 선도(仙道)에도 빠져들었다. 입산하여 3년을 정진했으나 젊은 여자의 유혹도 극복하지 못했고, 더 이상 선도에 매달릴 수 없었던 길선주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선도를 같이 수양했던 김종섭이 길선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 사이 김종섭은 기독교에 입문한 터였다. 향후 평양 장대현교회의 첫 장로가 될 인물이었던 김종섭은 길선주에게 자기와 같이 기독교에 입문할 것을 권했다. 당시 기독교는 ‘양귀자’(洋鬼子) 즉 서양 귀신으로 불릴 정도로 평양 지역에서는 반감이 높았다. 더구나 얼마 전까지 선도의 수양에 푹 빠져 있던 길선주에게는 정신 나간 사람의 소리로 들렸다. 오히려 길선주는 김종섭에게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김종섭은 길선주의 완강한 저항에 굴하지 않고 매일 같이 찾아와 〈그리스도신문〉을 읽어 주었다. 〈그리스도신문〉은 언더우드에 의해 발행된 장로교계 신문이었지만 해외 소식을 알 수도 있어서 차츰 흥미를 갖게 되었다. 또한 김종섭이 권하는 한문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 《천로역정》을 읽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그때부터 기독교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성경을 접하면서 빠져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선도를 수양하면서 단 한 번도 미치지 못한 가르침들이 성경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1897년 8월 15일 스물아홉 나던 해에 널다리골교회(장대현교회)에서 리 선교사(이길함)에게 세례를 받았고, 1898년에는 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고, 1902년 장대현교회의 조사 겸 평안도와 황해도 양도의 도조사를 맡았다. 190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고, 1907년 제1회 졸업생으로 7명의 동료와 함께 평양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장로교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했을 때, 민중들은 전국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장인환의 스티븐슨 저격,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졌다. 공교롭게도 관련자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한국 기독교인의 뒤에는 선교사가 있었고, 선교사의 뒤에는 당시 최강대국 영국, 그리고 신흥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미국이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기는 했지만 조선은 타이완과 달리 민중들의 반일 정서가 매우 강했으며 한국 민중의 반일정서 뒤에는 기독교인들이 관련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 민중의 반일 정서를 꺾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적 배경에서 ‘105인 사건’이 일어났다.

‘105인 사건’은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 했다는 가공의 사실을 꾸며 내어 경성과 평양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유능한 인재 수백 명을 잡아들였던 사건이다. 체포된 수백 명 가운데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고, 그중 98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때 선천 신성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길선주 목사의 맏아들 길진형이 ‘105인 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되었다.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진형은 갈비뼈 여러 개가 부러진 반송장의 상태였다. 치료차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진형이 병세가 악화되어 1918년 봄에 귀국했으나 고국에 돌아온 지 사흘 만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민족을 위해 자신을 던졌던 맏아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길선주 목사는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맏아들을 잃은 자신의 슬픔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에게 저미는 슬픔이었다. 민족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바른 정신은 오로지 기독교 신앙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즉 민족의 아픔과 슬픔을 신앙의 힘으로 견디고 버텨서 훗날을 기약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2. 장대현교회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1919년 2월 초, 길선주 목사 사택으로 한 신사가 찾아왔다.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맏아들 진형과 함께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중국 상해로 망명을 떠났던 선우혁이었다. 장로교 교인이었던 선우혁은, 장로회신학교를 중퇴하고 장로교회에서 전도사를 지냈던 여운형이 결성한 신한청년당에 가맹했다. 신한청년당은 국내외에서 독립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 일본, 만주 및 노령에도 각각 밀사를 파견했는데, 선우혁은 평양으로 파견된 밀사였다. 선우혁은 105인 사건의 옛 동지인 양전백 목사(증경 총회장), 이승훈 장로를 차례로 만나고, 평양 기독교계의 영적 지도자이면서 105인 사건의 동지 길진형의 부친인 길선주를 찾아와 현금의 국제 정세에 따른 독립운동을 논의하여 적극적인 찬동을 얻었다.

길선주 목사는 선우혁과 회담한 후 독립 선언에 가담할 것을 결의했다. 선우혁이 다녀간 후 정주의 이승훈 장로가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기별을 받았다. 이승훈의 입원은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서 동지를 규합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길선주는 이승훈 장로의 병문안 자리에서 평양에서의 독립운동 계획을 재차 확인했다.

얼마 후 105인 사건의 또 다른 옛 동지들이자 서북 지방의 기독교계 지도자인 강규찬 목사(산정현교회), 김성탁 목사(송오동교회), 105인 사건 동지들이자 평양노회 소속 지도자인 이덕환 장로(장대현교회), 김동원 장로(산정현교회), 윤원삼 집사(장대현교회), 윤성운(남문밖교회), 도인권 그리고 평양예수교서원 총무 안세환과도 회합을 갖고 독립운동 및 의연금모집에 관해 논의하고 상해로 돌아갔다.

이에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계의 독자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수립했다. 구체적으로는 평양시내의 기독교인과 기독교계학교와 관립 학교의 기독학생들을 총동원하여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교사측 교섭은 윤원삼, 학생측 교섭은 안세환, 학생 동원은 창동교회 조사 이보식이 맡기로 했다.

한편 길선주 목사는 장대현교회가 준비할 일에 착수했다. 먼저 여전도회 원로인 이신행 권사와 여전도회 회장인 한영신 권사를 조용히 불렀다. “전 민족이 궐기하는 독립운동이 곧 있을 예정입니다. 그때 태극기가 필요한데, 여전도회에서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며칠 뒤에 여전도회 회원 몇 명이 목사 사택의 별채에서 태극기 제작에 착수했다. 또한 길선주 목사는 자신의 생일을 핑계로 숭의여학교 기숙사생들을 초청하여 평양에서 벌어질 독립운동 계획을 알렸고, 장대현교회에서 출발하는 행렬에 동참하여 행진하도록 당부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평양, 선천, 의주, 진남포, 안주, 원산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월 1일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이 전국에서 7곳인데 이북 지역이 6곳이었다. 이북 지역의 중심은 단연 평양이었다. 평양 지역 기독교인들이 고종황제 봉도식을 명목으로 숭덕학교에 집합했다. 봉도식이 끝나자마자, 태극기가 단상에 걸리고 도인권이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식의 취지를 설명했다. 김선두 목사(당시 장로회 총회장)가 독립선언식의 시작을 선포하고 사회를 맡고, 정일선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다. 강규찬 목사는 자유 평등 및 조선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곽권응의 인도로 애국가를 합창했고 윤원삼은 숭덕학교 교사 황찬영과 함께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부하며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 제창을 인도했다. 독립 선언식을 마치고 가두로 진출하여 거리에 모여 있던 군중들과 합류하여 독립 선언을 외치며 행진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길선주 목사가 시무하던 장대현교회에서도 〈독립 선언서〉 낭독식이 벌어졌다. 장대현교회 한영신 권사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교회 마당에 높이 게양했다. 이 태극기는 경술국치때 길선주 목사가 교회 지붕에 감추어 두었던 바로 그 태극기였다. 장대현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교인들과 학생들은 선언서와 태극기를 뿌리면서 서문거리, 종로거리, 신창리 등지로 다니면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조선이 독립을 선언했다고 목소리 높여 외쳤다. 

3월 1일 당일 길선주 목사는 2월 21일부터 시작된 황해도 장연읍교회의 사경회 일정을 모두 마치고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향하였다. 경성에 도착해 보니 날은 이미 저물고 시위 군중은 대부분 흩어지고 말았다. 길선주 목사는 주저하지 않고 총독부로 직행했다. “기차 시간에 맞추지 못해서 독립 선언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나는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길선주요. 나를 감옥에 넣으시오.”
체포된 길선주는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뒤로는 북간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길선주 목사의 부흥집회는 지역을 막론하고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이 나라 이 백성을 구할 길은 기독교 신앙밖에 없다는 길선주 목사의 일념이 예수 믿지 않는 뭇사람에게도 전달된 것이다. 길선주 목사는 신앙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임시 정부 통합의 기여자, 도산 안창호

 
1. 예수 믿고 문명개화하여 애국하자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봉상도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에서 농사짓는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1878년 11월 9일 태어났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난 후 평양성 전투를 비롯하여 평안도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전화가 휩쓸고 지나간 후 사람들의 삶은 처참했다. 이를 목격한 17세 소년 안창호에게 질문이 생겼다. ‘어떻게 다른 나라들이 자기 마음대로 이 땅에 군대를 끌고 들어와서 전쟁을 벌이게 되었나?’ 그는 자신의 멘토였던 필대은과의 토론을 통해 힘이 있어야 나라의 독립과 주권이 수호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힘은 ‘덕(德)을 지니고 지(智)를 겸비하고 애국심 있는 나라의 백성이 많을수록 얻게 된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안창호는 상경했다. 거리를 배회하던 안창호는 선교사 밀러(閔老雅)가 우리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배우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학교로 오시오. 먹고 자고 공부를 거저 할 수 있소이다!” 이 소리에 이끌려 밀러 선교사가 운영하는 예수교학당(경신학당의 전신)에서 수학했다. 안창호는 예수교학당에서 성경을 비롯한 근대 학문을 접했다. 그리고 후일 새문안교회 조사가 된 송순명의 설득으로 장로교인이 되었다.

예수교는 서양 문명의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애국심을 상징하는 종교였다. 당시 상황을 김구 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중략)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 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 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1
  그즈음의 〈독립신문〉에는 기독교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는 사설이 자주 실렸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문명개화한 나라는 모두 기독교를 믿는 나라인데, 이것을 보더라도 기독교가 문명개화하는 데에 긴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2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으나, 예수교와 같이 참으로 선량하고, 참으로 사랑하고, 참으로 타인의 곤궁함을 살피는 종교는 이 세계에서 달리 없다. 어떤 종교가 천하만국에 사람을 파견하여 금전을 보내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타국인을 가르치고 치료하고 돌보겠는가!”3 안창호가 예수교학당을 통해서 서양 학문을 배우고 이어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안창호는 구세학당을 다니면서 근대 학문을 접했다. 구세학당은 초등 교육 과정이어서 깊이 있는 학문에 이르기는 어려웠으나 선교사로부터 얻은 엷은 지식을 통해서도, 다른 나라의 간섭과 침략으로부터 자주적으로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며 나라의 힘은 ‘덕(德)을 지니고 지(智)를 겸비한 나라의 백성’이 많아질수록 커진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때 마침 서재필, 이상재,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가 1896년 7월 2일 창립되었다. 독립협회 운동은 나라의 자주독립과 부강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만민공동회로 이어졌다. 근대적 시민 운동이 발현한 것이다. 이에 안창호는 독립협회에 투신했다. 이듬해 그의 동지 필대은 등과 더불어 독립협회운동 관서지부를 결성했다. 이윽고 독립협회 관서지부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가 평양 쾌재정에서 열렸다. 평양감사 조민희와 수천 명의 평양 시민이 모인 자리였다. 여기서 안창호는 자신을 명연설가로 유명하게 만든 이른바 ‘쾌재정 연설’을 했다.

20살 청년이 토해내는 사자후는 쾌재정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 자리에는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도 있었다. 그들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민족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안창호의 진면목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연설에 머물지 않고 그의 사상과 실천에 있었다.

안창호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교육학을 배우기 위해 189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학업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조선인들의 애처로운 처지를 보고서 모른 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조선인들의 힘을 기르기 위한 조선인 친목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친목 단체 및 권업 단체를 넘어서서 1905년 공립협회(共立協會)로 전환되었다.

이윽고 미국에서 구상한 새로운 시민 운동 단체를 국내에서 건설하기 위해 1907년 내한했다. 즉 신민회(新民會)가 그것이다. 신민회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백성’ 즉 근대적 시민의 모임임을 표방한다. ‘신민(新民)’이라는 용어는 앞으로 안창호 특유의 실력양성운동과 공화주의 사상의 핵심적인 개념이었다.
 
2. 3.1운동 후 임시 정부를 하나로 통일하다

“남에게 정복당한 백성을 노예라 하며, 전제정치에 눌린 백성을 신복(臣僕)이라 하며 입헌 군주국 백성을 신민(臣民)이라 하며 공화민주국 백성을 인민(人民)이라 하나니. 입헌과 공화를 물론하고 그 백성의 공론으로 그 나라 정치를 행하는 자라야 이를 국민이라 하느니라.”4
  
미국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에 실린 안창호의 논설이다. 곧 군주와 귀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입법·행정·사법의 자치권과 개인의 자유를 확보한 동시에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민만이 국민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라를 되찾고 보존하는 길은 오로지 우리 민족이 주권자인 ‘국민’이 되어 그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는 데 있다. 즉 이 논설은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신복(臣僕)으로 존재하던 우리 민족을 주권자인 국민으로 재탄생시키고 공화주의로 그 힘을 결집시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이른바 ‘공화주의 민족혁명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공화주의는 개인이 사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의 행사보다는 시민(혹은 공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성과 덕성의 고양을 강조하는 정치 사상이다. 즉 시민의 지성과 덕성에 기초하여 그 구성원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누릴 공동선에 합의하고, 이를 법률로 제정해 국가 질서를 확립하고, 주권과 자기결정 원칙에 따라 민주적으로 이를 운영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공화주의의 핵심이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백성의 공론’인 독립을 향한 염원이 그 땅에 사는 ‘국민’들에 의해서 만방에 선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안창호의 공화주의 이념이 역사의 공간에서 구현된 것이다. 3.1운동에서 발현된 전민족적 열기는 임시 정부 수립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장기적인 독립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자주적이고 독립된 하나의 임시 정부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3.1운동 직후 3개의 임시 정부가 공포되었다.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임시 정부(3월 21일 수립),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4월 11일 수립), 서울의 한성정부(漢城政府) (4월 23일 수립)가 그것이다. 각각의 임시 정부는 국민 대회 또는 각종 독립 운동 대표자회의 등 나름의 절차적인 정당성을 확보했고 행정부와 의회와 약식 헌법 등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의 민족국가 안에 ‘3개의 임시 정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민족이 자신의 임시 정부를 하나로 만들지 못한다면 자주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심받게 되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은 명약관화했다.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독립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3개의 임시 정부를 하나로 통합시켜야 했다. 
이 임시 정부 통합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 도산 안창호였다. 안창호는 1919년 6월 미국에서 상해로 건너와서 상해 임시 정부 내무 총장 겸 국무 총리 대리로 취임하자마자, 바로 3개 임시 정부의 ‘통합’에 총력을 기울였다. 도산은 13도 대표의 ‘국민 대회’ 절차를 거쳐 법통성이 강한 서울의 ‘한성 정부’안을 선택하고 국민의회 임시 정부 측의 이동휘를 국민 총리로 추대하겠다고 설득했다. 상해 임시 정부에 대해서는 임시 정부 위치를 ‘상해’에 두며, 국호를 상해 임정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채택할 것이고, 상해 임정 수립 이후 임정의 행정을 통합 임시 정부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승인하는 조건을 내세워 설득에 성공했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 내무 총장에서 ‘노동국 총판’으로 직급을 낮추면서 솔선수범을 보였다.

그 결과 ‘3개의 임시 정부’에서 하나로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1919년 9월 11일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통합은 도산 안창호의 노력에 의해 성취되었던 것이다.



1) 김구, 《백범일지》, pp.185-186.
2) 〈독립신문〉, 1897년 1월 26일.
3) 〈독립신문〉, 1898년 8월 20일.
4) 논설 “국민설,”〈신한민보〉, 1909년 11월 17일.

이치만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