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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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설교 2018년  11월호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네 개의 눈길 권연경 교수의 네 개의 복음서에서 한 분 예수님 만나기(27)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해 호스피스에서 봉사하던 한 청년이 심각한 영적 회의에 빠졌다. 죽음을 앞둔 많은 목회자가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과 평소 죽음과 영생에 관한 그분들의 멋진 설교를 연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영원에 대한 소망을 찾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저 이 땅의 삶이 전부이고, 그 삶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것 같은 이들의 모습에서 타향을 떠나 고향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는 괴로움이었다.

죽음을 향해

이렇게 보면,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는 그 사람이 그간 살아온 삶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 정말 영생의 소망을 어루만졌던 것이 아니라, 영생의 언어를 읊조리고 그 언어를 활용하며 이 땅에서의 삶만 누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죽음 자체가 최후의 유혹이 되어, 그간 지켜왔던 신앙적 태도를 뒤흔드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고대의 현인들 중 ‘죽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소크라테스다.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최후는 그야말로 의연한 죽음의 최고 사례다. 그는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던 죽음의 잔을 애써 피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에 대한 일상적 두려움조차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의 이런 태도는 죽음이 우리 인생의 ‘최악의 사태’가 아니라, 우리 삶이 향해야 할 목표 지점이며 우리 삶의 절정이라는 생각과 관계가 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철학자의 삶이란 죽음을 연습하는 삶이다. 삶의 목표는 육체의 욕망과 필요를 최소화하면서 영혼을 고결하게 가다듬는 일이다. 이 과정을 완결하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니 죽음은 무서워하며 피할 것이 아니라, 큰 기대감으로 맞이해야 할 일이다. 수련이 잘 되어 있을수록 더 나은 것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가 살아온 삶의 성격을 가장 잘 요약하는 사건인 셈이다.

죽음을 향해 가는 삶

바울은 예수의 의미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두 사건으로 요약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예수의 ‘생애’에 전혀 무관심했던 건 아니겠지만, 죽음이 성육신 후 예수의 지상적 삶에서 가장 ‘반짝이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바울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실 예수의 ‘생애’를 기술한 네 명의 복음서 저자들 역시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그의 삶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를 찾는다. 그래서 네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는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예수의 죽음에 매우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다소 과장하자면, 네 복음서가 그려내는 예수의 짧은 삶은 애초부터 죽음이라는 결말을 향한 긴 여정이었다는 인상을 풍긴다.

가령 마가복음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는 8장에서의 메시아 고백이다. 그런데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공인된 이 시점은 동시에 죽음이라는 그의 운명이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고난받는’ 메시아 예수는 그 길을 방해하는 사탄과 다시 한번 결정적인 전투를 벌인다. 이후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예수의 여정은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에 다름 아니다. 어떤 이는 마가복음을 두고 “긴 서론을 가진 수난 이야기”라고 불렀다. 마냥 터무니없는 과장은 아닌 셈이다.

누가복음 역시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는 주제를 잘 보여 준다. ‘여행 기사’(travel narrative)라고 따로 이름을 붙이곤 하는 것처럼, 예수의 여정은 상당 부분 예루살렘을 향한 의도적 여정으로 묘사된다. 예수의 의도적 움직임 속에서 예루살렘은 무엇보다도 죽음의 장소를 의미한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의 메시아적 영광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순간은 변화산 사건에서다. 여기서 예수는 환상 중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이 대화는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관한” 것이었다(9:31). 신변의 위험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나의 길을 가야 한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13:33).

죽음이 예수의 메시아적 생애의 절정이라면, 복음서 저자들은 이 죽음의 묘사에 무엇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들이 선포하고자 했던 예수의 의미가 예수의 죽음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예수의 죽음은 복음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만큼 예수의 죽음에 관한 주장 역시 다양하다. 여기서는 각 복음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들을 살피면서, 거기서 드러나는 죽음의 초상들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십자가

각 복음서의 십자가 이야기는 겹치는 부분도, 서로 다른 부분도 많다. 그중 가장 비슷한 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다. 물론 이 둘 사이에도 사소한 차이들은 존재한다. 마가복음에서는 체포 장면에서 예수의 제자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 떨어뜨리지만, 여기에 대해 예수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막 14:47).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제자의 그 행동을 꾸짖으시며, 자신의 체포가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마 27:51-54). 또 마가복음은 도망치는 제자들과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청년이 벗은 몸으로 도망치는 이야기를 덧붙인다(14:51). 뜬금없어 보여서 학자들의 상상력을 더 자극하는 흥미로운 삽화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를 넘겨준 것은 “민란이 날까 봐” 두려워서다(27:24). 반면 마가복음은 “무리에게 만족을 주려고” 그랬다고 기록한다(15:15). 같은 이야기지만, 보는 관점이 다른 셈이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골고다에 도착해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군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지만 예수는 이를 거절한다(막 15:23). 마태는 이를 “쓸개 탄 포도주”로 묘사하면서, 예수께서 이를 한 번 “맛보고서” 거절하셨다고 말한다(27:34). 군인들이 예수를 놀리기 위해 입힌 “홍포” 역시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예수의 죄패 역시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일 수도 있고(막 15:26),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이다” 하는 문장일 수도 있다(마 27:37). 또한 마태복음은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옷을 나눈 후 “거기 앉아서 지켰다”고 전한다(27:36).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은 장면이다. 이런 식의 소소한 차이는 이 외에도 많다.1

하지만 전체적으로 마태와 마가의 십자가 이야기는 상당 부분 겹친다. 유대인 지도자에게 버림을 당하고 빌라도에게 넘겨진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께서 “유대인의 시기심 때문에”(마 27:18; 막 15:10) 재판에 넘겨진 것을 알면서도, 결국 군중의 의지에 밀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다(마 27:26; 막 15:15). 이렇게 예수는 군인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골고다로 끌려간다. 그리고 군인, 군중,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한다. 누가복음에서와는 달리,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에게도 조롱을 당한다(마 27:44; 막 15:32).

이처럼 마태와 마가의 십자가 이야기는 “버림받는” 예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두 복음서가 전해 주는 십자가상 예수의 유일한 말씀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토로하는 시편의 말씀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저를 버리십니까?”(마 27:46; 막 15:34; 시 22:1). 마태와 마가만이 전해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마태와 마가는 모두 예수의 외침을 예수의 모국어로 인용한 후 이를 헬라어로 번역한다. 논란이 많긴 하지만 히브리어 시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시편의 말씀을 예수의 일상 언어인 아람어로 풀어 외치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노래한 시인의 언어를 빌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신 셈이다. 이것이 “큰 소리로” 외친 외침이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서 버림당하는 예수의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준다(마 27:46; 막 15:34). 운명하시기 전 예수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신다. 이 외침이 이전 것과는 달랐다는 흔적은 없다. 그렇다면, 예수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하신 셈이다. 이것이 마태와 마가가 그려 보여 주는 예수의 죽음이다. 죽음이 자신의 소명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예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 신비로운 혹은 당혹스런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의미심장하게도, 예수의 죽음을 목격한 이방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다(마 27:54; 막 15:39). 신학적으로는 당연한 귀결이지만, 마가복음의 흐름 속에서 이 반응은 매우 당혹스럽다. 버림받은 예수에 관한 마가의 묘사 속에서 이 고백의 이유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이 고백의 실질적인 이유가 보다 상세하게 제시된다. 마태는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큰 지진과 많은 성도들의 부활이 있었음을 기록함으로써, 이 죽음이 범상치 않은 사건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사람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매우 두려워하면서” 그런 고백을 하게 되었다고 말해 준다(27:54).

누가복음의 십자가 죽음

반면 누가복음이 그려내는 십자가의 색채는 사뭇 다르다. 십자가 죽음을 고난의 맥락에서 묘사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버림받음의 고통보다는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잃지 않는 의인의 모습이 더 두드러진다. 세 번 반복되며, 죽음 앞에서의 고뇌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기도를 한 번으로 요약한다. 천사가 힘을 도왔다는 이야기나 그의 땀방울이 마치 핏방울 같았다는 묘사 역시 고통보다는 상황에 신실하려는 의인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22:42-44). 또 체포 장면에서 곁에 섰던 제자들이 “주여, 칼로 칠까요?” 하고 묻고서는 예수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 떨어뜨린다. 하지만 예수는 “이것까지 참으라” 하고 말씀하시며,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22:49-51). 차분하게 상황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이 돋보인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알 수 없었던 이야기다. 골고다를 향해 가는 모습도 색다르다. 예수의 뒤를 따르며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해 위로의 말씀과 더불어 장차 다가올 고난에 대해 경고하신다.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선지자로서의 자태를 잃지 않은 의연한 모습이다(23:27-31).  

십자가 위에서의 모습은 이런 인상을 더욱 분명히 만들어 준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소개했던 버림받음의 절규를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상 예수의 첫 말씀은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들에 대한 용서의 말씀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23:34). 두 번째 말씀은 한 강도의 비난에 대해 예수를 변호하며 그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강도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 이 약속은 강도뿐 아니라 예수 자신 역시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전제한 말씀이다. 신앙을 고백한 강도를 향한 구원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예수의 의연함을 드러내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물론 누가 역시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쳤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하지만 이는 버림받음의 고통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향한 신뢰의 외침이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23:46).

이와 더불어 예수의 무죄함 역시 한결 더 선명하다. 누가복음에서 빌라도는 무려 세 번에 걸쳐 예수의 무죄를 강조하며 그를 풀어주려 노력한다. 구체적인 고소의 이유도 없이 그저 유대인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를 넘겨주었다 말하는 마태나 마가와 달리(마 27:18; 막 15:10), 누가는 백성의 장로들이 왕을 자칭하면서 백성을 현혹하고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했다는 죄목을 열거한다(23:2-3).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이 가장 엄중하게 다스렸던 정치적 반역죄다. 그런데 정작 제국의 대리자 빌라도는 그 혐의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제사장의 무리들도 물러서지 않고, 예수가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예루살렘까지)와서 백성을 소동케 한다”고 거듭 강변한다. 한마디로 ‘로마의 평화’를 흔드는 선동자라는 고발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다시금 예수의 무죄를 분명히 선언한다. 뿐만 아니라, 누가는 헤롯왕 앞에서의 재판 이야기까지 덧붙이며 예수의 무죄함을 한결 부각시킨다(23:6-12). 

유대의 지도자들은 정치적인 죄목을 뒤집어 씌워 예수를 고소했는데, 정작 로마를 대변하는 통치자들은 바로 그 점에서 예수의 무죄를 분명히 한다. 역설적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결국에는 군중의 목소리가 이긴다. 그 결과 무리가 원했던 사람, 곧 “민란과 살인 때문에 투옥된 사람”을 석방하고, 정작 죄가 없었던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여기서도 예수의 무고한 죽음이 또 한 번 부각된 셈이다.

예수의 무죄가 강조되는 만큼, 예수에 대한 사람의 태도도 달라진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서는 모두가 예수를 조롱하고 비난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엇갈린다. 백성은 예수를 비난하는 대신 그냥 서서 구경한다. 하지만 ‘관리들’은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예수를 비웃는다. 군인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23:35-37). 함께 달린 두 강도도 서로 어긋난다. 두 강도 모두 예수를 조롱했던 마태나 마가와 달리, 누가는 한 ‘행악자’는 비방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고 예수를 변호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에 마땅한 보응을 받는 것이라 이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분이 하신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23:40-41). 그리고 그 강도는 예수를 향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께 복된 미래를 약속받는다(23:42-43). 마태와 마가에 비해 볼 때, 대중의 반응에서도 예수의 무죄함이 그만큼 더 부각된 셈이다.

이렇게 보면, 누가가 그려내는 예수의 십자가는 전형적인 의로운 순교자의 죽음에 가깝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는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백성을 향한 사랑을 놓지 않는 의로운 선지자와 같다.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죽음 이야기를 읽으며, 어쩌면 이방인 독자들은 그 유명한 현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대인 독자들은 마카비 혁명 당시 순교했던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았을까?(마카비 하 7:1-42).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귀환’으로서의 십자가

공관복음에서 나와 요한복음으로 들어오면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온 느낌이다. 이는 예수의 마지막에 대한 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생애 전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은 요한복음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듯, 예수는 자기 육체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다(2:19-22).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3:14; 12:32-33).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부르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 영생을 약속할 때에도, 예수는 마음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계셨다. 그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며, 선한 목자로서 그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의식하고 계셨다(10:10-11, 15, 17-18).

당연히 요한복음에서도 죽음의 예감은 예수를 괴롭게 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 가득한 기도 장면 자체는 나오지 않지만, 죽음의 고통과 고뇌를 드러내는, 사실상 같은 기도가 오히려 보다 강력한 언어로 소개된다(12:27). 그러나 죽음의 고통이 스토리의 주된 색조는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 이 세상으로 오셨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후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분이다. 바로 이 귀환의 맥락 속에 예수의 죽음 이야기가 그려진다. 마지막이 괴로워 피하고 싶은 고통의 ‘때’라는 사실이 부정되지는 않지만, 이 죽음은 아버지께로의 귀환이라는 보다 큰 드라마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요한복음의 십자가 이야기에서 ‘수난’의 색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소명 의식 및 그 소명에 대한 순종을 그 어떤 복음서보다 더 분명히 강조한다. 그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에 머무는 아들이다(15:10). 이 순종의 여정은 그의 십자가 죽음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이 죽음은 아버지에게서 오셨다가 이 땅에서의 사명을 완수하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귀환의 모퉁이이기도 하다(13:1, 3; 6:62). 그래서 요한복음의 십자가 이야기는 예수께서 견뎌야 하는 수난과 고통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적극적인 순종의 과정으로 그려진다.2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의 최후의 만찬 대신 ‘다락방 강화’라 불리는 긴 이야기를 소개한다. 분명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마지막 식사를 통해 그 죽음을 의미화하는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의 마지막 밤은 이 세상에 왔다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서로 이별을 고하는 무대다(16:28). 이 긴 강화에서 예수는 자신의 떠남을 예고하고, 부재의 시간을 살아가야 할 제자들을 위한 유언의 말씀을 남긴다. 하지만 네 장 혹은 다섯 장에 걸친 이 긴 강화 어디에도 이 떠나감이 죽음을 통한 여정이라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유다가 예수를 팔 것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13:11, 18-19, 21-30),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주를 따르겠노라는 제자들의 호언 속에 죽음의 색조가 살짝 비치기는 한다. 하지만 공관복음의 도움이 없다면, 누구도 거기서 예수의 죽음을 유추해 내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그 죽음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는 셈이다.

당연히 예수의 체포와 재판, 그리고 십자가 처형에 관한 묘사 역시 이런 관점을 드러낸다. 예수는 유대의 지도자들에 의해 체포되지만, 예수는 이 사실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18:4). 그래서 예수의 체포 장면은 사실은 체포가 아니라 자진 출두에 가깝다. 유다의 인도하에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향해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시고, 직접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며 “자수”한다(18:5). 이런 당당함에 압도당하는 것은 오히려 그를 잡으러 온 무리들이다. 그들은 예수의 그 말씀에 “뒷걸음질 치며 땅에 엎드러졌다”(18:6). 이렇게 혼비백산하는 무리들에게 다시 “누구를 찾느냐?” 묻고, 또 한번 “내가 (너희가 찾는) 그 사람”이라고 확인시킨다(18:8). 심지어 제자들이 도망치는 것 역시 예수의 뜻에 의한 것처럼 그려진다(18:8-9). 저항을 말리는 예수의 말씀에서도 성경 성취의 필연성을 부각시키는 마태나 마가보다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셔야 한다는 순종의 의도가 더욱 두드러진다(18:10-11).

안나스에게 심문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 역시 누가 심문을 받는지 헷갈릴 정도로 당당하다. 대제사장이 예수의 제자들과 그의 가르침에 대해 심문하지만,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답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꾸지람 내지는 도발에 가깝다(18:20-21). 지켜보던 하인이 대제사장을 모욕했다고 뺨을 때릴 정도다(18:22). 물론 이에 대한 예수의 대응 역시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18:23). 빌라도 앞에서의 심문은 이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풍긴다. 재판 장면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다른 대화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무죄를 설득해 방면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빌라도의 모습도 흥미롭지만(19:12), 그런 재판장의 선의도 무시한 채, 마치 선문답이라도 하듯, 빌라도가 알아들을 수 없는 진리를 설교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더욱 흥미롭다.

십자가 위에서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떠나는 자기 대신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모습은 사형장보다는 오히려 공항 대합실에 더 어울리는 장면 같다. 이런 자리에 고통의 울부짖음이 있을 리 없다. “내가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시긴 하지만, 이는 실제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성경을 이루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19:28). 이 말씀을 하시고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모든 것이 완결되었음을 선언하신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는 숨을 거두신다. 물론 여기서도 죽음은 수동적으로 찾아오는 상황이 아니라, 마치 예수의 의도적 행동인 것처럼 그려진다. “머리를 누이시고(숙이시고), 그의 영을 내어주셨다”(19:30). 누군가 예수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기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는 선한 목자의 이야기다. 철저히 아버지의 계명에 복종하면서 그의 뜻을 이루어 가는, 그리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는 구원자의 모습이다.

네 복음서는 한 분의 예수를 소개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천편일률적일 필요는 없다. 그들은 모두 예수에 관해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저자들의 눈길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이런 색다름을 통해 우리는 나사렛 예수를 더욱 다채로운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 네 복음서의 증언을 통해 예수와 우리의 만남이 그만큼 더 풍성해진다는 이야기다. 여러 가닥이 맞물리고 꼬여 튼튼한 밧줄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네 복음서의 가닥들이 서로 얽혀 돌아가면서 한 분 예수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을 더욱 든든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네 복음서의 색다름이 불편함의 이유가 아니라 기쁨의 계기가 되는 이유다. 


각주


1) 보다 중대한 차이도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큰 지진과 더불어 무덤이 열려 많은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났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27:52-53).
2) 요한복음의 십자가 이야기는 특이하다. 무엇보다 공관복음에 나오지 않는 사실들을 알 수 있어 흥미롭다.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린 제자는 다름 아닌 베드로였다. 그리고 그 종의 이름은 말고(말코스)다(18:10). 예수는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가 아니라 이미 대제사장을 지낸 그의 장인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는다(18:12-14, 19-24). 베드로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인 어떤 제자 덕분에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18:15-16). 또 십자가상의 죄패가 유대인의 언어, 라틴어, 헬라어 세 개로 기록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19:20). 사형선고 후 이루어졌던 군인들의 조롱도 선고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된다(19:1-5).

권연경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신약학). 런던 킹스칼리지(Ph.D.). 저서로 《로마서 산책》,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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