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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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2019년  03월호 여성도의 반복적인 자살 상담 요청,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목회자 고민 상담소(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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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중견 교회 목회자입니다. 교회의 30대 젊은 여자 집사님이 종종 죽고 싶다는 전화를 하여 상담을 요청합니다. 처음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었지만 너무 자주 연락을 하는 것 같습니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랬다가 성도가 잘못된 선택이라도 할 것 같아서 고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목회자들의 잠을 깨우는 긴급한 전화

우선 밤낮으로 영혼을 목양하는 목사님의 수고에 칭찬과 격려를 드립니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성도들의 비상 상황에 늘 응답을 해야 하는 것이 목회자의 임무이다 보니 목회자의 고민과 성도들에 대한 염려가 크리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말하는 젊은 여성도의 전화는 목회자의 마음과 신경을 온통 곤두서게 만드는 큰 부담이라 생각합니다. 예배 인도와 설교를 비롯한 목회자의 일반적이고 정기적인 임무 자체도 결코 작지 않은 일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아픈 성도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은 목회자의 영혼의 평온함을 흔들어 놓는 큰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런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아 주시니 그 자체로 목사님은 참 귀한 사역자입니다.  

자칫 반복적으로 자살 위협을 하는 사람을 양치기 소년 이야기에 빗대어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하는 이야기인데, 저러다가 말겠지!” 하지만 두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양치기 소년과 마을 사람들은 양을 잃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자살의 ‘위협’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관심을 끌려는 의도가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심심하거나 장난으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심각하게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목숨을 끊겠다”는 말은 목회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합니다. 결코 무관심하게, 혹은 습관적으로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비록 그것이 반복적인 거짓말처럼 들린다 하더라도 목회자는 ‘자살’이라는 말에 가장 큰 비중과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자살 경고자와 직접 대화를 하기 위해 시도해야만 합니다. 

자살 경고자와의 대화에서 목회자는 자신이 지금 이 상황을 얼마나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자살 경고자가 보기에 목회자가 너무 바빠서 자신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인상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목회자를 자신의 인생에 통화 가능한 최후의 응답자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너무 분주하면 자칫 “역시나” 하는 절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자살 경고든 목회자는 거기에 가장 큰 우선순위를 두고, 자신이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진지함으로 그 경고자에게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목회자의 평정심과 고요한 묵상을 깨트리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레고리 교황의 말처럼 목회자는 성도의 정돈되지 않은 삶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반복적으로 당하는 ‘괴롭힘’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자살이라는 사안 자체는 한 사람의 생명이 걸린 중대한 일인만큼, 목회자는 반드시 특별한 집중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긴급 조치와 적극적인 경청

자살하겠다는 성도의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 목회자는 우선 긴급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자살의 실현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고, 둘째는 그 집사님을 도와줄 수 있는 모든 관계망을 동원하는 일입니다. 자살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집사님이 자살을 얼마나 오랫동안 심각하게 생각해 왔는지, 또 현실적으로 어떤 준비를 해 놓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만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수면제를 많이 준비했거나, 아파트 옥상을 다녀왔거나, 저수지나 바다를 탐색하고 왔다면 그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닙니다.
동시에 이 집사님이 자기 죽음의 시점을 정해 놓았는지도 반드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준비 상태가 실제적일수록 실행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행히 한국에는 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총기가 없지만, 그래도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아프지 않고’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목회자는 반드시 이 성도가 생각하고 있는 자살의 형태나 준비 상황에 대해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직접 만나서 대화할 수 있으면 바람직하겠지만, 전화로도 충분히 사전에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는 동시에 자살 경고자와의 첫 대화를 통해 도움의 관계망을 작동시킬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자살 경고자의 문제는 결코 목회자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많은 도움이 입체적으로 필요합니다. 자살에 관한 상담이 비밀 보장의 예외에 해당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목회자는 자살 경고의 심각성을 인지하자마자 조금도 미루지 말고, 이처럼 중대하고 시급한 일에 도움을 줄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여 당사자를 도울 길을 찾겠다는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에 따라 환자를 보호해야 할 가족, 교회 안에서 비슷한 연령대의 동성 친구들이나 같은 전도회 회원들, 환자를 수용하여 치료를 할 수 있는 인근 병원, 그리고 신실한 기독교 상담자를 연결하여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살 계획자들은 신경이 예민하고, 특히 자신과 통화하는 목회자의 마음이 자신에게 전심으로 집중해 주고 있는지를 매우 정밀하게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단 한 번의 통화라도 목회자는 따뜻하고 진지하게 대화 상대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평소의 대화에서도 진지한 경청을 연습해야 합니다.

자신이 설교자라는 권위의식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혹은 힘들어하는 자식을 대하는 부모처럼, 목회자는 자살 경고자에 대해 진심어린 염려와 이해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큼 힘들고 슬픈 일은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고 정죄하거나 정신 차리라고 충고하기 전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반드시 물어보십시오. 만일 귀찮은 마음에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쉽게 대답한다면, 자살 경고자는 자살에 대해 훨씬 심각하게 고려할 수 있습니다: “역시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야.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자살을 말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죽음의 문턱에 스스로 서 있는 그녀의 인생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지친 그녀의 말 한마디를 소중히 여기며, 하나도 흘리지 않고 진지하게 잘 경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목회자가 제공하고자 하는 도움의 관계망을 자살 경고자가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고자의 사유와 사연을 진지하게 경청하십시오. 그나마 목회자는 그가 붙들고 있는 실낱 같은 희망의 연결고리입니다. 만일 자살이란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청과 수용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집사님은 자신이 한 말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자살 시도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 번 자살 시도를 했던 사람이 다시 자살을 시도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수치심 때문입니다. 죽으려고 했는데 죽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반드시 생명을 끝낼 수 있는 더 치명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선택할 것입니다. 죄책감에 비해 수치심은 훨씬 파괴적입니다.

이같은 존재의 수치심을 없애는 것이 공감과 수용 그리고 대화를 통한 환대입니다. 목회자와의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아, 그래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었구나. 반드시 죽음이 아니어도 괜찮겠다’고 안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살 경고는 도와달라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그나마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으려는 의지적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살 경고자에게 많은 격려를 해 주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전화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도 빠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미래가 없다고 말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도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 체념합니다. 혹은 자신이 버림받아서 더 이상 쓸모가 없고 삶의 즐거움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 그 성도가 가진 평소의 장점들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특히 그 집사님의 도움을 받았거나 그녀를 의지하고 있는 어린 자녀들과 이웃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많은 엄마들이 심각한 우울증을 스스로 이겨내는 비결 한 가지는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목회자와의 이 같은 한 통화의 전화가 생명을 살리는 생명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살 경고: 삶과 죽음 사이의 갈등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 사람이 자살을 결정하는 데는 최소 3일이 걸리고, 자살 충동의 증상은 두 달 이상이 유지된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중요한 것은 주변 사람들이 그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자살 경고자들은 뭔가를 정리하고 뭔가를 준비하고 있으며, 심심찮게 마지막 인사 같은 말을 합니다. “요즘, 일로 힘들다”, “행복해야 돼!” 혹은 “그동안 고마웠어” 등등 뭔가 마지막을 암시하는 말들을 무심코 사용합니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자살 예방 시스템에 참여하게 된다면, 목회자는 다양한 눈과 귀를 통해 그런 말들이 주는 경고음들을 지속적으로 살펴야 할 것입니다. 웃으며 돌아서는 얼굴의 무거움까지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증상이 드러나든지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살 경고자에 따라 살려 달라는 외침과 살고자 하는 의지가 흔히 나타나기도 합니다. 오래 전 한 텔레비전 채널에서 자살하려고 한강에 뛰어든 한 여성을 구한 일이 방영되었습니다. 한강에 뛰어든 지 30분 만에 구조된 그 여성은 강에 빠지자마자 “살려 달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성의 마음은 단순했습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치료를 하는 도중 젊은 남성이 결국 자살에 성공한 이유는 엄마의 짜증스러운 한마디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나가서 죽어라.” 물론 그것이 엄마의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예민한 문제의 정점에 선 당사자에게는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주는 것이면 지체 없이 받아들이고 또 실행할 위험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 한마디 말은 ‘모든 사람이 나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환자의 고장난 생각에 불을 붙이는 격이었습니다: “그럼 죽어 주지!” 이런 죽음 후에, 그렇게 말한 엄마 자신은 또 얼마나 깊은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자살의 도미노 현상입니다. 때 아닌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유족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심각한 죄책감과 비난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가족 중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면 또 다른 자살 사건이 예고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상상하기 싫은 끔찍한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관계의 망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자살 경고자를 위해 기도하고, 한마디의 실언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스치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자살을 동조하는 언어나 태도로 변질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물론 상습적인 위협과 ‘자해 협박’이 주는 피로감은 매우 클 것입니다. 그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반응해야 하는 목회자의 피로도는 때로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살을 경고하는 사람의 ‘위협’과 ‘경고’는 어떤 경우에라도 가볍게 취급되거나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사실 자살 경고자들은 그런 반복적인 경고 행위를 통해, 그리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주는 사람들의 경청과 돌봄을 통해, 스스로 죽고자 하는 충동을 끊임없이 완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전문가들은 “저 환자는 경계선 성격장애가 있으므로 자살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아. 저건 버릇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지 마십시오. 자살 경고자의 입에서 나오는 ‘자살’이라는 말만큼 위험하고 확실하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심리학적 부검과 공동체

최근 10년 넘게 한국에는 매년 1만 2000명이 넘는 자살자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인 자살의 수치는 터키에 비하면 17배나 높습니다. 2차 대전 이후의 미국이나 핀란드처럼 자살률이 높았던 나라들도 심리학적 부검과 같은 노력을 통해 많은 생명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심리학적 부검이란 자살자들의 심리적, 관계적 이력들을 사후에 파악하고 관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자살자의 70%를 차지하는 우울증 환자들에 대한 관심이 커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우울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의 경우에는 성장 과정과 현재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소외와 고통이 우울증의 큰 이유를 차지합니다. 남성들의 경우에는 명예의 실추나 경제적인 파산 등이 자살의 주요한 이유입니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남성은 타인에게 알리거나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습니다. 어느 신학생의 아버지는 자신이 초등학교 2학년일 때, 그것도 어린이날에, 엄마와 아이들을 모두 밖에 보내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사업 빚으로 말미암아 파산한 경우였는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내와 아이들의 마음에 평생의 상처와 빚을 남기고 떠난 것이었습니다. 

우울한 여성들은 더 자주 자살 시도를 하지만, 우울한 남성들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치명적으로 자살을 실행합니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3-4배 더 자주 자살을 시도하지만,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4배나 많이 죽습니다. 그러므로 자살을 경고하는 청소년, 청년들이나 여자 성도들 못지않게, 갑작스러운 사업 실패로 말없이 절망하고 있는 남자 성도들의 형편을 더 긴급하게 살펴야 합니다.

목회자는 자살 경고자의 사정을 누구보다 면밀하게 살피고, 심리적, 환경적 해부를 통해 지금 자살 시도의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살펴야 합니다. 대화를 통해 심각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살 실행자들은 자살 직전까지 비관적인 생각에 함몰된다는 공통점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살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말수를 줄이거나, 잠을 못 이루거나, 체중감소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주요 우울증과 유사한 증상들입니다.

지역적으로는 실직자가 많은 도시 환경이 남성들에게 절망을 줄 수 있습니다. 고령화가 과도하게 진행되거나, 주민들의 이동이 많은 신도시의 환경에서도 자살의 유혹은 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이나 짐이 된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자리할 수도 있고, 자라온 환경의 불행과 현실의 고통이 겹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동원과 위로는 중요합니다. 목회자 혼자서 결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마치 모세에게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을 세우라는 이드로의 말(출 18:19-23)처럼, 목회자는 성숙하고 인내심이 많은 교회의 충성된 성도들과 함께 짐을 나누어야 합니다. 따뜻하고 진실하게 호소하십시오. 그리고 도움을 얻어 내십시오. 자살 경고자를 설득하십시오: “이 일은 너무나 중대하고 심각하기 때문에 목사인 저 혼자 이 일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혹시 저와 함께 집사님을 도와줄 수 있는 분들에게 이 이야기를 나누고 힘을 모아도 되겠습니까?”

프로이트는 자살을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여기고 자신을 향해 공격성을 발휘한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은 개인이 속한 사회집단이 따뜻하게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중요한 통찰력들입니다. 하지만 성경과 교회에는 이 모든 어려움을 함께 풀어갈 수 있는 복음과 관계망의 자원들이 있습니다. 자살은 잘 대처하면 반드시 예방이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큼 한 인간의 생명의 가치를 존귀하게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자원은 세상에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만큼 절박한 한 영혼을 끌어안고 기도해 줄 수 있는 공동체는 세상에서 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철학자 조사이어 로이스는 사랑스러운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비록 목회자로서의 부담이 크고 두려움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자원으로 한 영혼을 살릴 때, 그것은 하늘의 빛난 별과 같은 의인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역에 참여하신 목사님을 다시 한 번 격려하고 칭찬합니다. 인내와 지혜로 위험에 처한 영혼을 잘 돌보시는 만큼이나, 또한 책임을 함께 나누어 생명을 살리시는 사역 지속적으로 감당하길 바랍니다.  


 

하재성 고려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 밴더빌트대학교(Ph.D.). 저서로 《우울증, 슬픔과 함께 온 하나님의 선물》, 《강박적인 그리스도인》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