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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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2019년  01월호 교회를 찾아온 노숙자에게 돈을 주어도 될까요? 3인 3색

돕는 방법에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

송영식   서광교회 담임목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공급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약자를 섬겨야 한다. 필자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는 매주 수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찾아오면 교역자 사무실에서 담당자가 소액이지만 일정한 금액을 지급한다. 그런데 가까운 동네 어르신들은 찾아오지 않는데, 인천, 성북, 수원 등 먼 지역에서 찾아온다. 입소문으로 동료들을 데리고 함께 오는 듯하다. 65세 어르신들에게 정부에서 지급하는 연금이 생긴 후에는 그만 종료할까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교회를 찾아오는 어르신들이 많고, 그분들이 적은 돈을 받아가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계속하고 있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주님께서 교회에 명령하신 첫 번째가 영혼 구원이요, 다음은 구제 사역이다.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다(행 20:35). 청교도 목사 리처드 백스터가 쓴 《참 목자상》에 보면 “그리스도에게 대하듯이 미천한 사람에게도 공손하게 대하십시오. 양 떼 중 가난한 사람에게 낯선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     

프랑스어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사회의 고위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가리킨다. 즉 부와 권력의 특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개념이다. 1374년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마지막 저항노선이었던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의 작은 항구 도시 칼레가 위치한다.

시청 앞에 〈칼레의시민〉이라는 로댕의 조각상이 있는데, 여기에 여섯 명의 프랑스 귀족이 목에 밧줄을 매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걷는 모습이 작품으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노블리스 오블리주 유래로 생각한다. 영국 에드워드 3세가 칼레를 장악했을 때, 프랑스의 필립 6세는 칼레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내라고 명령했다. 필립 6세의 칼레 장악은 실패했고 굶주림으로 인해 결국 칼레는 항복을 위한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칼레시가 항복이 늦어 큰 피해를 입었으니 여섯 명의 전범자를 처벌하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스로 전범자를 자처한 사람이 최고 갑부와 시장 그리고 지도자 등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처음 자원을 한 갑부 외스타슈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처형을 자원한 사람 일곱 명 중에 한 명이라도 살아남으면 순교자의 뜻에 맞지 않고 또한 시민의 사기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여 자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 3세는 감동받아 여섯 명의 전범 자원자 처형을 중단했다. 이 사건이 귀족의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유래다.

고대 기록들 중에는 ‘하비루’들에 관한 기록이 많다. 이들은 어느 특정 지역에 한정되어 사는 것이 아니고 고대 전역에 걸쳐 골고루 발견된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빈궁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정치적으로 힘없는 하층 계급이었다. ‘하비루’란 사회학적 용어다. 성경에서 보면 ‘하비루’와 ‘히브리’의 용어 의미가 일치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시 사회적인 신분으로 볼 때 ‘하비루’들이다. 출애굽기 1-2장을 통해 애굽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라고 불리고 낮은 사회 계층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근동지역 강자들은 이스라엘을 비하해서 ‘하비루’(곧 히브리)라고 불렀다.

하비루는 기존 사회 질서의 중심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고, 특히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경제적인 약자들이었다. 법적으로 이들은 특정한 나라에 속하지 못하였고 무국적 상태의 사람들이 많았다. 즉 하비루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약자들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하비루’ 들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스라엘이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사람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자신은 가나안의 “나그네요 이방인”이라고 말한다(창 23:4). 이와 같이 가난하고 힘없는 “나그네요 이방인”인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다. 구약 성경에서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하비루 즉 히브리들의 하나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하비루와 같이 사람들의 편에 서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40년 광야 생활을 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일용할 양식을 해결할 수 없고,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대접해 주셨는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먹을 양식이 없는 하비루에게 하나님은 매일같이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게 하여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내려 주셨다(출 16: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곡식을 거둘 때까지 만나를 지속적으로 내려 주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힘없고 나약한 하비루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직접 돌보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 모세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의무를 신명기에서 유언처럼 말한다. 그 내용 가운데 사회적 약자를 돌보라고 말씀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또한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고 하셨다(신 24:19). 감람나무와 포도나무의 포도를 딴 후에도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 24:20)고 하셨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22). 이와 같이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의무다. 교회에 찾아온 노숙자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을 제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조성종   상계경신교회 담임목사


어느 날, 낡은 양복정장을 차려 입은 노신사가 교회에 찾아왔다. 사무실에서 손님을 맞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나를 찾았다. 담임목사와 면담을 원한다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만난 그 분은 충정도 어느 지역의 원로장로인데, 지금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교회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어느 교회를 섬겼고, 담임목사 이름은 누구라고 한다. 가만히 보니 그 교회의 전임목사가 내가 잘 아는 분이라 그분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는 원로장로이기는 하나 사업을 해서 잘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주일에 다시 뵙자고 했다. 여러 번 속은 경험이 있기에 더 이상 속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나와 작별하고 나가면서 교회 앞에서 장로님을 만나 감언이설로 돈을 받아 갔다. 상기된 얼굴로 목양실에 들어온 우리 교회 장로님이 “목사님, 그 원로장로님 딸이 피아노도 잘 치고, 부인도 사업을 하는데, 이 교회가 좋아서 꼭 나오겠다고 해요. 그런데 지금 빨리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부인 권사님이 약을 사오라고 했다면서 2만 원만 달라고 해서 빌려 드렸어요” 하는 것이었다.

10년 전에 우리 교회는 노인대학을 열었다. 매주 목요일에 간단한 특강을 하고, 예배와 간식을 나눠 주고, 오락과 율동을 하고, 가실 때 약간의 돈을 주는 행사를 했다. 물론 한 분이라도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어르신들에게 건전한 오락을 제공하고 싶어 실시한 것이다. 그러나 노인대학에 나온 분 대부분이 간단한 음식과 약간의 돈만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었다. 그러다가 노인대학을 중단했다. 가장 큰 이유는 섬길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분들이 한 번 왔다가 가면 교회 전체를 다시 청소해야 할 만큼 냄새가 진동하였고, 화장실이나, 회의실은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다. 이 일에 자원하여 뒤처리를 하실 분들이 부족했다. 

두번째로는 이분들에게 주는 돈이 전혀 무의미하게 쓰이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들은 일주일 스케줄이 꽉 짜여 있었다.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어느 교회에서는 몇 시에 돈을 주고, 어느 교회에서는 무료식사를 제공하고, 어디서는 간식을 준다는 정보를 다 알고 있었다. 이러한 연고로 노인대학 특강이나 간식 시간이 조금만 지체 되어도 이들을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왜냐하면 다른 교회에 빨리 가서 돈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인대학을 그만두고, 매주 화요일 오후 2시에 이들에게 적은 액수의 현금을 준 적도 있다. 그랬더니 정작 지역의 노인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전국 각지에서 걸인들이 모였다. 시간을 넘어서 오면 돈을 주지 않았더니, 시간에 맞추려고 뛰어오는 사람들, 서로 먼저 돈을 받겠다고 싸우는 분들이 생겼다. 결국 이 행사도 실패했다. 

이런 경험 속에서 나름의 답을 내리자면, 나는 노숙자에게 돈을 주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노숙자의 유형에 따라 접근을 다르게 할 필요는 있다. 현재 노숙자는 자발적인 노숙자와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된 노숙자로 구별할 수 있다. 피동적인 노숙자는 사업이 망하고, 이혼하고, 가산이 몰락해서 어쩔 수없이 된 경우다. 자발적인 노숙자는 충분히 일해서 생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숙자가 된 경우다. 피동적으로 노숙자가 된 경우에는 잠자리를 비롯한 도움을 주어 그들이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단기간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지역교회에서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성경에서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는 말씀과 연결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교회에 찾아온 노숙자들 중에는 단지 교회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는 이가 많다. 이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면 성경을 인용하여 큰 소리로 소란을 핀다.  성경에는 나그네와 약한 자를 돌보아 주라고 했는데, 무슨 교회가 이러냐고 하면서 말이다.

교회의 목적은 영혼 구원에 있다. 교회는 사회봉사기관이 아니다. 물론 사회봉사를 통하여 구원의 소식을 전할 수는 있다. 그런데 단지 나그네들과 걸인들이 교회에서 주는 한 푼의 돈을 보고 오고, 교회는 이 상황을 알면서도 돈을 제공한다면 잘못하는 일이다. 만약 돈을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사도행전 3장에 등장하는 미문 앞의 앉은뱅이는 평생 동안 베드로와 요한이 주는 한 푼의 돈만 바라고 결코 성전으로는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문전성시(門前成市)와 문전박대(門前薄待) 사이에서

이재호   기뻐하는교회 담임목사


목회를 하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많은 사람이 교회로 찾아온다. 그런데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 혹은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목사로 하여금 심각한 내적 갈등을 하게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노숙자다.

이들은 한결같이 돈을 요구한다. 만일 그들이 요구하는 돈을 손에 쥐어 주면, 교회는 노숙자들로 인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게 될 것이다. 어느 교회에 갔더니 다른 교회와 달리 돈을 주더라는 소문이 주변에 금세 퍼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몰려드는 노숙자들에게 일일이 돈을 줄 수 없다고 말하면,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냐는 핀잔을 들어야 한다. 도와주고 욕을 먹는 억울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노숙자들 중에는 실제 집이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숙자 행세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노숙을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번은 교회로 찾아온 사람에게 사지가 멀쩡한데 공사장에 가서 일용직으로라도 일을 하지, 왜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가 기가 막힌 대답을 들었다. 교회와 봉사 단체 등을 잘 다니면 한 달을 충분히 먹고 살만큼 버는데 굳이 왜 일을 하냐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면 바로 문전박대(門前薄待)다. 하지만 그렇게 돌려보낸 뒤에도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 뜻하지 않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 이 시대 목사의 현실이다.

결국 교회는 노숙자에게 돈을 주어도, 주지 않아도 문제가 생기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나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교회를 찾아오는 노숙자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만일 정말 도움이 필요한 노숙자가 교회를 찾아온다면 교회는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태복음 25:40 말씀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참 신앙인의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교회에 있는데 다섯 명의 일가족이 찾아왔다. 사정을 들어 보니 기가 막힌 일을 당해 집을 잃고 며칠째 노숙을 하다 일가족 모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누구에게 손 벌리고 살던 사람이 아닌데 버티고 버티다 못해 밥 한 끼만 먹을 수 있도록 식사비를 좀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이들을 데리고 교회 앞 식당에 가서 밥을 사 먹이고, 찜질방에 가서 잘 수 있도록 비용을 지불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정말로 뜻하지 않게 어려움을 당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그들이 교회를 먼저 찾은 것은 교회가 세상을 품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일말의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품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교회를 찾아오는 노숙자가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그들이 요구하는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물은 뒤, 목적에 맞게 도움을 준다고 했을 때, 그들의 반응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노숙을 하며 배가 고프다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식사를 사 주겠다고 했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정말 배가 고픈 사람이다. 또 차비가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노숙을 하고 있다며 돈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터미널까지 같이 가서 승차권을 구입해 주겠다고 말했을 때, 감사하다고 말하며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정말 돈이 없어서 고향에 못 가고 있는 사람이다. 또 한 달째 밖에서 잠을 자고 있어서 몸이 아프다고 말하며 돈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찜질방에 가서 이용료를 지불해 주겠다고 했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정말 한 달째 밖에서 잠을 자며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위와 같은 이유로 돈을 요구했을 때, 목적에 맞게 함께 가서 도움을 준다고 이야기하면 열에 아홉, 아니 백에 아흔 아홉은 그냥 돌아서서 나간다. 심지어 욕을 하며 가는 사람도 있다. 무슨 뜻일까?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다. 단순히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돈이 오히려 독이 된다.  
 
첫 번째 이유는 그 돈으로 인해 오히려 그들의 건강을 해칠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노숙자들이 모이는 곳에 가 보면 대부분 술을 마시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알코올의존증 환자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돈이 없으면 못 마실 술을 누군가가 선의를 갖고 건네 준 돈으로 사서 마시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돈으로 인해 이들의 자립심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들의 인생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손에 쥐어 준 그 돈이 오히려 그들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를 든다면, 교회의 본질이 흐려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구제는 마땅히 교회가 해야 할 일이지만, 교회의 본질은 아니다. 교회의 본질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교회가 무분별하게 구제에 앞장서면, 세상에 비친 교회의 모습은 복음의 센터가 아니라 사회복지 센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처럼 교회에 찾아온 노숙자에게 돈을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그렇다’와 ‘아니다’로 양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상황을 잘 살펴서 뱀같이 지혜로운 분별력을 갖고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주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거절하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도 유익한 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말 도움이 필요해서 교회에 찾아오는 노숙자들을 위하는 길은 한두 번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자녀에게 물고기 한 마리를 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법을 알려 주라’라는 탈무드의 격언처럼 그들이 직접 일을 하고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들의 삶을 위해 훨씬 더 유익하다. 다행히도 우리나라의 지자체에는 이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들이 제법 많다. 일례로 성공회유지재단이 서울시와 협력해서 운영하는 ‘다시서기 종합 지원센터’(www.homelesskr.org)에서는 노숙자들에 대한 다양한 지원을 실시하고 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노숙자들에게 교회가 이런 시설과 연계해 줄 수 있다면, 처음에 돈을 요구하며 교회를 찾아왔던 노숙자가 언젠가는 감사의 인사를 하러 교회를 다시 찾는 날이 오진 않을까? 꿈같은 그날을 상상해 본다.  

 

송영식, 조성종, 이재호 송영식 서광교회 담임목사, 조성종 상계경신교회 담임목사, 이재호 기뻐하는교회 담임목사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