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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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2019년  02월호 선교사·미자립교회 후원 관리,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회자 고민 상담소(61)

Q300명 규모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10년 이상 매월 일정 금액을 해외 파송 및 협력 선교사와 미자립 교회에 후원하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후원 선교사와 미자립 교회에 대한 평가와 검토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어떤 후원 기준과 원칙으로 진행하면 좋을까요?

A바울은 로마서 12:2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본문은 ‘이 세대’와 ‘하나님의 뜻’을 대조하여 말합니다. 이후에 계속되는 로마서의 문맥이나 성경 전체의 문맥을 보면 ‘이 세대’의 특징은 ‘자기중심성’인 반면에 ‘하나님의 뜻’은 ‘자기 내어줌’임이 분명합니다. 가진 자가 자기의 가진 것을 희생하여 가지지 못한 자를 돕는 것, 더 나아가서는 비록 많이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한 절약하면서 가지지 못한 자들을 돕는 것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이 가진 것까지도 빼앗기를 서슴지 않는 이 세상의 삶의 방식과는 구별되는 기독교인 삶의 독보적이고 아름다운 특징입니다. 따라서 재정적으로 여력이 있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선교지 혹은 미자립 교회를 돕는 것은 아름답고 정당한 사랑의 증시(證示)입니다.

재정적으로 여력이 있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열악한 교회를 돕는 구체적인 사랑의 증시는 선교 활동 혹은 전도 활동의 한 부분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이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하신 말씀(마 7:16-20)이 지닌 뜻이기도 합니다. 선교나 전도의 핵심을 청중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고, 예수님께 호감을 갖게 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한 다음에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도록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유 있는 교회가 열악한 교회를 돕는 재정 정책은 선교와 전도의 효율성 뿐만 아니라 보다 깊은 교회론적이고 기독교 윤리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지상에 실재하는 모든 유형의 교회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 유형 교회들을 유기적인 몸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이 몸 안에서 모든 지체들은 유기적인 긴밀한 신경망으로 연결되어 한 지체의 고통과 기쁨은 곧 다른 지체들의 것이 됩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2:23-24에서 바울은 여성들이 화장할 때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여성이 화장을 할 때 자신이 있는 부분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지만, 자신이 없는 부분-주름이 있거나 뾰루지가 난 부분-은 특별히 공을 들여서 화장합니다. 그리하여 몸 전체가 골고루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합니다.

바울의 교회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재정의 여유가 있는 교회가 재정이 약한 교회를 돕는 것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는” 배려의 실천으로서 그 의미를 가집니다. 이 같은 배려는 곧 100마리로 구성된 한 무리의 양 떼를 돌보는 목자가 한 마리가 길을 잃었을 때 99마리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한 마리를 찾아서 무리에 합류시킨 후에야 비로소 진행시키는 예수님의 가르침(마 18:12-15)을 따르는 것이며, 이것이 곧 사랑의 증시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증시라는 “비둘기 같은 순결함”에는 “뱀 같은 지혜”가 수반되어야 합니다(마 10:16).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 6:21; 눅 12:34)라는 말씀처럼 사랑하는 마음은 통상적으로 재물의 나눔을 통해 표현될 때가 많지만, 재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로서 순기능을 가집니다. 동시에 인류를 부패시키고 멸망으로 떨어뜨리는 악마적인 역기능을 가지며, 이 역기능이 매우 강력합니다. 따라서 재물의 나눔을 통한 사랑의 실천은 역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한 사려 깊은 기술적 배열의 뒷받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은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더욱이 문제의 재정이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공적 헌물이기 때문에 이 공적 헌물을 사용할 때 한층 더 신중한 전략이 필요하게 됩니다.

자비량을 강조한 바울과 네비우스의 선교 재정 전략

선교지의 교회와 미자립 교회에 대한 재정 후원 문제를 고려할 때 바울의 선교 사역 과정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선교 철학은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터 위에서 사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롬 15:20; 고후 10:16). 이 말은 바울은 항상 순전한 개척 선교 사역을 수행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개척 선교 사역을 수행할 때 모교회인 안디옥 교회를 비롯하여 어떤 교회로부터도 정기적인 재정 후원을 받지 않았으며, 자신과 동료들의 생활비는 철저하게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활용한 노동을 통해 충당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비롯한 마게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이 바울 일행에게 두서너 번 후원금을 보낸 준 것은 사실이지만 정기적인 지원은 아니었고, 바울의 선교비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선교지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어느 정도 교회 회중이 형성된 이후에 교회를 떠날 때는 장로들을 세워서 성도들을 돌보도록 했고 장로들 가운데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를 따로 세워서 전임 사역을 하게 하고 이들의 생활비를 현지 교회가 담당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세운 초대 교회에서는 특정한 교회가 다른 교회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운영된 경우가 보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교 초기에 있는 교회들, 예를 들면 마게도니아 교회들이 재정적으로 극히 열악한 상황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고후 8:1-3),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인하여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구제금을 모아서 보냈습니다. 이 일도 단발적으로 끝났고 정기적인 후원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중국 선교사 네비우스는 바울의 선교 전략에서 힌트를 얻어 선교 재정 정책을 수립했습니다(네비우스 선교 정책). 네비우스는 바울이 현지 교회로부터 사례금을 받지 않고 자신의 생활비는 스스로 일을 하여 충당하는 결단을 하게 된 배경에 주목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 돈을 주고 하는 사역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런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네비우스는 바울이 특히 데살로니가에서 자신이 수고로이 일을 하면서 복음을 증거 했음을 상기시킨 일(살후 3:7-12)과 밀레도의 고별 설교에서 일을 하면서 사역했던 자신의 모습을 본받을 것을 권고한(행 20:34-35) 것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네비우스의 우려는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 활동을 수행했던 지역들인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는 순회 설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그리스의 궤변 철학의 전통 안에 있었던 자들로서 대중을 모아 놓고 대중의 말초적인 감각을 충족시켜 주는 기발한 처세의 원리들을 열정적으로 소개하여 청중의 관심을 끈 다음에는 일정한 강의료를 챙겨서 축재했습니다. 바울은 선교 초기의 초신자들이 아직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돈을 주고 사고파는 일로 오해할 위험이 있음을 인지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돈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고 철저하게 자비량 방법으로 선교 사역을 진행시켰습니다.

1890년에 한국 선교회는 네비우스를 초청하여 2주간에 걸친 토론과 대화 끝에 네비우스의 방법을 선교 재정 정책으로 채택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채택한 교회 재정 정책의 핵심은 교회 재정의 자립화에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는 두 가지를 강조했는데, 하나는 한국의 목사들이 선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학교를 포함한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때 교육에 필요한 재정을 스스로 충당하거나 현지 교회가 담당하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후원 평가 · 관리에 필요한 원리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일반적인 기독교 윤리적인 관점과 교회론적인 관점에서는 재정적인 여유가 있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열악한 교회를 돕는 것이 대체로 정당화될 수 있지만 사도 시대의 초기 선교 교회들은 교회 간의 극히 간헐적인 후원을 제외하고는 교회 간의 정기적인 후원의 사례를 보여 주지 않고 있어서 서로 상반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물론 사도 시대의 교회들도 시대적 정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시대의 교회가 반드시 따라야 할 보편적인 롤 모델로 제시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이 교회들이 모두 선교 초기의 교회들로서 같은 선교 초기의 교회들이 유념해야 할 중요한 시사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선교지 혹은 미자립 교회에 대한 후원이 바람직한 열매를 거둘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뱀 같은 전략’이 필요할까요?

첫째, 바울이 선교 활동을 할 때 일관되게 견지했던 원리 곧, 하나님의 나라는 돈의 힘으로 이룩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원리를 돕는 교회나 도움을 받는 교회가 항상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개척 교회나 개척 선교를 하는 사역자들은 바울이 오직 구원의 말씀을 증거하여 영혼을 살리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살아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어떤 기관이나 집단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생활비는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해결하면서 선교 사역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무겁게 여기면서 가능한 한 바울의 길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개척 교회나 개척 선교 사역자들은 다른 교회들로부터 선교비나 생활비 지원을 받는 경우라 하더라도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지원받는 것을 자발적으로 중단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선교 현지나 개척 교회 현지에 설립한 교회가 초기에 재정 형편이 어려우면 사역자는 일거리를 찾아서 일을 하면서 선교 및 전도 활동을 하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 사역자가 노동에 참여하는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건강에 대해서도 유익한 측면이 있습니다. 말씀 사역은 주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사역으로서 육체노동과는 거리가 있는 사역입니다. 따라서 말씀 사역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육체 노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데, 육체 노동을 멀리하면 인간의 삶의 많은 부분에 대한 이해 특히, 노동자들의 고된 삶에 대한 이해가 약해질 수 있고, 거친 삶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 사역자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개척 초기를 지나서 교인들의 신앙이 어느 정도 자라고 재정적인 형편이 나아지면 교인들과 협의하여 과감하게 노동을 중단하고 말씀과 목양 사역에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바울은 자기 자신의 사역하는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지 않고 후임 사역자에 대해서만 교회가 생활비를 해결하도록 조치를 취했지만 이는 바울이 받은 소명과 은사가 통상적인 목회자들이 받은 은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순회 선교의 소명과 은사를 받았으나, 목회자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사역하는 소명과 은사를 받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둘째, 선교지나 개척 교회 사역자가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다른 교회의 후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과는 달리, 후원하는 교회는 재정적으로 약한 교회들을 언제든지 흔쾌히 돕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를 항상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도움 제공은 무조건 퍼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도움 제공은 일정한 규범적 원칙에 따라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우선 교회의 정기적인 재정 후원은 파송한 선교사 혹은 사역자의 생활비 지원에 국한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때 특별히 고려해야 할 사항은 현지에서의 생활비 수준을 신중하게 조사하여 그 사회에서 중간 수준의 경제 생활의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환율의 큰 차이 때문에 교회가 보내는 돈이 현지에서는 예상을 초월하는 큰 돈으로 둔갑하여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최상위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게다가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단 선교부에 소속된 경우라 할지라도 후원 교회는 개인적으로 찾아서 연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수완이 좋은 선교사들은 많은 교회들을 후원 교회로 개발하여 들어오는 후원금을 모두 받아서 풍족하게 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컨대, 저택에 살면서 하인들을 여러 명 거느리거나, 열악한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자녀들을 일 년에 수만 달러 이상의 학자금이 소요되는 영미의 명문 사립 대학교에 보내 엘리트 교육을 받게 하는 일들이 보고됩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관행입니다.

이와 같은 폐단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후원 교회는 후원 결정을 하기 전에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지에서 중간계층 정도의 생활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후원이 필요한가? 본 교회 외에 후원을 받는 다른 교회들은 몇 군데이며 모두 어느 정도의 후원금을 받고 있는가?” 선교사나 개척 사역자들은 이 질문들에 대해 정직하게 답변을 해야 하며, 답변을 들을 후에 금액을 정하여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이 질문들에 대해 선교사가 정직하게 답변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선교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합니다.

셋째, 후원 교회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원리에 따라서 현지인 사역자의 생활비를 지원하는 일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와 같은 지원은 현지인 사역자들 사이에 소외감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지원받는 자로 하여금 불필요한 우월 의식을 갖도록 하며, 복음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다만 사역자로 훈련받기 위하여 신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목사 후보생의 경우 일정한 장학금 지원은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지에서 세운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경우에 학비 100%를 모두 지원하기 보다는 등록금 정도를 지원하고 나머지는 현지 교회나 본인이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일 현지의 목사 후보생이 후원하는 교회가 속한 나라에 유학하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전액 장학금을 지원할 수도 있으나 이때도 어느 정도는 근로를 하고 근로에 대한 대가를 지급받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점은 “돈은 반드시 수고한 대가로서 벌어야 한다”라는 원리를 숙지하도록 지도하는 것입니다.

넷째, 현지 교회가 기독교학교를 설립하거나, 어떤 특별한 활동을 위한 센터 등의 건립을 추진하는 데 자금이 긴급히 필요하다든가, 자연재해 등을 만나 큰 어려움에 처해 있어서 긴급한 재정 후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이 상황을 소상하게 교회 성도들에게 알리고 특별한 후원자를 찾거나 목적 헌금 형태로 후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다섯째, 후원하는 기간을 무기한으로 하는 것보다는 기간을 특정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입니다. 기간을 특정화 된 교회의 재정 능력이 허용하고 현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계속 도울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 기간을 특정해야 하는 이유는 현지 교회로 하여금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재정적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컨대, 후원 교회는 5년 정도의 후원 기간을 설정하고 가능한 한 이 기간 안에 자립하도록 권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원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면 5년이 지나기 1년 전쯤에 추가 후원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여 설명이 타당하면 한 차례 더 후원 기간을 연장해 줍니다. 이런 방식으로 두 번 정도 연장할 기회를 준 후에는 후원을 마무리합니다. 후원을 시작할 때 후원을 중단하는 때가 온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며, 후원이 중단된다는 사실을 사전에 단계적으로 예고한 다음에 후원을 중단한다면 현지 교회도 서운함이나 상처를 받지 않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교회의 후원을 위해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선교지 및 미자립 교회 후원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지상의 유형 교회가 하나의 유기적인 몸이므로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하고 약한 지체들일수록 더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한다는 교회관 및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아름답고 정당한 관행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후원은 선교지 및 미자립 교회 사역자가 눈에 보이는 사람의 도움보다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원리에 따라서 담대하게 나아가는 이른 바 ‘영적 야생성’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정한 규범적 한계 안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정기적인 후원은 사역자의 생활비에 제한하고, 사역 훈련을 위한 장학금 지원이나 학교 설립과 같은 경우는 필요에 따라서 단발적으로 지원하고, 무엇보다도 기간을 특정하여 후원하는 것이 지혜로운 후원 방법으로 사료됩니다.  


 

이상원 총신대학교 기독교윤리학과 교수. 네덜란드 캄펜신학교(Th.D.). 저서로 《기독교 윤리학》, 《21세기 사도신경 해설》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