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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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진단 2019년  02월호 예배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교회 건축의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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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건물은 ‘돌로 지은 신학’이자 ‘돌로 쓴 설교’다.


믿음은 해석과 번역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구체적 고백을 담은 신경(信經)과 같은 언명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음악과 그림, 건축과 같은 예술의 형태를 빌어 모습을 갖기도 한다. 폴 틸리히의 표현대로 이 과정에 예술가의 해석과 표현, 기대가 함축적으로 담긴다.1 해석과 번역이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미려하기까지 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신선한 통찰을 선물로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지 못한 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왜곡되거나 지나치게 자의적인 경우도 흔하고, 잘못되거나 어설픈 번역이 답습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도 발견된다. 세상을 압도하는 힘의 과시나 세상과의 철저한 단절과 같은 건축의 언어들은 오늘날의 교회에 대한 기대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을 오역한 증거들이다.

우리 시대의 바람직한 번역을 찾기 위한 사전이자 안경은 이 글의 주제이자 소재인 ‘공공성’이다. 교회가 사전적 정의대로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을 갖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며 건축이 대화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도 장려해야 한다. 일반 사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 즉 교회 건축의 원칙과 방법론에서는 이미 논의들이 있어 왔는데 만시지탄이긴 하지만 최근 상당히 많은 진전이 있었다.

한 예로 《한국 교회 건축과 공공성》은 교회 건축의 공공성에 대한 신학적, 성서적, 역사적, 건축적 이해를 도모한다. 예를 들면 손호현은 “교회 건축의 십계명-신학이 있는 교회 건축과 인생 건축”이라는 제하에 깊은 신학적 사색과 실제적 조언을 담았다. 송용섭은 “교회 건축 공공성 지표 확립을 위한 기독교윤리학적 제안”이라는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교회의 공공성을 확립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제안했다. 정시춘은 교회 건축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각각의 건축 양식이 지닌 특징들을 요약했고 김정두는 개방적 교회론의 입장에서 교회 건축을 다룬다. 소요한은 안식, 계몽, 치유, 교육, 공감의 공간이 된 한국 교회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고찰했다.2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만큼 다양한 입장에서의 진지하고 세밀한 접근을 통해 한국 교회의 건축을 바라보는 기준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예배 공간으로서의 교회

앞서 인용한 글들과의 깊은 공감과 연대를 토대로 본격적으로 예배학의 입장에서 교회 건축을 생각해 보자. 제임스 화이트는 개신교 교회 건축에서 일종의 보편적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매우 간단명료하다.

“교회 건축은 그 자체로 기념비적 존재가 아니고 회중이 드리는 예배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로 시작하지 않고 예배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건물은 우리의 손을 떠나게 되고 건물은 그것이 마땅히 섬겨야 할 대상인 공동체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3

교회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예배드리는 장소다. 예배는 단순히 감정을 고양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영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신학이 있는 예배와 건축은 바로 바른 예배관에서 출발한다. 화이트는 건축물의 크기나 가치보다 교회의 본질적 요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주목한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바로 ‘예배’다. 성도들이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오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자로 살 것을 결심하며 예배자로서 공공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필자는 이것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시원(始原)적 공공성’ 혹은 ‘본래적 공공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 따라 사역의 형태와 건물의 구조는 변할지언정, 교회와 예배 자체가 본래적으로 가진 이 예배 장소로서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교회가 이 고유한 본래적 속성인 예배에 충실할 때, 예배를 돕는 장치와 도구로서 교회 건물은 비로소 본래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게 된다.

교회 건축의 역사는 결국 예배에 대한 해석과 적용의 흔적이다. 주지하는 대로 기독교 공인 이전 교회는 가정에서, 지하 무덤에서, 혹은 빌려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주후 2-3세기의 로마의 인슐라(insula)나 시리아의 듀라 유로포스(Dura Europos)와 같은 가정 교회나 가옥 교회들은 새로운 건축 양식의 제시보다는 ‘예배’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모임이라는 본질적 목적에 충실했다.4

그러나 바실리카와 고딕으로 이어지는 교회 건축의 변화에는 ‘예배’라는 본래적 기능에 상징성을 가장한 성속의 분리와 과시욕이 더해진 일종의 덧칠이 개입되었다. 정시춘은 콘스탄틴 이후 장엄함과 권위, 성직자와 회중의 분리라는 명제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교회 건축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점은 성직자들의 자리가 회중에게서 지성소의 제단 너머로 옮겨진 점이었다. 교회가 보다 제도적이고 성직자 중심적이며 사회적인 권세를 가지게 됨에 따라, 주교석은 점차 명예와 권력의 자리로 변하게 되었다. 성소는 지위가 낮은 성직자들이 낭독자들과 노래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서있는 자리가 되었다.”5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논리에 휘둘리고 결국 모방하게 된 것이다. 물론 중세 고딕 성당의 건축가와 건축에 참여했던 이들의 마음에 담긴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순수한 열망마저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심지어 20세기에 교회가 중심이 된 공동체의 구현으로서 고딕 부활(Gothic Revival)이라는 새로운 번역도 등장한 바 있으니, 중세 경건의 언어와 공공성의 구현을 21세기의 눈으로 재단하는 것은 또 다른 오역의 생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름의 신앙 표현으로서 교회 건축의 다양성을 바라보되 과연 변화시키지 말아야 할 본질적 요소와 가변적 요소를 구분할 필요는 있겠다. 즉 교회의 본래적 공공성, 예배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과 기여를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다시 교회와 예배로 돌아가서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매 주일 공동의 기억으로 성도들에게 소환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닌 어넴니시스, 즉 생생한 기념과 재현의 자리다. 교회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방식을 보고 배우며 따르는 이들이 모인 곳이다. 천국을 미리 경험하는 프롤렙시스, 즉 천국을 기대하고 미리 맛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교회처럼 돔으로 천국을 상징화시키지 않아도, 절대 평안과 평등을 맛보는 공간으로서 교회는 시장이나 관공서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그 뿐인가?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경험을 하여 구별된 이로 새롭게 태어나고 그들에게는 주님의 몸과 보혈을 나누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그곳에서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바꾸는 꿈과 소명을 안고 예배당을 나선 것이다.

세례와 성찬의 자리로 좀 더 다가서 보자. 세례는 누구에게나 열린 ‘구원론적 평등성’의 구현이며, ‘교회와 사회가 서로 교류하는 외접 공간’의 확대이기도 하다.6 세례를 통해 교회는 일반 사회에 문을 열고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궁극의 평등 공동체로 초대했다. 국가와 성별과 신분의 벽이 사라진 환대의 세계가 그곳에 실제로 존재했다(갈 3:28; 고전 12:13). 돈 셀리어스는 세례가 “인간 실존을 위한 명백하면서도 암묵적인 광범위한 가능성을 조성해 준다”라고 표현한다.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이 가꾸어 가야 할 삶의 내용과 양식에 주목하면서 고통받으며 신음하고 죽음의 굴레 안에 놓인 세상을 위해 “어떤 그리스도가 되겠는가?”라고 묻게 되는 것이다.7 세례를 받은 이들은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나아간다.

세례를 받은 이들이 참여하는 성찬은 평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체화하는 시간이었다. 셀리어스는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을 위해 쪼개져야 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그분의 이름으로 만지고, 먹고, 화해하고, 씨를 뿌리고, 빵을 굽고, 베푸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8 로완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이 성찬례의 의미를 정의한다.
  
“성찬례는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뿐만 아니라 사물을 보는 방식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으며, 또 앞에서 암시했듯이(우리 이웃을 하나님의 손님으로 보도록 배웠듯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도 변하게 합니다. 성찬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대를 베풀려는 신자들의 마음을 지지하고 강화시켜 줍니다. 또 우리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눈을 열고 그들도 초대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성찬례에서 경험하는 참으로 놀라운 변혁적 힘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우리 이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9

기독교의 새로운 가치관은 고대 근동을 넘어 로마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전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가 간파한 대로 기독교는 이 세계가 잡동사니나 감옥이 아닌 하나님께서 초월적인 사랑으로, 은혜로 만든 걸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 것이다.10 이제야 사람이 단순한 물질의 조합이 아닌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적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잔인한 복수의 대상이 아닌 사랑을 받아 마땅하며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 주는 새로운 인간관의 제시야말로 기독교가 인류에 ‘공적으로’ 기여한 위대하고 아름다운 흔적인 것이다.

우리가 지어 온 교회들, 지어야 할 교회들

예배를 기준으로 한국 개신교회의 건축을 바라보면 그 본래적 공공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유의미한 발전들이 있어 왔지만 여전히 신학 부재, 답습, 무분별한 모방, 과시 등의 표현들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건축가 승효상의 한국 도시 건축에 대한 예리한 지적을 들어보자.

  “…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비움은 추방해야 할 구악이 되었고, 채우기에 몰두한 나머지 우리 도시는 악다구니하는 한갓 조형물과 건물로 가득차고 말았다.”11

교회가 “악다구니하는 한갓 조형물과 건물”이 절대 아니라고 항변한들, ‘일반 사회 구성원’들이 그와 같이 본다면 무어라 말해야 할지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무엇이 우리 교회의 안팎을 채우는가? 공간과 환경이 우리의 정서, 행동, 존재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불필요한 허영의 흔적이 마음을 헛헛하게 만든다. 

교회가 남겨야 할 것은 공동의 기억이지 사적인 재산이 아닌데 여전히 후손에게 물려주겠다는 허망한 구호들이 난무한다. 교회가 예배의 자리에 존경과 간판과 권세를 올려놓은 순간, 교회의 감독들이 로마시의원의 권세를 누리게 된 그 즈음, 다른 공공건물보다 높아지고 화려해진 바로 그날, 가정 교회의 환대는, 지하 교회의 간절함은, 회당에서의 겸손과 진지함은 그 자취를 감추고 신화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자의 결기가 크기와 규모의 경쟁 앞에서 허무하게 꺾였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십자가를 달아 놓는 이유는 세상의 길과는 판이한 방법으로 살겠다는 웅변적 선언이다. 예배자들은 은혜 가운데 들어와서, 은혜를 누리고, 은혜를 가지고 나가서, 세상을 은혜로 만져 주고, 살펴 주고, 주님께서 우셨듯이 그렇게 울고, 결국 십자가를 져야 한다. 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맛보는 공간임과 동시에 은혜를 베푸신 이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는 곳이어야 한다. 이 정체성이 무너지면 복지도, 자선도, 개방성도 출발선이 불분명한 달음질이 될 위험에 속절없이 노출된다. 결국 교회는 예배드리는 장소로서의 시원적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필자는 아돌프 로스의 ‘장식은 죄악’이라는 표현을 자주 인용한다. 장식의 완전한 배제로 오해하는데 실은 과장이나 불필요한 치장에 대한 경계를 의미한다. 필자는 이 의견을 ‘예배를 돕는 건축’으로 해석하고 싶다. 제임스 화이트는 바람직한 교회 건축의 조건으로 유용성, 단순성, 유연성, 친근감, 그리고 아름다움을 제시했다.12 이 항목들은 교회 건축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예배를 위해 모인 거룩한 공동체를 위해 그 정도만 갖추면 충분하다는 의미에서 소개된 것이다. 화이트는 강대상과 성찬대의 크기가 압도적이어서는 안 되며 환경 친화적 소재를 사용해야 한다는 꼼꼼한 조언까지 잊지 않는다. 화이트의 제안은 ‘예배 장소’로서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와 ‘교회’로서 소통하기에 충분한 기준이다. 즉 예배 공간으로서의 교회는 철저히 예배의 의미를 고양하는 방향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신학과 신앙을 건축으로 번역하는 과정에 얼마든지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 종교개혁가들만 보아도 루터와 칼뱅과 쯔빙글리가 각기 상징과 예술에 대한 이해를 달리했다. 요는 거룩, 겸손, 희생, 부활, 환대는 예배하는 공동체가 세상과 소통하는 고유한 방식임과 동시에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라는 사실이다.

나가는 말 - 거룩한 기억과 기대의 공간

폴 틸리히의 말처럼 훌륭한 예술에 담긴 신학은 예술 행위와 결과에 드러나는 신성의 현현에 대한 교리다.13 교회 건축은 그에 의하면 일종의 ‘돌로 지은 신학’이자 ‘돌로 쓴 설교’다.14 이처럼 중요한 교회 건축을 결코 가벼이 대할 수 없다. 교회 건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의 집, 인생의 집을 지으라는 손호현의 표현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예배자로서 예배의 집을 지으라고 제안한다.

진정한 예배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분의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판단한다. 그는 위압감을 안겨 주는 건물을 지양할 것이고 불필요한 치장을 선호할 리 없다. 후손에게 부담을 줄 반환경적 재료를 사용해 공해를 남겨둘 리 만무하다. 십자가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처절한 비극과 그 희생의 신비가 만들어 낸 구원의 소식에 주목하기에 허세의 노예가 될 리가 없다. 주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업적을 절대시하는 경박한 구호를 걸어 둘 수 없다. 

주님과 연합된 이들이 주님이 만드신 세상과 담을 쌓고 살 수 없고, 그들을 적대시하거나 무시하거나, 천박한 언어로 소통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교회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이들이 결코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정죄로 질식된 중세의 처참한 기독교인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 땅에 천국을 이루고자 하는 꿈을 꾸는 공간이기에 분명 건축을 통해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그 기쁜 소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공유해야 할 교회 건축의 보편적 기준은 분명하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 십자가이고 은혜이며 환대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예배의 정신이 배어 있는 건축, 세례와 성찬의 메타포가 담기는 건축, 세상을 본받지 않고 세상에 새로운 본을 제시하는 건축, 그것이야말로 여타의 ‘기관’에서는 할 수 없는 교회만의 ‘일반 사회’를 위한 기여 방식이 아닐까?  


각주


1) Paul Tillich, On Art and Architecture (New York: Crossroad, 1987), pp.18, 27.
2) 손호현, “교회 건축의 십계명-신학이 있는 교회 건축과 인생 건축,”《한국 교회 건축과 공공성 ?신학이 있는 교회 건축》(서울: 동연, 2015), pp.11-42; 송용섭, “교회 건축 공공성 지표 확립을 위한 기독교윤리학적 제안”, 앞의 책, pp.306-332; 정시춘, “기독교 교회 건축의 역사와 그 의미,” 앞의 책, pp.73-114: 김정두, “개방적 교회론과 교회 건축의 공공성,” 앞의 책, pp.191-227. 소요한, “역사적인 관점으로 살펴보는 교회 공간의 공공성과 그 의미,” 앞의 책, pp.171-190.
3) 제임스 화이트, 수잔 화이트, 《교회 건축과 예배 공간》, 정시춘, 안덕원 옮김(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저자 서문. 교회의 건축이나 보수, 수리(리모델링)를 고려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4) 초대교회 예배에 대한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로버트 뱅크스,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신현기 옮김(서울: IVP, 2017)
5) 정시춘, 《교회 건축의 이해》(서울: 발언, 2000), p.105. 교회 건축과 교회직제의 관계에 대한 필자의 졸고를 참고하라. 안덕원, “탈식민주의이론으로 바라보는 사역과 직제,” 〈신학과 선교〉 51 (2017): pp.53-89.
6) 돈 셀리어스, 《예배와 영성》, 이필은 옮김(서울: 은성, 2002), p.77.
7) 차정식, 《바울신학 탐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pp.381-382. 세례의 평등성과 저항성에 관련된 필자의 졸고를 참고하라. 안덕원, “탈식민주의 이론으로 바라보는 기독교 세례예식: 저항과 어파퍼시스(Apophasis) 그리고 제 3의 공간을 중심으로.” 〈신학논단〉 79 (2015.3): pp.257-282. 
8) 돈 셀리어스, 앞의 책, pp.102-103.
9) 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김기철 옮김(서울: 복있는 사람, 2015), pp.84-85
10)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무신론자들의 망상》, 한성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6), pp.358-359.
11) 승효상,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서울: 컬처그라퍼, 2012), p.27.
12) 제임스 화이트, 수잔 화이트, 앞의 책, pp.100-103. 
13) Paul Tillich, 앞의 책, pp.205-206.
14) 손호현, 앞의 글, p.11.

안덕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교수. 드류대학교 대학원(Ph.D.). 저서로 《우리의 예배를 찾아서》가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