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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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9년  03월호 먼저 명목상의 교인을 전도하라 부교역자 훈련 길라잡이

바울 사도는 교역자였던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이 권면을 확대해서 해석하면 부교역자를 포함한 모든 교역자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바로 ‘전도자의 일’이다. 그러므로 너무 많은 업무에 열심인 나머지 전도에 게으르다면 부교역자에게 주어진 중대한 직무에 소홀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부교역자는 충실한 전도자가 될 수 있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훈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이론적인 면과 실제적인 면으로 나누어서 훈련 과정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이론은 전도에 대한 그의 안목을 열어 줄 것이다. 이론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실제적인 경험은 뼈대 없는 혈육과 같기 때문이다. 그 다음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이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부교역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왜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요 3:5). 그 이유는 위의 질문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성령이 사람의 마음속에 거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람 안에 성령을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신 성령 때문에 그는 ‘생령’, 곧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1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이신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 안에 내주하신 성령으로 하나님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요 4:24). 그런데 불행하게도 첫 인간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므로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창 2:17).

성경에서 죽음은 분리를 뜻한다. 첫 인간이 불순종의 결과 맛본 첫째 죽음은 영적 죽음이다. 다시 말해서, 그 안에 내주하시던 성령이 그를 떠나셨던 것이다. 그 이후 성령 없는 첫 인간의 후손도 성령 없이 태어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없이 태어나서, 살다가, 다시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 죽음도 역시 하나님이 첫 인간에게 경고하신 죽음의 둘째 부분이었다. 영적 죽음은 필연적으로 육체적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것으로 끝나는가? 물론 아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후 모든 인간은 다시 부활하는데, 이것을 “심판의 부활”이라 한다(요 5:29).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떨어져서 영원히 지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인간의 길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분명히 볼 때 부교역자는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런 숙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복음을 듣고 “거듭나다”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불신자가 그들의 죄와 심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회개와 믿음의 과정을 통하여 영접할 때, 그들의 모든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 그들 안에 성령이 다시 들어가신다. 그 성령의 내주로 첫 인간이 ‘생령’이 된 것처럼, 그들도 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영적 삶을 누리기 시작한다.

 

명목상의 교인에게 복음을 전하라

이 시점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거듭나지 못한 교인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을 명목상의 교인이라고 한다. 이름은 교인이지만 실제로는 성령과 상관없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 중에는 소위 모태 교인도 있고, 인간관계 때문에 교회에 출석한 자도 있다. 문화적인 삶이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출석할 수도 있다.
이런 명목상의 교인들을 염두에 둔 듯, 사도 요한은 이렇게 묘사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이러한 교인을 직접적으로 가장 많이 만나는 교역자는 담임목사가 아니라, 부교역자이다. 부교역자는 목양하는 교인이 거듭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거듭나지 못한 교인을 찾아내서 복음을 전하여 거듭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교회 생활을 했지만,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며, 부교역자의 책임은 결코 작지 않다.

그렇다면 명목상의 교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 어엿한 직분까지 맡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일상생활에서는 성경의 가르침과 명령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무시하며, 또 필요하면 그런 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한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이 나의 생활을 지배하도록 맡기지 않는다. 그의 사고와 생활 양식은 그가 속해 있는 전형적인 문화의 산물일 뿐이다.”2

이런 명목상의 교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울 특권이 부교역자에게 주어졌다. 부교역자가 그들을 도울 때 진정으로 영적 관계를 맺게 된다. 바울 사도의 간증이 그들의 경험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교인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인지하는 것이 전도의 첫 걸음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새김질해야 할 것이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 말씀에서 “죄로 죽었던”은 영적으로 죽었던 상태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육체적으로 죽었다면 다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삶을 바울 사도는 제법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이 묘사에 의하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세상의 바람과 악령의 영향과 육신의 욕구에 끌려 다닌다. 한마디로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같은 인생이다.

위의 말씀에서 “너희를 살리셨도다”는 영적으로 살리셨다는 말씀이다. 그들 안에 성령이 내주하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복된 말씀이다. 그들은 삶의 목적을 찾았고, 삶의 방법도 찾았다. 그리고 그 목적지를 향해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들에게 변화된 삶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벧전 3:15).

위에서 언급한 대로 명목상의 교인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교회를 거부하는 불신자와 다른 점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명목상의 교인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과 “영적으로 살리심을 받은 자들” 사이에 집어넣어도 좋을 것이다. 그처럼 중간지대에 있는 명목상의 교인에게 부교역자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영적 진단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라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명목상 교인은 기독교 문화에 젖은 사람들이기에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제법 많이 알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십중팔구 기독교의 핵심 진리에 대해선 선명하게 알지 못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부교역자는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만나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영접하도록 도와야 한다.

명목상의 교인들이 이처럼 거듭나서 변화되는 모습을 본 부교역자는 전도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한다. 그는 교회와 상관없는 불신자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정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그를 통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불신자를 전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관계 때문에 부교역자를 무조건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인에게 복음을 전하듯, 무조건 전하면 십중팔구 실패할 것이다.

먼저, 불신자가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생각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대화의 완전한 모델이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철저하게 종교적인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3:3). 반면, 요한복음 4장에서 물을 길러온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물을 좀 달라”면서 접근하셨다(4:7). 요한복음 5장에서 오랜 동안 질병으로 시달리던 환자에게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시면서 접근하셨다(요 5:6). 

부교역자도 마찬가지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그들의 생각을 먼저 진단해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대화를 하면 된다. 그 대화를 통하여 교회를 다녔었는지, 교회에 무관심한지, 아니면 교회를 반대하는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라면 이를 갈면서 반대하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혜롭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격적 관계를 맺고, 신뢰를 바탕으로 복음을 전하라

불신자와 인격적 관계는 쉽게 맺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시간과 마음을 주면서 노력한다면 그들도 마음을 조금씩 열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는 동안 그들에게 어떤 필요가 생기면 그것은 하나님이 부교역자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다. 그 필요를 채워 주면 불신자도 감사하게 되어 관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도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신뢰의 관계다.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 그들도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이다. 만일 부교역자가 이처럼 엄청난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더 많은 불신자를 붙여 주시고, 자신의 목회지가 열릴 것이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든지, 아니면 전도의 결실들과 더불어 교회를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 부교역자는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위하여 이처럼 헌신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적인 목회자로 성숙해 간다. 왜냐하면 한 영혼의 귀함을 알고 그에게 심혈을 기울여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 그와 그 영혼은 복음으로 묶여진 관계로 승화하기 때문이다. 그런 영혼들이 하나씩 모이면 튼튼한 교회가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부교역자의 전도 훈련은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 다른 어떤 훈련보다도 귀하고 값진 것이 될 것이다.
 

목양과 훈련을 통해 동역자로 성장시키라

한 영혼을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인도한 부교역자는 당연히 그의 영적 안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정성을 들여서 거듭나게 된 그리스도인을 사랑하며, 영적으로 돌보기를 원한다. 마치 엄마가 갓 태어난 자녀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돌봄을 직접 경험한 부교역자는 엄마와 같은 목회자로 승화될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전도를 경험한 부교역자야말로 진정으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갓난아이를 양육하던 엄마는 아이가 혼자서 걷게 되었다고 양육을 마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정성을 기울여 성도를 양육한 부교역자는 그것으로 중단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갓난아이가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돌보고, 사랑하고, 그리고 적절한 가르침을 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훈련이라고 해도 좋고, 교육이라고 해도 상관없으며, 제자 훈련이라고 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갓난아이가 성숙의 과정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역을 “온전하게 하여”라는 표현으로 대신했다(엡 4:12). “온전하게 하다”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고치다, 꿰매다, 두드리다” 등의 뜻을 갖는다.3 다시 말해서, 찢어진 옷을 꿰매거나, 고장 난 자동차를 두드려서 고치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영적으로 갓난아이도 세상의 풍조에서 성장했기에 고치고, 두드리고, 꿰맬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떤 때는 아프지만, 그런 과정이 없이 어떻게 성숙하겠는가?

부교역자가 성도를 돕는 목적은 무엇인가? 위에서 인용한 바울의 말에 의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여러 가지 사역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게 하는 것이다. 즉, 부교역자는 전도해서 양육시키고 훈련시킨 그리스도인을 동역자로 승화시켜야 한다.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부교역자에게 누가 전도 훈련을 시킬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담임목회자는 부교역자를 삶의 현장으로 함께 가서 전도를 보여 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다. 뿐만 아니라 부교역자에게 맡겨진 일은 밑바닥 없는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이 끝이 없다. 그러면 부교역자는 어떻게 전도 훈련을 받아야 하나? 그 방법은 하나뿐이다. 영혼 구원의 참여를 위하여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전도 훈련에 매진해야 한다. 전도 훈련은 언제나 현장 실습이어야 한다. 실제로 명목상의 교인이나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에게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실패가 없는 전도 훈련은 더 이상 전도 훈련이 아니다. 처음부터 전도를 잘 하는 사람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초보 운전자는 여기저기 부딪치면서 자동차에 흠집을 내기도 하고, 다른 차와 접촉 사고를 내기도 하며 점점 숙련된 운전사가 된다. 전도 훈련도 마찬가지다. 전도를 하다 보면 피전도자에게 상처를 주고, 어떤 때는 자신이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필요악에 해당된다. 수없이 많은 실패를 통하여 조금씩 숙련된 전도자로 탈바꿈해가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할 때 훈련자와 함께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그 모든 실패의 과정에서 함께하면서 훈련자를 돕고 위로하시며, 또 한편 훈련자의 미숙한 전도라도 기꺼이 사용하여 피전도자를 도전하여 주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훈련의 과정에 놓인 부교역자는 전도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훈련자를 주님은 기쁘게 받으신다. 주님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전도 훈련에 매진하는 부교역자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면서,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영혼을 허락하실 것이다.




1) 이 말씀에서 “생령”은 “살아 있는 사람”(a living being or person)을 뜻하는 "하야 네페쉬“(????? ?????)이다.
2) 홍성철, 《전도학 개론》(서울: 도서출판 세복, 2015), pp.78-79.
3) 여기에서 “온전케하다”는 헬라어로 “카타르티스몬”(καταρτισμoν)이다.
4) 홍성철, 《기독교의 8가지 핵심 진리》(서울: 도서출판 세복, 2015), p.114.

 

홍성철 세계복음화문제연구소 소장. 보스턴대학교(Ph.D). 저서로《기독교 신앙에 대한 질의응답》, 《거룩한 삶, 사랑의 삶》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