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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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19년  02월호 3.1운동과 여성 개신교 지도자들 3.1운동과 한국 교회(2)

일제의 조선 강점 10년째인 1919년, 억눌리고 고통 중에 있던 백성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은 사건이 바로 3.1운동이다. 일제의 감시로 집회, 언론, 출판 등 모든 자유 활동이 제한되고 통제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전국 조직망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었던 장소가 바로 교회였다. 이 교회의 전국 조직망을 통해 3.1운동은 전국적 운동이 되었으며, 남녀노소를 무론 한(*막론하고/불문하고) 범국민 운동이 된 것이다.

3.1운동이 나이, 성별, 종교를 뛰어넘는 범민족적 전국적 독립운동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박정신이 지적하듯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동력은 개신교가 ‘지도력, 운동가들, 그리고 조직’을 제공했기 때문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1 김승태 역시 만세운동이 빠르고 일관되게 전국적 운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인원을 동원하고 운동을 조직하고 소통을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2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개신교인이며, 만세운동 첫날 7835명 중 개신교인 수는 1719명으로 전체 22%를 차지했다.3 개신교인들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교회 지도자들은 주요한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의주 만세운동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유여대 목사의 주도하에 700명 이상이 모였으며,4 평양에서 김선두 목사가 1000명 이상을 모집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했고,5 대구에서는 이만집, 정재선 목사 등 경북노회 회원 및 계성학교 학생 등 약 700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6

여기서 개신교 지도자들의 3.1운동 참여는 신앙고백의 행위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자유의 회복운동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7 이승훈 장로는 “민족 자결은 천제의 혜택으로 되는 것”이라 했으며, 신홍식 목사도 “조선도 하나님의 의사로 독립국이 되리라”고 믿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전도사였던 김창준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천의”라고 생각했다.8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민족대표 중 신석구 목사는 1919년 2월 27일 새벽기도 중에 “4000년 전해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9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들에게 3.1운동은 헌병들의 무자비한 총칼 아래 박해받고 생명을 유린당하던 백성들의 울부짖음에 참여하고 연대한 신앙운동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바, 그리스도를 본받아 평화와 타인의 생명 존중을 지향하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초기 단계에서 기독교인 만세운동 참가자에게 배포된 것으로 보이는 〈독립단통고문〉은 그리스도교인들의 만세운동이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행위였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

우리의 존경스럽고 고귀한 독립 단원 여러분이여. 무슨 일이든지 일인들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이니 독립의 주의를 손해케 할 뿐인즉 다 바라건대 각자 주의할지며, 신도는 매일 세 차례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아가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으로 순환독료(循環讀了)할 것이니라.10

개신교를 향한 일제의 보복은 잔인하고 참혹했다. 선교사들도 각국 선교부에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는 체포 수감하고 폭행하고 죽이는 “종교적 박해”로 규정했다.11

3.1운동 후 구금되어 극심한 옥고를 치른 수난자 중 기독교인은 17.6%(3426명)다. 당시 한국 개신교인 비율(2-3%)로 볼 때 기독교인 3.1운동 수난사는 더 강조할 필요도 없다. 특히 전체 여성 피감자는 471명 중 309명이 기독교인으로 65.6%에 이른다.12 이는 기독교여성 리더십의 3.1운동 참여비중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3.1운동의 중심에서 여성 개신교인의 활약은 주목할 만하다. 이치만에 따르면, 개신교 여성들이 3.1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단통치하 항일 독립운동 전개에 필수적인 비밀활동이 가능한 여성신도조직의 발달, 기독교 사립학교 출신의 네트워크, 그리고 당시 여성이 개신교의 다수였기 때문으로 분석했다.13 그중 유관순, 김마리아를 소개한다.

지령리교회 유관순14

유관순은 1902년 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의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전통적인 선비 집안의 부친 유중권은 학교 교육을 통한 구국 운동과 신앙 운동을 통한 자주 독립의 길을 모색한 사람이었다. 그는 1907년 설립된 마을의 홍호학교 운영에 직접 관여하여 민족 교육에 힘쓰고 있었다. 또한 그는 공주선교부를 책임지던 샤프 선교사의 부인 사애리시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접한 친척 유빈기에 의해 입신하고, 1908년 시작된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를 조인원과 함께 책임지고 있었다. 유관순은 이곳 학교와 매봉교회에서 “신앙을 통한 나라 사랑”을 배웠다.

유관순은 지령리교회에 순회 전도차 온 사애리시 선교사의 주선으로 샤프 선교사가 설립한 공주 영명학교에서 공부했다. 총명하며 신앙도 든든한 소녀로 알려진 유관순은 다시 사애리시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6년 4월 1일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했다. 유관순은 이곳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기독교 교육을 통해 신앙의 공적책임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은 두 사람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주일마다 출석한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에게 하나님 사랑이 곧 나라 사랑임을 배웠다. 또 박인덕 선생으로부터 신앙을 통한 나라 사랑의 실천을 배웠다. 박인덕 선생은 1919년 3.1운동과 관련하여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를 때 유관순과 함께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유관순과 이화학당에서 신앙생활과 구국 활동을 함께했던 서명학의 증언에 따르면, 유관순은 매일 밤과 새벽에 텅 빈 예배당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고 한다. 이처럼 깊은 유관순의 신앙심은 훗날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조국 독립을 위해 순국할 수 있었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관순은 고등과 2학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유관순은 이 비밀결사대 일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숙사 뒷담을 넘어 탑골공원으로 달려가서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했으며, 3월 5일 학생 시위 운동에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19년 3월 10일 일제가 휴교령을 내렸다. 이에 학생들은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고, 이때 유관순도 고향인 병천으로 돌아왔다. 유관순이 언제 귀향하여 어떻게 병천의 만세운동을 조직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으나 일제의 ‘대정(大正) 8년 형공(刑控) 제 513호’ 판결 이유문을 통해서 유관순이 병천 만세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유관순은 3월 13일에 고향 병천으로 내려와 부친 유중권을 위시하여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과 교회당에서 병천 만세운동을 기획했다. 유관순은 20일간 천안, 청주, 연기, 진천 일대를 다니며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음력 2월 그믐날 밤 동생 유관복, 조카 유제한과 매봉산 꼭대기에서 봉화를 올렸다. 각 마을에서도 만세운동에 동참하겠다는 봉화가 타올랐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장터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령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인원, 유관순 등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로 진입해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유관순은 대한독립의 필요성을 토로했다. 선언식을 마친 약 3000명의 군중은 만세시위 행진에 나섰다. 이로 인해 일제의 헌병, 수비대와 충돌이 있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선두에 있던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총에 맞고 어머니 이소제는 칼에 찔려 사망했다고 한다. 일제의 폭압적 진압에 격분한 군중은 순국자의 시신을 주제소로 운반하여 일제에 항의했고, 이 과정에서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일부 군중은 천안-병천간 전선을 절단하여 통신을 끊고,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점검하여 시위를 벌였다.

유관순은 병천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천안 헌병부대 유치장에 10일간 구금되었다가 공주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19년 5월 9일 공부지방법원에서 유관순은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인명을 살상하지 않은 시위에서 5년형을 선고받은 예가 없었다. 이로 인해 유관순과 조인원, 유중무 등이 치열하게 법정 투쟁을 벌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7세의 어린 여학생인 유관순이 조인원, 유중무 등과 같은 중형을 받았다는 것은 그녀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조인원, 유중무 등과 함께 유관순은 이에 불복하고 항고했다. 1919년 6월 30일 열린 경성복심법원 상고심에서 공소는 이유 없음 기각판결을 내렸다. 이에 유관순은 일제의 부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재판정에서 걸상을 집어던지는 등 항거한 끝에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우국지사들과 이화학당 학생들인 어윤희, 박인덕, 이신애 등과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 유관순은 이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전개된 이 옥중 만세운동에는 함께 수감되어 있던 일반 범죄자들도 합세하여 만세소리가 모화관, 냉천동, 애오개, 서소문 일대로까지 번져 나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수감된 애국지사들이 고문을 당했는데, 이로 인해 유관순은 방광이 터지고, 이신애는 유방이 파열되기까지 했다. 계속되는 고문으로 유관순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으며, 1920년 9월 28일 만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옥사했다. 

유관순의 부음을 들은 이화학당 학장 프라이와 교사 월터는 가족을 대신하여 그녀의 시신 수습 절차를 밟았다. 시신 인도를 거부했던 일제는 프라이 학장 등의 항의로 시신을 인도했다. 이때 유관순의 친척인 유빈기와 유중영 부자가 참관했다. 시신은 실로 처참한 상태였다고 한다. 시신을 인도받은 프라이 학장은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만든 수의를 입히고, 가슴에 성경을 안겨 주고 입관했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을 치러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시신을 소실하여 행방과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해방을 맞이하여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에 대해 가르쳤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함께 수감생활 했던 박인덕에 의해 유관순의 업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박인덕은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을 만나 유관순을 소개하여 이화여고를 중심으로 1947년 8월 ‘순국처녀 유관순 기념 사업회’를 조직하여 유관순의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기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유관순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이화여고 개교 80주년을 맞아 1967년 11월 11일에 유관순 기념교회인 매봉교회를 준공하여 유관순의 신앙과 나라사랑의 정신을 되새겼다.

소래교회 김마리아15

김마리아는 1892년 음력 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마을에서 아버지 광산 김씨 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의 셋째 딸로 출생했다. 출생 당시 본명은 진상(眞常)이었고, 마리아는 그녀가 1908년 연동교회 선교사 밀러 목사에게 세례 받을 때 얻은 이름이다. 그녀가 출생한 소래마을은 초기 개신교 교인들의 공동체가 한반도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거주하기 이전에 주체적으로 교회를 설립한 곳이다. 이곳에서 그녀의 집은 일찍이 기독교와 신문화를 받아들였다. 마리아는 교회가 설립한 해서제일학교(소래학교)를 1903년에 졸업했다. 이후 이화학당에 입학했으나 고모 김필례가 1회로 졸업한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로 옮겨 1910년 제4회로 졸업했다. 졸업 후 마리아는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가르치던 중 1912년 일본 히로시마 고등여학교로 유학하며 1년간 수학했다. 귀국 후 그녀는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데 헌신했다. 그러던 중 정신여학교 교장 루이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두 번째 유학길에 올랐다. 1915년 마리아는 동경여자학원에 입학, 영문과에 진학하여 수학했다. 그러나 그녀는 3.1운동,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 등으로 체포, 수감되어 고초를 당하며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김마리아의 독립운동은 그녀가 동경여자학원 영문과 졸업을 한 달 앞두고 개최된 2.8독립선언대회에 참여하고 그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비밀리에 가져오는 것으로 본격화 되었다. 일본 유학 중에도 한복 입기를 고집했던 그녀는 〈2.8독립선언서〉의 국내 유입원으로 자청하여 귀국할 때 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그 안에 〈2.8독립선언서〉를 숨겼다. 무사히 부산에 귀국한 마리아는 기차로 광주로 이동하던 중 상해 신한청년당을 대표해서 온 큰 고모부 서병호와 셋째 고모 김순애를 대구에서 만나 동경 2.8독립선언 소식과 〈2.8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고, 언니와 막내 고모 김필례가 살고 있는 광주에서 회합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모의했다. 이후 김마리아는 전국을 누비며 교육계, 종교계, 여성계 지도자들과 회합을 가지고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1919년 3월 1일, 황해도 재령 신천 등지에서 활동 중이던 김마리아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돌아와 정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여성 지도자들을 만났다. 이때 마리아는 항일부녀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이들과 함께 조직과 확대 방안을 모색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다시 만세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는데 여학교 학생들도 참석, 다수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김마리아는 3월 6일 정신여학교 교무실에서 만세 시위 주모자로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에서도 함께 수감된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을 위한 소통을 이어 나갔다. 일경의 가혹한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상처를 입고, 예심종결 결정으로 감옥을 나온 마리아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정신여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도 항일여성운동 활성화를 모색했다. 마침내 1919년 10월 19일 여성계 대표 18명이 모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발족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부인회 취지서는 김마리아가 작성했다. 애국부인회는 발족 후 한 달여 만에 회원이 2000명을 돌파했고, 전국 지역지부와 하와이, 간도 등 해외지부까지 설치되었다. 애국부인회는 비밀리에 모은 군자금 2000원과 활동 취지문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게 송부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여성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애국부인회는 동지의 밀고로 일경에 발각되었고 핵심 간부가 모두 체포 연행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발병하여 사경을 헤매던 중 병 보석으로 출감했다.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로 급히 상경하여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대구-서울을 오가며 재판을 받았고, 마침내 3년형 판결을 받았다.

이미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불가했기에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1921년 7월 21일 중국 웨이하이에 도착하며 망명길에 올랐다. 다시 상해로 이동해 그곳에서 동지와 친척들의 극심한 간호로 몸을 회복한 마리아는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몸의 회복과 안정을 위해 안창호 등이 결혼을 권유하고 주선했을 때 마리아는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고 반려했다. 오로지 독립운동에만 힘을 쏟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녀는 여성 최초로 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로 125개 독립 단체가 모두 모인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개막 연설을 하는 등 상해에서도 여성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독립 활동과 함께 그녀는 실력 양성을 위해 끊임없이 배움을 이어나갔다. 그녀에게 실력 양성이 곧 독립운동이었다. 이후 미국으로 간 마리아는 재미 한국학생연맹의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귀국 때까지 사업을 주관했으며, 1928년 미국 뉴욕에서 여성항일단체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형 집행 종료로 1932년에 귀국한 김마리아는 원산의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 교수로 부임해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듬해 장로교여전도회 총회에서 7대 회장으로 선출된 후 10대까지 4대에 걸쳐 회장을 맡아 여전도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1938년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회장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여전도회는 끝까지 반대했다. 신학교도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결국 폐교되고 말았다. 여전도회와 여자신학교의 신사참배 거부의 중심에는 늘 김마리아가 있었다. 1944년 3월 13일 향년 53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그녀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을 기려 1962년 3월 1일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마리아는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나는 일본의 연호를 모르는 사람이라”,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 할 이유가 있소?”라고 항변했으며,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며 한평생 대한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여성 지도자였다. 1923년 도산 안창호는 “그 같은 여성 동지가 10명만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독립되었을 것이다”라고 그녀를 평가했다.



1) Chung-Shin Park, Protestantism and Politics in Korea (Seattle, WA: University of Wahington Press, 2003), pp.136, 138.
2) 김승태, “종교인의 3·1운동 참여와 기독교의 역할”,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서울: 다산글방, 1994), p.302.
3) Chung-Shin Park, Protestantism and Politics in Korea, p.135.: 천도교인은 1209명(15%), 무종교인 3808명(43%), 종교 파악 불가가 1099명(20%).
4) 국사편찬위원회, “유여대, 안응석 등 판결문”,《한국 독립운동사 자료5》(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74), pp.875-877.
5) 국사편찬위원회, “김선두, 이일영 등 판결문”,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5》, pp.786-789.
6) 국사편찬위원회, “이만집, 김태련, 정재선 등 판결문”,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5》, pp.1264-74.
7) 좀 더 긴 논의는 이덕주, “3·1운동에 대한 신앙운동사적 이해”, 〈기독교사상〉(1990. 3), pp.139-141, 참조.
8) 한규무, “기독교와 천도교의 3·1운동 협력에 대한 평가와 오늘의 의미”, 〈기독교 사상〉(2014. 3), p.58.;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기독교의 역사 2》(서울: 기독교문사, 1990, 2014), p.37에서 재인용.
9) 신석구, 〈자서전〉, 미간행 친필, pp.86-87; 이덕주, 《신석구 연구》(서울: 기감출판국, 2000), p.108에서 재인용.
10) 김병조, 《한국독립운동사(상)》(상해: 선민사, 1920), p.57에서 인용.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에서 1977년 비매품으로 발행된 자료에서 인용했음을 밝힌다. 본서의 원명은 《한국독립운동사략》, p.230, 국한문 혼영의 평이체를 사용했다.
11) The Korean Situation: Authentic Accounts of Recent Events by Eye Witnesses (New York: The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 of 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1919), p.87, 6-7(인용순서대로).
12) 개신교의 피해상황에 대해서는 김승태, “종교인의 3·1운동 참여와 기독교의 역할”, pp.303-311 참조. 김승태의 통계를 이용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II》(서울: (주)기독교문사, 2014(개정판)), pp.41-48도 참조.
13) 이치만, “3.1운동과 장로교의 역할”, 〈광복70주년기념 세미나-3.1운동과 기독교〉(미간행 자료집), 2015.2.23.,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p.49.
14) 유관순에 대한 서술은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서울: 쿰란출판사, 2107), pp.228-233에 실린 필자의 원고를 가져왔다.
15) 김마리아의 생애에 대한 서술은 박용옥의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서울: 홍성사, 2003)에 근거했다. 또한 새로 발견된 자료를 일부 보완하여 출판된 전병무의 《김마리아: 한국 항일여성운동계의 대모》(서울: 역사공간, 2013)도 참고했다.



 

최상도 호남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에든버러대학교(Ph.D). 공저로는《손양원 목사의 옥중서신》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