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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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11월호여성과 함께한 초기 한국 교회 여성과 함께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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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복음주의 개신교의 선교 정책

초기 한국 교회에서 여성들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한국에 처음 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어떤 선교 정책을 사용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천주교는 전통적으로 상류층 선교에 힘썼다. 일본에 처음 온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주요 선교 대상을 봉건 영주 계급에서 찾았다. 이것은 상당한 열매를 맺었다. 16세기 말에 이미 20만 명에 이르는 신자를 확보할 정도였다. 그 뒤 중국에 온 선교사들도 같은 정책을 사용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유교 선비와 동일시했고, 서구의 과학 문명을 중국의 지식층들에게 전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천주교에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 개신교가 등장한 것은 이보다 수세기가 지난 19세기 말이었다. 16세기 세계 무역을 지배하던 가톨릭 국가들은 쇠퇴했고, 이제 개신교 국가들이 해상 무역을 주도하게 되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개신교인들은 자기들의 국가를 민주국가로 만들어서 과거처럼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국민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이런 개신교의 흐름은 선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상류층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한국 개신교 선교에 영향을 준 복음주의 기독교는 대중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기독교의 본질은 예전의 준수나 교리의 암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보았다.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한 사람은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참된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는 기독교가 귀족보다는 평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도록 만들었다.

19세기 복음주의적인 개신교의 선교 정책은 1893년 한국장로교선교부공의회가 채택한 선교 정책에 잘 나타나 있다. 10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전도의 목표를 상류층보다는 근로 계급의 귀도(歸道)에 두는 것이 더 낫다”이다. 둘째는 “모성(母性)은 후대의 양육에 중대한 영향력을 주는 관계상, 부녀자의 귀도와 청소년의 교육을 특수목적으로 한다”이다. 여섯째는 “모든 문서사업에는 한자의 구속을 벗어나고, 순 한글을 사용함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이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여성을 가장 중요한 선교 대상으로 삼고, 이들에게 적합한 한글을 주요 교육 수단으로 채택해 선교했다.
 

한국 전통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1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여성은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한국의 전통사회는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남성 중심의 세계관을 지탱해 주는 것은 한국의 전통 종교였다.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불교는 인과응보의 교리를 남성 중심의 세계관과 연결해 해석했다.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여성은 전생의 업보에 의해서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며, 여기에서 벗어나 남성으로 환생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덕을 쌓아야 한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인과응보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다.

불교보다 더 심각하게 여성을 차별한 것은 유교였다. 유교의 핵심 사상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인데, 모든 만물에는 격이 있고, 이것을 아는 것이 참 지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에게는 남성에 맞는 격이 있고, 여성에게는 여성에게 맞는 격이 있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같은 격으로 대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전통적인 유교에 의하면 남성은 양(陽)의 영역에 있고, 여성은 음(陰)의 영역에 있다. 양은 적극적이어야 하고, 음은 수동적이어야 한다. 이 질서가 무너지면 우주의 질서가 깨진다.

많은 학자들은 고려시대에는 남녀의 차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사회가 혼란해지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회 혼란의 원인을 성적인 문란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사회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교 윤리를 강조했다. 유교 윤리는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의 강화와 함께 더욱 강조되었다.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정신적으로 유교를 더욱 추종하게 되었고, 이것은 소위 소중화(小中華) 의식으로 발전했다. 조선은 동양의 어떤 나라보다도 남성 중심의 유교 문화에 속박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구한말 한반도에 왔던 선교사들이 느낀 조선은 유교 문화의 속박 속에 여성들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나라였다. 조선에서는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도, 결혼해서 부인이 된다는 것도 불행한 일이었다. 어떤 조선 여성은 선교사에게 “[조선] 여인의 삶은 두 번 후회할 때가 있다. 한 번은 날 때이고, 다른 한 번은 시집갈 때이다.”2 초기 감리교 선교사 존스(Herber Jones)는 “조선에서 여성의 영역은 어떤 외부인도 들어갈 수 없고, 여인은 그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감방과 같다”고 말했다.3

 

근대 기독교의 역사와 여성의 위치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불교나 유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구약이나 신약 성서에 보면 남성 중심적인 언어들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사람을 계수할 때 주로 남성만 세었으며, 신구약 전체로 보면 남성 지도자들의 숫자가 여성 지도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필자는 이런 남성 중심적인 기독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이 종교개혁이라고 본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는 여성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더 이상 남성 사제의 중개가 필요하지 않고, 믿음으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 같은 종교개혁의 원리는 18세기 복음주의 기독교로 인해 더욱 발전했다. 복음주의 기독교는 종교의 핵심을 영적인 체험에 두었고, 이것은 여성들이 좀 더 종교의 중심적인 위치에 설 수 있게 했다.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성적이며, 감성은 이성보다 열등하기에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전통적인 논리는 복음주의 기독교에 와서 수정되어야 했다. 즉 진정한 신앙은 예식이나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와의 인격적인 만남(경험)에 있기에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실제로 18세기 부흥운동은 성직자들이 하는 설교 못지않게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간증도 중요하게 평가했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은 성경을 다시 해석하게 만들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모든 인간, 즉 남자와 여자가 다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받았다는 말씀이 강조되었다. 여성은 남성의 부속품이 아니라 남자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특별히 남녀의 평등은 성령운동에서 강조되었다. 특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내 영을 부어 주겠다”는 말씀은 여성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주었다. 더 나아가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오순절운동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차별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남녀만이 아니라 인종까지 초월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교의 흐름도 바꾸어 놓았다. 과거 전통적으로 선교는 남성의 영역이었는데, 이제는 많은 여성들이 선교에 나서게 되었다. 특별히 자국에서는 아직도 남녀 차별 때문에 여성들에게 열리지 않은 기회들이 선교지에서는 열려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 가운데는 여성들도 많이 포함되었다. 특별히 여성들은 자국의 여성 신자들로부터 후원을 받았고, 선교지에서 여성들을 위한 선교를 실시했다. 이들은 한국에 와서 여성 전용 병원을 짓고, 여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여성 사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성서학원 등을 운영했다.

초기 선교사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여성 사역자들이 있었다. 남자 선교사의 부인으로서 가정을 책임지면서 선교에 종사하는 경우와 독신으로 사역한 경우다. 많은 여성 선교사들이 처음에는 처녀로 왔다가 이곳에서 남자 선교사들과 결혼한 후 함께 사역을 했다. 언더우드의 부인도 그런 경우였다. 그러나 끝까지 독신으로 활동하면서 사역을 감당한 선교사들도 많다. 남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한 서서평 선교사가 그런 경우였다.
 

초기 기독교가 바꾸어 놓은 여성 세계

기독교는 이 땅에 들어와서 여성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들에게 이름을 만들어 주었다.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독립된 이름이 없었다. 그저 누구의 딸, 어느 집안의 댁, 누구의 안사람 등이었다. 여성들은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는 제대로 된 이름 대신 첫째, 둘째, 셋째 등의 이름을 붙여 주었고, 그래도 계속 딸이 태어나면 이제 딸은 그만 태어나라는 뜻으로 “그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새로 태어난 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신의 뒤에 아들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아들이 태어나라는 뜻으로 이남(以男)이라고 불렀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도 어른들이 여자아이들을 향해 터를 잘 팔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태를 남자 동생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감리교 선교사 무스(Robert Moose)는 한국 여자들 가운데서 ‘섭섭이’라는 이름을 많이 보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딸을 낳은 것에 대한 서운함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교회는 이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것은 ‘이쁜 애’였다. 무스 선교사는 이런 새로운 이름이 늘어나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고 고백했다.4 전주에서 처음 신자가 된 유씨 부인은 기독교인이 된 후 자신의 큰딸에게는 “큰 보배”, 작은딸에게는 “작은 보배”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천덕꾸러기 여자아이들이 이제는 보배가 된 것이다.

선교사들은 새로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도 제공해 주었다. 오늘날 한국의 빛나는 여성 애국자들은 거의가 다 예외 없이 기독교인들이었고, 이들은 일반 비기독교인들이 누릴 수 없는 교육의 기회를 가졌다. 한국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여성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자라도록 도와주었다.
둘째, 기독교는 여성들을 조혼 풍습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조선의 조혼 풍습은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정해 준 사람과 결혼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결혼한 여자들은 시어머니의 종이 되는 것과 비슷했다. 이에 대해 여선교사 니스벳은 “한국에서 시어머니는 여왕벌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5

이렇게 결혼한 한국인들의 가정생활은 행복하기 어렵다. 특히 남자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경우 어려서 결혼한 아내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장한 다음에는 자신의 뜻에 맞는 사람과 다시 결혼하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아내는 긴 세월을 고통 가운데 살게 된다. 당시 조선사회는 전환기에 있었고,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한국 기독교는 조혼 풍습이야말로 만악(萬惡)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선교사들은 결혼이란 당사자들이 서로 보고, 스스로 결정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는 조혼 풍습을 폐기하고, 남녀가 각각 성장한 다음에 서로의 결정에 의해서 결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1920년대에 제정된 성결교회의 헌법은 신자는 남자는 18세 이상, 여자는 17세 이상이 되었을 때 결혼식을 거행해야 하며, 조혼 풍습은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기독교는 축첩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에서 가장 고심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첩의 문제였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첩을 둔 경우가 많았다. 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양반 선교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할 정도였다. 조선사회는 양반 사회다. 만일 양반을 선교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조선사회의 핵심 세력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단호했다. 일부 반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창세기 2장의 말씀에 기초해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였다. 조혼제도가 한국 가정을 망치는 것처럼 축첩제도 역시 한국 가정을 병들게 하여 불화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신자가 첩을 데려오는 것을 반대할 뿐더러 기존의 첩도 정리할 것을 요구했다. 사실 많은 경우 첩은 본부인보다도 새로운 문화에 개방적이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첩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첩의 전도로 남편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자 했을 때 교회는 이런 관계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세례를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전라도의 유력한 장로였던 김영진은 서울에 본부인을 두고 목포로 내려와 매력적인 젊은 여자와 결혼해 자녀를 두었다. 기독교병원에서 병을 치료받은 김영진은 그 계기로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첩이 장애물이었다. 김영진은 이 문제를 첩과 상의했고, 첩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김영진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첩에게 넘겨주었고, 선교사들은 이 첩이 목포의 병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리고 서울에 사는 본부인을 내려오게 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김영진은 1918년 순천 지역에서 장로가 되었다. 그는 예수를 믿은 다음에는 한 번도 목포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의 지도자로서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를까 염려했기 때문이다.6

넷째, 기독교는 한국의 가정을 변화시켰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느낀 것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는 서양에서 보던 ‘가정(Home)’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한국에는 가장이 절대군주로서 존재하며, 여성은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선교사들은 한국의 가옥을 지날 때 남편들이 아내를 구타하는 소리를 종종 듣곤 했다. 특히 여성 선교사들에게 이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기독교는 이런 한국의 가정을 변화시키는 일을 했다. 먼저 선교사들이 강조한 것은 아내를 자신의 정당한 반려자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신문〉은 부부관계가 인륜의 기초인데 한국에서는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친구보다도 못하며, 심지어 노복보다도 못한 경우도 있다고 지적하면서 아내를 동반자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7 그리고 아내에게 존대하기 운동을 벌였다. 또한 전통적인 한국 가정에서는 남자들은 상에서 밥을 먹지만 여자들은 바닥에서 밥을 먹었다. 그러나 기독교 가정에서는 한 상에 모든 식구들이 둘러앉아서 먹도록 했다. 이처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을 뜻했다. 기독교인이 되어서 아내를 사랑하는 모습은 언더우드 부인이 남긴 다음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더욱이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은 남편은 아내가 바느질을 잘 할 수 있도록 불을 밝혀주고, 창호지로 된 문에 유리창을 달아주어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해 주고, 대문 가까이에 우물을 파주어 물 긷기가 좋도록 해 주며, 아내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며, 아내를 사려 깊고 비이기적인 사랑으로 대우하기 시작한다.”8
 

숨은 보배, 초기 한국교회의 전도부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였을 때, 한국사회는 남녀의 구별이 철저하였다. 예배당도 남자석과 여자석을 나누고, 가운데를 휘장으로 구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 한국교회는 어떻게 여성들에게 선교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전도부인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남자교역자들이 직접 여성들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전도부인을 양성하여 이들로 하여금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초기 성결교회의 경우 거의 모든 교회에 남자교역자와 전도부인이 함께 사역하였다.

전도부인은 한국 최초로 직업을 가진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여성들에게는 집에서 살림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 그러나 전도부인은 가정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서 활동할 수 있었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전도부인은 주로 남편을 잃은 과부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다. 한국의 전통사회는 과부들에게 재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전도부인 사역은 고마운 통로였다. 그것은 전통적인 가정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신들의 힘으로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에게 소박을 맞아 갈 곳 없는 여인들 가운데 전도부인이 된 경우도 많다. 성결교회의 문준경 전도부인은 결혼 후에 남편이 집을 떠나 다른 여자와 동거하자, 이성봉 목사의 부흥집회에서 신자가 되고, 전도부인이 되어 전라남도 신안군 섬을 돌아다니며 도서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섰다.
 

여성, 한국 기독교의 힘

전통적인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여성들은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죽도록 제사상을 준비했지만 이들은 제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들에게 이름을 주고, 직분을 주었다. 교회에 나가면 당당히 남자와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일종의 해방 공간이었다.

기독교가 들어온 후 여성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재발견했다.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교훈에 의하면 여성도 남성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다 같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았으며, 특별히 성령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것은 여성은 단지 남성에게 복종만 하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더 높은 분의 뜻을 이루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여성들에게 엄청난 힘을 가져다주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사명을 깨닫고, 그 일을 감당하고자 노력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바로 이런 여성들의 희생과 헌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1) 본 글은 박명수, “놀라운 변화: 초기 한국 기독교와 가정”, 〈역사신학 논총〉 12(2006)의 내용을 기초로 재구성했음을 밝힌다.  
2) 마서 헌트리, 《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와 교회성장》(서울: 목양사, 1985), p.154.
3) Herber Jones, “The Status of Women in Korea”, Korea Repository vol. 3(June 1896), pp.223-229.   
4) Martha Huntley, To Start a Work: The Foundation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84-1919(Seoul, Korea: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1987), p.238.
5) 애네벨 니스벳, 《호남선교 초기의 역사》(서울: 도서출판 경건, 1998), p.203.
6) 앞의 책, pp.126-130.
7) 〈그리스도신문〉(1901년 1월 3일).
8) “Wonderfull Transformation”, Electric Messages(January, 1909), p.10.


 

박명수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보스턴대학교(Ph.D.). 저서로 《근대사회의 변화와 기독교》, 《대한민국 건국과 기독교》(공저) 등이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 keyboard_arrow_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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