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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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말씀 2019년  01월호 신약성경에 나타난 소망 주제별 성경 연구 | 소망

그리스도교의 ‘소망’은 일반 세상에서 말하는 ‘희망’과 다르다. 후자가 막연한 인간의 바람을 말한다면 전자는 확실한 약속에 근거한 바람이며, 후자가 인간의 자의로 가지는 바람이라면 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바람이다. 후자가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이 마음대로 갖는 바람이라면, 전자는 믿음의 눈을 가진 자가 신령한 세계를 보고, 그 완성을 향해 가지는 바람이다. ‘소망’은 ‘믿음’, ‘사랑’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필수적인 세 요소다(고전 13:13). ‘믿음’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우리 구원의 강력한 행위들 가운데 놓여 있고, ‘소망’은 미래에 있을 우리 구원의 최후 완성에 놓여 있다. 그것은 미래에 완성될 구원에 대한 바람과 기대다. 그리고 ‘사랑’은 그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이 재림을 넘어 영원한 천국까지 계속될 삶이다. 그리하여 소망은 그리스도교 사도신경의 중요한 신앙고백 내용이다.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그럼, 신약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어떤 소망인가?
 
신약의 소망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소망
‘소망’이란 어휘는 구약성서의 후기 문서들에서 드물지 않게 나오는데, 대개의 경우 ‘신뢰하다,’ ‘기대하다’는 뜻의 히브리어에 상당하는 의미로, 점차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의 신학적 의미의 용례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소망”, “경건한 이스라엘인의 소망”이다(스 10:2; 시 39:7; 62:5; 78:7; 146:5; 렘 14:8; 50:7; 애 3:18 등).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시 33:18), 하나님의 말씀에(시 119:81, 114, 147; 130:5) 소망을 둔다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구약에 일관되게 흐르는, 종말론적인 의미의 소망이 창세기로부터 말라기까지 나온다. 그것은 곧 구원의 소망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뱀을 향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하셨다(창 3:15). 그리고 아브라함을 향해서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하셨다(창 12:3; 22:17-18; 26:4). 이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여인의 몸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이스라엘에게는 큰 소망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 메시아 전승이 나타났다.
하나는 다윗 전승이고, 다른 하나는 다니엘 전승이다. 바울은 이를 “이스라엘의 소망”이라 한다(행 26:7; 28:20). 전자는 다윗의 후손이 세우는 하나님의 나라 전승이고(삼하 7:12 이하; 대상 28:5; 대하 13:8; 렘 30:8-9; 33:15-16; 사 9:6-7; 11:1; 겔 37:24-28; 암 9:11; 미 5:2; 슥 9:9 등), 다른 하나는 하늘의 인자가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 전승이다(단 2:44; 7:13-14; 8:17-26; 10:21; 12:1-12). 전자에 의하면,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한 인간 메시아가 나와서 옛날의 다윗의 나라처럼 지상적이고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유대 제국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후자에 의하면, 하늘의 인자 같으신 어떤 신적인 존재가 영적인 세력들과 싸워서(단 8:15-16; 10:1, 20-21), 우주적이고 영적이며 부활한 인류가 참여하는 초자연적인 영원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이 두 나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다윗 전승의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인 영도자(메시아)가 세우는 나라이고, 다니엘 전승의 하나님 나라는 초자연적 존재(인자 같은 이)가 세우는 나라다. 전자는 죽음을 지닌 유대인들(유대인들이면 누구나 포함된다)의 나라이며, 후자는 모든 민족 출신의 (유대인이라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부활한 자들의 나라다. 전자는 다윗 군대의 정복에 의해 이룩되는 나라며, 후자는 악령들과 싸워 이김으로 그 천적인 존재만이 이룩할 수 있는 나라다. 그 원수는 인간의 힘으로는 정복될 수 없으며, 인간은 그 “인자 같은 이”를 도울 수도 없고, 그를 도울 수 있는 자는 유일하게 천사장 미가엘뿐이다(단 10:21). 전자는 유대 역사의 절정에 오는 나라고, 후자는 인류 역사의 종말에 오는 나라다(단 8:17-18).
예수님은 이중 다니엘 전승의 하나님 나라 사상을 취하셨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나 일반 무리와 달리, 인자가 다스리는 천적인 나라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라는 칭호와 개념을 좋아하는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인자’란 칭호 사용하기를 좋아했으며(막 2:10, 28; 8:31; 9:9, 12, 31; 10:33-34; 14:62 등), 그리스도란 칭호 사용에 대해서는 침묵을 명하기도 했다(막 8:30). 그는 자신을 다윗 계열의 지상적인 통치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인자 같은” 다니엘적인 천적인 존재로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 나라를 기대했고, 시계(視界)가 너무 낮았고, 너무 사소한 것을 기대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다윗의 주로 생각했으며(마 22:41-45), 그가 가지고 온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이라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이방인도 포함하는 나라라는 묵시사상과(단 12:1-2), 세례 요한의 사상을 가졌다(마 3:7; 8:11-12; 눅 3:7).
예수님은 이 세상을 마귀가 통치하는 세계로 보셨다. 이 세상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계였다. 하나님은 별과 달과 나라와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통치를 하늘의 천사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런데 이 천사들이 반역해 사탄과 그 졸개들(귀신들)이 되었으며, 그들은 이 세상을 훔쳐내었다. 그들은 인간의 내적 삶과 물리적 환경 안에서 그들 자신의 왜곡되고 악의적인 뜻을 실현하기 위해 애를 쓴다. 따라서 이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지 않다. 그것은 마귀들에 의해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악한 자의 나라일 뿐이다. 이 세상은 원래의 제 모습을 잃었다. 이 세상에 있는 악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 사탄의 소행이다. 사단과 그의 무리들은 견고하게 방비를 해 놓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을 포학하게 다루었고, 이 세상의 물리적인 힘 속에 악을 침투시켰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태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도둑맞은 그의 왕국을 회복해 다시 한 번 다스리시려고(하나님의 나라) 하신다. 이 회복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윗의 아들 같은 어떤 인간이나 지상의 육적 군대에 의해 정복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하늘의 “인자 같은 이”가 이스라엘의 수호천사인 미가엘의 도움을 받아(단 10:21, 계 12:7) 할 수 있는 영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악한 자들이 쫓겨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때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일생 동안 이 악한 마귀 세력들과 싸워 그들을 쫓아내고 병을 낫게 하셨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와 부활로(시 16:10; 호 6:1)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으로 인류를 사탄으로부터 구속해 내시고, 그들에게 부활 인류로(단 12:2) 구성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다. 이 “영혼의 구원”(벧전 1:9) 약속은 일찍이 모세와(신 18:15) 이사야를(사 9;11;42;51;53 등) 비롯한 예레미야(렘 31장), 에스겔(겔 36장), 다니엘(단 7:13-14; 12:1-2), 미가(미 4;5) 등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고, 그리하여 이 묵시적인 인자 메시아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곧 이스라엘의 소망이자, 전 인류의 소망이 되었다.
복음서의 소망 사상
메시아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들에는 ‘소망’이란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으나, 메시아가 오셔서 구약의 소망들을 성취하시고, 신약의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들에서 복음서의 소망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의 소망은 부활 이전 그리스도의 많은 미래적 천국의 말씀들과 약속들에 그 기원을 둔다.
(1)마가복음 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여기 ‘가까이 왔다’(엘기켄)는 말은 ‘임박했다’(has come near)는 뜻으로, “임박은 했으나 오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무한한 소망이 된다.
(2)마가복음 9: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그 나라가 자기와 함께 서 있는 사람들 중 일부가 죽기 전에 임할 것이라고 하셨다. 혹은 그의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임하리라고 하셨다(막 13:30).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건의 시기가 아니라(참조, 막 13:32)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한다는 사실이다. 이럴 때 하나님의 나라는 무한한 소망이 된다.  
(3)마태복음 5:4-9: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 나열된 동사의 모든 시제들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고, ‘위로 받음, 땅을 차지함, 배부름을 얻음, 긍휼히 여김을 받음, 하나님을 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얻음’ 등은 모두 천국에서의 축복을 가리킨다.
(4)마태복음 5:20: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미래시제(‘에이 메’+가정법)로 나타나 있다.
(5)마태복음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임한다’는 동사가 단순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 미래에 있을 단회적인 사건을 나타낸다. 그 사건은 바로 “당신의 나라”다.
(6)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인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여기서 말씀하는 나라가 미래적인 천국임을 보여준다.
(7)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에서는 ‘들어간다’는 동사가 미래시제로, 미래적인 천국을 말씀하신 것이 확실하다.
(8)마태복음 8:11-1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여기에서 말하는 천국은 확실히 미래적 천국을 말한다.
(9)마태복음 19: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신천신지를 맞이할 때 열두 사도가 유대인들을 심판할 것을 가리킨다.  
(10)요한복음 14:1-2: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내 아버지의 집(堂)”이라 하셨다. 그는 제자들이 장차 부활해 있을 곳을 하늘에 있는 ‘처소’(天堂)라 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주님은 이곳을 ‘낙원’(눅 23:43), 혹은 ‘하나님의 나라’(막 1:15; 눅 9:27 등), ‘천국’(마 5:10; 8:11; 18:3 등)이라 하셨다. 이는 모두 최후에 성도가 있을 곳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들로서, 전자(‘낙원’)는 성도의 영혼이 재림 시까지 있을 곳이란 의미에서의 칭호이며, 후자(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는 성도의 영혼과 육신이 아울러 영원히 있을 곳이란 의미에서의 칭호다. 이곳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이며(마 25:34), “영생”(마 25:46), “내 아버지의 나라”(마 26:29), “의인들의 아버지의 나라”(마 13:43), “새 세상”(마 19:28)이다. 그 곳은 하늘에 있는, 장소를 알 수 없는 어떤 한 장소다. 
 
사도행전의 소망 사상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에서 ‘소망’이라는 어휘가 제일 처음으로 나오는 책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소망 사상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베드로는 그의 오순절 설교에서 예수께서 이미 그리스도가 되실 뿐 아니라, 앞으로 장차 심판자 그리스도가 되실 것을 말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0-21).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행 10:42).
예수께서는 앞으로 만유를 회복하시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가 앞으로 회복자와 심판자로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은 일찍이 다니엘이 보았던 바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이는 미래적 천국이 초대교회의 소망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서신의 소망 사상
‘소망’이라는 명사형은 신약성경에서 사도행전부터 나오기 시작하는데, 사도행전에 4회, 바울서신에 28회, 히브리서에 4회, 베드로전서에 3회, 요한 1서에 1회가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의 4회 중 1회는 비전문적 의미로 사용되었고(행 16:19, ‘이익의 소망’), 나머지 3회는 모두 바울의 변호 중에 나온다(행 23:6; 24:15; 28:20).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교의 소망이 본격적인 형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엔 존재하지 않다가 부활 이후 초대교회, 특히 바울에 의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소망”의 일꾼이라고 한다(골 1:23). 과연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소망의 근원이 되었다(롬 5:2; 딤전 1:1; 벧전 1:3).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딤전 1:1).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가장 능력 있는 행위로서, 우리의 믿음을 탄생시켰고, 역사 내에서의 우리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하나의 종말론적 상징이 됨으로 인해 우리의 소망의 터전이 되었다”(Richardson)1.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모든 소망의 기원이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여기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는 소망하는 행위로 구원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고 소망하는 내용, 즉 미래의 완성될 구원이 우리의 믿음을 탄생시켰고, 그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뜻이다(‘소망’이 거느리는 전치사가 여격으로 되어 있음). 바울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라고 한다(롬 8:25). 보이지 않는 소망이 인내하며 기다릴 가치가 있는 소망이며,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소망이다(롬 5:5).
신자가 가진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기에, 그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실현되고야마는 소망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며,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결코 배반당하지 않는다. 그 보이지 않는 미래에 완성될 구원은 바울의 강한 미래적 종말사상에 나타나 있다(고전 6:9 롬 8:18-21: 살전 1:10).
바울은 천국을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빌 3:14),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고후 5:1, 이는 문맥상 성도가 장차 있을 신령한 몸을 가리키나, 이 몸을 입고 살 집이 천당이기에, 천당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셋째 하늘”(고후 12:2), “낙원”(고후 12:4), “위에 있는 예루살렘”(갈 4:26),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 8:18), “영생”(롬 2:7), “하나님의 나라”(고전 6:10), “사랑의 아들의 나라”(골 1:13)라고 부른다.

히브리서의 소망 사상   
히브리서 기자는 바울이 말한 보이지 않는 소망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소망을 “영혼의 닻”이라고 하며(히 6:19),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한다(히 11:1). 그러고는 그런 보이지 않는 소망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많은 신앙의 조상들을 열거한다(믿음장). 그리고 제일 끝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한다(히 11:39-40).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멀리 바라보았을 뿐이고, 그리스도가 실제로 오신 것은 신약 시대로서 신약 시대 성도들은 성취(fulfillment)의 시대에 살고 있다(더 좋은 언약, 히 7:22; 더 나은 본향, 히 11:16; 더 좋은 제물, 히 9:23; 더 좋은 피, 히 12:24; 더 좋은 소망, 히 7:19). 신약 시대 성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구약의 모든 약속은 하나님이 신약 시대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신약 시대를 통해서이므로, 신약 시대 성도들이 아니면 구약 시대 성도들이 소망했던 약속들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신약 시대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통해 구약 시대 성도들은 비로소 온전하게(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구약 시대 성도와 신약 시대 성도는 다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권속이요 자녀들이지만, 신약 시대 성도들은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 시대 성도들을 능가한다. 그래서 구약 시대 성도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멀리서 메시아의 오실 것을 바라보았지만, 신약 시대 성도들로 인해 신약 시대 성도들이 소망하는 것과 동일한 소망, 곧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할 수 있었다(히 11:15-16).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천당)을 예비하셨다(히 11:16). 그 이유는 신약 시대 성도들이 이른 곳이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이기 때문이다(히 12:22-24).


베드로전서의 소망 사상
베드로전서 1:3-5에서 저자는 먼저 그리스도인이 받은 구원이 특히 소망의 성격을 가졌음을 논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중생케 되고, 그리하여 ‘산 소망’을 가진 것이다. 소망이 없는 삶은 죽음이요, 산 소망이 있는 삶은 곧 구원이다. 소망은 베드로전서가 강조하는 사상이다(1:13, 21; 3:5, 15 등). ‘산 소망’은 이 세상의 죽은 소망과(욥 7:6; 엡 2:12) 대조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이 거듭남을 통해 영적으로 살아 있음과 그들의 소망이 살아 있음, 즉 그 소망이 계속 유효하며, 그들을 결코 끝 날에 부끄럽게 아니할 것(롬 5:5)을 뜻한다. 그것은 “생명으로 충만하며, 그 소망을 성취시킬 죽지 않는 능력(롬 5:5)에서 생명과 더불어 살며, 그러므로 마음이 기쁘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Huther)2. “이런 소망은 그 자체에 생명을 가지며, 생명을 주고 또 생명이 그 목표다”(De Wette)3.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누림에서 가지게 되는 소망이며, 성공하고 실패하지 않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소멸하지 아니 하시는 것처럼 소멸하지 않는”(Best)4 소망이다. 그것은 “사람이 그것에 의해 살 수 있는 소망이다”(Bo Reiche)5. 이는 다음 4절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된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산 소망은 곧 하늘의 영원한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하고, 마침내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한다(갈 4:7; 롬 8:17).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 그러나 그 기업은 단지 보이는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었다(시 16:5; 73:26). 이런 사상은 신약에 와서 더욱 명백히 나타나, 보이는 지상세계가 아닌, 천상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골 3:24; 고전 6:9; 15:50; 딛 3:7; 히 1:14). 팔레스타인 같은 물질적인 기업 대신에 저자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말한다. “그 기업은 죽음에 의해 영향 받지 아니하고, 죄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으며, 시간에 의해 손상되지 아니한다”(Beare)6. 그 곳은 죽음이 없고, 죄악이 없고, 질병이 없는 땅이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 기업은 성도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만드시고, 우리에게 주실 때까지 하늘에 간직하시는 것이다. 여기 “간직하신”(‘테테레메넨’)이 완료형 분사로 되어 있는 것은 그 기업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현재 보호받고 있는 자들을 위해(5절) 보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지금은 하늘에서 감추어져 있지만(골 1:5; 마 5:12)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과연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현현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의 소망 사상
요한은 미래적 천국을 “하나님의 낙원”(계 2:7),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계 3:12), “새 하늘과 새 땅”(계 21:1),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 21:2), “어린 양의 아내”(계 21:9) 등으로 소개한다7. 그 곳은 각색 열두 보석으로 기초석을 삼은 성곽이 있는 곳이며(계 21:19, 20), 열두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고(계 21:14), 열두 대문이 있으며, 그 열두 대문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고(계 21:12),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해 장광이 같고,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다(계 21:18). 그 성의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으며(계 21:11), 그 성의 열두 문은 열두 진주이고 문마다 한 진주이며, 그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다(계 21:21).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 되시기에 성전이 따로 필요 없으며(계 21:22),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燈)이 되시기에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는 곳이다(계 21:23). 그 곳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 바다가 없는 곳이며(계 21:1), 밤이 없는 곳이다(계 21:25). 그래서 성문을 닫을 필요가 없다(계 21:25). 그곳은 악한 자도, 외적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며,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온다(계 21:24). 이는 왕들이나 사람들이 자기네가 받으리라 생각했던 영광을 이제는 모두 하나님께 드린다는, 하나님의 영광의 위대함을 기록한, 묵시문학적인 표현이다.
그 곳에서의 삶은 영생(永生)으로서, 무궁한 생이다. “천성에서의 생명강수와 생명과수는 그 정체가 무엇이든지 간에 구속 받은 자들의 영생을 보증하는 것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이것은 죽음과 관계없고, 죽음의 밥으로 될 가능성 없는, 인생의 지복상태(至福狀態)다”(박형용)8. 그 곳에서의 삶은 완성의 삶이다. 그곳에서의 삶은 모든 면에서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는 완전한 삶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으로 인해 성전이 필요 없게 되며, 그들의 영광과 조명으로 인해 해와 달이 쓸데없게 된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한 평화의 삶이다. 그 곳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가 있는 곳이요, 끊임없는 복 주심이 있는 곳이기에, 그 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영교로 인해 혼란과 슬픔이 없는 평화로운 생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교통으로부터 오는 평화이기에 그 평화는 참된 평화인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그 곳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삶이다. 지금까지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나타나지 못하고,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재림 시에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요일 3:2). 부활, 신령한 몸으로의 변화, 영화 등을 경험할 것이다. 이는 피조물들도 학수고대하는 바이다. 그 때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같이 빛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구주를 보고, 그로 더불어 친히 교통하며, 그의 모든 영광과 복되신 중에 그로 더불어 교제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그와 함께 있어, 그의 영광을 볼 것이요(요 17:24), 승리자로서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을 것이다(마 19:28; 계 3:21). 천당에는 등급이 있을 것이다(고전 3:12-15; 고후 9:6). 그러나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각 개인의 기쁨은 완전하고 충만할 것이다. “지상 선행을 척도로 한 시상에 불공(不公)이 없으니 그것에 대해서 불평을 올릴 자 없을 것이다. 고급에 있는 자 저급 사람에 대하여 교만하지 않고, 후자는 전자에게 향하여 시기하지 않으니, 불유쾌가 있을 수 없으리라”(박형용).
그 곳에서의 삶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이다. 거기는 의가 거하는 곳으로(벧후 3:13), 악으로부터 완전 분리 되어 있는 곳이며, 범죄자들이 절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기에, 그 곳에서의 성도들의 삶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이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며,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온다(계 21:27).
그 곳에서의 삶은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삶이다.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즉 최고의 단장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계 21:11). “저 천성의 지극한 순미(純美)와 영화는 형언할 수 없는 화경(畵景)으로 어른거린다”(박형용). 그 곳에서의 삶은 사랑의 교제다.
그 곳은 사랑의 나라요 섬김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계 7:15).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과 성도들, 그리던 부모, 형제, 자매, 벗들을 만나 함께 교제하며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 큰 소망(HOPE) 가운데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소망들(hopes)은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1) A. Richardson, A Theological Word Book of the Bible (New York : Macmillan, Pub. Co, 1950), p.109.
2) 이상근 지음, 《공동서신》(서울: 총회교육부, 1963), p. 117.
3) 이상근 지음, 앞의 책, p. 117. 4) E. Best, 1 Peter, NCB (London: Oliphants, 1971).
5) C. F. D. Moule, The Meaning of Hope (London, 1953) 참조.
6) F. W. Beare, The First Epiistle of Peter, 3d ed. (Oxford: Blackwell, 1970) 참조.
7) 박수암, 《신약신학주제사전》(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2), pp. 425-427. 
8) 박형용, 《교의신학 제7권: 내세론》, pp. 365-366.

박수암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토론토 대학교(Th.D.). 저서로 《신약 신학 주제 사전》, 《신약성경 개론》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